최무수리의 임신과 장비(張妃)의 행패
세상에서 와글와글하도록 떠들어대는 장비와 장희재 일당들의 탐권 행악을
비난하는 소리는 임금의 귀를 아프게 할 지경이 되었다. 임금은 항상 근심
으로 지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면 근심을 잊기 위해서 상궁 나인들을 시켜 고담책을 읽게 하여 들었
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고대소설이란 소설을 모조리 대궐에서 모아들이게
되자, 이 기회를 타서 임금의 마음을 한번 돌려보겠다는 결심으로써 김춘
택(金春澤)이란 사람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란 소설을 한역해서 마치
고대 소설인양 일부러 빛이 바랜 종이에 옮겨 써가지고 궁중으로 들여보냈
다.
김춘택은 그전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부친 김만기(金萬基)의 아들로
서 별호가 북헌(北軒)이란 문장가였는데,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겠다
고 이런 계획적인 일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러던 어느남 밤의 일이다. 장비의 심복 조상궁(趙尙宮)이 장비 침방으로
들어오더니 장비에게 귓속말로 무엇이라 속삭였다. 궁인의 말을 듣고 있던
장비의 얼굴 빛은 당장 변했다.
"그래 네가 그 일을 확실히 아느냐?"
"아, 알고 말고가 있습니까? 어느 앞이라 사실 없는 말을 아뢰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어서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런데 그 계집은 나인도 아니요 무수리라 하오니 너무도 해괴합니다."
"뭐? 무수리?"
"예, 예전에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옵니다."
"참 기막힌 일이다. 그래 일국의 지존으로 하필 비자(婢子)년 무수리를 가
까이 해서 또 그중에도 아이를 배었다니 이게 웬말이냐? 내일은 그년을
불러들여서 특별한 조처를 해야겠다."
장비는 노기충천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날밤 장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번이나 이를 갈며 날을 밝혔다.
이년을 불러들이면 어떻게 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것인가, 또 뱃속에는
임금의 씨가 벌써 들어 있다니 이것을 죽이고 보면 문제가 일어니지 않을
까, 가지 가지로 독살풀이를 해볼 계교를 생각하다가 밤을 밝혔다.
아침 수라 절차가 지나고, 대강 다른 절차도 지난 뒤라 벌써 낮이 가까웠
다. 장비는 드디어 측근자를 시켜서 조용히 그 무수리를 불러들여 뒷뜰에
세워놓았다. 무수리는 무슨 처분이 내릴지 몰라서 덜덜 떨고 서 있는데
장비의 무수리를 쏘아 보는 안광은 불이라도 일어날 듯이 날카로왔다.
"네가 예전 폐비 민씨 처소에서 거행하던 무수리라 하니 그러하냐?"
"예, 황공하옵니다."
"무수리의 신분으로 상감마마를 뫼셨다 하니 그렇고도 아무런 일이 없을
줄 아는가?"
" ... "
"어째 대답이 없느냐?"
장비의 독살스레 외치는 소리는 귀를 찢는 듯이 날카로왔다.
"황공무지하오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런 일은 애매하다는 말이냐? 어디 네 배를 내어보여라. 억울하
면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줄 게다."
"... "
"저 년을 잡아젖히고 옷을 풀어보아라. 벌써 만삭이 돼 있을 게다."
장비의 호령 소리에 모시고 섰던 나인들은 당황하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너희들도 그러기냐? 냉큼 벗기지 못할까?"
그때야 여러 궁인들이 내려가서 최무수리의 웃옷을 벗기었다. 최씨는 속옷
만을 입은 채 어쩌할 바를 몰라 울고 있었다.
"네 저 년의 속옷까지 벗기어라."
호령이 다시 내렸으나 나인들은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장비의 표
독스런 호령에 최무수리는 드디어 나체(裸體)가 되어 앉지도 서지도 못해
서 쩔쩔 매며 돌아서서 울고 있었다.
"너는 그래도 변병할 길이 있느냐? 대관절 너는 무슨 목숨을 가졌기에 천
한 몸으로서 감히 상감을 가까이 모셔서 왕자까지 배고 살기를 바랐더냐?"
"황공하옵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이 아니오라 상감마마께서 저의 처소로
오신 것을 피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이옵니다."
무수리는 울음 섞인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천하에 앙큼한 년! 네가 가만히 있는 것을 상감께서 건드렸더냐? 무
슨 뜻으로 궁중에서 요망스럽게 폐서인된 악독한 계집 민가의 생일을 지낸
다고 음식을 차려놓고 했더란 말이냐? 네가 앙큼한 마음에 평소에 버정대
던 무감놈을 꾀어 그 곳으로 상감의 미행길을 인도하게 했던 일이 아니냐?
그러고도 모든 일을 상감께만 밀어버릴 작정이냐?"
"그 말씀은 너무 애매하옵니다."
"뭐 애매하다고? 네 저년을 기둥에 단단히 묶어 놓아라!"
장비가 발을 구르고 요망을 떠는 통에 화관(花冠)이 떨어지고 첩지가 삐뚤
어졌다. 암상이 났던 판이라 장비는 그 화관을 떼어내서 방구석에 동댕이
를 치고 마루 아래로 뛰어내려가서 준비해 놓았던 싸리비를 뽑아들고
"흥! 네가 요만치 안팎으로 절색이니 무수리 아니라 아무것이기로니 상감
의 마음을 끌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런 소리를 하다가는 싸리채를 들어서 무수리의 하복부와 넙적다리를 한
데 얼러서 훔쳐 때리며 호통을 한다.
"너 이년, 바로 대지 못하겠느냐? 번연히 어느 무감놈과 정을 통해서 자
식을 배고 못된 꾀로써 무감놈을 시켜 미행을 해오게 해서 상감을 농락한
다음에 왕자를 잉태했다고 하는 것이니, 이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그러
나 항복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 무감놈과 정을 통했는지 바로
일러라."
너무도 억울한 호령이었다. 무수리는 별안간 하복부를 무수히 회초리에 얻
어맞고 신음소리를 내며
"그 말씀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너 이년! 그래도 억울하다고 하느냐? 어서 바른대로 대어라. 그놈이 어
느 놈이냐?"
장비는 또 새로 싸리비를 뽑아내서 두 세 개를 합쳐가지고 있다가 말이 끝
나자마자 무수히 전신을 휘갈기니 무수리의 몸에는 손가락 굵기만한 기다
란 선(線)이 시뻘겋게 일어났다. 무수리가 악을 쓰자 수건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무수리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이년, 그래도 자백하지 못할까?"
장비는 또 다시 싸리채를 뽑아들고 전신에 잔채질을 했다. 아까 맞아서 부
르텄던 자국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무수리의 몸은 어느 한곳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참, 고년 독물 중에도 무서운 독물이다. 이제는 낙형(烙刑)을 할 수밖에
없다. 백탄을 피오놓은 화로와 인두를 어서 가져 오너라."
화로와 인두는 미리 준비했던 듯이 즉시 가져왔다.
"너 이년, 그래도 꿈쩍 않고서서 자백을 안할 모양이구나. 어디 불찜질 맛
을 한번 보아라."
장비는 새빨간 백탄 숯불 속에서 인두를 꺼내들더니 거침없이 무수리의 하
체로 가져다가 지지는 것이다.
"이년 네가 상감을 모시던 때에도 이만치는 좋았으리라. 너 이 맛이 얼마
나 좋은가 맛보아라."
장비는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가며 이 짓을 하는데 무수리는 괴로움을 견디
지 못해 얼굴을 찡그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누린내가 끼쳐 장비의 코로
들어가고 살이 타는 연기가 인두 밑에서 보얗게 일어났다. 모시고 있던
나인들도 모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고는 코를 막았다.
"너, 그래도 뱃 속의 아이가 왕자라고 엉뚱한 말을 할까? 어서 그 아이의
아비놈을 자백하여라."
장비는 또 얼러대면서 다른 인두를 다시 빼어드는 것이었다. 이번 인두는
아주 빨갛게 달구어져서 나무라도 당장 탈 지경이었다. 이 인두를 들고 악
착스럽게 아귀같이 무수리를 바라보는데 돌연 내전 저편으로부터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비는 이 설레이는 소리에 귀가 쫑끗해서 색빨갛게 달구어진 인두를 도로
화로에 꽂고 나인을 돌아보며 조용히 일렀다.
"너 급히 나가 동정을 살펴 보아라."
나인이 재빨리 뛰어나가더니 곧 되돌아 와서 황황히 아뢴다.
"이를 어쩝니까. 상감마마께서 듭신답니다."
이 말을 듣던 장비는 금방 눈이 휘둥그래지며 두 눈을 갈팡질팡 사면으로
돌리다가 저편 추녀 끝에 낙숫물 받느라고 세워놓은 큰 독을 보았다.
"얘, 이 계집을 번쩍 들어다가 저 담 밑에 앉혀놓고 이 독을 들씌워 놓아
라."
나인들은 황황히 묶은 것을 끄르며 입을 틀어 막은 것을 꺼내며 해서 옷에
피를 묻힐세라 조심조심 사지를 드는데 잘 들지를 못하니까 장비가 겁과
암상이 일시에 일어나서 곧 달려들어 계집을 잡아끌다가 잘못하여 옷에 피
를 묻혔다. 그러나 장비는 당황 중에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조상궁이 옆에서
"중전마마께옵서는 화관을 쓰십소서."
말하니까 그제서야 화관을 벗어 동댕이친 생각이 나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화관을 들쓰며 앞에 흐트러진 것을 치우라 하고 편전으로 나가려 하는데,
벌써 임금은 내전 툇마루까지 나와 서서 눈을 좌우로 돌리며 무엇을 살피
는 기색이었다.
- 눈 밖에 난 독초(毒草)
장비는 너무나 황황망조 어쩔줄을 모르면서 그래도 가능한한 꾀을 내어서
간특한 애교의 웃음으로 임금을 맞았다.
"에그, 오늘은 별일이십니다그려. 웬일이십니까?"
그러나 임금은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여전히 담 밑으며 뜰이며 살펴보는
것이었다. 장비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필시 어떤 년이 임금에게 고급(告
急)을 해서 들어온 모양인데 이 일이 탄로나고 보면 이 노릇을 어쩌는가
애가 바작바작 탔다. 이러면서 언뜻 보니 퇴 앞을 치웠다는 꼴이 핏울방이
두어 곳 떨어진 채 있으므로 이것이 임금의 눈에 띄울까 보아 얼른 임금
앞을 가리워서서 무엇이라 말을 붙이려 했다.
이때 임금의 눈에는 장비의 옷고름에 붉은 피가 밤톨만치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장비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임금은 옆에 있는 무관을 돌아
보고
"네 지금 내려가서 저 담 밑에 놓인 저 독을 치워보아라."
이런 말을 하며 장비의 안색을 훑었다. 아니나 다르랴, 이 말이 떨어지자
장비의 얼굴은 순간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장비는 곧 태연한 태도로 돌
아가며 차디 찬 웃음을 입가에 지으면서
"원, 상감께서는 별 것을 다 시키십니다. 그 독은 왜 별안간 치우라 하십
니까?"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또 한번 재촉을 하였다.
"네 머뭇거리지 말고 곧 거행하지 못할까?"
분부가 다시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무감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다.
"글쎄, 무엇 때문에 독을 옮기시려는 겁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발
그대로 두어주십시오."
장비의 태도는 극도로 당황해 하는 눈치가 보였다.
"글쎄 무엇 때문에 그 독은 기어이 옮겨놓지 못하게 하오? 참말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이렇게 대답하며 무감을 재촉해서
"거, 머뭇거릴 게 뭐냐. 어서 냉큼 가서 치우렸다!"
무감은 드디어 그 담 밑으로 가서 독을 치웠다.
'아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인고!'
독을 누이자 그 밑에는 한 젊은 계집이 몸에 실오리 하나 감지 아니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지 아니한가. 아마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보였다.
"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임금은 나인을 돌아보고 물었으나 모두 얼굴빛이 빨개져서 대답을 못하고
있다. 무감은 나체가 된 시체가 나오자 놀라우면서도 역시 남자라 무안해
서 그대로 외면하며 서있는데 임금은 무감을 보고
"너는 그만 나가거라. 나가다가 대조전에 지밀상궁이 있을 터이니 곧 들어
오라 해라."
무감은 말없이 국궁하고 물러갔다. 이때 임금이 그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의심없는 최무수리가 분명했다. 임금은 더욱 놀라왔다. 장비를 돌아
보고 지극히 조용한 말씨로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요?"
장비는 오히려 웃는 낯으로
"저 계집이 무수리온데 어느 무감과 간통해서 자식을 배고 앙큼스럽게 상
감을 모셔서 왕자를 잉태했다 하며 상감마마를 욕되게 하였기에 그 죄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
임금은 대답 없이 한동안 의아와 분노의 눈초리로 장비를 쏘아보았다.
"호호... 왜 이리 쏘아 보셔요? 만일 이 말을 새나간다면 도리어 상감 위
신이 손상되십니다. 그대로 나가주십시오."
분명히 궁중 종년을 가까이 했다는 것을 조소하는 뜻으로 경멸의 눈초리를
던지는 것에 틀림 없었다. 너무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그런 죄에는 저런 형벌을 해야 하는 법이요?"
"호호... 왜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여전히 비웃는 말소리였다. 임금은 그만 격분했다.
"에잇! 악독한 계집, 썩 물러가지 못할까."
임금은 드디어 두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굴렸다. 이때에야 장비는 주춤 물러
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저 계집이 무감과 간통했던 사실이 있고 증거가 있어
도 그렇게 싸고 도시겠어요?"
"뭐라구?"
"참 딱한 노릇입니다. 저 계집을 가까이 하셨대서 이다지도 저 계집을 옹
하시지마는 너무나 딱합니다. 체면을 생각하십시오. 상감의 몸으로서 그래
겨우 궁 비자 저 계집을..."
"무슨 딴 말인가? 냉큼 물러나지 못할까?"
임금은 또 발을 굴러 호령했다. 그러나 장비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그
대로 서서 임금을 맞 쏘아보고 있다. 이때 지밀 상궁이 들어왔다.
"무슨 분부이십니까?"
"저 담 밑을 보오."
"앗! 저게 웬일이옵니까. 누구이옵니까?"
늙은 상궁은 임금을 바라보고 또 장비를 바라보고 눈치를 살핀다.
"그 말은 나중에 하고 급히 나아가 옷 한벌을 들여다 입히고 누구에게 일
러서 저 계집을 급히 구하도록 하오. 우선 상궁의 처소로 데려다가 조섭
을 시키게 해야겠소."
늙은 상궁은 맨발로 뛰어내려가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치마를 벗어 그 알
몸을 덮어 주고 곧 황황히 나가서 나인 몇 사람을 불러가지고 들어왔다.
임금은 상궁을 보고
"아직 숨기가 붙었나 만져보오."
상궁은 자세히 맥과 가슴을 짚어보고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있으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고 나인에게 업혀 가지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자 임금은 격노한 빛으
로 한번 훑어보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다행히 최씨는 그 후 구호를 받아서 소생이 되었다.
"임금은 최씨에게 소원(昭媛)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그 다음에는 금위(禁
衛)와 여관을 수십명씩 교대해 가면서 최소원을 극진히 보호케 하였다.
이런지 한달이 지난 숙종 이십년 구월 십삼일 새벽에 최소원은 드디어 옥
동자를 낳으니 이때 임금의 나이는 삼십사세였다.
임금은 새로 태어난 왕자를 보고 전날 제일 왕자 탄생 때보다 한층 더 기
뻐하였다. 이때 최소원은 조용히 일어나서 임금에게 절하며
"이 왕자는 전날 마마께서 탄신망례(誕辰望禮)를 드렸던 까닭에 탄생된 바
이온즉 그 일을 생각하시더라도 하루 바삐 전 중전마마를 복위시켜 주옵소
서."
이런 말을 아외었다.
"오냐, 낸들 생각이 없겠느냐마는 아직 무슨 일을 생각하는 중이다. 네 정
성이 그러하니 곧 복위를 시키겠다."
임금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이럴즈음 장비는 임금에게 그런 지경을 당
하고도 오히려 최소원을 살해하려고 최소원의 처소에 장희재를 시켜서 독
약을 들여가려다 탄로되었다. 임금은 극도로 진노하고 그날로 왕비의 직첩
을 거두고 장씨를 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와 동시에 장희재도 즉각 의금
부에 잡어가두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한때 자기의 은인인 민중전의 지위를 찬탈해서 스스로 왕비의 자리에 나아
간지 무릇 육년이오, 민비의 은혜를 입어서 재입궐한지 무릇 구년 만에 장
씨는 재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장씨가 이렇게 되고 민비의 복위전지(復位傳旨)가 내리게 되자 세상 사람
들은 모두
"그러면 그렇지. 우리 상감께서 착한 민비를 그대로 둘 리가 있나. 이제야
나라가 바로 잡히게 될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하였다.
- 장희빈(張禧嬪)의 마지막 음모
민비(閔妃=仁顯王后)가 복위해서 환궁하니 이때 민비의 나이는 이십팔세였
고 임금은 삼십사세였다.
이때부터 양전(兩殿)의 부부애는 재출발이 된 듯 다정스러웠고 최숙빈도
이십여세의 나이로 양전의 사랑을 받으면서 화합한 날을 보내게 되니 궁중
은 저으기 안정되었다.
이런 반면에 장비는 장희빈이란 예전 작호 그대로 초전골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처량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오늘날 이 지
경이 되었어도 오히려 민비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자기 죄과에 대한 부끄
러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또 민중전과 최숙빈을 욕하고 저주하면서 어
떻게 하면 그들의 원수를 갚아 볼까 악착스럽게 벼르고 있었다.
민비가 환궁한지 어느덧 팔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민비는 무엇 때
문인지 항상 신체에 잔병이 생겨서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한번은 병세
가 좀 회복되어서 기동을 하자 구미를 돋구어 드린다고 최숙빈이 게젓을
갖다가 바친 일이 있었다.
아직 첫가을이라 마침 쓸 만한 것이 없어서 궁중에 있던 것을 몇 개쯤 미
음 반찬으로 올렸더니 민비는 여기에 구미를 붙이고
"여보게, 이 게장이 유난히 다니 웬일인가? 이렇게 맛좋은 게장은 처음
먹어보네."
이런 말을 하였다.
"아무것이라도 잡수시고 구미를 얻으셔야 하지요."
최숙빈은 너무나 다행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는 한편 사람을 또 보내서
햇 게젓이 결이 삭는 대로 들여오라 일렀다. 그런데 왕비는 이 게젓을 먹
고 별안간 정신을 잃는 듯 누워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숙빈은 그 증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두어 시간 후 왕비는 서
둘 새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 왕비는 호흡을 모두어 쉬게 되는 마지막 시
간까지 임금을 보고
"저 세자를 생각하시더라도 아무쪼록 그 친생모를 너무 슬프게 대접치 말
아 주옵소서."
이런 말을 하고 열네살 된 세자를 앞에 불러 어루만지며
"네 어미가 덕이 박해서 네 친생모(親生母)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훗날
에 친생모를 보거든 부디 내 말을 전해다오."
이렇게 말을 한 후에 즉시 숨이 가빠지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가 이렇게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측
근들은 의심을 잃으키게 되어서 드디어 식사 진공했던 일을 살피게 되었
다.
숙빈은 언뜻 게장밖에 의심나는 게 없어서 그 게장을 조금 맛을 보니 과연
게장의 단맛이 좀 이상스러웠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게장
속에 꿀을 넣었던 것이다. 숙빈은 곧 게장이 궁중에까지 들어오게 된 그
경로를 살펴 보았다.
이 게장을 수랏간에서 편전까지 올리기는 김나인(金內人)이다. 편전에서
최숙빈이 몸소 미음상을 드려서 올렸던 터이다. 최숙빈은 곧 김나인을 은
밀한 곳에 가두어 놓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즉시 친국을 시작했다.
금부나장(禁府羅將)이 몇 번 때리지도 아니해서 자백은 순순히 나왔다. 김
나인은 장희빈의 밀계를 그대로 받아서 이번에 그런 금기(禁忌) 음식을 이
용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김나
인을 금부로 내보내고 그 즉석에서 장희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었다.
이 전교가 내리자 열네살 된 세자는 가뜩이나 모비상(母妃喪)을 당해서 망
극한 중에 이중(二重)으로 친생모(親生母)의 극형 처분을 듣게 되니 그 애
통해하는 정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구해보리라 결심한 어린 세자는 부
왕(父王)의 처소 앞뜰에 거적을 펴고 석고대죄하며 아뢰었다.
"소좌를 어미와 함께 죽여 주소서."
이렇게 아뢰면서 통곡하고, 한편으로는 입직 대신들을 보는대로
"우리 어머니를 구해 주시오."
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임금은 처음부터 결심한 바가 있는 듯 조금도 세자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한편 장희빈은 최후의 민비 치독사건(置毒事件)이 탄로되어 사약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마음이 이상하게 변하며 사약을 받아놓고 나인을 궐내로 보내
어
"사약을 내리시니 먹기는 하겠사오나 생전에 모자(母子)가 마지막 영결이
라도 하고자 하오니, 세자를 잠간만 만나게 해주시면 유한이 없이 죽겠나
이다."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무엇보다도 애걸통곡하는 세자가 측은해서 우선 세자
를 위로해 줄 양으로
"네가 가서 마지막 네 어미를 대면하고 오너라."
이런 말로 이르고 늙은 내시를 따르게 하여 내어보냈다. 세자는 그 친생모
를 대하자 눈물을 좌르르 흘리면서
"어머님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단 말씀입니까?"
하면서 어머니의 앞으로 달려들어 통곡을 했다.
그러나 장희빈은 세자를 대하자, 갑자기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마음은 아
주 악독하고도 광란적으로 변했다. 으레 눈물로 세자를 맞이하련마는 돌
연 눈빛이 싸늘해지고 얼굴에 독기가 서리었다.
그러다가 세자가 자기를 향해서 어머님! 하고 울며 달려들 때에 장희빈은
번개같이 세자의 하채를 부여잡고 죽어라 하고 아래로 나꾸어챘다.
울고 있던 세자가 금시에 비병을 울리고 당장 까무라치는 바람에 옆에 있
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장희빈을 떼어놓았다. 장희빈은 여전히 독기가 서린
말로
"내가 이지경이 되어 죽게 되는 처지에 너를 남겨 두어서 이가의 혈통을
잇게 하고 민가년의 제사를 지내게 할 내가 아니다. 너 죽이고 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런 소리를 하며 놓쳐버린 세자의 하초를 다시 잡으려고 세자에게 달려드
는 것을 사람들이 억지로 떼내어 밀쳐놓고 그대로 세자를 안아서 밖으로
내갔다.
세자의 일행이 그렇게 돌아가자 장희빈은 약사발을 들어서 동댕이치고 대
청마루 보꾹에 줄을 매어 목을 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희빈은 이와같이 악독한 최후를 마쳤으나 궁중에서는 갑자기 초주검으로
변한 세자가 들어오게 되자 소동을 일으키고 급히 응급치료를 가하는 한편
어의(御醫)들이 있는 대로 모여들어서 구호를 하게 되었다.
임금은 이 광경을 보고
"오, 이게 무슨 실수란 말이냐? 이제 나이 사십에 이다지도 파란이 많다는
말이냐. 이럴바에는 차라리 천인(賤人)의 집에라도 태어나서 일생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느니만 못하다."
이런 말을 하며 한숨만 쉬었다.
세자는 얼마 후에 명의(名醫)와 약의 효과로 소생되고 차차 기운을 차려서
기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급소를 다친 상처라 끝끝내 그
결과가 좋지 못해서 세자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양쪽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걸음걸이가 내시처럼 되고 말았다. 이런데다가 한달이면 두세차례씩 누워
있게 되니 이럴 때마다 부왕의 초조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구월 삼십일 인현 민비(仁顯閔妃)의 복제가 끝나자 대신들 중에
서는 임금에게 다시 왕비 간택을 고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은 신하들의 권고로 재삼 왕비 간택의 영을 내리고 왕비를 몰색하게
하였다. 이때는 조정의 재상들이 대게 서인들이었는데 서인의 집정한지
여러 해가 되자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두 파로
갈려서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임금은 이러한 당파싸움하는 집안에서는 아무리 좋은 왕비 재목이 있다 하
더라도 결코 간택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 임금은 외척과 당파싸움의 폐해
를 뻐저리게 느껴왔던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살펴본 결과 경주 김씨인 김주신(金株臣)의 집에 십육세 된
규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궁을 보내서 간선한 결과 마음에 들게 되어 즉
시 김주신의 딸로 왕비를 삼으니 이가 인원 김씨(仁元金氏)인 것이다.
김주신은 그 친척들이 소론이므로 대개 소론으로 지목을 받기는 하나, 그
자신은 어떠한 당색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을 택했던 것
이다.
세자는 십육세 때에 병중인데 불구하고 청송부원군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세자빈(世子嬪)을 맞이하니 세자빈의 나이는 두해 위가 되는 십팔세요, 모
비(母妃) 인원왕후(仁元王后)보다 한 살 위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나이로 입궐한 세자빈 심씨는 현숙한 여성이긴 하지만 남편이
병신의 몸인 까닭에 늘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다
가 숙종 삼십일년 가을부터 동궁의 병이 저으기 평복되는 듯하므로 임금은
동궁에게 국정을 대리시키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스스로 물러나 앉았다.
동궁의 존재는 뚜렷해졌다. 그러나 아직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 제
일왕자를 싸고 돌던 일당, 즉 남인 일당들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동궁의 마음을 사서 저 서인들을 있는대로 전멸시켜 볼까...
이런 생각을 하기에 여가가 없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서인들도 남인을
어떻게 하면 억누를까 해서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밤과 낮을 가
리지 않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제일왕자 연영군(延英君)과 제이왕자 연잉군(延孕君) 형제 사이는
그 우애가 지극하였다. 동궁은 여섯해 아래 되는 아우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우되는 제이왕자는 그 형을 극진히 공경하고 따랐다. 그런 처지였지마는
큰 왕자를 옹호하는 당파(남인)들은 큰 왕자를 해하려고 겨루어서 드디어
이 형당(兄黨)과 제당(弟黨)끼리 왕위를 다투는 큰 싸움을 또 한번 일으키
고야 말았다.
동궁이 대리 청정(聽政)의 어명을 받은 후에도 종종 자리에 눕게 되자 제
당(弟黨)들은 동궁의 건장이 좋지 못하니 아우로 자리를 바꾸자고 여러차
례 여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동궁이 국정을 대리하게 되어 사년이 지나간 경자년(庚子年), 숙종은 환후
가 침중해지기 시작하더니 그해 유월 팔일 드디어 육십세란 나이로 빈천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숙종이 재위 사십육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서 동궁이 즉위하
니 이가 곧 경종(景宗)이다.
- 암운(暗雲) 짙은 궁중
경종(景宗=西紀 1720-1724)은 사년간이나 부왕을 보좌해서 국정을 대리한
경험이 있으므로 정사가 그다지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신왕은 원체 약질
이어서 전날의 병이 재발하여 자주 병석에 눕게 되니, 차츰 정신까지 흐려
져서 의식이 똑똑치 못한 때가 많았다.
며칠에 한번씩 의식이 회복되는 때를 타서 공사를 처단하게 되니 궁정이
침체되고 백반 정령(政令)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경종은
의식이 회복되면
"내가 병들어 누워서 국정을 돌아보지 못했으니 나라 일이 오죽 문란하랴.
어서 밀린 공사를 들여다 곧 처단해 치우리라."
이렇게 말하다가도 산적된 공사를 대하고 보면 그만 진력이 나서
"모두 귀찮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좀 쉬어야겠다."
이런 말로 대소 사건의 처단을 모두 승지(承旨), 사관(史官), 주서(注書)
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느 조관이 소대(召對)를 청할때면 눈살을 찌푸리고 불러들여서 그의
아룀을 듣다가 지루한 생각이 날 때면
"그만 말해도 알아 듣겠다. 그대로 나가서 기다려라."
내어보내고 하루 이틀 수일이 지나도 하등 비답이 없는 것이었다.
측근자들이 궁중형편을 아뢰고 어찌하오리까하고 청할 때도 신왕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고
"너희들 생각대로 좋게 처리해서 대과 없이 거행하려무나."
마냥 이러는 것이었다.
이쯤되니 국정이 침체하고 혼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승지나 사관
을 비롯하여 나인과 환관들은 이런 것을 기회 삼아서, 무슨 중대한 주청
(奏請)이나 상소가 들어오면 그대로 끼고 있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또
는 자기의 생색이나도록 처결해서 내어보냈다. 그러니 나라 일은 국왕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측근자들의 장중(掌中) 일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듬해 신축년(辛丑年)이 되었다. 이 해가 경종 원년(景宗元年)이었다. 국
정이 더욱 침체해지는 중에 신왕의 환후도 가일층 침중하게 되니 무엇보다
도 국본(國本)을 내세우는 일이 급하다는 의논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해 팔월 이십일에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노
론파 대신들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궐내에 들어와 합문(閤門)밖에 엎드
리며
"성상의 환후가 침중한 이때이오니 하루바삐 세제(世弟)를 동궁으로 책봉
하시와 국본을 튼튼케 하옵소서."
하는 상소를 올리고 비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때이고 반대파는 있는 법이어서 화단(禍端)은 다시 일어나 크
나 큰 참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경종이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에 그 세자빈 단의 심씨(端懿沈氏)는 아깝게
도 이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어유구(魚有龜)의 딸을
맞이해서 계빈(繼嬪)을 삼았다.
계빈의 아버지 어유구는 외척의 이해 득실을 밝히면서도 궁중 형편을 살펴
서 자기의 진퇴향배를 민첩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노론 재상의 영수 김창집(金昌集)은 어유구의 모든 행동을 경
계하고 그를 감시 할 양으로 은밀히 그의 집으로 밀정을 들여 보냈으니 그
밀정은 바로 어유구의 매부 김순행(金純行)이었다. 김순행은 김창집의 심
복이 되어 가지고 어유구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친한 척하고 어유구의 동
정을 살핀 결과 어유구가 딸 어비(魚妃)를 책동해서 경종(景宗)이 아들을
낳을 가망이 없음을 기화로 소론들과 한패가 되어서 은근히 종친 중에서
적당한 아이를 데려다가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경이 되면 제이왕자 연잉군(延孕君)을 옹호해 오던 노론 당파는 여지
없이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최근에 와서 경종이 양자(養子) 문제
를 일으켜서 새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어유구 일당의 음모라는 것까지 알
게 되었다.
노론파에서는 마침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
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이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 호조판서 민진원
(閔鎭遠),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형조판서 이관명(李觀命), 공조판서
겸훈련대장 이홍술(李弘述), 한성판윤 이우항(李宇恒), 대사헌 홍계적(洪
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도승지 조영복(趙榮福) 등을 인솔하고 입
궐해서 세제 동궁 책봉을 주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다만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로 했던 것이 아니고
이들의 선배요 동지가 되는 이이명(李 命)이 일찍이 선왕으로부터 간곡한
유촉(遺囑)을 받았던 때문에 그 유촉을 받들겠다는 충의로써 일어났던 것
이다.
그러면 이이명(李 命)은 숙종으로부터 어떠한 유촉을 받았던가? 이야기는
잠깐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숙종 사십삼년 팔월 어느날.
숙종은 환후가 침중해지자 그날은 평소부터 신임하던 우의정 이이명이 약
방에 입적하게 되었다. 원래 국가의 규칙으로 말하면 평시든지 병환중이든
지 군왕이 정승과 대할 때는 반드시 승지가 그 군신 사이의 범절을 살피고
사관(史官)이 군신 사이의 대화를 그록하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는 법이
다. 그런데 이때는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고 소위 독대(獨對)를 허락하였
다.
임금은 이이명을 가까이 불러세우고
"동궁이 병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용단을 내서려 제이왕자로 동궁을 고쳐
세우고 싶소."
이런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이명은 임금의 분부가 지당한 의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과 의
리를 전혀 몰각할수도 없어서 이이명은 임금의 표정을 살피며
"지금 하교하신바 동궁의 자리를 바꾸겠다 하시는 것은 신등이 아무리 무
식하오나 감히 봉행치 못하겠사옵니다. 동궁이 아무리 건강치 못하오나 신
등이 힘을 합해서 보필하오면 대리청정쯤 못하실 바 없으니, 정 몸이 괴로
우시면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이라도 내리시는 게 마땅한 줄 아룁니
다."
하고 아뢰었으므로 임금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다음날로 세자 대리청정을
분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우의정의 이 독대사건을 제각기 억측하며 이이명이 자
기의 의견을 임금에게 고해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고
떠들어댔다. 독대라는 것도 깜짝 놀랄만한 변고인데다가 더욱이 그 독대의
자리에서 임금에게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은 도저히 그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안산(安山) 고을에 은퇴해 있던 원임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소론의
영수로서 당년 구십 노인이었으나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와서 펄펄 뛰
면서
"이런 목을 베어 죽일 놈이 있나. 주상께서 살아 계신데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라니, 그래 그런 역적놈을 그대로 둔단 말이냐? 내 아무리 구십 노병
(老病)이지마는 이 역적놈을 죽이고 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승 명색으로
군왕께 아첨해서 밀실에서 사사로이 독대해 가면서 이와같이 할 수가 있다
는 말이냐. 이놈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루 바삐 올라갈
터이나 노상에서 죽을지도 모르니 아주 관을 짜가지고 자비 뒤에 이끌고
가야겠다."
이런 말을 외치고 즉시 관을 짜서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
올라와서 소론 당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니 시골서 듣던바와는 딴판
이었다. 즉 원래 이이명이 독대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자진 동궁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는 것을 이이명은 동궁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서 동궁의 자리를 제이왕자 연잉군(延 君)에게 바꾸어 연잉군으로써 대리
청정을 시키시라고 아뢰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론 이이명을 몹쓸 곳으로
몰아넣기 좋은 말이라 윤지완은 더욱 분기해서
"이이명이 왕위를 제이왕자에게 옮기려는 전제(前提)의 행동이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여론을 일으키고 드디어 상소를 지어서 위에 올렸다.
{ 명분이 일국의 정승으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되어 밀실에서 주상께 독
대하고 그러는 중에도 주상 다음으로 받들어야 할 동궁을 까닭없이 모해하
고 임금의 권위를 세자에게 옮기십시오 하는 이런 무도무엄한 말을 아뢰었
다 하오니 이런 자는 곧 목을 베어서 국가의 기강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
- 왕비가 휘두른 피바람, 신임무옥(辛壬誣獄)
이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은 윤지완에게
"동궁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는 것은 나의 병세를 염려해서 내가 말한 바
이며 이이명이 그와같이 한 것이 아니고 또 동궁에게 기위 대리청정을 시
킬 바에는 병약한 동궁보다는 튼튼한 연잉군을 동궁으로 봉하겠다고 하니
까 이이명은 도리어 인정과 의리상으로 차마 큰 왕자를 버릴 수 없다고 도
리어 동궁을 두호했던 바이다. 그리고 승지와 사관만 없었지 측근자들이
다 옆에 있었던 일인데 독대라는 말이 어디 당한 말이냐? 허무한 풍설을
듣고 구십 노병으로 관을 끌고 올라와서 이와같이 세상의 이목을 소연케
하니 이런 경솔한 처사로 어찌 일국의 원로 체면을 보존할 것이랴. 너무
한심하도다."
이렇게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를 일소에 붙였다.
이런 주목이 있는 가운데 동궁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고, 사년 후에는 동궁
이 즉위하고, 즉위한 후에 다시 임금의 환후가 치중해지니 나라의 앞길을
근심하는 대신들이 예전 숙종이 제이왕자를 부탁하던 그 유지를 좇아서 하
루바삐 왕세제(王世弟)로 동궁을 책봉하려는 것은 조금도 그릇된 점이 없
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그 형당(兄黨) 소론파들은 이일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도리어 환후 중에 있는 군왕의 지위를 엿보는 행동인즉 도저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원래 영의정 김창집 이하 여러 신하들의 연좌건백(連坐建白) 때에, 대신들
중에서 오직 우의정 조태구만이 빠져 있었다. 그 까닭은 이때 있으면 반드
시 이 일을 반대해서 연좌건백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마침 그가 향제로 내
려가 있는 동안을 택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조태구가 서울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알게되자 그는 본격적
으로 소론들과 손을 맞잡고 세제 동궁 책봉문제를 절대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번 연좌건백의 비답이
{상소한 뜻은 여러 가지로 더 생각해 본 후에 신중히 처단할 터이니 아직
기다리라.}
이런 뜻으로 보낸 것을 필시 불윤(不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원
군이 유구와 함께 왕비 어씨(魚氏)를 움직여서 임금에게 양자를 들여 동궁
을 세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런 말에는 도무지 대답을 안하고
더욱이 왕대비 인원 김씨(仁元金氏)가 이 말을 듣고서
{효종, 태종 이래로 그 혈통이 계승되는 왕실이요. 또 임금의 춘추가 아직
도 젊거늘 그 누구가 양자를 의논하며, 만일 무슨 변고가 있다 하더라도
선왕의 혈통이 또 한분 있어 아주 혈통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그누가 망녕
된 짓을 한다는 말이냐?}
이러한 엄교(嚴敎)가 내리게 되어서 드디어 형당(兄黨)들은 목을 움찔하고
물러나고, 왕대비의 주장대로 왕세자가 동궁에 책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해 십월 십이일에 조성복(趙聖復)이 또 상소를 올리었다.
{상감께서 나날이 환후 침중하시고 나라의 일이 허다히 지체되고 있는 이
때에 왕세제께서 이미 동궁에 책봉되었은즉 이대로 환후 평복만 기다릴 것
이 아니라 동궁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시는 일이 당연한 줄 아뢰는 바
입니다. 바라옵건대 널리 통촉하여 처분하시옵소서.}
이 상소가 한번 오르자 세상은 또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조성복은 상소가
오르던 때는 한창 경종(景宗)의 환세가 침중하게 된 때라 무슨 일이든지
그저 귀찮게만 생각하던 무렵이다. 이런 때에 이런 상소를 받으니 임금은
매우 반가와 하였다. 더우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종은 그 아우를 극진
히 사랑하고 믿는 처지이므로 상소를 받은 즉시로 어떤 굳은 결심을 하고
다음날 정원에 전지(傳旨)를 내리었다.
{나의 병세가 한결같이 침중하여 회복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일이 침체되
어 하루가 바쁘니 왕세자에게 국정을 대리케 하여 만기(萬機)를 처단케 하
노라.}
이 전교가 한번 내리자 조정은 갑자기 슬렁거렸고, 더욱이 소론 재상들은
큰 변이나 일어난 듯이 청황망조했다. 이번 처분에 대해서는 노론 일당들
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의 병세가 침중하여 국정을 세제(世弟)에게 맡긴다는 것이지만, 그러
나 지금까지 그 임금을 섬겨오던 처지로서 너무나 섭섭하고 송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삼사(三司)에서 간지(諫止)했으나 듣지 않았고, 다음에 사대신(김창
섭, 조태채, 이건명, 이이명)이 연좌 합계로서
"연전에 선대왕 생존시에 동궁으로 계셔서 청정하던 그 정도로 보필만 시
키실 뿐이지 만기(萬機)를 다 맡기신다 함은 너무도 황공 불안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불허(不許)하였을 뿐이다.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은
"이번 전교는 만만부당하오니 곧 거두어 주옵소서."
하고 끝까지 역설했으나 다만
"그만 물러 가거라."
한 마디로 물리쳐 버리고 왕세제 대리청정을 고집하였다. 이 쯤 되고 보니
소론파의 양자 책립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노론파에서 옹호하던 세
제 추대계획은 거의 이루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소론들은 장차 노론의 압박을 받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
혔다. 조태구는 밤중에 갑자기 내전으로 들어가서 정원을 통해 소대(召對)
를 청했다. 이때 입직승지는 밤중에 정승의 소대는 정원에서 아뢰어 올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태구는 너무도 괘씸했다.
입직승지가 괘씸한 것이 아니라 노론파 정승은 마음대로 소대를 허락하고
소론 정승에게는 이와같이 미리 방어진을 쳐둔 노론파의 행패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는 분기를 참다 못해 무감을 시켜서 이 뜻을 곧 곤순전에 아뢰었다.
"시급한 국사로 밤을 가리지 않고 알현을 청했던 바인데, 정원의 입직승지
가 알현을 허락치 않으오니 곧 전하를 뵙게 주선해 주십소서."
하고 간청했다.
조태구라 하면 왕비 어씨도 그가 부친의 동지인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곧
어비는 임금의 침전으로 가서 임금에게
"지금 좌의정 조태구가 시급한 일로 야반인데도 불구하고 입궐을 했는데
건방진 입직승지가 들이지 않는다 하오니 군신지간을 이와같이 막는 자를
치워버리시고 곧 좌의정을 인견하옵소서."
이렇게 아뢰었다.
요즘 병세가 더욱 침중해짐에 따라 정신이 시시각각으로 변태를 일으키는
임금은 이말을 듣고 노기를 띄우며
"저런 쳐죽일 놈이 있나. 어째서 대신의 고급(告急)하는 길을 막는단 말이
냐. 곧 입직승지라는 놈을 불러들여라."
하고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조금 후에 조태구가 들어왔다. 조태구는 밤이 깊도록 이번 왕세제 대리청
정이 만만부당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하면 민심이 동요되고 불길한 일까지
일어날 기미가 있다, 하고 역설을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러한 조태구의
말까지도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김일경(金一鏡)은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족질(族侄)로서 김만기가
부귀할 때에 그 집을 출입했다. 그는 문장과 변론이 뛰어나고 지략이 있는
인물로서 김만기의 후대를 받아 엄연히 노론과 선비로서 한 몫을 볼만하였
다. 그런데 김만기가 얼맛동안 지내면서 살펴보니 그의 본심이 흉악무도
하므로 괄세를 하고 배척을 했다. 그러자 그는 김만기에게 감정을 품고
소론의 거두 이사상(李師尙), 유봉휘(柳鳳輝) 등을 찾아가서 아첨을 했다.
김일경이 영변부사(寧邊府使)로 있을 때 궁중 장번내시(長番內侍)로 있는
박상검(朴尙儉)이가 영변 출신으로 그 세력이 등등한 것을 알고 박상검의
일족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한번은 박상검이 고향에 왔다가 김일경이 자기
일족에게 고맙게 구는 것을 알고 손수 찾아가서 치사하며 이 은혜는 언제
든지 꼭 갚겠노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그 후 김일경이 서울로 돌아와서 박
상검의 집을 드나들게 되니 두 사람은 창자를 서로 맞대는 친한 사이가 되
었다.
박상검은 장희빈 득세 당시에 그의 신임을 받아서 남인과 소론들에게 충성
을 바치며 지내온자였다. 이사상, 유봉휘를 사사(師事)하던 김일경은 그들
을 통해서 소론들과 친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조태구와도 친한 교분을
갖고 있었다.
소론 일파는 드디어 김일경을 통해 박상검을 움직이고, 박상검은 그의 심
복 내시 문유도(文有道)를 통해 나인 석렬(石烈), 필정(必貞) 등을 시켜
궁중 연락을 했다. 이러한 기구(機構)를 짜놓은 다음에 김일경은 이진유
(李眞儒) 등 여섯 사람의 동지와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
{이번 사대신(四大臣)이 왕세제 대리청정을 간지(諫止)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그 일을 일찍부터 권주(權契)하려 했던 일인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권주를 하려는 뜻은 틀림 없이 왕세제를 추대해서 왕위를 엿보려는
흉계이오니 그 흉계를 사전에 밝혀서 다스리옵소서.}
이런 상소를 올린 후에 김일경은 다시 목호롱(睦虎龍) 같은 늙은 원로를
시켜 또 한번 사대신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사대신(四大臣)이 이번에 군왕에게 강박으로써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오니
이것은 역죄의 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노론 재상들은 갖은 음
모로써 병중에 계신 상감의 신변을 살피면서 불칙한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
다. 당장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런 묵호룡의 상소는 이진유의 상소를 더욱 힘있게 밀어 주는 것이 되었
다.
이때 임금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지자 박상검은 이 상소문을 나인 석렬을
시켜 왕비께 올리게 하였다. 왕비는 이 글을 보고 너무나 놀랍고 기가 막
혀서 곧 신임하는 박상검을 불러 그 처리 방법을 물었다. 여기서 박상검은
왕비에게 자기의 의견을 낱낱이 다 아뢰었다.
왕비는 즉시 왕명을 칭탁하고 병석에 누운 임금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대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하옥시키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날로 최석항(崔錫恒)이 위관(委官)이 되고 남인 심단(沈檀)이 금부당상
이 되고 소론 이삼(李森)이 포도대장이 되어서 마음대로 혹독한 형벌로 사
대신을 형살(刑殺)시키고 거기에 연결시켜서 노론과 한편이 되었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쫓고 하니, 그 수효가 실로 수백명에 달했다.
이 일이 경종 원년 신축년(辛丑年)서부터 그 이듬해 임인년(壬寅年)까지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신임무옥(辛壬誣獄) 또는 사화(士禍)라 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