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쿠라 히로미 “‘가해의 유적’ 남겨야 전쟁없는 세상 만듭니다”
|기사입력 2002-11-25 18:46 | 최종수정 2002-11-25 18:46
“재일 한국인 최소암씨는 일본 침략전쟁의 피해자이면서도 ‘일본 사람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다. 전쟁을일으킨 사람이 문제다. 앞으로 전쟁을 일어나지 않게 하면 한국과 일본 사람들도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곤 했죠. 한마디로 ‘전쟁없는 세상’은 그의 슬로건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일은 하는 것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 위한 것입니다.”
광신적인 일제 침략전쟁의 상징인 일본 나가노현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의 보존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인 이타쿠라 히로미(72). 지난주 현지에서 만난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설명했다.
-언제부터 이 운동에 관여했나
=운동은 크게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의 보존, 지하호 건설과 관련한 자료 전시 및 지역·세계 평화 발신지 노릇을 할 평화기념관 건설, 한-일 민간교류의 거점이 될 망향의 집 건설 등 세 가지다. 부근에 있는 마쓰시로고등학교 교사 시절인 14~15년 전에 지역 중·고교 교사, 일부 대학 교원들과 함께 대본영 건설지에 대한 자료조사와 연구를 한 게 운동에 참여한 첫 계기다. 깊숙이 관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최소암씨와의 만남이다.
-최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당시 공사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한글도 일본어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마음이 맞아 인간적으로도 친해졌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16살 때 일본에 건너와 일본 전역의 공사판을 다닌 탓인지 시야가 넓었다. 전쟁과 한-일 관계를 얘기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의식을 확실히 가졌다. 마쓰시로대본영 보존운동에는 일본의 다른 지역 운동과는 달리 고교생 등이 참가해 운동을 견인하고 있는 게 특징인데, 학생들이 최씨를 찾아가 증언을 들을 때 그는 가해의식으로 긴장된 상태에 있던 학생들에게 “일본 사람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전쟁이 나쁘다”는 말을 해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내가 그의 고향인 합천군 가야면 이천리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을 얼마 남기지 않고 숨졌다. 결국 내가 그의 죽음을 고향에 있는 친척에게 알렸다.
-마쓰시로대본영에 대한 일본 사람의 증언이나 기록은 없나
=별로 없다. 최씨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으로 공사장의 임시 관리직원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내부 공사, 특히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곳은 한국인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은 내부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 당시 일본 사람도 하루에 2~3천명 가량 동원됐지만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일했다. 또 1945년 패전 뒤 정부의 명령으로 대본영 건설과 관련한 기록을 전부 태워버렸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동원된 사람 가운데 숨진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 대한 통계는 있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공사는 44년 11월부터 45년 8월15일까지 진행됐다. 작업이 이뤄진 굴의 개수와 작업반 등을 감안하면 연 300만명 가량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몇명이 숨졌는지 다쳤는지 전혀 모른다. 공사 중에 집단 장례식이나 매장이 있었다는 얘기는 있다. 또 일부 시민단체가 지하호 앞에 세운 위령비에는 300~1000명이 죽었다는 설이 쓰여져 있다. 지역 주민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을 위한 시설이므로 식량공급이나 임금수준이 다른 곳보다 좋았다는 증언도 있다.
-사망자 등 동원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 등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생업 때문에 전념할 수 없지만 최근 나라가 나서 조사하기로 한 것이 획기적이다. 최근 고적뿐 아니라 전쟁유적도 나라유적으로 지정하자는 시민운동이 성과를 거둬, 나라의 책임으로 조사해 자료를 남기는 게 가능하게 될 것같다. 앞으로 몇 년 뒤에 히로시마 원폭자료관과 같은 형태로 마쓰시로대본영도 유적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자료관과 달리 피해의 유적이 아닌 가해의 유적이 나라 유적으로 지정되는 것은 획기적이다. 우리를 비롯한 시민운동의 영향도 있어 지금은 나가노시가 1억엔 정도의 돈을 들여 마쓰시로대본영을 관리하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희생자위령제에 나가노현 지사와 나가노 시장이 추도문을 보내온 것도 운동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기념관을 세울 곳이 농지 보전지구인데 기념관을 세우려면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사람들이 침략전쟁의 상징인 대본영을 보존하면 마을 이미지가 나빠져 관광에 안좋다고 목소리를 높히면 관청이 허가를 내주기가 어렵다. 실제 히로시마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강했다. 때문에 주민과 함께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원래 반발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일방적인 움직임이다. 일반인이 여기에 맞서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뿐 아니라 평화와 환경친화 생활의 거점으로 만들자, 과거의 나쁜 역사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생활도 고려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오면서 지역 주민도 급속하게 운동에 동조하게 됐다.
-운동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한국관도 변했나
=변했다기보다 기억을 되살렸다는 말이 옳다. 50대 이상은 대개 어릴 적 한국친구에 대한 기억이 있다. 대부분 좋은 기억이다. 학교 다닐 때 한국 친구가 학생회장을 했다거나 여자가 억세서 놀리다가 오히려 혼났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물론 한국과의 교류도 많아졌다. 한국에서 관광차 왔다가 들르는 사람이나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과 지역 주민이 만나서 얘기도 나누고 한국 사람이 머물고 가기도 한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과 민간 차원의 교류 계획은
=일부 하고 있다. 이제까지 30명 가량이 2차례 한국에 ‘평화의 여행’을 했다. 최씨의 고향에 가서 불고기 파티도 하고 교류도 했다. 지금까지는 교류의 폭이 한정됐고 우리도 전체적으로 평화기념관의 건설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소홀한 면이 있다. 최근에는 건설 전이라도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하자는 흐름이 강하다. 앞으로는 1년에 몇 차례 집단적으로 왔다갔다 하며 교류할 계획이다. 빨리 망향의 집을 지어 교류의 중심으로 삼고 싶다. 이곳을 김치나 막걸리 등 한국 음식도 팔고 한국 사람들과 대화하는 곳으로 하고 싶다. 그 전에라도 일단 ‘망향의 원두막’같은 작은 건물이라도 만들고 싶다. 한-일 공동의 집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한국 쪽에서도 참여했으면 한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 인정이 운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나
=북한에 대해서는 반발이 크다. 북한에 돌아간 과거 동급생을 둔 한 사람이 북한에서 고생하는 사람을 위해 쌀을 보내자고 제안하자 맹렬한 반발이 나왔다. 망향의 집을 짓는 모임의 이름을 ‘일-한, 일-조 교류를 촉진하는 시민의 모임’이라고 지었는데 이 운동에 가장 협력적인 사람들이 조선이란 단어를 빼라고 얘기하고 있다. 나중에 납치 문제가 해결돼 국교를 맺으면 넣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를 빼고 하면 운동의 의미가 없다. 지금부터 이를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역사는 대학입시에도 나오지 않아 거의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 등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납치 문제도 역사적 맥락에서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매우 적다. 이 운동도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란?
일본 수도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200㎞ 가량 떨어진 나가노현 마쓰시로에 있는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는 2차대전 말기 일본 군부가 본토결전의 최후 거점으로 극비리에 왕족의 주거지와 전쟁사령부인 대본영, 정부 각 성·청 등을 이전한다는 계획 아래 만든 것이다.
1944년 11월11일 오전 11시에 첫 발파를 한 뒤 45년 8월15일 패전일까지 9개월여에 걸쳐 당시 2억엔의 거금과 300만명 가량의 노동자를 강제 동원해 1일 3교대로 철야 공사를 벌였다. 하루에 6천~7천명의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가 가장 위험한 작업인 발파 및 내부 굴착 작업 등에 동원됐으며, 나쁜 식량사정과 인해전술 방식의 작업으로 인해 수백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하호는 마이쓰루산을 중심으로 미나카미산, 조산 등 3곳에 건설됐다. 전체 길이는 10㎞에 이르며 공정의 75%가 완공된 시점에서 패전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전후에는 일본의 가해를 상징하는 시설이란 점도 영향을 끼쳐 잊혀진 상태였으나 ‘마쓰시로대본영의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이 중심이 된 지역 시민운동 단체의 활동으로 89년부터 500m 가량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타쿠라 히로미’는 누구?
‘마쓰시로대본영의 보존을 추진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는 중심인물인 이타쿠라 히로미는 첫 인상부터 남다르다. 한국의 승려복을 연상하게 하는 ‘사무에’라는 복장에 더부룩한 수염과 거친 손, 껑충한 키는 옛 무사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마쓰시로대본영 보존운동에 깊게 관여하게 된 것은 한국인으로서 대본영 내부 공사 상황을 유일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최소암(1991년 사망, 당시 70살)씨와 만나면서였다. 지역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서 대본영에 대한 자료 연구 등을 하던 중 지하호 내부 공사에 참석했던 최씨를 통해 당시의 참혹했던 공사 현황을 듣고 과거 침략 역사를 반성하는 상징물인 대본영을 보존하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최씨를 만나면서 배우게 된 한글도 시를 쓸 정도로 능숙하다. 교사를 그만두고 60살이 넘은 94·95년 두차례에 걸쳐 1년간 한글 공부를 위해 한국에 유학하기도 했다. “최씨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한글을 배웠다”는 그는 최근에도 한국과 일본의 텔레비전과 신문 등을 보고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 등의 정보를 담은 개인신문인 <한국정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노릇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마쓰시로(나가노현)/오태규 특파원 oht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