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오디세이] 33. 대나무의 미덕에 관한 기록
신라인들에게 대나무는 마법·기적 불러오는 신비의 생존도구
미추왕릉 옆 고분에 있는 대나무숲. 미추왕릉에서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와 적을 물리쳤다.
미추왕릉을 죽현릉이라고도 한다.
대나무는 겨울을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푸름을 잃지 않는 상록의 가치가 눈 내리는
한겨울에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곧게 자라고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않으며 속이 비어 넉넉하고 어떠한 시련
에도 꼿꼿한 강직함이 군자의 모습을 닮았다. 눈이 쌓이면 설죽, 바람에 몸이 휘어지면 풍죽, 서리를 맞으면
상죽, 비를 맞아 잎이 처진 대나무를 우죽이라 불렀다. 고난이 더해질 때마다 고난을 이겨내는 빛나는 푸름과
곧음의 가치를 높이 샀다.
대나무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름은 사군자 말고도 많다. 한겨울에 더욱 빛나는 품성을 지녔다는 뜻으로 소나무,
매화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불렀고 절개가 굳다는 의미로 매화와 함께 ‘쌍청(雙淸)이라고 했다.
선비의 벗이라며 소나무 매화 난과 더불어 ‘사우(四友)’로 높여 불렀으며 사우에 돌을 더해 ‘오청(五淸)’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어부사시사’의 윤선도는 물 바위 소나무 달과 함께 자신의 다섯 친구라며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신라인들은 대나무를 조금 다른 의미로 풀었다. 사로국 시절에는 인근 도시국가와 치열한 몸싸움을 벌여야
했고 고대국가로 성장한 이후에는 백제와 고구려,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대나무에서 군자의
미덕, 선비의 고결함 같은 품위를 찾아낼 여유가 없었다. 신라인들에게 대나무는 나라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한
마술봉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마법과 기적을 불러오는 신비의 생존도구였고 종교와 같은 믿음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대나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미추왕 죽엽군’ 편이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
들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우리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격파했으나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
로소 선왕의 음덕의 공로인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이서국은 지금의 경북 청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다. 297년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했다. 왕궁까지 적
군이 밀려온 상황으로 봐서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대나무를 귀에 꽂은 군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적을 물리쳤다. 미추왕을 호위하는 신병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추왕은 호국의 아이콘으
로 자리를 잡았고 대나무는 신라를 지키는 ‘신병 부대’의 심벌이 됐다. 미추왕은 김씨 최초의 왕이다. 내물왕이
왕위를 김씨 세습제로 하면서 뒤를 이은 38명의 김씨 왕들은 모두 미추왕을 시조왕으로 모셨다. 특히 신문왕
이후 사실상 오묘제를 도입하면서 오묘의 제일 윗자리에 미추왕을 모셨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과
함께 호국의 대표인물에 올려놓았다.
신문왕릉 앞 대나무 숲
미추왕릉은 경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과 닿아 있다. 황리단길 도로 동쪽의 담장이 대릉원이고
대릉원 안에 미추왕릉이 있다. 죽엽군이 등장했던 설화를 증명하듯이 미추왕릉 옆 이름 모를 고분에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사람들은 거기서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신문왕릉. 신문왕은 대나무 신화를 통해 정국주도권과 정권안정, 민심끌어들이기에 성공했다.
대나무는 신문왕대에 들어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로 가공되면서 본격적으로 신격화 된다. 제31대 신문왕은
죽어서 해룡이 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고 문무왕이 잠들어 있는 해중릉을 바라보기 위해
이견대를 만들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나무와 해중릉. 신문왕은 해중릉에서 대나무를 가져와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왕은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합심하여 보내온 대나무와 옥대를 선물 받고 궁으로 돌아온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합심하여 대나무를 선물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신문왕이 왕좌에 오르자
말자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왕의 장인이며 김유신의 조카다. 반란을 제압한 왕은 김흠돌은 물론
김유신계와 화랑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 부인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감은사와 해중릉을 찾
은 것이다. 김유신계를 내쫓은 데 대한 부담과 충격을 완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나무를 얻음으로써 자
신에 대한 문무왕과 김유신의 지지가 콘크리트처럼 확고하다는 사실을 공표해야 했다. 그 대나무로 만파식적
을 만들어 신화를 완성했다. 만파식적을 국보로 삼고 궁궐 안 천존고에 보관했다. ‘천명은 나에게 있다’고 말하
고 싶었던 것일까.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갰다. 바람
이 잦아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만파식적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보물이었다. 김흠돌의 난으로 불안한 출발
을 보였던 신문왕 정권은 만파식적 신화를 만들어 상당한 안정을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대나무와 관련해 의미 있는 기사를 실었다. “신문왕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그해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효소왕대에 들어와서 국선 부례랑이 오랑캐에게 납치되고 천존고에 있던
거문고와 만파식적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 대비상 앞에 가서 몇 날 며칠 기도
를 드린 덕에 납치됐던 부례랑과 안상이 만파식적과 거문고와 함께 돌아왔다. 백률사 관세음보살이 부례랑과
안상을 데려오기 위해 천존고에 있는 만파식적과 거문고를 가지고 갔던 것이다. 오랑케 땅에 들어간 관음보
살은 피리를 손바닥으로 쳐 둘로 나눈 뒤 부례랑과 안상을 나눠 타게 하고 자신도 거문고를 타고 백률사로
돌아왔다. 효소왕은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 높여 불렀다.
경주시 양북면은 최근 지명을 ‘문무대왕면’으로 바꿨다. 해중릉, 이견대, 감은사 모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
왕과 아들 신문왕의 스토리로 풍성하다.
감은사 동쪽의 대나무 숲에서 바라본 삼층석탑.
감은사지에도 대나무 숲이 풍성하다. 삼층석탑 서쪽에 대나무 숲으로 벽을 둘렀고 북쪽에도 울창한 대나무
숲이 조성됐다.
백률사 오솔길의 대나무숲. 납치됐던 부례랑과 안상,잃어버렸던 거문고와 만파식적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백률사는 대웅전에서 돌아 나오는 동쪽 오솔길 양쪽에 무성한 대나무 숲을 조성했다. 고즈넉한 절간에 바람
이 불면 키 큰 대나무들이 몸을 부딪히면서 후두두둑 비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민이 생겼다.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복두장이 혼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복두장은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 대밭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쳤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왕은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임금님 귀는 길다’라고 숲이 말했다.
대나무는 증폭이 큰 빅스피커였고 산수유는 잘 순치된 언론 같기도 하다. 이 설화가 삼국유사 속에서
대나무가 악역을 맡은 경우이고 대나무가 수난을 당한 유일한 케이스다. 경문왕 시대에는 만파식적이니
죽현릉의 신병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신라인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래서였을까.
도림사지로 추정되는 구황동 모전석탑지. 경문왕은 대나무를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었다.
도림사지로 추정되는 구황동모전석탑지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7세기 중엽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
되는 모전석탑과 남북 감실의 돌기둥 2쌍이 있다. 인왕상 2쌍이 굉음을 내며 시속 100㎞ 이상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모양을 하고 서 있다.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l 승인 2021.07.15 l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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