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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Anima란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는
ANIMA는 남성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적 인격 요인임과 동시에 남성이 여성에게 품고 있는 이미지, 즉 여성성의 원형이기도 하다
아니무스Animus 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 무의식적인 남성성으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 남성에 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제 안에도 아주 많습죠!
대상 없이 혼자 발휘될 때, 제가 동키호테로 변신하는 이유인 거 같아요,아무래도^^ ㅎ)
이것은 여성에게는 남성의 성질이며, 남성에게는 여성의 성질이다. 이러한 성질은 유전적으로 계승해온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다.
예를 들어 이성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그리고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라든지 '영웅'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일방적 또는 상호투사가 일어나고 있다.
남성은 그녀에게서 현실적인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여신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여성은 그에게서 신화에 나오는 '영웅상', '성자상'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원형Archetype》이란
우리는 부모로부터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적 토대를 DNA라는 유전자를 통하여 물려받아
우리의 몸은 부모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머리카락, 대머리의 여부, 혈우병이나 색맹, 키, 눈동자의 색깔, 피부색 등 몸을 이루는
물질들은 부모에게 받은 씨앗이 발아된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 성격 등 정신적인 면은 부모와 닮지 않는다
흔히 이러한 것들은 타고난다고 말한다.
유전자를 통한게 아닌데 타고났다?
심리학자 융은 신화ㆍ꿈ㆍ종교 등을 연구하면서 지구의 어느 곳에서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인 상상력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수많은 신화와 종교, 꿈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통찰하던 융의 결론은
고대 이집트인이건, 아즈텍인이건, 인디언이건, 티벳인이건,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영국인이든 그들의 마음 속에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걸쳐 근본적으로 비슷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Jung은 이 '공통적인 심상'에다 원형(archetyp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형》, 즉 인류 전체의 '하나의 정신적 틀'은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여 유전한다
원형을 이루는 이 상상력의 틀은 문명의 이동이나 문명의 교류가 없는 지역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원형의 심상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과는 다른 통로로 즉 정신적으로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형의 틀이란 하나의 거푸집 같은 거죠, 거기에 어떤 재료를 붓든 같은 모양이 나오죠?
벗어날 수 없는 인류 유산의 상속자입니다, 회원님들과 저는...)
융에 의하면, 《원형》은 영원히 유전되는 하나의 틀(frame)이다
DNA를 통한 몸의 유전에는 우성인자가 발현되는데, 융은 생명과학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를 빌려 자신이 발견한 원형을 《무의식의 우성인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보편적이고 역동적인 《원형》이 담겨 있는 정신층을 융은 《집단무의식》이라
이름 붙인다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달리
어느 정도 까지의 무의식의 표면적인 층은 의심할 여지없이 '개인적'이지만,
인간의 무의식은 더욱 더 깊은 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 층은 이미 개인적으로
경험되고 획득되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담고 있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다 라고 했다.
이러한 인간 마음의 보다 깊은 층을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라고 불렀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에 의해서 촉발되는 감정은 반드시 황홀한 신비감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강렬한 혐오감, 공포감, 불쾌감 또는 외경의 마음일 수도 있다
일상적인 부정적 감정보다는 더욱 강렬하고 강박적이고 마력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런 감정이 이성에게서 느껴져서 그 이성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감정관계를 갖게 될
때 거기에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이 반드시 밖에 있는 어떤 인물에만 투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 시인은 자기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화폭이나 작품 속에 형상화한다
반드시 사람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새, 사자, 학, 코끼리, 용, 신, 나무...
혹은 태양과 달 또는 추상 속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을 그려내어 그것이
그들 작품의 독특한 특질을 이루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또한 이념에 투사(심리 상태의 반영)되기도 하고 물질에 투사되기도
한다.
그 이념이 계몽사상이든, 공산주의든, 기독교 사상이든, 혹은 낭만주의든, 그것이 그의
아니마 또는 그녀의 아니무스 투사의 대상이 되면 그 이념들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열병 환자처럼 그들은 그 '주의'와 '사상'에 광신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원형이란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마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므로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도 거기에 적합한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 나타났을 때는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집단적으로 ‘심상’(心像)을 투사하는 결과를 빚는다.
신흥 종교집단의 형성도 여성들의 아니무스 원형, 즉 영웅원형 또는 구원자 원형의 집단적 투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인기가수에 대한 집단적인 열광’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그들의 마음을 열광케 하는 것이
그 마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순한 성적인 매력이나 호기심을 넘어서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초인과 영웅에 대한 열정과 회구(옛날을 돌이켜 생각) 인 것이다
물질은 곧 잘 《아니마 원형》의 투사를 받는다.
그것은 모체(Matrix근원적인 기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를 뜻하는 라틴어 mater에서 물질이라는 matter가 유래하였고,
meter(측정하다)와 matrix(모체, 기반)도 여기에서 파생됩니다
반면, 아버지를 뜻하는 pater에서 pattern(패턴)이 유래하였으니
결국 자연은 어머니인 물질과 아버지인 패턴의 결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알코올(알코올 중독자의 술에 대한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을
능가한다)일수도 있고 지극히 사사로운 물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은 아니마가 투사되면 평범한 물질을 떠나 마력을 지닌 것으로 변하여
인간은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봉하게 된다.
신을 모시던 그리스의 신전이, 돈을 거래하는 근대의 은행 건물의 주요한 양식이 되어
경외심과 신봉을 자극하는 하늘로 튼튼하게 뻗은 웅장한 원형의 이미지를 통해 무의식적인 믿음과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되었다
( 융의《 원형》의 궁극적 의미의 핵심은 그 한계는 정할 수 있으나
《묘사할 수는 없는 것》이며《언어의 영역에 속하는 '시각표상'(視覺表象)》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원형적 이미지'를 광고와 소비자 마케팅 및 모든 분야에 활용해서 효과의 극대화에
성공할 수 있다)
정신 병리 현상이라고 생각되는 것 가운데도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현상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정신의학에서 애정 망상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환자는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 속의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는 굽힐 수 없는 믿음을 갖는다.
자세히 관찰하면 그 남자는 그녀에게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여러가지 신비스러운
속성을 띤 초인적 존재이다.
환자에게 그는 위기에서 그녀를 구출하는 구원자이며 모든 악을 물리치는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리학적으로는 여기에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가 간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로서의 부모상 -
아니마 아니무스의 원형상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어린 시절이다.
네 살 이전의 어린이는 아직 연속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몽롱한 상태처럼 의식의 단절적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하며
이런 상태에서 인지하는 부모의 상像은 현실적인 상이 아니라 풍부한 환상에 의해서 채색된 부모상이다.
이 환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심리적 현실로서, 그 환상을 낳게 하는 마음 속의
모체(아니마 원형)를 전제로 반영되는 부모 원형인 것이다.
어린이가 지각하는 부모는 부모의 현실상(現實像)이 신성(神性)으로 덧입혀진 상이다.
융은 이것을 종교적 표상이라고 지적한다.
부모의 상은 사랑의 관념뿐 아니라 신의 관념에 연관된다.
이러한 부모에 대한 원형적 체험은 어린이가 성장하고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사라지고
어린이는 현실적인 부모상을 적지 않은 실망과 함께 원형적 부모상으로부터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형적 부모상은 그대로 무의식에 남아 있어 부모 아닌 다른 이성에 투사되거나
또한 투사될 준비 태세를 간직한 채 있게 된다
(ex. 자기 아들을 더 없는 정성으로 보살피며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큰 기대를 걸다가
결국 노이로제 환자로 만들어버린 한 어머니의 예 - 이 어머니는 무의식적인 도그마
“내 아들은 미래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여성들의 마음 속의 아니무스적 영웅 원형이 아버지나 남편 또는 아들에게 투사되면
그녀의 행동이 그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조종된다.
* 모성 콤플렉스와 성년식Initiation 의 의의
원시사회에서의 성년식은 어린이들의 부모와의 일체감을 '지양'하고,
종족, 사회, 국가와의 새로운 형태의 일체감을 '지향'하는 것이다.
(TV 다큐에서, 원주민 소년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육체의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테스트를 통과하여 한 남자로 인정받고 부족 구성원이 되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에 이런 무의식의 원형을 벗어나서 사회일원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줄을 오늘 알게 됩니다)
남아에게 아버지는 '외계의 위험'에서 보호하는 존재이며, 남성으로서의 《페르소나》의
표본이 되듯, 어머니는 그에게 어둠 속에서 그의 '마음을 위협'하는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성인식에서 후보자는 어머니 아닌, 다른 남자 성인으로부터 그 내면(어둠)의 세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배움으로써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탈피한다.
cf. 모성콤플렉스의 병리적 측면
병리적 측면 - 성년식( 또는 사회속에 들어가는 입사식入社式 )같은 모성으로부터의
효과적인 극복 단계가 특별히 제도화되지 못한 동서의 이른바 ‘문명사회’의 현대인들은
모성상을 그대로 아내에게 전이한다.
(ex. 남성은 결혼만 하면 어린애 같아지고 감상적이고 의존적이 아니면
폭군적이며 예민하거나 인색하여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게 되는데,
후자 즉 폭군적 변모는 바로 전자, 비굴한 수동성과 종이 한 장 차이며 모성애의
의존이라는 점과 다르지 않다(-----ㅎㅎ 결혼한 덕분에 잘 경험하고 있습니다! 으휴~ㅋ
^^회원님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부산에서도요♥)
*분석 심리학에서 보는 결혼의 심리적 의의
여성은 남성에게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며 남성으로부터 생각하는 힘을 얻는다.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는 이러한 선상에서 상호 보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격의 성숙'은 자기의 의식에 부족한 것을 상대방에게 구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찾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데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한다면 이것은 끝없는 상호투사로 인한 고태적(옛모습) 결합을 장려하는 말이며,
때로는 개체의 성숙을 저해하는 조건이 된다.
(HUR유림님이 보여주신 멋진 액자 속 글이 떠 오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복감과 신비적 융화로서의 결혼은, 그것이 너무 인위적인 틀로서 강요되면
내부에서, 또는 밖에서 오는 작용에 의하여 파괴되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기는 사실상 개인의 개인으로서의 자각을 위해서는 '귀중한 기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결혼을 성인의 조건으로 삼았고 신성시하였다
'독신자'에 대한 백안시와 동정, 불안감이 한국 사회처럼 강한 곳이 없는 것은,
결혼을 신성시하고 이를 성인의 절대적 조건으로 믿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이러한 '신비적 결혼관'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대극》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Jung에 의하면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소나와 아니마- 아니무스는
상호 '대극' 관계에 있지만, '대극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은 '완전한 하나'가 된다.
《대극의 조화》는 융 심리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대극》은 대극이 지닌 감정가치의 '강도'에 따라 '낙차'를 형성하고 활발한 정신활동의
조건이 된다. 대극 갈등이 나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정신은 질서정연한 정체를 오래
참지 못한다. 그러나 대립된 양극은 궁극적으로 합쳐져야 하며, 그것이 또한 대극의
긴장과 갈등의 목적이다.
정신 자체는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 아니 인간을 둘러싼 세계, 우주와 자연은 모두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과 의식은 '양극의 쌍'이 되는 글자이며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은 밝고 어두운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자기원형 또한 그림자를 가진다. 이 그림자의 자각은 인내와 겸손을 요구하는 도덕적인
작업이다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와 통합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 즉 양성성을
균형있게 계발하는 작업이다
자기의 인식은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의 물음이 아니라
'원래 내가 무엇이었는가'의 물음과 관련된 것이다
《상징Symbol》은 사물의 외관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능력이자 '무의식과 의식',
'상상와 실재', '개인과 우주'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상징'을 통한 대립되는 두 세계의 통합은 '치유, 구원'의 효과가 담겨 있다
(추상미술을 감상하며 우는 것, 명상하는 것,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는 것을 포함)
인간의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체험》과 예술가에 의해 인간 심연이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된 《작품》에 대한 적절한 《감상》은
인간 심연에 대한 앎의 깊이를더해주며,
'자기실현'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실한 상징'이 깃든 《예술 활동(창작이나 감상)》은
《자기실현의 매개》라 할 수 있다
Jung이 지향하는 정신치료의 궁극적 목표는 그 개인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도록 하는
것 즉, 전체 정신의 실현, 자기실현 혹은 개성화Individuation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자아Ego》가 《전체 정신의 중심인 자기Self》에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평탄치가 않다. 왜냐하면 자아는 의식의 성질상 한 방향으로만 발전해
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의 발전 방향에 맞지 않는 것은 의식에서 배제되어 무의식에 억압되며,
그림자라는 의식의 대자를 형성하게 된다.
( 그림자의 분석심리학적 개념
그림자의 정의
그림자는 자아 컴플렉스의 어두운, 아직 살지 못한, 억압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단지 부분적으로 타당할 뿐이다.
융은 사람들이 경험의 토대도 없이 어떤 용어를 글자 그대로 따지고 그 개념에 매달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시작의 단계에서 그림자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리가 모르는 마음을 말한다
그림자는 자신의 인격의 부정적 측면이므로 쉽게 남에게 투사되어
자신 속에는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되므로 투사를 거두는 데 상당한 저항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등성이 '의식화'된다면 그 열등함을 교정할 기회가 생긴다.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은 보통의 정도를 넘어서는 '도덕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림자 개념은 결국 전체 정신을 구성하는 어두운 대극, ‘자기’의 그림자에 귀착된다》
자기는 그림자가 있음으로써 하나가 된다. 음과 양이 합쳐 도를 이루는 것과 같다.
그림자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이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림자》저 감추어진, 억압된, 흔히 열등한, 그리고 죄 많은 인격, 그 마지막 주자는
동물 조상의 왕국에 이르며 이로써 《무의식의 모든 역사적 측면을 포괄》한다.
자아가 발전과 개선과 더 나은미래를 목표로 매진하는 한 그림자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에서 내적인격인 아니마,
아니무스가 무의식에 있게 되는 것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외가 있지만
남성과 여성은 먼저 타고난 성의 역할을 따르게 되기 때문에 무의식에 이에 대응하는 내적인격이 형성될 조건을 가지게 된다.
근원적 양극성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되는 한 가지 이유는 자아의식이
양극 중 하나를 고집하고 다른 것을 누르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심할 경우 대극의 반전 ,신경증적 해리를 일으킨다.
대극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합칠 수는 없다.
합리성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인 콤플렉스를 매개자로 할 때
대극은 대극을 지양한 제 3의 위치에서 포괄된다.
이러한 대극합일의 기능을 융은 초월적 기능이라 불렀다.
그것은 곧 무의식의 기능이고 합리와 비합리를 융합하고,
무한한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상징(Symbol)이다.
융 학파의 분석가들이 환자의 치료를 위해 꿈을 보는 목적이 바로
상징의 이해와 상징적 해석의 치료효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융은 동서의 사상사에서 대극, 혹은 양극성에 관한 여러 선구자들의 견해를 섭렵하고
심리학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한 바 있다.
특히 노자의 도[道]사상에 깊은 공감을 표명하였다.
대극 갈등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전체 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와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에는 대극으로의 분리 경향 뿐 아니라 대극합일의 조건이 원초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융의 가장 핵심적인 학설이다.
자기원형이 바로 무의식에 있는 ‘전체를 만드는 자’, 근원적인 조절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상징을 통해 우리에게 현시된다.
융의 대극론과 대극합일에 관한 학설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심리에서 발견된 것이지만
그의 학설로 현실정치나 사회상을 이해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난 일은 밖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대극 갈등의 해결은 집단이 아닌 개인 개인의 과제라는 것을
융은 항상 강조했다.
개인 개인의 진지한 자기 인식만이 사회의 성숙을 위한 확실한 길이다.
집단은 개인 개인이 개성을 발휘하고 자기인식을 잘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일을 할 뿐이다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합일, 의식과 무의식, 남성과 그의 ‘아니마’,
여성적 의식과 ‘아니무스’의 합일을
전통적 결혼관에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이성간의 결합 관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흔히 말하듯이 일심동체가 아니고,
일심일체의 남성과 일심일체의 여성의 만남인 것이다.
결혼 생활의 문제점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상대 속에 아니마 원형과 아니무스 원형을
투사하며,
또 각기 그 원형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자 할 때 일어난다.
이 관계는 평화롭고 다정스러워 보일 수는 있으나 성숙에 필요한 갈등과 고통이 결여되어 있어
개인으로서의 성장이 저지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마나 아니무스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그것은 남성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경험의 총화이며
여성에게는 남성에 대한 경험을 통튼 것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인간 정신 속에
전승된 여성적 요소, 전승된 남성적 요소이다.
남성에서의 아니마는 ‘기분(mood)’, ‘정서(emotion)'으로 나타나고,
여성에서의 아니무스는 ‘생각’, ‘의견(opinion)’으로 나타난다.
1. 남성의 아니마의 양상
아니마 원형이 지니고 있는 ‘기분’의 성질은 어둡고 밝은 여러 뉘앙스를 띠고 있어서
꼭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마는 의식화하기가 쉽지 않다
남성의 시선은 여러가지 외계의 일을 향하며 여러 여성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듯이
보인다.
가정은 하나의 지나가는 장소, 남성은 거기에 잠깐 머물렀다가 바깥 세계로
다시금 치달아간다.
그렇게 밖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의 마음속의 ‘아니마’ 는 개인적인성격을 띤다
(상보성). 남성이 외계에 관심을 두면 둘수록 그의 아니마는 독선적 감정,
고집불통의 정열이라는 특징을 띠며 하나의 여성상에 집약한다.
2. 여성의 아니무스의 양상
여성은 반대로 의식에 있어서의 사적인 감정적 태도와는 달리 무의식에서의 남성적
요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마치 다수의 재판관, 아버지들의, 혹은 그 밖의 권위자들의 집회’ 처럼, 굽힐 수 없는 정당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전제들의 대백과사전, 말, 의견, 법칙, 평균 진리, 판단,이성들이다.
때로는 건전한 인간 이해의 형태로, 때로는 찌르는 듯한 편견의 모습으로,
혹은 “사람이란 누구나 그런 거야” 하는 식의 교육용으로
개작된 법의 모습으로 아니무스는 나타난다고 융은 말한다.
3. 아니마와 아니무스 미분화
(남성속에 있는 ) 아니마가 의식되지 않아 미분화 상태에 있으면
그것은 원시적인 감정과 통하게 된다.
그것은 침착하고 이성적임을 자랑하는 남성으로 하여금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 순간 그는 그의 부정적 아니마에 사로잡힌 것 (possessed) 이다.
아니마가 통합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너무 강하게 배치되면
그는 무의식적인 자극에 쉴 새 없이 영향을 받아 여성화되어 요변스러운 남자,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때로는 분방한 추측, 질투, 의혹에 사로잡혀서 부인을 괴롭히는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남성이 바로 완전 무결한 호남 (好男) 의 페르조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여성안에서) 아니무스가 미분화되면 그것은 ‘따지는 버릇’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미리부터 정해 놓고 시작하는 의논이므로 아무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의견’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논리정연한
판단이 아니고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한 궤변의 형태를 취한다. 이런 부정적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기의
미분화된 아니마의 분노에 사로잡혀서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아는 신’
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 고 말하게
함으로써 파장을 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대개 “아니마는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이다.”
예를 들면 한국문화에 있어 부부간의 대화의 문제나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부부간의 말다툼이나 여러가지 집단모임이나 수업상의 토론에서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신의 미분화된 아니마로 인해 분노에 사로 잡혀서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하는 신'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다"고 궤변을 떨면서 그런 대화나 토론은 파장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opinion)이고, 미성숙한 남성의 아니마는
비합리적인 기분(mood)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싸움하다가 미성숙한 남성은 화를 내고 밖에 나가고, 미성숙한 여성은
자신이 옳았고 그러기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미성숙한 부부가 지니게 되는
일반적인 형태로 융은 보았다.
부정적인 아니마는 자신이나 타인을 깎아내리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보람도 없다” 는 아니마의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암울한 기분은 자살을 유혹하기도 한다
용감하고 늠름한 남성에게서 종종 발견되어지는 과도의 민감성 역시 ANIMA가 그
일력을 담당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볼 수 있다
또한 '부정적인 아니마'의 다른 측면은 남성들로 하여금 지적(知的) 유희에 사로잡혀서
삶의 생기와 자발성을 무의미한 현학적 사고로 희생시키는 데 있다.
또한 '미숙한 아니마'는 원시적인 색정적(色情的) 환상 속에 나타난다 (ex. 도색잡지).
잘 분화된 아니마가 창조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듯,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 남성들이 보지 못하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
그들의 추상적 사물에 의해서 흐려진 시야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는 개체의 통일된 인격의 실현, 즉 자기 실현의 과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나 이 작업은 자아와 페르소나와의 구별,
그림자의 인식에 비해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여성의 심리세계와 성적 특성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그것과 동일하나, 왜곡된 역사 문화의
진행으로 인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사회문화적 영역에 남성과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개념을 깨뜨려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여성은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무스의 힘과 행위의 단계는 여성적 본성과 조화있게 받아들여 활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 통합 과정이 좋지 않아 남성적 태도가 여성성을 능가하여 여성성을 내몰아
버린 듯한 ANIMUS도 있다. 요컨대 필요 이상으로 정력적이며, 동정심이 없고, 거친 남자
같은 여자이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성미가 사나운 여성이다
ANIMUS의 힘과 행위의 단계는 적극적, 정렬적, 용감하고 행동력이 있는 여성에게
나타나며, 여성적 본성과 조화적으로 받아들여 활성화된다. 현대의 여성에 있어서
자신의 힘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에 두어 성취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원형과 더불어 친숙해지고 동시에 그 영향에 맹목적으로 자기를 맡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자기실현의 가장 큰 난관을 통과하는 것이 된다.
프로이트와 융
첫댓글 아니마 아니무스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주셨네요.^^
원형이론은
미술사, 문화예술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도 알아야할 중요이론으로
문학, 미술, 연극, 영화등 모든 예술 창작 원리이기도 하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불멸의 작품 속에는 이 <원형이론>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헤세는 융을 직접 만난 후,
이 원형이론에 깊은 감동받고
쓴 소설이 바로 <데미안>입니다.
싱클레어가 방황하며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니마 아니무스의 결합체로
데미안의 어머니를 제시하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죠.
원형이론을 몸에 붙인 후,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결합된 인격체를 실현하는 것은
헤세 꿈이었지만
인격체를 구현하는 모든 이의 소망일 겁니다.
은시님 댓글 내용으로 원형이론을 더 넓게 개괄해 볼 수 있어
더욱 감사합니다
곧 시작될 워크샾에서 은시님과 멋진 회원님 모두
보람되고 알찬 결실 맺으시길 기원하며 맘으로
늘 함께 합니다, 열정의 은시님 회이띵!!! 야~호~
Minnie님 연휴기간에 정신없는 저를 다시 일깨워주시네요.
저 이 자료 프린트해서 참고하며 공부해도 되까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HUR유림님 ^^
뜨끔했으요오! 연휴에 모두 바쁘실 틈에
살짝 읽을거리 올리려고 주제를 고심하고
피로 회복용의 내용으로다가 ...ㅎㅎ
근데 가치를 두어주시니 송구하면서 많이 기쁩니다
음력 새해 첫인사로 최고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자세히 정리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찬찬히 읽어보면서 문득 드는 의문... 칼 융은 몇 명의 사례를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어디까지가 추측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사례에 기반한 이론일지 궁금.. 하네요!!
프로이드는 자신의 환자를 기초로한 심리임상학적 바탕이니 사례를 근거로 했지만
융은 접근방법부터 다르잖아요?
신화분석을 통한 집단 무의식으로 신화의 원형에서 제시된 사례에서 찾은 것이니..
성경의 창세기, 이집트의 창조신화, 그리스의 창조신화 등 대부분의 신화에서
아니마, 아니무스의 일원론적 시각을 찾을 수 있죠.
최근 임상학적 사럐들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 예능에서 더욱 그의 이 이론을이
직접 간접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도 누구나 쉽게 엿볼 수있게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죠.
@은시 그렇군요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융의 이 이론은 이제 모든 예술하는 사람이나
미술사하는 사람..그 밖에 경제적 활동으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이론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카페 회원님들도 주시해 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