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의 길로 행하며
삼상 6:10~15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운동선수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은 금년 1년 동안 선한 싸움을 잘 싸워왔으며,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는지, 1년간을 잘 달리면서 믿음을 지켰는지, 과연 의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삼상6:10-16절의 말씀은 4장에서부터 읽어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사시대 엘리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함이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무력과, 그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패역한 악행은 급기야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불레셋나라의 침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나라는 참패를 당하고 나라는 온통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엘리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나님의 선민의 상징인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법궤를 빼앗아간 불레셋나라에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 법궤를 두는 성읍마다 독종이 퍼져서 수백, 수천 명씩 죽는 재앙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불레셋나라의 방백들이 의논 끝에 이 나라의 재앙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빼앗아온 법궤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법궤를 이스라엘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수레를 만들고 수레를 메어보지 않은 소중에 새끼 갖은 소를 택하여 송아지는 떼어놓고 수레에 메워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나라 벧세메스를 향하여 내몰았습니다.
이 소들은 젖 먹는 새끼들을 떼어놓았지만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나라를 향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벧세메스까지 달려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곡식을 거두다가 수레에 법궤가 실려 오는 것을 보고 맞이하여 그 소를 잡아 제물로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불레셋에서 이스라엘 벧세메스까지 달려온 이 소들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들이 지나온 1년을 돌이켜 보면서 과연 나는 지난 1년을 어떻게 달려왔는가를 생각하면서 신년을 맞기 전에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10절)
불레셋 나라의 소가 어찌 이 두 마리뿐이겠습니까?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무리 중에서 특별히 사명을 띠고 선택받은 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소들과 같이 사명 받은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 아니 이 동리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여러분들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 소들과 같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계셔서 큰 사명을 띠고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나라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는 것이 군인이듯이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송아지가 젖을 먹기 위해 어미 소의 다리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면 수레를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떼어놓고 갈 때에 그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사명을 위해서는 모든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거치적거리는 걸림돌이 있으면 과감하게 모두 끊어버려야 합니다.
창22장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산에 도착하였을 때에 함께 동행한 하인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고 이삭에게 나무를 지워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만약에 그의 하인들이 끝까지 따라갔다면 아브라함의 하는 행동을 보고 가만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일찍이 걸림돌이 되는 하인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미련도 끊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포기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머뭇머뭇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 사명의 길로 바로 행하였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12절)
신앙생활은 마치 이 소들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1년 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지고 왔습니까?
무겁다고 벗어 던진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잘 달려왔습니까?
이때는 마침 밀을 거두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곡식을 거둘 때에 길가의 한 이랑은 거두지 않고 그냥 놔두어서 지나가는 객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짐승들을 위해 거두지 않았습니다.
길가에 얼마든지 먹을 것이 있어도 앞만 보고 걸어온 소들의 모습은 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번도 메어보지 않던 수레멍에를 메고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소들처럼 여러분들은 지난 1년 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손만 뻗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세상의 향락 다 버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환란의 바람에 쓰러지기도 하고, 유혹의 손길에 솔깃해서 나태하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면서 게으름도 피우고, 하며 힘들다고 쉬엄쉬엄 걸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는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의 멍에를 메고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벧세메스인 하늘나라를 향해 갈 때에 울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들도 믿음을 지키기에 너무 힘이 들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생각하며 불쌍해서 울고, 은혜 받고 감격해서 울고, 자신의 지은 죄를 인하여 회개하며 울고, 울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울으신 적이 성경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소들은 ①새끼들을 집에다 떼어놓았습니다. ②한 번도 끌어보지 않던 수레를 끌고 갑니다. ③쉬지도 못하고 앞만 보고 앞날을 알 수 없이 가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이 소들은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떼어놓고 자신들만 천성 길을 가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실 때 통곡하며 뒤따라오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고 하셨습니다.
운다는 것은 간구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우는 것으로서 의사 표시를 합니다. 배가 고파 울고, 몸이 아파 울고, 어디가 불편해서 울고, 똥오줌 싸고도 울고, 이렇듯 우리 성도들의 울음은 곳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가 없으면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눈이 상하도록 울고, 히스기야는 죽음의 예고를 듣고 심히 통곡할 때 그의 간구와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셋째 :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14절)
힘들여 쉬지도 못하고 애써 수레를 끌고 오니까.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서 각을 떠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마지막 신앙의 피날레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직 주님 앞에 무익한 종들입니다.
종들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 영광은 주인에게 돌아가고 칭찬도 듣지 못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들 바로 나의 모습은 외형적인 것에 치우쳤고, 남에게 드러나기를 원했고, 주님이 알아주기보다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며, 하늘나라의 상급보다는 세상의 칭찬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참 성도는 이 소와 같이 마지막 희생의 제물이 될 때까지 주어진 사명을 다한 후에 “주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 앞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앞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신앙은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희생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