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
향은 임 경자
시내버스 옆면에 써있는 ‘황금곶간’이라는 광고문은 내 고향 쌀 브랜드이다. 그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잠시나마 어릴 적 생각에 젖게 된다.
내가 자란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다. 마을 앞에는 보청천 냇물이 흐르며 신작로 건너는 넓게 펼쳐진 비옥한 들판이 있는 마을이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15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많은 가족들로 늘 시끌벅적하고 고샅에는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넉넉한 살림을 하는 집은 손가락 꼽을 정도였고 거의 모든 집은 소작농으로 늘 배고프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했던 시절이었다. 대가족에 빈농으로 사는 살림살이로 가슴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하루 세 끼를 다 먹는 것은 사치로 여겨야 할 정도였으니 그 배고픈 설움을 어디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초등학교를 나오거나 아니면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집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가서 한 푼 벌이라도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태려는 처녀들, 총각들이 늘어 삶의 고통과 어려움의 시대였다. 그 때 그 시절에는 그래도 깊은 정이 오고 가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어서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속담처럼 형제간에 또는 이웃 간에 나누는 인심은 후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햇보리가 나오는 시기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나긴 봄날을 애타게 기다려야한다는 뜻에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왔다.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서럽다.’고 한 옛 어른들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절미운동은 좀 더 잘 살아보자고 밥 지을 때마다 ‘한 줌 쌀을 아껴보자.’는 운동이었다. 나 또한 부뚜막 위에 항아리를 놓아두고 밥 지을 때 마다 한 줌 쌀을 항아리에 담아 놓는 습관이 있었다. 가을이면 벼를 베고 난 후에 학교에서도 벼이삭 줍기를 하여 어려운 가정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새마을 사업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열심히 일을 했다. 새마을 운동 모범 마을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견학을 와서 배워가는 선진 마을이 되었으니 그로 인하여 부자 마을이 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 된 하루가 우리 국민의 부지런함과 지혜로운 국민성을 일깨워 풍요로운 삶으로 가꾸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는 시집와서 살림날 때 숟가락 두 개, 밥그릇 두벌을 가지고 신접살림을 차리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 꽁보리밥을 별로 좋아하
지 않으신다. 젊은 날 너무 많이 잡수셨기에 싫다고 하신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기가 힘드셨기에 알뜰살뜰 모아 저축을 하여 마당 넓이 정도 되는 논을 사서 농사를 지어 양식을 해결하셨단다. 이러다 보니 살림이 늘어나고 저축이 되어 해마다 땅을 사는 재미로 사셨다.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신 아버지는 새마을 운동으로 공무에 항상 분주하셨다.
집안일은 어머니 혼자서 안팎일을 다 처리 해야만 하기에 이른 봄이 되면 볍씨 담그는 일에서부터 늦은 가을걷이가 끝날 때 까지 한시도 손을 놓지 않으셨다. 봄에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벼를 벤 논에 보리를 심어 이모작 농사를 지었다.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 되면 우리 집 앞마당은 온갖 곡식들로 가득 찼다. 타작을 하고 나면 햇빛 좋은 가을볕에 며칠을 두고 벼를 말린다. 이렇게 말린 벼를 방앗간에 실고 가서 찧어다 광속에 큰항아리마다 가득히 넣어두면 그것만 바라봐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늘 곳간을 가득 채워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며 항아리마다 양식은 넉넉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삽작을 열고 바삐 드나들었다. “쌀이나 보리쌀 좀 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어머니는 마다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었다. 따뜻한 손길로 가득 찼던 어머니의 넉넉했던 그 곳간이 그립다.
오늘날에는 종자개량, 농업의 과학화, 기계화, 영농법의 발달로 농사를 지으
니 풍요로운 농촌 생활이 되었다. 각종 농산물은 브랜드화 해서 내 고장을 대표하는 작목반 활동으로 잘사는 마을, 희망찬 농촌으로 기름진 쌀이 가득 들어있는 풍족한 곳간이 되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하다. 서로서로 보듬고 살피는 넉넉한 인심으로 적선하며 살아야겠다.
내 고향 보은! 報 (갚을보) 恩 (은혜은). 은혜를 갚으며 살라는 뜻이 담겨있
기에 고향 지명의 의미를 오늘도 다시금 가슴에 새겨본다.
첫댓글
임선생님의 어머님은'
일찌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당신의 곳간을 활짝 열으셨기에
선생님 또한 어머님을 닮으셔서 늘 마음이 넉넉하신 것같아요.
좋은 글 감사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