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똥 이야기
문명이란 더럽지 않은 것을 더럽게 만드는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하얀 양변기 속에 다소 곳이 잠긴 똥을 내려다보면서 똥이 더럽다는 인식이 어디에서부터 연원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똥은 아득한 원시시절부터 귀한 대접을 받던 물건이었다. 똥통에 빠지거나 똥물을 뒤집어 쓴 꿈을 꾸면 틀림없이 다음날 큰 횡재를 한다고 여길 정도로 보물 취급을 받았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날이 납작한 호미와 삼태기를 들고 똥을 주우러 다니셨다. 가축조차도 자유분방하게 풀어 놓고 키웠으니 개나 소들이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싼 똥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고, 말똥구리가 쇠똥을 경단 비비듯 말아서 굴리고 가는 모습을 어디서든지 쉽게 볼 수 가 있었다. 그 때는 나라에 비료 공장 하나 없었던 시절이었다. 외양간도 단순히 소의 잠자리만이 아니었다. 겨우내 이부자리로 깔아준 보릿짚과 볏짚 같은 것들이 소의 똥오줌에 잘 발효되어 거름이 되었다. 외양간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고 한쪽 구석에다 구덩이를 파두면 적당량의 오줌이 검불더미에 쓰며들어 퇴비로 발효되면서 저절로 바닥이 따뜻하게 되고 남은 오줌은 구덩이로 모여져서 물 비료가 되었다. 한 겨울에도 거름을 뒤집으면 속에서는 허연 김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소는 한번 오줌을 누면 양동이 하나로는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누는데 외양간은 바로 비료공장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길을 가다가도 뒤가 마려우면 두 다리를 비틀며 항문을 조이고 참았다가 꼭 우리 밭고랑에 가서 그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전하는데 그 밭에서 키운 곡식을 먹고 자란 손자의 육신이니 내 몸 또한 할머니의 그 성스럽기조차 한 똥을 자양분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그때는 대소변을 보는 곳도 지금처럼 고상한 말로 화장실이라 하지 않고 정낭, 측간 또는 통시라고 불렀다. 나는 그 중에서도 통시(通屎)란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기가 막혀 죽었거나, 속이 터져 죽었거나, 억울해서 죽었거나, 화가 나서 죽었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지경을 당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통(通)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지 말의 고상유무에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은 오두막집에 살수가 있어도 사람은 속 좁은 사람하고는 같이 살지 못한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상고해 보면 예나 제나 속이 좁아서 통하기 어려운 사람이 가장 큰 애물단지라는 소리 일시 분명하니 많은 이름들 중에서 통시란 이름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해보는 데, 세상의 그 어떤 쾌감도 단 번에 똥이 쑥 빠져나갈 때의 상쾌한 기분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통시에 앉아서 그런 쾌변을 눠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형통한 쾌락의 맛을 모를 것이다.
통시는 대게 땅에다가 초등학생 키 높이만큼의 구덩이를 파고 주둥이가 깨진 독 같은 것을 묻은 후 그 위에다가 굵은 통나무를 엮어서 걸치고 이엉을 엮어서 외부와 차단하면 통시가 되었는데 대문 삽짝 옆이나 아래 체 처마 밑에다 통시를 지었다. 통시를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통시가 가득차면 똥장군에다가 똥을 퍼 담아가서 밭에다 뿌리는데 통시를 친 일꾼이 생각이 모자라면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의 간격을 어른 가랑이 크기에 맞춰서 놓는지라, 그리하면 다리가 짧은 아이들이 볼일을 보다가 실수로 빠지기도 하였고, 또 똥물을 깨끗이 퍼내지 않고 남겨둘 경우는 똥 덩어리가 떨어질 때마다 똥물이 위로 튀어 올라왔다. 그런 날은 똥 한 덩어리 누고 엉덩이 한번 치켜들고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엉덩이춤을 추어야 했고 그 타이밍이 절묘하지 못하면 똥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내가 그때의 일을 이렇게 세밀하게 상고할 수 있음도 머리에 똥만 가득한 똥 푼 사람의 아둔함에 대한 원망이 컸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통시에는 헌 책이나 다 쓴 공책 같은 것을 걸어두고는 볼일을 보고나서 한 장씩 쭉 찢어서 사용하였는데 그마저도 없는 날이면 굴러다니는 감나무 잎사귀를 이용하여 뒤를 닦기도 했다. 감잎은 앞면이 엉덩이에 닿으면 차갑고 미끄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넓고 두터운 잎인지라 지푸라기에 비해 따갑지 않고 그런대로 잘 닦였다. 그때 유한킴벌리란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워져 두루마리 휴지를 만든다고 방송에 나왔는데 나는 세상에 어느 한심한 놈이 있어서 똥 닦는 휴지를 돈을 주고 사 쓸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통시에 가기가 무서운 밤이면 아이들은 두엄 옆에서 똥을 누곤 하였다. 그럴 때는 퇴비더미 옆에 누워서 되새김질 하는 소가 지킴이가 되어 주었고 밤하늘의 별들이 친구가 되어 똥도 같이 누자며 땅으로 떨어졌는데 아이들은 그걸 별똥별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 시절은 해가 저물면 방마다 요강을 씻어서 들여다 주는 게 갓 시집온 며느리의 중요한 임무였으며 아침이 되면 할아버지, 아들, 손자. 며느리의 오줌이 몽땅 한 곳으로 모아져서 남새밭에 뿌려졌다. 그 오줌 똥물을 먹고 자란 상추며 고추며 가지들이 가족들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었으니 명실상부하게 똥을 통해서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하늘과 땅과 키우는 짐승까지도 하나로 연대해지는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똥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지 않도록 똥에 대한 교육도 단단히 시켰다. 밥 먹다가도 아이가 똥을 싸면 밥상머리에서 그대로 마당에 뛰노는 ‘워리’를 불러서 사타구니를 핥도록 시켰으니 그건 요즘 시중에 나오는 최첨단 물휴지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가끔씩 짧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다가 일어서지 못하고 통시에 빠지는 아이가 나오면 골프 치다가 홀인원을 한 것 마냥 ‘똥떡’을 해서 ‘복떡’이라며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돌렸는데, 복을 많이 받겠다고 서로 똥떡을 먹으려고 다투기 까지 하였으니 누가 낸 지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똥을 신(神)으로 대접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귀하디귀하신 똥이 제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문명이 가져온 함정에 빠져서 저처럼 한 바가지 물과 함께 어두운 하수구로 떠내려갈 운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이나 똥이나 심지어는 신(神)까지도 변기 같은 문명의 틀에 갇혀버리면 제 역할을 잊어버리고는 죄다 “더러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는데 오늘 밤에 똥통에 푹 빠지는 꿈이라도 꾸게 되면 이제까지 한 번도 산 적이 없는 로또복권이라도 한번 사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똥을 이렇게 칭찬해 줬으니 똥 신이 내게 축복을 내리실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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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정임표 관세사는 우연히 옛 스승을 만나 수필에 입문 했다. <문학예술>, <에세이 21>로 등단하여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사무국장,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대구제일관세사무소를 경영하고 있으며 한국관세사회 감사의 직을 맡아 있다. 수필집으로 <<꼴찌로 달리기>>, <<생각 속에 갇힌 인간>>이 있으며 문학이 자신을 변화 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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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글을 읽어보면 우리시절의 시골 생활 이야기, 공감이 갈 것이오
@윤수석 통시에 가면 뒷처리 할게 마땅찮아 계절따라 나는 큰 잎사귀를 애용했지요 특히 여름철엔 호박잎 칡잎 기타 잎 넓은 풀들 칡잎은 조금 억세고 호박잎은 크고 부드럽긴한데 까끌거려서ㅎㅎ 그리고 나는 겨울엔 담배잎? 배추잎? 말린것을 이용했는데? 장손자의 특권...ㅎㅎ,먹는 것인인데 삼촌들은 엄두도 못내었지요 ㅋㅋㅋ 그래도 그 시절엔 항문이 건강하고 깨끗했지요 그 풀잎들이 약이 된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