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교의 역사
징검다리와 섭다리
아주오래된 내가 네다섯살때의 기억에 여물리와 용두리간 개울에 징검다리라고 커다란 둥글고 넓적한 돌로 간격이 일정하게 일렬로 정열이 잘이루어저 돌다리를 만들어놓고 양쪽 마을 사람들이 물위 징검다리를 걸으면서 왕내하였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보인다,
한여름 장마가지면 시뻘건 흙탕물이 범람하여 징검다리를 휩쓸고 지나지만 이곳은 발원지가 12키로라 비가그치면 곧 원상 복구가되여 여전히 사람들은 왕래 할 수가있었다.
세월은 흘러 굴업과 단월 장꾼들에 이동등 인구가 증가하고 시장이 번성 활성화되면서, 어느새 섭다리로 변신
하지만 섭다리는 미관상 보기좋고 통행에 편하지만 불편한점이많은 약점이있다.
섭다리는 개울건너 여물리 마을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관계로 이른봄 건기에 여물리마을 사람들만 부역으로 산에가서 받침목감과 섯가래감과 소나무가지 울섭을 마련하여 약1.5미터 높이로 목다리를 완성 최종 흙으로 포장, 2,3일 동안 온마을 사람들에 노력봉사하면 보기좋은 섭다리가 완성되여 편하게 사용할수있었다.
하지만 우마차는 개울바닥으로 통행해야하고 소이동은 중량 때문에 섭다리를 통과할수가없어 소는 개울 바닥으로 고삐를 잡은 주인은 섭다리로 통과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상류에 화전민이 많이 살고있어 산림이 황폐화되여 비가오면 홍수로 변해 수량이 많음으로 섭다리는 맥을 못추고 유실되기 일수라 매년 여물리 주민들이 감당하기 힘들어 여물리 주민들에 원성으로 정부에서 양회 다리라고 자동차 한 대 통과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았으나 다리발이 부실하여 65년 대홍수에 다리가 주저않는 바람에 애꿎게도 용두시장 둑이 터저 용두시장 주민은 모두 물난리를 만나 용두시장을 옮기는 원인이 돠였다.
이런 부실한 교량을 보고있던 여물리 주민중 서울에서 성공한 김선배씨가 자청하여 튼튼한 교량을 건설하였으나 역씨 신통치않아 정부에서 현재 사용하고있는 2차선 교량을건설하고 틈틈이 다리발, 나간대등을 보수하며 사용하고 있다,
덧붙여 정부에서는 새 교량을 건설하면서 해가지면 오색 등불이 들어어와 춤을 추듯 움직이는 야간에 여물교 모습은 다른곳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 장관을 이룬다. 마치 움직이는 교량으로 착각이 들기도?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