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성시(悲情城市, 1989) : 비극의 가족사가 보여주는 현대사의 굴곡
허우 샤오시엔 감독
<줄거리>
51년간의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 1945년부터 장개석의 국민당이 타이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1949년까지 4년 동안을 임가네 4형제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해방된 대만. 식당을 경영하는 임아록에게는 장사를 하는 문웅(잭카오), 일본 군의관으로 출정해 행방불명된 문상, 불량배가 된 문량, 청각장애를 가진 문청(양조위) 네 아들이 있다. 문청은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지식인 청년 오관영과 함께 살고 있다. 관영과 그 친구들은 부패한 나라를 걱정하며 개혁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문청은 관영의 누이 관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 사이 문량과 문웅은 상해에 본거지를 둔 범죄 조직의 유혹으로 배를 제공하고 밀수에 손을 댄다. 그러나 상해 조직은 문량이 일본에 징용돼서 일했던 것을 빌미로 문량과 문웅을 전범으로 당국에 고발하고, 이권을 빼앗아 버린다. 문량은 곧 석방되지만, 폐인이 된다.
한편 2ㆍ28사건이 터지자 문청의 친구들은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문청도 옥살이를 한다. 옥에서 나온 문청은 관영의 정부 대항조직에 참여하려 하나 관영은 그에게 관미를 부탁한다. 이즈음 제일 큰형 문웅이 상해 조직과의 혈전에서 죽자 임씨 집안의 아들은 문청만 남게 된다. 결국 문청은 관미와 결혼식을 올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까지 낳는다. 그러나 문청도 역시 체포된다.
ㅡ이재훈
<대만의 2ㆍ28사건>
대만의 2ㆍ28사건은 1947년 당시 타이페이 시에서 전매국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팔던 한 좌판상 여인을 과잉단속하는 과정에서 총격이 발생해 대만인 한 명이 사망함으로써 촉발되었으며, 대만 본토 출신인 ‘대만인(本省人)’과 대륙에서 온 이른바 ‘외성인(外省人)’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됐다.
중국 본토의 남동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타이완 섬에는 17세기 중반부터 중국 대륙 본토의 한족(漢族)이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부터 국민당은 국부군을 대만에 파견하는 등 인수 작업을 실시하였고, 1949년 중화민국을 세우기까지 대륙의 중국인들이 대만으로 건너왔다.
이에 따라 대만의 한족(漢族)은 중국 대륙에서 조기 이주해온 본성인과 1949년 전후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외성인으로 나뉜다. 본성인은 전인구의 85%, 외성인은 13%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둘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이 소위 2ㆍ28사건이다.
2ㆍ28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역 근처에서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고 있던 여성을 본토 출신의 전매국 단속반원이 구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나왔다. 사태는 일거에 확대돼 28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전 섬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당황한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을 대만으로 불러들여 3월 9일부터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 등 무고한 대만 원주민들이 무참히 죽었고 현지의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인 언론인들도 체포되거나 처형됐다. 정부 발표로만 2만8,000여 명이라는 희생자를 냈다.
이 사건은 대만 토박이들과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뒤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한 뒤 대만으로 피란한 중국인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정부의 군사 독재는 1949년에서 1987년까지의 계엄령으로 이어졌으며, ‘백색공포’로 알려진 40년의 탄압정치로 이어졌다. 1987년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에는 이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8년 리덩후이 정권이 출범한 후 2ㆍ28사건의 진상조사가 진행되었다. 4년간에 걸친 진상조사 끝에 나온 공식보고서에서는 당시 사망자가 본토 이주자 700~800명을 포함해 1만 8,000~2만 8,000명이라고 발표했다.
1995년에 2월 28일에는 사건 발생 48년 만에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수반으로는 처음으로 희생자 가족에 사죄의 뜻을 표시하는 한편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하고 사건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이날 대만 타이베이 공원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결국 1997년 대만정부는 사건 50주년을 맞아 과거 정권의 잘못에 대해 정부의 공식사과를 발표하고 2ㆍ28기념탑과 기념관을 건립했다.
<관람평>
1989년작 대만 영화 <비정성시>를 다시 본다.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2천년대 거장의 하나인 허우 샤오시엔 감독? 세계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 줄거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에 쏟아지는 기존의 찬사나 몰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자잘한 분석은 이제 그만, 시간이 없다. <비정성시>가 주는 마음의 칼을 찾아라!
이 작품은 1945년에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1948년에 중국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에 정부를 세웠다는 자막으로 문을 닫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역사로 문을 연다. 우리 역사를 연상시키는 대만 현대사가, 제주 4ㆍ3항쟁을 연상시키는 2ㆍ28항쟁의 추이가 배경에 깔려 있다. 깔려 있다고? <비정성시>는 가족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문 안에는 인간의, 한 가족의 삶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문씨 집안 형제의 3대에 걸친 슬프고도 꿋꿋한 가족사가 서 있다. <비정성시>의 역사성과 생명력은 역사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그리지 않고, 먼저 인간을 묘사하면서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 있다.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도 호흡이 긴 카메라 리듬, 생략을 활용한 심리 묘사와 사건 전개, 음향 방식은 자신이 체험한 대지의 인간을 온몸으로 기록하려는 감독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다. 진정한 인간주의는 역사성, 서정성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 <비정성시>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감동이요 가르침이다.
필자와 <비정성시>의 인연은 깊은 셈이다. 영화를 본 감동 때문에 대만을 여행했고, 허우 샤오시엔을 인터뷰했으며, 급기야 대만 영화에 관한 방송 다큐멘터리까지 만들게 되다니……. 대만 영화인들 가운데에는 허우 샤오이엔과 비슷한 ‘붕어빵’이 많다. 그 사람들은 틈만 나면 가족을, 사람을, 역사를 말한다.
게다가 그들의 대표작들도 어딘가 허우 샤오시엔과 비슷하다. 주제는 물론 긴 호흡에 관조적인 카메라 시선 등 스타일까지 닮았다. 그래서 ‘장사’가 안 된다는 점까지도. 하지만 그들은 허우 샤오시엔의 붕어빵이 아니었다. 허우 샤오시엔이야말로 대만인들의 삶과 역사 때문에 생겨난 붕어빵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풀지 못한 과거의 숙제, 평생 끌고 가야 할 희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힘이 있다. 서구의 고전적 영화형식과 대등하게 보편적 영화문법의 하나로 자리잡은 <비정성시>의 영화언어로 허우 샤오시엔과는 다른 개인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들은 <비정성시>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 우리도 이제는 허우 샤오시엔을 만날 필요가 없다! <비정성시>하는 성배를 찾아 떠날 이유도 없다. 이 땅 안에, 우리 마음 안에 허우 샤오시엔이 있고, <비정성시>가 있다! <비정성시>는 바로 시선의 에너지요 힘이다. 자기가 선 땅을, 가족을, 자연을, 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응시하느냐가 미학이다. 자기가 살고 보고 느낀 것만큼만 보고 느끼고 만들 수 있다던가. <비정성시>는 우리에게 절규한다. 두 발로 대지를 굳게 밟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응시하라고. 안이한 영화 습관, 잘못된 인생관을 잘라버릴 자객의 칼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비수처럼 박히는 불가의 화두, 마음이 거세된 모든 것은 허상이다. 허우 샤오시엔을 만나면 허우 샤오시엔을 죽이리라. <비정성시>를 만나면 <비정성시>를 죽이리라. 아니, 영화를 만나면 영화를 죽여라!
ㅡ조재홍




















출처: 이승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