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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신영희)공 묘소 전경
위치: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산57
사진설명:아래-진사공 신영희 묘
중간-문희공의 배 정부인 묘
위-문희공 대제학 신석조 묘
바로 위 산소는 진사공의 할머니산소이고 제일 위 산소는 할아버지 산소이다
이 사진은 내가 오래전에 촬영했던 사진인데 2005년~2006년 사이에 진사공의 문인석과 할머니 정부인 안정라씨 문인석을 도난 당했다
진사공의 문인석은 볼수록 특이하다
관복에 관모를 쓰고 있는것이 아니라
선비의 복장이 아닐까 생각되며 섬세한 조각상은 일반 문인석과 차원이 다르다
할머니 정부인 문인석(위 사진의 중간 문인석)도 내 기억에 약간
장군석 같기도 했고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두분의 석물이 도난당하여 산소를 찾을때마다 횡한 묘역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무절공 종중에서 석물을 찾기위한 노력을 하고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꼭 찾아 제자리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묘역을 지켜주기를 기원해 본다
정부인의 묘와 위쪽은 문희공 묘
아래부터 진사공 신영희 묘- 정부인 안정라씨 묘 - 문희공 신석조 묘
진사공 신영희 묘의 8각상석
지금은 진사공의 신도비만 남아있고
문인석이 사라진 횡한 모습이다
할아버지 문희공 산소의 문인석은 오른쪽 문인석의 관모가 파손되어서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할수 있었던것 같다
오른쪽 문인석
왼쪽 문인석
정부인 안정라씨 묘
위 쪽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
신영희는 누구인가?
연산군 시대를 살아야했던 불운의 역정이 그려집니다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벼슬길을 포기하고 서울을 떠나 멀리 충남 직산으로 내려가 안정 이라는 당을짓고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을 깊이 강마하였다 합니다
그 당시 안정공의 학식이 얼마나 깊고 뛰어났는지 전국의 학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그 평을 보면 진사공의 명성이 실감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종인님들과 이렇게 훌륭한 분의 발자취를 함께 돌아보는 시간 갖어보면 좋을것 같아 사진들과 제가 아는 진사공의 발자취를 올려봅니다
모든 종인님의 건강과 안녕과 행복을 비옵니다
♧♧그 당시 진사공의 평들♧♧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
다.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문장과 행의(行義)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었다.
♧.김종직이 일찍이 공의 남정시
(南征 詩)를 보고, “이 시는 마땅히
청산 백석(靑山白石) 사이에서 읊어야
될 것이라.” 하였다.
♧.신영희(辛永禧)가 李白과 陶淵明의
풍치를 이어 탈속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다.
♧.학덕과 문장으로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신영희(辛永禧)
생년1442년(세종 24년)
몰년1511년(중종 6년)
본관영산(靈山)
저서(작품)사우언행록|안정실기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덕우(德優), 호는 안정(安亭). 서울 출생. 참판 석조(碩祖)의 손자이며, 현감 수담(壽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감찰 맹렴(孟廉)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이원(李黿) 등과 교우를 맺고 학문을 깊이 강마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가을 승려의 도첩(度牒)을 허여하는 왕의 교지가 내리자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제진(製進)하였다.
그뒤 사림으로 자처하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497년(연산군 3) 김굉필로부터 시국이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고 이내 직산(稷山)에 은둔,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학덕과 문장으로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저술로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과 약간의 시문이 『안정실기(安亭實紀)』에 실려 있다.
신영희(辛永禧)
1442(세종 24) ∼ 1511(중종 6).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영산 ( 靈山 ). 자는 덕우(德優), 호는 안정(安亭). 시호는 숙헌(肅憲)이다.서울 출생. 참판 석조(碩祖)의 손자이며, 현감 수담(壽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감찰 맹렴(孟廉)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굉필 ( 金宏弼 ) · 정여창 ( 鄭汝昌 ) · 남효온 ( 南孝溫 ) · 이원(李 復 ) 등과 교우를 맺고 학문을 깊이 강마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가을 승려의 도첩(度牒)을 왕의 교지가 내리자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제진(製進)하였다.
그뒤 사림으로 자처하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497년(연산군 3) 김굉필로부터 시국이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고 이내 직산 ( 稷山 )에 은둔,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학덕과 문장으로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저술로 〈 사우언행록 師友言行錄 〉 과 약간의 시문이 ≪ 안정실기 安亭實紀 ≫ 에 실려 있다.
신영희(辛永禧)
신영희는 자는 덕우(德優)이며, 호는 안정(安亭)이요,시호는 숙헌(肅憲)이다.본관은 영월(寧越)이다. 대제학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계묘년에 진사과에 올랐으나 과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 호방하여 구속을 받지 않고 대절이 있어서 세속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선비의 기개를 보면 옛날 동한(東漢) 시대 말기와 같으니 멀지 않은 시일에 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속히 숨으라.” 하였다.공은 갑자기 직산(稷山)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들과 함께 죽림우사(竹林羽士)라 하였는데 문장과 행의(行義)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었다. 작은 당을 지어 당 이름을 안정(安亭)이라 하였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산장을 지나가다가 시를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노인이라 하니 어찌 알지 못하랴 / 村號老人那不識
동네 이름을 빈사라 하니 이를 좋아해서 온다 / 里名貧士愛玆來
나뭇군 아이는 선비의 풍류가 멀어져 감을 알지 못하지만 / 樵兒不識風流遠
오히려 사산 별곡만은 부르고 있네 별곡(別曲)은 공이 지은 것이다 / 猶唱蛇山別曲回
하였으며, 김종직이 일찍이 공의 남정시(南征詩)를 보고, “이 시는 마땅히 청산 백석(靑山白石) 사이에서 읊어야 될 것이라.” 하였다. 《해동잡록》
김굉필이 일찍이 나를 책망하기를, “그대와 벌써 교분을 끊으려고 해도 정리상 차마 끊지 못했다.”고 하므로 내가 물으니, “그대가 아니었다면 능히 결단하였을 것이다.” 하였다.다시 물으니,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百源) 무풍정(茂豊正)과 정중(正中) 수천정(秀泉正)과 문병(文炳) 허반(許磐)은 모두 진(晋) 나라 선비들의 풍습이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신영희(申永禧)가 지은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김굉필이 신영희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가 멀지 않은 시일에 일어날 것이니, 나같은 사람은 진실로 면할 수 없지마는 그대는 멀리 피하라.” 하고 드디어 서로 교분을 끊었다. 남효온(南孝溫)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효온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 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굉필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굉필이 영희를 끊으려고 한 것과 효온이 굉필을 끊으려고 한 것은 세상 일이 어지럽고 위태한 관계로 철인(哲人)이 아니면 능히 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田家 [전가] 辛永禧[신영희]
打麥聲高酒滿盆[타맥성고주만분] : 보리 타작 소리 높고 동이에 술은 가득한데
老人無事臥荒村[노인무사와황촌] : 늙은이는 일이 없어 쓸쓸한 마을에 누워 있네.
呼兒室下遮風慢[호아실하차풍만] : 아이 불러 집 아래 오만한 바람를 차단함은
恐擾新移紫竹根[공우신이자죽근] : 새로 옮긴 자죽의 뿌리가 흔들릴까 두려워서라네.
擾[우] : 어지러울 ,시끄러울 '요' 움직일 '우'
紫竹[자죽] : 대나무의 일종 (마디 사이 겉껍질에 자흑색의 반점이 있음).
辛永禧[신영희] : 자는 德優[덕우]. 호는 安亭[안정]. 영산사람.
辛永禧詩云。打麥聲高酒滿盆。老人無事臥荒村。呼童室下遮風慢。恐擾新移紫竹根。按進士辛永禧號安亭
次韻元冲秋興(차운원충추흥)-辛永禧(신영희)
원충의 추흥의 운을 빌려-辛永禧(신영희)
斗覺遷時序(두각천시서) : 갑자기 계절의 변화를 깨닫나니
西風病葉驚(서풍병엽경) : 서쪽 바람에 병든 나뭇잎이 놀라는구나.
霜橫陂水素(상횡피수소) : 서리는 산비탈 물의 흰 빛에 비끼어 있고
天入草亭淸(천입초정청) : 하늘빛은 숲 풀 속 정자의 맑음에 스며든다.
詩遣幽懷就(시견유회취) : 시는 그윽한 가슴 속 회포를 좇아 보내고
愁仍世事嬰(수잉세사영) : 시름은 곧 세상일의 얽힘 때문에 생기느니라.
長甁賖薄酒(장병사박주) : 오랜 병에 외상으로 막걸리를 사와
寂寞爲殘生(적막위잔생) : 쓸쓸한 그대로 남은 생을 위로하노라.
신영희(辛永禧)1442,세종24∼1511,중종6)는 조선 전기의 학자다. 자는 덕우(德優)이고 호는 안정(安亭)이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본관은 영산(靈山)으로 한양 출신이다. 참판 석조(碩祖)의 손자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승려의 도첩(度牒)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그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497년(연산3) 김굉필로부터 시국이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충청도 직산(稷山)에 안정(安亭)을 짓고 학문과 시문을 즐겼다.
일이 있어 (即事)
보리타작 소리 높고 술통에 술이 가득한데
늙은이는 일이 없어 빈 마을에 누워있네.
방 아래 바람막이 휘장을 아이 불러 내리나니
새로 옮긴 자주 대나무 뿌리 흔들릴까 두렵네.
打麥聲髙酒滿盆 老人無事臥荒村 呼兒室下遮風幔 恐擾新移紫竹根 (箕雅 卷3)
그는 당시에 시명(詩名)이 있었고 성현(成俔)은 그의 시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그는 남효온과 교유했는데 그의 시가 청신(淸新)하여 깨끗하다고 했다.(權鼈, 海東雜錄 3. 詩名日播聞 成慵齋以其詩出入蘇黃 安亭與秋江交遊 其詩淸新洒落.) 이 시는 한가한 전원의 은거생활을 읊은 칠언절구로 원(元)운이다. 기구는 당시의 농촌 상황을 보여준다. 때는 초여름 보리타작 철이고 술통에 술이 가득하다는 말로 넉넉한 농촌 형편을 알려주고 있다. 승구는 자신의 사정이다. 충청도 직산에 은거하여 안정(安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농사철이라 바쁜 마을 사람들은 들에 나가고 늙은 시인만이 홀로 누웠다고 했다. 세상사에 오불관언하는 꿋꿋한 자세이기도 하다. 전구는 아이에게 일을 시키는 대목인데,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내면적 가치로 시상을 전환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랑방 곁에 바람막이 휘장을 쳐서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막으라고 아이를 부르는 것이다. 결구는 그가 지키려는 가치를 상징하는 사물을 보여준다. 마디 사이에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를 옮겨 심어놓고 그 뿌리가 바람에 흔들릴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사군자의 표상이고 험한 세상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는 지절(志節)의 상징이다
문집(文集)
중국 사람은 자기가 지은 문장을 곧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펴는데, 아마 일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조(前朝 고려조)의 이규보(李奎報)와 본조의 서거정(徐居正)ㆍ강희맹(姜希孟)의 문집도 그들의 생시에 출간하였다. 《지봉유설》
○ 강희맹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고, 김수녕(金壽寧)과 함께 점(點)을 치고 뭉개고 보태고 덜고 하여 남이 보기 좋게 하여, 선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한다.신영희(辛永禧)의 집에 그의 조부 문희공 석조(文禧公碩祖)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집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가 비록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家集)》에 기재된 것에는 하나도 전할 만한 것이 없네. 일찍이 한 문생(門生)에 대한 만시로서,
32세에 죽었구나 / 三十二而卒
불행히도 안회와 같구려 / 不幸同顔回
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하겠나.” 하였다고 한다. 남들은 이것을 불효라고 하나 나는 효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조부의 문예에 대해 곧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거짓을 꾸민 붓으로 선조를 높인들 선조의 마음이 저승에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서포집 (西浦集)
西浦 郭說의 문집. 7권 4책.
간략해제 8대손 昌?이 1900년에 편집? 간행한 목활자본으로? 권두에 崔益鉉의 서문과 권말에 昌?의 발문이 있다. 권1에 雜著 12편? 권2에 五言古詩 40수? 六言古詩 4수? 七言古詩 12수? 권3에 五言絶句 38수? 五言四律 155수? 권4에 七言絶句 317수? 권5에 七言四律 218수? 권6? 7에 <日錄>이 실려 있다. 권말의 부록에는 <行狀>·<墓碣銘>·<壽契帖>·<松泉建院時遺士林書>·<景寒齋郭公行狀>·<庚午譜釐整記>·<譜疑辨> 등이 실려 있다. <日錄>은 잡록 형식으로 저자 자신의 시문 및 견문? 선현의 사적? 조상의 世系와 世敎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권6은 선현들의 사적과 世系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고? 권7은 자신들의 시문 및 詩話와 野談 등을 싣고 있다. <日錄>은 제목 없이 항을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대부분 詩의 재인용이거나 관련 詩話이다. 주로 조선의 문인에 대한 내용이지만 중국의 사신 및 문인도 망라하고 있으며 시만 수록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외에 野談 및 ≪左傳≫ 등 서적에 대한 내용도 있다.
편저자 곽열 (郭說)
저자개요 1548-1630 (명종3-인조8)字: 夢得? 號: 西浦? 本貫: 淸州? 父: 懷英? 母: 靈山 辛氏(貴貞의 딸)
저자내용 閔純(1519-1591)? 成守琛(1493-1564)? 成渾(1535-1598)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1589년(선조 22) 增廣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좌랑? 호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外戚 金自點의 專橫을 極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稱病하고 原州로 退隱하였고? 후에 吏曹判書에 追贈되었다. 洪履祥? 洪可臣 등과 교유하였고 金長生 등과 서신왕래가 많았다. 그의 시는 典雅하다는 평을 받았다. 詩篇 중에서 杜甫? 成以敏? 趙翊 등의 시에 次韻한 것이 많다. 百家書에 두루 능통했으며 필법은 松雪體를 본받았다고 한다.
貢院唱和詩序 1451년 여러 관료들을 나누어 酒果를 베풀어 화창하게 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 모였던 인물은 모두 14명으로 禮曹에는 河演? 朴彭年? 신석조(辛碩祖) 申叔舟? 成三問? 徐居正이 있었고 成均館에는 李思哲? 崔德之? 柳誠源? 姜希孟? 河緯地가? 漢城府에는 金禮蒙? 李石亨? 李塏가 모여 있었다. 박팽년이 서문을 쓰고 각기 창화시를 남겼는데 30년 뒤 작자는 이를 기념하여 추록시를 덧붙였다.
後序 或者와의 문답을 통해 日錄의 저술 의도를 밝힌 글이다. 권6의 日錄이 前賢? 名公의 事蹟과 先代 世系의 傳 등 世敎에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았던 반면 권7은 詩文과 滑稽? 戱談이 많아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근심을 떨쳐 버리려고 글을 썼다고 밝혔다. 註에는 前人들의 글을 <日錄>에 수록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先人들의 글이 泯滅될까 염려한 결과 수록했으며 先代 世系와 교유한 사적을 훗날 자손들이 보고 경계로 삼을 것을 당부한다고 하였다. 서문의 뒤에는 1619년에 쓴 글이 附記되어 있다. 권6에 수록된 先賢의 저작으로 외가 7대조인 武節 신유정(辛有定)의 詩와 신석조(辛碩祖)가 참여한 <院唱和詩>? 신영희(辛永禧)의 遺稿는 모두 자신의 집에 있던 것으로 泯滅될까 염려하여 추록하였으며 世系와 交遊의 事蹟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남겨주겠다는 저술의도를 명시하였다.
貢院唱和詩序 1451년 여러 관료들을 나누어 酒果를 베풀어 화창하게 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 모였던 인물은 모두 14명으로 禮曹에는 河演? 朴彭年? 신석조(辛碩祖)? 申叔舟? 成三問? 徐居正이 있었고 成均館에는 李思哲? 崔德之? 柳誠源? 姜希孟? 河緯地가? 漢城府에는 金禮蒙? 李石亨? 李塏가 모여 있었다. 박팽년이 서문을 쓰고 각기 창화시를 남겼는데 30년 뒤 작자는 이를 기념하여 추록시를 덧붙였다.
無題 특별한 제목 없이 앞의 글에 이어 서술한 詩話이다. 조선에 온 중국 사신 倪謙? 張寧? 唐皐史? ?用卿과 창화한 기록이 4개항으로 나뉘어 서술되었고? 세종조 때 왕실에 대한 일화가 3개항에 기록되었다. 문인들에 대한 詩話는 총 62항으로 成三問? 鄭光弼? 兪好仁를 비롯하여 다수의 문인들의 시와 관련 시화가 서술되어 있다. 창화시가 수록된 경우도 있고 許蘭雪軒 및 승려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그 가운데 安亭 신영희(辛永禧) (1454-1511)의 詩 16편을 수록하였는데 원래 곽열의 집에서 100여수를 가지고 있었으나 壬辰亂 때 잃어버리고 남은 약간의 편을 수습하여 기록한다고 하였다. 安亭 신영희(辛永禧)의 문인 張應斗가 1622년에 쓴 <祭安亭先生文>에서는 신영희(辛永禧)가 李白과 陶淵明의 풍치를 이어 탈속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다.
後序 或者와의 문답을 통해 日錄의 저술 의도를 밝힌 글이다. 권6의 日錄이 前賢? 名公의 事蹟과 先代 世系의 傳 등 世敎에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았던 반면 권7은 詩文과 滑稽? 戱談이 많아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근심을 떨쳐 버리려고 글을 썼다고 밝혔다. 註에는 前人들의 글을 <日錄>에 수록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先人들의 글이 泯滅될까 염려한 결과 수록했으며 先代 世系와 교유한 사적을 훗날 자손들이 보고 경계로 삼을 것을 당부한다고 하였다. 서문의 뒤에는 1619년에 쓴 글이 附記되어 있다. 권6에 수록된 先賢의 저작으로 외가 7대조인 武節 신유정(辛有定)의 詩와 신석조(辛碩祖)가 참여한 <院唱和詩>? 신영희(辛永禧)의 遺稿는 모두 자신의 집에 있던 것으로 泯滅될까 염려하여 추록하였으며 世系와 交遊의 事蹟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남겨주겠다는 저술의도를 명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