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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목적지
제목 : 황홀한 여행의 목적지
성경 : 벧전 3:18~22
찬송 : 50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430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 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여행은 설렘을 가지게 합니다. 어디를 여행하려면 여행을 가기 전에 먼저 여행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이미 마음은 여행 목적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렘을 안고 출발하지만, 가다가 뜻밖에 당황스런 일도 만나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일들도 발생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성지 순례를 갔는데 목사님과 사모님 각각 여행 캐리어를 준비하여 출발하였는데 막상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 보니 사모님 가방이 도착하지 않아 당황하였다고 합니다. 두 주간 동안 사모님은 같이 동행한 사모님들의 도움을 받아 즐겁지 않은 성지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돌아올 무렵 이스탄불 공항에서 잊어버린 가방을 찾았는데 식사가 힘들 때 먹으려고 싸갔던 누룽지가 파랗게 곰팡이가 펴서 공항 쓰레기통에 버리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많지 않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기쁨은 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교회가, 세상 속을 지나며 뜻밖의 악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자취를 충실하게 따라 결국 가장 찬란하고 황홀하고 영광스런 목적지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세속적인 복을 받는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만큼 이제부터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총천연색의 화려한 피날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마음속에 세 가지 그림을 떠 올려야 합니다. 첫 번째 그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노아의 방주입니다. 40일 동안 내린 심판의 홍수로 인해 그 물바다 위에 떠 있는 방주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은 세례 받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선한 양심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그림들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노아의 방주 그리고 교회의 세례입니다. 준비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그림을 하나로 포개어 겹쳐 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배경으로 노아의 방주를 띄워 보십시오. 방주는 심판의 물 위를 떠다니면서 결국 마른 땅인 아라랏 산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그 방주 위에는 교회가 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홍수 같은 세례를 지나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배경음악으로 웅장한 심포니가 들립니다.
웅장한 진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노아의 방주와 교회가 다 함께 어둠을 건넙니다. 옥에 있는 영들을 지나, 홍수의 심판을 지나, 세례를 지나, 다 함께 하늘의 하나님 보좌 앞으로 건너갑니다. 이 거대한 출애굽 광경을 보십시오. 드디어 교회가 이 세상을 지나 황홀한 하늘나라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 옛날 노아 시대의 방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바라고 바라던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릅니다. 이제 여기서 그들은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요, 여행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거기에 이르셨고, 거기서 그들을 맞으십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의 장애를 두려워 말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찬송가 359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여정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마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이 중심적인 뼈대입니다. 베드로는 이 골격들 사이에 노아의 홍수와 방주 이야기(20절), 교회의 세례 이야기(21절)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본문을 구성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교회의 세례는 모두 서로 병행되는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삼중적인 병행 구조 중에서 우선 그리스도와 교회가 서로 연관을 맺는 부분인 16절에서 1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그리스도의 여정을 꺼낸 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걷고 있는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설명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교회론은 철두철미하게 기독론에 기초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알려면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인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셨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역으로, 성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전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방향을 잃고, 길을 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보고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도리어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하는 대기업이나 그들의 마케팅 전략 같은 것들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제는 이미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과 같이 썩어짐에, 더러움에, 허무함에 종노릇하는 덫에 다시 걸려든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따라가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교회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부르신 자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부르신 자, 곧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그 도착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해법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길을 가지 않는 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거스르는 셈입니다. 독수리가 뱀처럼 기어 다니겠다거나, 양이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라도 먹고 살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길입니다. 교회의 길은 곧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관해 말할 때, 그것은 동시에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18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는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더 분명하게 말해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습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아남을 입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육체로는’, ‘영으로는’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한 인격 전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련된 차원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온전히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악인을 만나 선으로 대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드러내는 동안, 그는 죄에 대하여 온전히 해방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온전히 살아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절정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도 자신도 죄에서 해방되어 온전히 살아나고, 동시에 그 악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제사장’이 되시며, 그 길을 가는 교회 또한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교회로 하여금 이 제사장의 역할을 다하게 하는 그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그것을 ‘선한 양심’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할 뿐 아니라, 악을 만나도 은혜와 진리의 강력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아는 의식, 곧 거듭난 심령의 회복된 양심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그것이 죄인을 대하여 선한 양심, 은혜를 드러내는 양심으로 표현된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 선한 양심이 교회로 하여금 이 땅에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다하게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선한 양심으로 대하는 것, 그 역할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18절),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아남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19절과 20절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갑자기 노아의 방주이야기일까요? 무엇을 보충하려고, 혹은 어떤 점을 확증하려고 노아의 이야기가 나올까요? 그것은 우선 18절 끝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라는 방향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곧 교회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이동입니다. 어디로 이동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 가는 이동입니다. 20절의 노아의 방주는 ‘물을 통해 구원을 얻은’, 즉 물 위가 아니라 마른 땅인 아라랏 산으로 이동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어서 21절에 교회가 받는 세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육의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동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2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함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우리 곧 교회가 그 제사장과 함께 하늘에 오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해서 그가 제사장으로 인도하시는 교회의 종착지에 대한 확실하고도 살아 있는 소망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노아 홍수와 교회의 세례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교회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합니까?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요, 순례하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마치 잘나가는 기업처럼 세상에서 성공하는 교회, 남보다 크게 성장하는 교회가 올바른 모델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일시적으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실로 하늘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이고 온전한 교회요, 이 땅의 교회는 종말에 그 하늘의 교회와 결국 하나가 되지만(계 21:1~8), 아직은 이 땅에서 순례자 된 교회요 악과 그 권세자들과 더불어 피 흘려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건너야 할 홍해가 있고 지나야 할 광야가 있으며, ‘살아 있는 소망’에 붙들려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사랑을 덧입어’ 저 멀리 보이는 천성(天城)을 향해 계속 전투하며 전진하는 교회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전통적인 ‘여행자 교회’의 모습을 20-21절이 잘 보여 줍니다. 사실 19~20절에 나타나는 타락한 악한 영들과 노아 시대의 죄악, 그리고 홍수로 인한 심판과 구원의 종말에 대한 선포, 소수의 구원 등 일련의 주제들은, 베드로후서 2:3~5절에서도 그렇듯이 초대교회에게는 서로 연이어 묶여 있는 귀에 익은 이야기의 줄거리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이렇게 노아의 홍수와 방주로 이해하는 것은 베드로전서가 강조하는 대로(1:13) 구원은 이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주는 단지 물 위에 떠 있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물을 통해’(디 휘다토스;개역개정, ‘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당시의 홍수가 심판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구원, 곧 ‘이동으로서의 구원’의 수단이기도 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결국 방주는 40일 홍수 이후에 마른 땅이었던 아라랏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창 8:4).
이렇게 보면, 지금 그리스도의 여정과 노아의 방주의 여정, 그리고 교회의 여정, 이 셋을 중첩시키고 있는 본문의 의도를 따라, 노아의 방주가 이르게 된 아라랏 산이 문맥 안에서 상징하는 의미상 교회가 이르게 될 도착지가 어디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22절에서 명확히 표현된 그리스도의 여정의 최종 도착지인 하늘의 보좌입니다. 이런 식으로,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곧 심판의 상징이었던 물을 다시 ‘이동으로서의 구원’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이해가 21절에서 노아의 홍수와 교회가 받는 세례를 연결하는 상징적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노아의 홍수와 성도들이 받는 세례가 연결될까요?
이것은 당대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베드로서신만의 매우 독특한 연결입니다.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나 당시의 방주를, 현재 교회가 받는 세례와 구원의 수단이라는 실재(reality)를 예표 하는 그림자 혹은 모형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21절). 즉, 당시의 노아의 홍수나 방주도 심판과 구원을 의미했지만, 그 진정한 심판과 구원의 실재는 바로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사는 세례를 받는 사실에서 진정으로 성취된 것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점, 정말 교회가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세례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신약에는 세례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베드로전서의 이 본문은 독특하고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세례를 한 번 받고 마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 떠서 결국 아라랏 산으로 나아가듯, 새 땅으로 가는 하나의 긴 ‘여정,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을 통해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 뿐이라는 표현으로도 뒷받침 됩니다. 여기서 8이라는 숫자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지시 하지만(창 8:18), 상징적으로는 종말론적으로 새 창조를 가리키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8이라는 숫자는 창조의 7일에 뒤이은 여덟 번째 날로서 새 창조의 상징인데, 초대교회는 이 상징성을 살려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제 여덟 번째 날’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초대교회에서 옛 세상의 심판을 피하여 새 창조의 세계로 들어간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구원을 다 받은 것입니까? 본문에서 세례는, 성도가 한 번 받고 그저 교인이 되는 절차라든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실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공포했다든지, 아니면 육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든지 하는 단회적 사건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세례를 노아의 홍수가 상징했던 실체라고 보는 이 시각은 그래서 너무도 흥미롭고, 오늘날 교회에게 결정적으로 중대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오늘날 구원에 대한 좁은 이해는, 신자들을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처럼 작용하기도 합니다. 마치 구원은 이미 받아 놓은 티켓처럼 지갑 속에 보관해 놓고, 자신은 그 확신과 은혜와 ‘예정’을 담보로 마음 든든하게 나가 노는 것입니다. 놀아도 자신을 해치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부모를 욕되게 하는 그런 자식처럼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방주가 아무 데도 이르지 않고, 그저 평생 물 위에만 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저주일까요? 방향과 목적을 잃은 구원은 그래서 그 구원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실로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 믿고 세상 복 받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으니 아무 데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세속과 전투하는 교회가 될 이유도 없습니다. 항상 ‘두 마음’(약 1:8, 4:8)을 품고, 하나님과 세상 사랑을 저울질하며 이 땅에 영원히 뿌리박으려 하다가 수치와 부끄러움의 거품을 내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가 받는 세례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한 번 받고 자격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방주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죄와 죄에 대한 심판의 홍수를 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 나아가는 긴 여정 전체를 가리킵니다. 방주는 땅에 뿌리박는 건물이 아닙니다. 물 위에 떠서 이동하는 중입니다. 언제나 심판을 피하여 의와 화평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 이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이해하는 세례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동 하는 중입니다.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한 데에 굴복하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구원의 방주를 타고 그 안에서 견디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으니, 살아 있는 소망을 붙들고 전심전력으로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세상을 지나 하늘에 이르는 하나님의 교회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은 선한 양심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 양심이 세상처럼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라면, 혹을 선을 행하지도 않고 혹은 악을 만나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은혜의 강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양심이라면, 그는 분명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세상을 지나가는 교회에게 믿음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의 방주를 타고 하늘에 이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요?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