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 예레미야(6)/형통
제목 : 형통한 삶에도 이유가 있다!
성경 : 렘 2:29~37
찬송 : 290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731 낙양교회 수요예배
렘 2:29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30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렘 2: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렘 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렘 2: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렘 2: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렘 2: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렘 2: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렘 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평온한 때에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전략은 열강과의 동맹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보도하는 바와 같이 결국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기를 당했을 때의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찾아와서 당연히 자기를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반역이 습관화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불평을 달고 삶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여 무조건 도와 달라고 졸라 댑니다. 이러한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갈취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절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우리는 왜 하나님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준비하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자연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해 흐르지, 높은 곳을 향해 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에도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불행한 삶에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이끄는 원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라!(29~31절)
렘 2:29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30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하나님의 물음은 언약 관계에 기초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2인칭(너희)으로 부르시며 이스라엘이 스스로 무죄함을 주장(35절)한 데 대한 의문과 분노를 표출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철없는 아이처럼 떼를 쓰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앞서 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너희 조상들이 나를 멀리한 것이냐?’라고 되물으시며, 뻔뻔스럽게 무죄를 주장하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모두 나에게 반역했다”라고 질책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여호와께서 당연히 자신들을 구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불평했습니다(27~28절). 그러나 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망각을 여호와께서 상기 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참조, 3장). 본래 언약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써 언약 관계를 유지해 나갈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더 목말라 있었습니다. 2장은 그들이 이방 신들을 연애하여 그것을 따라 간 결과, 복이 아닌 재앙을 만났음을 말합니다. 더 심각한 상황이 3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매를 맞으면 아파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매를 맞아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상태가 매우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하십니다.
렘 2: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여기서 이스라엘을 부르는 호칭이 2인칭(너희)에서 3인칭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수사적 질문으로 대화를 계속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처럼, 깜깜한 땅처럼 되었느냐?”
어찌하여 이 백성은,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으니 당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이끌어 내어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고,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도록 보살펴 주셨습니다. 실제로 광야와 같이 행동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앞서 1~3절에서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으셨고 신혼 기간을 지나고 있었는데,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여호와를 떠나 이방 신들을 연모해 따라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들이 복과 형통을 내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함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29절). 그들의 삶이 형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수없이 징계하셨습니다(30절). 많은 징계를 당하고도 이스라엘은 문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광야의 쓸모없는 땅이나 흑암처럼 무익한 존재로 취급했습니다(31절).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탈선한 채 탕자처럼 방황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동산을 떠나 고통의 현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났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형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등지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형통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사모할 때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다스리심에 순복하십시오. 인생을 형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라!(32~37절)
렘 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처녀는 남편에게서 받은 패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결혼 패물은 금전적인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의 사랑의 약속입니다. 마치 결혼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아내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결혼반지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남편에게 갈 수 있고 남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신부는 결혼할 때 입은 그 고운 옷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옷을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많은 축복 중에 최고로 귀중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축복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권을 주셔서 그들이 누구를 축복하든지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즉 축복하기만 하면 무한정의 축복이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오고 큰 흉년과 재앙을 당한다고 해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다 극복할 수 있도록 하세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기도 응답의 축복이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패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나의 소중한 믿음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신부인 우리는 우리의 패물과 그 고운 옷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옷과 좋은 반지를 사 준다고 해도 거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욕심을 냈을 때 그들은 점점 더 세상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 앞에는 무시무시한 바벨론의 공격이라는 큰 폭포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들은 다른 나라의 호의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렘 2: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난 후에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많은 우상들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너무 무식해서 다른 신상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모든 신을 인정합니다.”라는 뜻으로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까지 우상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 줄 정도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 동안 여호와 신앙 때문에 소외된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같아지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원해 여호와 종교 자체가 세계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믿지 못해 자기들의 소중한 패물은 다 버리고 싸구려 가짜 패물들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아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매우 계산에 빠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새롭고 특별하며 자기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이 자기들과 다를 때에는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했지만 일단 같아지고 난 후에는 맛 잃은 소금처럼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 백성들이 소금이라면 소금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짜니 어쩌니 하며 불평하지만 결국 김장을 담글 때가 되면 모두 소금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향기와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세상 냄세를 많이 풍겼는데, 그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렘 2: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또 어떤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들의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원래 율법에는 밤에 담에 구멍을 뚫고 침입하는 자는 정당방위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밤에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합니다. 그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항의하는 사람들은 죽이든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을 보십시오. 이세벨의 간계로 무죄한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남편 아합에게 빼앗아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저지른 유다 백성에 대해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는 바벨론의 공격이라는 폭포를 향해 점점 떠내려가고 있는데 그들은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가진 재산을 다 포기하고 맨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렘 2: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34절에서 백성은 은밀하게 가난한 자를 죽였습니다. 그들의 옷자락에 죽은 자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도, 진실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35절에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나는 무죄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푸른 나무 아래에서 행한 우상 숭배 행위와 악행에 대한 죄의식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들의 뻔뻔한 거짓 진술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렘 2: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렘 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36절은 좀 더 이들이 되는 나라를 찾기 위해 애굽과 앗수르를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유다의 외교 전략을 풍자합니다. 혼돈에 빠진 유다는 어느 곳에 잘 보여야 할지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길을 헤맵니다. 그저 강한 쪽에 의지해 살아남으려는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의지하려 했던 그들은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의지하려는 나라들을 여호와께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열방과의 동맹을 통해 살길을 모색했던 북 이스라엘은 망했고, 앗수르 또한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유다는 애굽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와도 정략적으로 관계하지 않아야 하며 이방인들의 우상을 배격해야 합니다.
37절은 유다 백성이 애굽을 의지하지만 결국 두 손을 머리에 얹고 나올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으로부터 수치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에 있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강대국이나 큰 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형통의 영적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려 놓고도 아쉬울 때만 하나님께 도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행을 맞았습니다.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함에 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통치를 기뻐할 때 형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복된 길로 인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