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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가운데 “티치아노”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별 가운데 있는 태양”이라고 불리는 가운데, 646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신중함에 의해 지배받은 시기에 대한 비유”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과 짐승이 있습니다. 오른쪽의 머리로는, 젊은이의 미래를 바라보며, 가운데 머리로는, 장년의 현실을 주시하고, 왼쪽의 머리로는, 지혜로운 노인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아래에 있는 짐승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머리 위에는 라틴어로, “현재의 남자는 과거의 교훈을 통해, 신중히 행함으로, 미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티치아노는, 과거를 발판으로,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말했던 겁니다. 그림에서, 사람의 그림 아래, 짐승의 그림도 똑같이 그렸습니다. 이것은, 짐승 역시, 과거를 교훈삼아,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엄연하게, 사람과 짐승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은 과거를 걸러낸다는 겁니다. 즉, 과거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구별하여, 재차 반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이며, 반대로, 이방으로부터 수시로, 침략을 받거나, 아예, 이방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조상들의 이러한 행위를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따르고, 그 말씀 안에 거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본문 속의 요셉은, 13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고난과 역경이 겹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다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지만,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형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되어, 모든 것을 관리했습니다. 그러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이쯤에서 보면,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이었던 시 40: 2에서, 다윗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본문 속의 요셉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기가 막히는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과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2인자인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습니다. 이 아들들의 이름 속에, 요셉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눈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모진 역경과 고난을 겪고, 총리가 되었기에, 기뻐하며, 축복이라고 하겠지만, 요셉은, 자신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았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나갈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한창 봄 기운을 느끼는 요즘, 거리를 나가면, 사람들의 옷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또는, 취향에 따라, 목적에 따라, 갈아입는 옷 가운데, 가장 좋은 옷이 어떤 옷이겠습니까? 고가의 원단으로 만든 옷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옷이 우리 몸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최고의 원단으로 만든, 고가의 옷이라 하여도, 우리에게는 좋은 옷이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옷은, 내 몸에 잘 맞고, 나와 잘 어울리는 옷입니다. 그렇듯,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이, 그에게 맞기에 좋은 겁니다. 요셉에게, 총리의 직분에 맞기 위해서, 그에게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했다면, 총리의 직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을 겁니다. 그럼, 본문을 통해,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48 - 49절을 보시면,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본문 앞의 47절을 보시면,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고 합니다. 애굽 전역에 풍년이 들어 소출이 많아지자, 요셉은 그것을 거두어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애굽에는, 곡식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몽과도 같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우리가 흡족하게 여기는 상황 뿐 아니라, 우리가 불편하거나 불만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간과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 우리의 정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풍성한 열매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겁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뿐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로, 농사가 풍년이 되느냐? 흉년이 되느냐?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다만, 곡식의 저장법이 발달하면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지만, 풍년과 흉년의 요인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자연에게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 달 동안 가뭄이 계속 된다거나 아니면, 장마가 여러 달 동안 계속 된다면, 그 해는 흉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연을 주관하시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시기에 맞게 내려주시고, 태양의 뜨거움을 비춰주실 때, 농부들은 그들이 흘린 땀의 결과를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풍성한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가 이 땅의 열매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이 땅에서 살아감에 있어서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한 분이, 우리 신목교회의 밴드에 올리신 글처럼, 우리의 영적 건강이 필요합니다. 성도된 우리에게는 영적 열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시 92: 12 – 13을 보시면,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 또, 우리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또, 골 1: 9 – 10을 보시면,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기쁨과 선한 열매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영적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먼저 구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삶이란, 내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에 대해, 잠 6: 7 – 8을 보시면,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오늘을 통해,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직, 코로나19의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확진자가 줄었다가 다시 늘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가운데, 코로나19의 상황 종료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대해, 기도하며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15일자 전자신문의 이영호 기자는, 자신이 인터뷰한 기업인들로부터, “상반기는 실적이 극도로 부진합니다.” “업황이 최악입니다. 하반기엔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산업에 강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빠르게 자리잡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마트워크”를 비롯하여, 여러 방면에서 비대면 업무입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재택근무 효율성이 예상 밖으로 높다. 재택근무 기반의 새로운 업무 방식을 검토해야 할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코로나19의 종료 후,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반면, 한국경제연구원은,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경제위기가 지속됨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화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상도중앙교회의 박봉수 목사는, 코로나19 속에서 드려진, 온라인을 통한 가정예배가 본의 아니게,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도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격이 되었다면서, 온라인 예배는 개인경건의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해야 함을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본문 속의 요셉과 같이, 우리에게도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달라며,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천 년이 두 번 지나도”의 가사를 보면, “천 년이 두 번 지나도 / 변하지 않는 건 /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 천 년이 두 번 지나도 / 바꿀 수 없는 건 /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 천 년이 두 번 지나도 /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죠 / 당신의 삶을 통해 /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 우리가 하나될 때 주님나라 이뤄지죠”라고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요셉을 향했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건강하며, 영적으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1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라고 합니다. 지나온 날들의 아픔을 잊었습니다.
요셉이 결혼하여 낳은 첫째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그 뜻은, “잊어버림”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할 때, 지난 날들의 아픔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제껏 달려왔기 때문이지만,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 속에서의 위로와 힐링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잊자”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있었던 그 상황과 비슷한 환경이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픔의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분노하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자들이 말하는, 정신적인 병의 원인 중 하나는, 지난 날의 괴로움을 잊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본문 속의 요셉이야 말로, 형들에 대한 분노,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분노로, 그의 생각을 가득 메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롬 8: 18을 보시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오직 내 안에 있는 나만의 아픔은 있지 않습니까? 그 아픔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힐링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므낫세”란 이름의 의미가 “잊어버림”이라 하여, “망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욥 2: 7 – 9을 보시면,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있던 욥이, 42: 10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난 날의 고난과 역경을 잊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거친 광야 속에서의 행진을 통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지나온 모든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었기에, 그간의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상대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위로를 받으며, 위로를 구할 곳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계 7: 17을 보시면,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신앙 고백적인 의미에서,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그의 모든 고통을 일순간에 잊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지킬 때, 하나님께선 마지막 날에,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고,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잊게 해 주실 겁니다. 계 21: 4을 보시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합니다. 저도 목회 속에서, 그리고, 제 개인의 생활 속에서, 때때로, 힘들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그 현실을 떠나, 제가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읽은, 계 21: 4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이나 시련을 당한다 해도, 믿음에 있어서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믿음을 위해, 흘린 눈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님 앞에 서는 날의 기쁨은, 더욱 클 것이며, 그 날의 그 기쁨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했던 모든 고난을 잊기에 충분할 겁니다. 사 25: 8을 보시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또, 시 116: 8을 보시면,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본문의 요셉과 같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손수 닦아주실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삶의 쓴 뿌리는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가 잊혀져서, 더 이상 아픈 과거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므낫세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2절을 보시면,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바라본 요셉의 삶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요셉의 둘째 아들 이름은, “에브라임”입니다. 그 뜻은, “번성하다, 창성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선, 애굽에서 수고한 요셉으로 하여금, 그 땅에서 번성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이러한 번성이, 그에게만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선,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 야곱에게, 20년 동안, 온갖 고난을 다 겪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가족과 풍성한 가축을 주셨습니다. 쉽게 이룬 것이나 하나님 없이 세워진 것은, 쉽게 무너집니다. 진주조개가 영롱한 진주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찬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의 4절 가사를 보시면, “고생한 후에 기쁨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므낫세를 거쳐야 에브라임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면, 앞의 51절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잊게 한 것이나 또, 자신이 수고한 땅에서 번성한 것에 대해, 자신의 노력이라며, 자신의 공로를 치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내가 수고한 땅에서”를 직역하면, “나의 고통의 땅 안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생한 그 곳, 나의 뼈에 고통을 새겼던 그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셉은, 자신의 수고가 있고, 고통이 있는 곳에서 영원히 뿌리내리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어투가 있습니다. 그것은, “땅”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에게, 애굽은 자신의 고향도 아니며, 자신의 부모형제가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와서 살게 된 나그네로서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자신이 영원히 거할 지역, 자신이 돌아갈 지역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사건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요셉이 죽은 후, 약400년 이후에 있게 될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 이제껏 주일예배를 가정에서 가정예배로 드리심에 어떠합니까? 매우 힘들지는 않습니까? 주일 오전 11시 예배당에 모여, 공동체로 함께 드릴 때보다 많이 힘드실 줄 압니다. 그래서, 상도중앙교회의 박봉수 목사는, 성도들 가운데, 오전에 드리지 못하고, 오후에 드린다거나, 아니면, 주 중에 드리는 이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목교회도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시간인, 오전 11시를 지켜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형들에 의해, 억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렸던 요셉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같아도, 같은 형제라 해도 밉고, 증오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또, 애굽에서 만났던 사람들 역시, 요셉을 모함했고, 요셉의 은혜를 잊음으로 오랜 세월을 고통 가운데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가운데, 주변에서 뭐라하든, 오직,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을, 주변 사람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아셨고, 보고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 역시, 하나님이 아시고, 보고 계실 줄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면 됩니다. 번성케 하시는 에브라임의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에 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