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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작정하셨습니다. 율법은 성민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지배했습니다. 조금도 빈틈없이 다스렸습니다. 압제했습니다. 어디 얼마나 할 수 있는 지 한 번 보자고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b-6a)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맺은 언약이 담겨 있는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당신의 “소유סגלה‘(세굴라)” 곧 보석 같이 특별히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로 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열방 가운데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백성 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열방을 중재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는 물론 그들을 다스리는 왕 같은 나라로 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열방과는 달리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오직 당신 한 분만 섬기는 성민聖民 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들은 성민 이스라엘은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 (우리가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출19:8)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다 순종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철저한 불가항력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빈틈없이 다스리는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율법이라는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곤고함에 빠진 상태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힘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을 다 동원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숫양 몇 천 마리를 바치면...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기 위해서는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어버리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미6:6-7)라고 절규했습니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에서 속절없이 몸부림쳤습니다.
문제는 성민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행위를 통해서는 자신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또 율법의 정죄를 유발誘發하는 죄로부터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한 가지 죄도 해결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데 언제 지었는지도 모르는,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는 다른 죄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옵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더 솔직하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죄가 나입니다. 내가 죄입니다. 나와 죄는 도무지 떼려야 뗄 수 없는 완벽한 하나입니다.
치를 떨면서 거부하고 외면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죄에 완전히 매몰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원래부터 부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쏟아놓는 말이 아닙니다.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지나치게 표현하는 말도 아닙니다.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존재적으로 절망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들춰냅니다.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같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절망 속으로 몰아붙입니다. 정죄합니다.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멸시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는 꿈은 애시 당초 포기하고 버리라고 선포합니다. 죽음을 선포합니다. 인생은 벽처럼 느껴지는 율법 앞에서 몸서리치면서 떨 수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한 숨이 쏟아집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사도는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갈4:4a)라고 외쳤습니다. 드디어 율법이 성민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기간이 모두 다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율법에게 맡겨두기로 작정하신 기간이 모두 다 지나갔습니다.
율법이 성민 이스라엘을 더 이상 암울한 상태로 붙잡아 둘 수 없는, 정죄할 수도 없는, 절대 절망에 가둬둘 수도 없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때가 이르렀습니다. 한편,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로마에는 정치적인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약 200년 동안이나 평화가 이어지는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기였습니다. 신흥 종교가 출현하기에는 안성맞춤인 환경이었습니다. 또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 곧 현재의 프랑스, 독일 서남부, 잉글랜드, 아프리카 북부 지역, 아시아와 동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다스렸습니다. 로마가 곧 세계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로마는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다 통할 수 있는 도로를 확장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무려 15,000km에 이르는 도로를 닦았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이동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교통의 발달로도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이렇게 닦아진 도로와 교통의 발달을 통로로 삼아 로마에 속한 여러 나라들 곧 세계 열방으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또 로마의 언어는 라틴어였습니다. 헬라인들이 문화적으로 자신들보다 뛰어나다고 확신했습니다. 경외했습니다. 헬라인들의 언어 곧 헬라어를 제국의 공용어公用語로 채택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던 평화,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이어져 있던 대로大路, 헬라어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주었습니다.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로마와는 달랐습니다. 전쟁의 후유증, 헤롯의 폭정, 감당하기 힘든 과중한 세금, 힘에 지날 정도로 많이 부과된 종교 상납금, 부족한 식량 등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암담하고 침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백성을 위로하고 용기와 힘을 북돋워주어야 했던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지도자들이 앞장섰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서기관들은 직업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민족주의로 변질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눅11:42a)라는 저주의 말을 거듭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특히,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탐욕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당하고 있던 어려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치를 즐겼습니다. 백성들이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백성들의 도덕적인 타락 역시 극에 달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 마음 속 깊은 곳에 깔려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었습니다.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가 하루라도 빨리 나타나서 자신들을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구원해 주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들의 갈급함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바야흐로,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참고 견디며 기다리셨던 메시아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예비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때καιρός가 이르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그림자였던 구약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구원의 실제인 신약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창세전부터 작정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메마른 땅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 같으셨습니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거절과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때나 지금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척하고 멸시합니다. 아예 무관심하거나 적의를 품고 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신 당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당신 백성 곧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신해서 짊어지셨습니다. 짊어지신 정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상처가 아닙니다. 상처를 뜻하는 히브리어שבר(샤바르)를 직역하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다 또는 산산 조각나다”입니다. 외부로부터 가해진 강한 힘에 의해서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뼈는 손바닥을 뚫고 들어온 대못에 의해 완전히 으스러졌습니다. 발목뼈는 발목을 뚫고 들어온 대못에 의해 완전히 으스러졌습니다.
정강이뼈는, 로마 병사가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던 쇠몽둥이에 의해 완전히 으스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허물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며, 심장이 터질 정도로 힘겨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살점을 파헤치고 들어와서는 선지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가 흐르게 만드는 채찍을 무려 서른아홉 대나 맞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기 일보직전이 될 때까지 무자비하게 맞으셨습니다.
알량한 저와 여러분으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하나 같이 그릇 행하였습니다. 제각기 가고 싶은 길로 갔습니다. 죄로 충만했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헤매며 방황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저와 여러분을 세상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저지른 파렴치한 죄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완벽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우신 곤욕困辱에 온전히 내맡기셨습니다. 곤욕이 당신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도록 내맡기셨습니다. 자발적으로 맡기셨습니다. 심장이 터지고 분리된 물과 피가 심낭에 모일 정도로 견디기 힘든 엄청난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끝까지 감수하며 참아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으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으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타락한 지도자들이 처음 고소했던 종교적인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죄가 없음이 드러나자, 없는 죄를 만들었습니다. 로마에 대하여 반역을 꾀했다며 정치적인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려는 빌라도를 향해서 “(당신이 만약) 이 사람을 놓아 준다면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왕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황제를 반역하는 자입니다.”(요19:12b)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준다면 똑같이 반역죄를 짓는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야말로 마녀재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거룩하다는 종교 집단 바리새인들과 가장 세속적인 종교 집단 사두개인들과 가장 세속적인 정치 집단 헤롯당이 손을 잡았습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이질적인 집단들이, 평소에는 상종도 하지 않고 또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가던 집단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의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뜻을 모았습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가혹한 형벌에 해당하는 십자가에 매달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눈엣 가시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워버리기 위해서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완악한 존재였는지, 죄에 얼마나 깊숙이 매몰埋沒되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민 이스라엘을 선하고 아름답게 이끌어야할 사명과 책임을 부여받는 사람들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도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황소들이 떼를 지어 (나를) 에워쌌습니다. 바산의 들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습니다.”(시22:12-13)라는 시인의 외침에 따르면, 그들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존귀하게 지음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흉악한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저주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그들의 손에 당신을 맡기셨습니다. 짐승 같은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마침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사53:10a)라는 선지자의 외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볼 것이다. 그의 날은 길 것이다. 그의 손을 통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게 되리라.”(사53:10b)라고 이어지는 선지자의 외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 제물로 받아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저주로부터,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로부터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살려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주와 그리스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셨습니다. 당신의 보좌 우편으로 들어 올려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탄생한 영적 후손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의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이 땅에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거룩한 나라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혹독한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신 이유도 하나입니다.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다 흘리신 이유도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승천하신 이유도,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이유도, 당신이 통치하는 거룩한 나라를 세우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저주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이 타고 있는 지옥 불구덩이로부터 완벽하게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 상황, 조건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여 주저앉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어떤 환경, 상황, 조건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희망을 노래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저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2022년,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이 단단히 새겨놓아야할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종살이 하던 절망의 땅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절망의 자리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끝없이 펼쳐지는 위험한 광야 곧 없어야할 불 뱀과 전갈들은 득실거리고 반드시 있어야할 물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던 메마른 광야를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고해와 같은 인생을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위하여 단단한 반석으로부터 물을 내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알지 못했던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려주셨습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내려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외치자 메추라기도 내려주셨습니다. 이齒와 이 사이에 낀 고기를 다 빼내기도 전에 내려주셨습니다.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충분히 먹여주셨습니다. 인생으로서는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방법으로 필요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이제까지 저와 여러분의 삶의 필요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도록 충분히 채워주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채워주고 계십니다. 이후로도 영원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창세전부터 당신의 거룩한 작정이 서려 있었던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단 하나의 이유는 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녀田原米子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십팔 세가 되었을 때,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방황했습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두 발을 잃었습니다. 왼팔을 잃었습니다. 오른팔 손가락 가운데 두 개를 잃었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참한 몰골로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 이상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수시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두발은 없고, 손가락도 달랑 세 개만 남은 상태에서는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어느 날, 선교사와 그가 전하는 복음을 통역하기 위해서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예비 되어 있던 하나님의 선물은 더 있었습니다. 통역을 위해서 따라왔던 청년이었습니다.
역시 선교사 지망생이었던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습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지가 멀쩡했고, 자신에게는 손가락 세 개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마음은 달랐습니다.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주었던 그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것을 자신도 갖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결혼했습니다. 두 아이를 가진 행복한 가정까지 꾸렸습니다. 그녀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따라잡고, 슬픔과 탄식은 꽁지를 빼고 달아나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이유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복된 성탄절,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해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탄절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