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김준현
믿과 밑
젊과 점과 접과 절
달과 닮과 닳
담과 답과 닭과 닥과 닻
낮과 낯과 낫과 낟과 낱
빛과 빗과 빚
잃과 잊
믿을 밑으로 읽는 나의 믿음은 버려집니다
개구리 해부도를 닮은 야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중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모르고
묻습니다, 무언가를 묻는 게 무덤은 아니니까요
러시아어에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가 있는데
시계의 성별은 무엇입니까?
몇 시입니까?
맞습니다, 나는 혼혈이에요
혼혈은 나쁜 피와 쓸쓸한 피를 나눌 수 없어
몰랐습니다, 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바나나가 달콤해서
그렇게 벗겼습니까?
그렇게 베었습니까?
시의 형식을 ㅅ1로 바꿔도 人1로 바꿔도 人I로 바꿔도
다 알아봅니다, 한국인들은
이게 말놀이입니까?
단 한 사람이 말하는 형식으로
시를 써보겠습니다
선과 악도 하나이고, 신과 악마도 하나이다. 남과 북도 하나이고, 동과 서도 하나이다. 음과 양도 하나이고, 남과 여도 하나이다. 진리와 허위도 하나이고, 흑과 백도 하나이다. 순종과 잡종도 하나이고, 잡종과 혼혈도 하나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신도 없고, 악마도 없다. 남도 없고, 북도 없다. 동도 없고, 서도 없다. 음도 없고, 양도 없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진리도 없고, 허위도 없다. 흑도 없고, 백도 없다. 순종도 없고, 혼혈도 없다. 이처럼 이분법에 근거하여 선과 악을 나눈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이지, 그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이 하나의 근거는 원자로 설명할 수가 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이지만, 그러나 이 원자와 원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모든 사물들이 탄생하고 죽어간다. 원자는 변하지 않지만, 이 원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그 어떤 변화와 운동의 가능성까지도 부인한 원자론자이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변화론자라고 할 수가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 놓고, 상호간의 입장과 위치와 가치관에 따라서 사생결단식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김준현 시인의 [혼혈]은 모든 순혈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이며, 모든 혈통은 혼혈이다라고 선언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믿과 밑/ 젊과 점과 접과 절/ 달과 닮과 닳/ 담과 답과 닭과 닥과 닻/ 낮과 낯과 낫과 낟과 낱/ 빛과 빗과 빚/ 잃과 잊” 등은, 이 말들의 유사성만큼이나 혼혈과 순혈을 구분할 수가 없고, 그 결과, “맞습니다, 나는 혼혈이에요”라고 다소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바나나가 달콤해서/ 그렇게 벗겼습니까?/ 그렇게 베었습니까?”라는 시구는 내가 혼혈이다라는 것을 바나나 껍질을 벗기듯이 벗겼다는 것이고, “시의 형식을 ㅅ1로 바꿔도 人1로 바꿔도 人I로 바꿔도/ 다 알아봅니다, 한국인들은/ 이게 말놀이입니까?/ 단 한 사람이 말하는 형식으로 / 시를 써보겠습니다”라는 시구는 다소 말놀이처럼 보이더라도 ‘단 한 사람이 말하는 형식’, 즉, 나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연출해내겠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시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나 프란츠 카프카가 역설한 것처럼 기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기법이 새로우면 새로운 세계(내용=사상)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믿을 밑으로 읽는 나의 믿음은 버려집니다”도 좋고, “개구리 해부도를 닮은 야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좋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모르”는 것도 좋고, “러시아어에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가 있는데/ 시계의 성별은 무엇입니까?/ 몇 시입니까?”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좋다. 요컨대 말놀이도 좋고, 진지한 언어도 좋지만, “나쁜 피와 쓸쓸한 피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맞습니다, 나는 혼혈이에요”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 더욱더 좋은 것이다.
시(사상)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기 이전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칸트는 도덕법칙을 역설하기 이전에 도덕군자가 되었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외치기 이전에 사유하는 인간이 되었다.
‘나는 혼혈아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 혼혈아의 정당성과 이 혼혈아들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창출해내기는 더욱더 어렵다. 안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것이며, 실천한다는 것은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앎은 뼈를 깎는 듯한 극기와 그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는 자기 결벽으로부터 얻어진다.
김준현 시인은 더욱더 역사 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을 하고, 새로운 이상형으로서의 혼혈아의 천국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