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와 통소를 배우다.
도인이 벽에 걸린 거문고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대는 능히 이것을 탈 줄 아느뇨?”
양생이 대답하되,
“본디 몹시 즐기오나 스승을 만나지 못해 신묘한 곡조를 배우지 못하였나이다.”
도인이 동자로 하여금 거문고를 양생에게 내주고 한번 타보라 하니, 양생이 이를 받아 무릎위에 놓고는 풍잎송(風入松) 한 곡조를 타자 도사가 웃으면 말하기를,
“그대 손 놀리는 폼이 가볍고 빨라서 가르쳐 볼만하다.”하고는,
몸소 거문고를 옮겨 천고에 전하지 못하던 너덧 가지 곡조를 차례로 가르치니 그 소리가 맑고 아담하여 인간세계에서 듣지 못하던 것이더라.
양생이 본디 지혜가 총명하여 음률을 한번 배우면 그 신묘한 것을 능히 통달하는지라, 도사가 매우 기꺼워 하시더라. 다시 백옥으로 만든 퉁소를 꺼내어 몸소 한 곡조를 불어 양생을 가르치며 다시 일러 주기를,
“음률을 아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기란 옛 사람도 어렵게 여기던 바라, 이제 거문고 하나와 퉁소를 그대에게 주노니 후일에 반드시 쓸 곳이 있을 터인즉 기억하여 둘지어다.”
양생이 공손히 두손으로 이를 받으면서,.
“선생은 곧 가친의 친구이시라 소생이 가친이나 다름없이 섬기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소생을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도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당하는 부귀에 미련을 그대가 수월히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어찌 나를 쫒아 산석에서 세월을 보내리오? 그대가 돌아갈 곳이 또한 나와 다르니, 나의 제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간절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 팽조방서(彭祖方書) 한 권을 주노니, 이 법을 익히면 비록 장생불사(長生不死)는 못할지라도 평생에 병이 없고 늙은 것을 족히 물리치리라.”
양생이 다시 일어나 절하고 이를 받으면서 아뢰기를,
“선생께서 소자가 인간세상의 부귀를 누리겠다 하시니 외람되어 앞날의 일을 묻겠사옵니다. 소자는 화음현에서 진씨댁 여자와 장차 혼인할 것을 언약하옵다가 난리에 쫓겨 여기에 왔사오니, 모를 노릇이나 이 혼인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나이까?”
대서가 크게 웃으며 일러주기를,
“혼인이란 밤처럼 어두운 것이라, 쉽사리 경솔하게 누설치 못할 것이나 그대의 아름다운 인연은 여어곳에 있으니 진씨녀만을 외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로다.”
양생이 꿇어앉아 분부를 받고 객실에서 잠을 자는데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도사가 양생을 불러 깨우며,
“거리가 이미 트이고, 과거는 내년 봄으로 연기했으니 그대의 모친이 기다리시는 고향으로 속히 돌아가 모친의 근심을 덜어 드리라.”하고는,
이어서 노비를 장만해 주니 양생이 백배사례하고, 거문고와 퉁소와 방서를 거두어 가지고 동구 밖으로 나갈새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보니 그 집과 도사는 이미 간 곳이 없고 오직 산에 색구름이 아롱질 뿐이요, 양생이 산에 들어갈 때에는 버들 꽃이 피었는데 하루밤 사이에 국화가 만발하였기에, 양생이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 길 가는 이에게 물어본즉 ‘나라에서 각도 군사를 불러 올려서 겨우 다섯 달만에 역적을 모두 잡아들이고, 천자는 서울로 돌아가시고, 과거는 내년 봄으로 연기하였다.’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