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전쟁(한국전쟁) : 1950.6.25~1953.7.27(3년 전쟁)
6 ․ 25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정세)을 알아보자. → 광복 후 남한과 북한이 양분(兩分. 둘로 나누어)되어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자본주의 사상을 바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9.9.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 →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1. 모택동 = 마오쩌둥) →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1949) → 김일성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전쟁 지원을 약속 받음 → 중국 공산당을 돕던, 조선의용군(독립군) 출신들이 북한군에 편입됨(북한의 군사력 증강) → 군사적으로 남한은 1949년 미군이 전부 철수한 반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고 전쟁 수행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 미국의 애치슨 선언 발표(애치슨 라인.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함) →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1949∼1953)이 애치슨 선언에서 언급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 그 내용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즉 애치슨 라인으로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킴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비쳐져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켰고 6· 25전쟁 발발(갑자기 일어남)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후 애치슨 선언은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철회되었다 → 38선 부근에서 남북 간의 잦은 소규모 무력 충돌 지속되고 있었음 →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의 군사력 증강. 국군의 경우 전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데 비하여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 1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북한군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넘어 침략해 왔어요(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1950.6.28) → 우리 국군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미리 준비한 북한군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한 지역은 북한군이 점령함) → 이에 국제연합(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였어요(유엔군 참전). 유엔군의 대부분은 미군이었다(유엔군 사령관은 미군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맡음)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을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반전시켰다. 서울도 수복되었다(1950.9.28) → 1950년 10월 1일, 38선 돌파(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음) →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시킴 → 1950년 12월 24일 압록강까지 진격함 → 그러나 중국군이 북한군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면서(중국군의 참전. 1950.10.25),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되었다(1· 4후퇴, 1951.1.4로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함락 당함) → 중국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사람 바다. 무기나 전술보다 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술. 우세한 인력을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 고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 전쟁은 혼전 상태로 접어들었다(전쟁의 장기화로 피해 급증) → 한국군 + 유엔군(미군 중심의 16개 국가) ↔ 북한군 + 중국군 + 소련군(부분적 참전) → 6· 25전쟁은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우려, 소련이 유엔에 휴전(休戰. 교전국이 서로 합의하여, 전쟁을 얼마 동안 멈추는 일) 제의(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임 → 유엔군과 중국군의 휴전 회담 시작 → 이승만 정부의 휴전 협정 반대 →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로 휴전 회담이 지연됨 → 휴전 협정 체결(1953.7.27) → 군사분계선은 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의 전선(戰線. 최전선)으로 하고(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움), 포로 교환은 포로들의 의사에 따라 하기로 결정 → 반공 포로(남한), 친공 포로(북한), 그 밖의 다른 나라(제 3국)로 구분 됨(거제도 포로수용소) → 오랜 협상 끝에 남과 북은 1953년 7월 휴전을 하였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어 남북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 휴전선(休戰線)은 휴전 협정에 따라서 결정되는 서로의 군사적 경계선이다. 1953년 7월 27일, 6ㆍ25 전쟁의 휴전에 따라서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설정된 군사 경계선이 휴전선이다. → 3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가 생겼어요.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족이 흩어져 서로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기도 했지요. 국토는 황폐해졌고, 건물, 도로, 철도, 다리 등이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되었답니다. → 같은 민족이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으로 나누어, 서로를 불신하며 적대시하고 싸움 → 독재 체제의 강화(남한의 이승만, 북한의 김일성 독재 권력 강화) → 2017년 현재, 남북한은 휴전 상태이다. → 종전(終戰. 전쟁이 끝남. 또는 전쟁을 끝냄)이 아니라, 전쟁을 하다가 잠시 쉬는 휴전(休戰) 상태가 64년째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남북 분단 → 남북한 대립(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대표는 미국, 공산주의 대표는 소련) → 소련군 철수(북한), 미군 철수(남한)와 미국의 애치슨라인 설정(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 → 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참고) →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되찾음. 탈환) → 38선 돌파(기념으로 국군의 날) → 평양 함락 → 압록강까지 진격 → 중국군(중공군) 참전(공격), 인해전술 → 흥남철수 작전(영화, 국제시장 참고), 1· 4 후퇴 → 서울 다시 함락 → 서울 다시 수복 → 38선을 경계로 전쟁이 교착상태(전선이 상호 대치하여 고정된 상태. 교착 = 아교처럼 아주 단단히 맞붙어서, 조금도 변동이나 진전이 없음)에 빠짐(영화, 고지전 참고) → 소련의 휴전 제안, 미국의 동의로 휴전 협정 시작 (군사적 분계선과 포로 석방 문제) → 휴전 협정 체결(이승만의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 미군의 한반도 주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