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섬에 가다
박경선 2편
몇 번을 다녀와도 늘 아련한 그리움 끝에 머무는 섬이 있다. 자연경관으로 치자면 호주, 뉴질랜드 못지않게 자연이 살아있는 청정지역이다. 유럽 부호들 중에는 주인 없는 외딴 섬을 사서 거기에 별장을 짓고 여유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는 그런 섬과 섬을 이어 다니며 섬사람들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배달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즐기며 산다. 새로운 섬과 바다를 좋아해서…. 그들처럼 가진 부도 없고 배 저을 노동력도 없는 내가 자유스럽게 제주도를 드나들며 관광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그런데 관광은 ‘바라보기’ 정도이고 살기는 ‘겪어보기’다. 해마다 며칠씩만 다녀와 관광 수준에서 그저 ‘바라보기’에 그쳤던 제주도를 제대로 ‘겪어보기’ 하려고 한 달 살기 계획을 세워 떠났다. 하루에 한 곳에만 머물러보려고 일정을 느긋하게 짜고 ‘제주가 품은 자연과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건 검은 밭담이다. 구멍 숭숭 뚫린 얼굴로 맞아주는 표정이 정겹고 귤나무에 매달려 햇볕에 숨바꼭질하듯 언뜻언뜻 얼굴 보이며 익어가는 귤들도 정겹다.
한 달간 머물 펜션은 2018년부터 인연 맺은 편백나무 집으로 동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집이다. 새벽마다 바다에서 해미를 뚫고 떠오르는 햇귀와 시원하게 파도치는 정경을 액자 속 그림처럼 즐겨본다. 까치놀 지는 저녁이면 바다에 나가 목새의 감촉을 발로 느끼고, 바닷가 정자에 앉아 눈 아래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면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보살핌이 지극한 정 많은 펜션 사장님께 이런 제주도에 살아 참 행복하겠다며 부러워했더니 지병 이야기를 했다. 급할 때 서울의 큰 병원에 가려고 나섰다가 폭우와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아 제주도에 사는 것을 후회했다는 말에 ‘바라보기’와 ‘겪어보기’의 차이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 맑고 공기 좋으면 교통이 불편한 것은 감수해야 할 일! 그래서 퇴직 후 시골에 집 지어 공기 좋다고 살던 사람들도 나이가 더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차차 도시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나보다. 두고 온 우리 시골 베나(베풀고 나눔)의 집에도 남편과 내가 얼마나 더 머물게 될지!
하지만 즐기러 왔으니 제주도의 자연을 찾아 볼 일이다. 여름에는 폭포와 휴양림이 으뜸! 관광으로 왔을 때는 쇠소깍, 정방폭포, 원앙폭포,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별 내린 천들을 찾아다니며 늘 사진만 찍고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청량한 물에 발 담그고 앉아 여유를 즐기며 다른 사람들도 찬찬히 둘러보았다. 돈네코에서는 원앙폭포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이 차갑고 얕아 어린이들이 고무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하며 즐겼다. 물에 발 담그고 찰방대다가 점심으로 싸온 음식을 옹기종기 모여 먹는 모습은 가족간의 행복을 씹어 먹는 모습이었다. 소정방폭포를 돌아 올라가다가 폭포와 파도가 만나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려 설계한 <소라의 성>이라는 북카페를 만났다. 1969년에 지어졌다는데 그전에는 늘 와도 이런 건물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북카페에는 시집과 그림동화책, 사색서들이 정갈하게 꽂혀있고 차를 타서 마실 공간도 있었다. 이런 관광지에 그저 이용할 수 있는 고즈넉한 북카페가 있었다니. <누가 내 머리에 똥 샀어> 의 작가로 알려진 독일 볼프 에를브루흐의 <내가 함께 있을게> 그림책이 눈에 띄어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죽음이라는 친구가 오리를 따라다니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책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편안함이 안겨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짧은 시간에 큰 위안을 받으며 소라의 성을 나오니 이런 곳에 근무하는 사서와 제주도민이 부러웠다.
삼다수 숲길, 사려니 숲길, 이승악, 올레길 5코스, 한라산 둘레길로 이어진 치유의 숲들을 하루하루 걸으니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가 생각났다. 42년간 노를 젓다가 정년퇴임으로 노를 놓친 뒤, 비로소 바쁘게 힘겹게 달려왔던 나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토닥거려주는 치유의 시간에 젖는 나날이었다. 특히, 절물휴양림 깊숙한 곳에 있는 편백나무 숲은 너무 좋아 이틀이나 찾아 갔다. 긴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뱀도 만나고, 요양 차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전날 마주친 어르신들과도 다시 마주쳤다. 이들에게 편백나무 숲의 피톤치드는 치료사이다. 바쁘게 살며 나무를 보았을 때는 큰 나무들만 의미 있게 보였고 ’나무들도 열심히 살구나‘생각했는데 평상에 누워 하늘에 닿듯 뻗은 편백나무를 우러러보니 잎들끼리 둘러서서 껴안고 즐기는 평화로움이 내 가슴에도 편하게 안겨왔다. 무념무상의 시간 속! 이대로 누워 고요히 눈 감아도 행복하겠다는 마음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