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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자의 수필세계
영원과 생명력의 단사丹砂, 황홀한 우연성의 미학,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J. 애디슨은 ‘색은 모든 말을 한다.’고 했다. 윤영자 수필을 논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색’이다. 수필집의 제목도 그렇고 수필집의 시작 글도 <가슴에 머무는 색>이란 수필이다. ‘색’을 빼고 윤영자 수필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윤영자수필집을 다 읽고 난 후였다. 윤영자는 <가슴에 머무는 색>에서 ‘그리움의 색, 노란색은 영원히 존재하는 색이라고 다짐해 본다. 내 마음에 병아리같이 귀엽고 예쁜 색으로 간직할 것이다.’라며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노란색으로 치환해서 그리움을 감각화하고 있다.『여씨춘추呂氏春秋』란 책에, ‘丹可磨 而不可奪其赤(단가마 이불가탈기적) 이란 말이 있다. 단사丹砂는 갈 수 있다고 해도 그 붉은 빛깔은 빼앗을 수 없다. 즉 사람은 죽일 수 있지만 그 사상은 뺏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丹’은 곧 ‘丹砂’ 혹은 朱砂를 가리키는 말이다. ‘丹砂’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서 어린애들의 경기驚氣에 사용하는 약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인주印朱의 원료로 쓰이는 물건이다. 인주는 변색이 되면 안 된다. ‘丹’은 바로 그 ‘변하지 않는 물질’인 것이다. ‘丹’은 아무리 갈고 갈아도 그 붉은 색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색에 대한 윤영자의 애정은 ‘단심’이 아닐까.
색채는 우리에게 철학할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오지호가 <금욕주의와 색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릇 색채의 환희는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한 은총의 하나일 것이다.’ G. 바술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색채는 기분을 전환시키고 장식하며 꽃을 피운다. 색채는 향기롭다.’고 한 데 견주면 윤영자의 색채론이 설명될지 모르겠다. 윤영자는 책의 서문에서, ‘천연염색을 배우면서 색이 찬미하는 소리가 내 귓전을 울려 그 소리를 수필에 접목하고 싶었다. 자연에서 얻은 풀과 꽃들이 신세계를 펼칠 때면 색의 부자가 된 듯했다. 그 감성이 우러나와 글로 표현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염색과의 대화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 주었다. 한 가지 소재로 16가지의 색을 만들 수 있는 천연염색의 매력을 과하게 표현하자면 황홀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썼다. ‘색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주는 것 같다. 우리를 자극은 해도 짜증스럽게 하지 않는다.’고 L. 비트겐슈타인이 말했고, 이어령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생명이, 기쁨이 있는 곳에 색채를 발하는 마음이 있다. 밤과 죽음과 비극은 색을 거부하고 색을 피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무슨 사연이 색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지 윤영자의 작품을 살펴보자.
Ⅱ.
윤영자 수필가는 천연염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과 친숙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수필을 구성하는 화소는 주로 색, 바다, 바람, 나무, 풀, 물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 중에서도 윤영자의 수필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고 있는 제재로서 ‘색’은 작가의 심상에 순수를 배태케 한다. 이러한 순수는 작가를 감사하는 생활에서 노력하는 생활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삶의 원초적 동기는 이 순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순수가 바탕이 된 그녀의 글에는 잔잔한 감동이 스며있다. 그녀는 별빛을 보기 위해 가을을 기다리고, 고목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보기 위해 봄을 기다리는, 관절 속의 물기를 걷어낼 구원의 작가다. 수필의 여러 매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국적 소재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인상이다. 대상과의 인연화합에서 그리고 진솔한 자기 고백에서 그녀의 순수한 삶은 맹물 같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인생사의 흔한 한 축을 과거라는 시공에 놓고 그 시절의 순수를 그리워하고 있는 그녀의 글은 출발점도 귀착점도 한마디로 생명과 영원성의 ‘색’이 부여하는 황홀한 감각 그 자체다. ‘색’에서 출발하고, ‘색’을 표현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윤영자의 작품은 한국적 수필의 결정체라 하겠다.
그리움의 색, 노란색은 영원히 존재하는 색이라고 다짐해 본다. 내 마음에 병아리같이 귀엽고 예쁜 색으로 간직할 것이다. 고운 노란색을 만들기 위해 나는 주로 양파 정향 금잔화 대나무 잎 같은 식물에 명반을 쓴다. 숨 고르면서 달려가 만난 친구와 함께 걸으며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에 넣으니 의자에 앉아있던 한 아주머니가 “소녀 같으세요.”라고 한마디 부추긴다. 부모님 형상의 노란색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 <가슴 속에 머무는 색> 중에서 -
이 작품은 그녀의 글 중에서도 어찌 보면 가장 윤영자다운 수필이라 할 수 있다. 그녀에 있어서 창작의 의미는 곧 ‘색’에 대한 의미부여요, 이를 통하여 정서의 객관화에 이르는 작업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수필적 질료인 ‘색’을 철저히 탐색하고 규명함으로써 그 ‘색’을 이미지화하고 결국에는 ‘색’를 초월하여 부모님의 형상으로 감각화해서 ‘그리움의 노랑색’을 ‘영원히 존재하는 색’으로 의미화하고자 하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작가는 늘 계절을 보내고, 단풍으로 물드는 잎들을 보며 의가 좋으셨던 두 분 부모님을 생각한다. 노랑 은행잎은 수의보관함에 들어가는 일종의 옷장 소독약으로 좀이 스는 것을 방지하는 데 쓰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노랑 은행잎은 그리움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이다. ‘가슴 속에 머무는 색’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노란 색은 어머니를 상징하면서 그리움을 의미한다. 노란 색을 작가가 영원의 색이라고 보는 데는 오랫도록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리라는 다짐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가슴 속에 머무는 색’이란 제목은 연상과 상상의 측면에서 문학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에 매우 탁월한 선택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 가지 중에는 ‘색’이 포함된다. 색깔은 말, 리듬과 함께 강력한 컨트롤 파워를 가진다. ‘올여름 수를 다하고 가신 어머니,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서 옛날보다 더 행복하고 즐겁게 함께 하세요. 아버지께 자식들은 건강하고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전하세요. 내 젊은 날에 타계하신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제게 은행알을 구워 주실 때,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시며 다섯 알을 주신 생각이 납니다. 그 마음을 노란 은행잎에 담아 보냅니다. 유난히 사이좋은 부부, 자상하고 유머도 많으셨던 부모님을 자식들은 닮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가슴으로 쓴 편지를 두 분께 보낸다. 그리고 은유법을 많이 쓰신 아버지에 얽힌 예화를 들려준다. 밥에 돌이 가끔 들어있었는데, 그럴 때면 집안일 도와주는 두 언니한테 “아가, 우리 집에 유달산 바위가 굴러왔구나.” 하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항상 배려하는 말을 썼던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그런 배려의 말로 인해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부모님의 이미지를 은행잎 노란 색으로 정하면서 아버지가 은행알을 구워주면서 다섯 알만 주던 기억을 소환한 전략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표현을 못 하니 붉다고 했지, 자줏빛과 금빛이 섞인 붉은색이다. 이 붉은 빛은 소목에 황산철을 섞은 빛깔 같다. 초록빛이 곁들어진 색도 보이고 아니 느껴지는 듯도 하다. 그러다가 서리 내릴 때쯤이면 그들은 보랏빛으로 변한다. 서리가 아무리 매섭게 내려도 아침에 그네들을 보면 허연 얼음 밑에서도 그 빛을 잃는 법이 없다. 첫 눈쯤 내린다고 해서 이들이 부랴부랴 꼿꼿함을 접고 붉은 기 나는 금빛을 사그라뜨려 누런 지푸라기로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추운 겨울 눈보라 치는 날에도 여전하다.
- <기억 속의 그 색> 중에서 -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유와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수필은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이 작품도 앞에 인용했던 수필과 마찬가지로 색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떤 색을 단순하게 보겠지만, 작가는 유독 색에 대해서만은 민감하다. 그녀는 자연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사람이다. 눈, 코, 피부가 자연과 함께 할 때면 날마다 조금씩 변화가 오는 것을 기분 좋게 느낀다. 길지 않게 머무는 자연 속에서 아침이면 아침대로 밤이면 밤대로 달라지는 풍경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산다. 남서쪽 바닷가, 길고도 따뜻한 늦가을 햇살을 듬뿍 받은 그네들이 지천으로 자리 잡고 흐드러지게 춤을 추어대는 걸 혼자 보고 있으려면 심장이 뛰고, 서서히 금빛 머금은 녹색으로 바뀌다가 십일월에는 밑부터 붉어지는 길가의 풀들을 보며 작가는 오페라를 연상하고, 자연을 그 자체로 황홀함의 극치로 인식한다. 이 수필 속에는 시골풍경을 그려보며 행복에 젖는 작가의 자연관이 노출되어 있어 공감을 준다.
조석으로 달라지는 자연의 자태, 냄새, 소리를 만날 때마다 작가는 그것들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인사를 한다고 느낀다. “어머나, 저기 길가에 풀색 좀 봐.” 하고 돌아서면 풀들이 햇빛과 만난다. 해 넘어갈 무렵이면 산등성이가 홍시색으로 물들여진다. 다른 시간에는 산 모두가 반짝이는 은빛 억새풀의 띠들로 꽉 차 있다. “보고 있으면 미칠 것 같이 예뻐.” 이런 색들이 주는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시골체험을 기억으로 더듬으면, 자연과 함께하며 행복했던 생각들은 가슴속을 밀치고 바람결에 날리듯 스쳐간다. 작가는 흔적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 작품이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연서정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풀들이 햇빛을 만나 연출하는 색감을 반추하는 일을 잊지 못하는 작가이기에 더욱 독자의 애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서리가 아무리 매섭게 내려도 아침에 그네들을 보면 허연 얼음 밑에서도 그 빛을 잃는 법이 없다.”는 말은 <여씨춘추>의 단사丹砂는 갈 수 있다고 해도 그 붉은 빛깔은 빼앗을 수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이런 비유는 문학적 성취를 위한 고도의 간접화 전략이라 하겠다.
구십을 가까이 살아간 긴 여정을 단 두 시간 만에 까만 점을 찍었다. 활활 타던 촛불의 불꽃이 꺼지는 까만 심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영원히 내 머리 속에 지울 수 없는 빛나는 까만색으로 남을 것 같다. 준엄하고 정갈하게 멋이 있는 그 모습이 당신의 색깔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검정색은 영원불멸할 색이라는 것을. 까만색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색들이 받쳐주기 때문에 사랑받는 색이 된 것이 아닐까. 이 지구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색, 자신이 주인공이어도 좋지만 다른 색을 위해 배려해 줄 수 있는 무게 있는 색, 멋있고 사랑받는 까만색처럼.
- <검은 색의 사연> 중에서 -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사랑과 죽음이다. 특히 노년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는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소멸은 이렇게 눈물을 남기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평자는 이쯤에서 상기해 본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작가에게 많은 것을 색각하게 해줄 것이다. 본래 흑색과 백색은 생명 이전 혹은 생면 이후의 절대세계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검은 색이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작가는 어머니의 승하를 ‘까만 점을 찍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두려움을 넘어서고 있다. 왜 윤영자는 죽음의 검은 색을 영원의 색으로 의미화했을까. 윤영자의 이 ‘검은 색’에 관한 수필은 인간의 나약한 일면을 다룬 글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이 헌신과 배려 그리고 사랑받음이 뒷받침되고 있다면, 충분히 성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준엄하고 정갈하게 멋이 있는 그 모습이 당신의 색깔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검정색은 영원불멸할 색이라는 것을. 까만색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색들이 받쳐주기 때문에 사랑받는 색이 된 것이 아닐까. 이 지구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색, 자신이 주인공이어도 좋지만 다른 색을 위해 배려해 줄 수 있는 무게 있는 색, 멋있고 사랑받는 까만색”으로 의미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검은 색을 역설적으로 투시하는 그녀의 검정색에 대한 역설적인 입장 표명은 색채 전문가다운 철학이 있어서 공감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작가의 강인한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예지를 배워야 할 살아있는 우리에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식탐이 있기 마련이다. 음식의 맛을 안다는 것은 삶을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를 대접할 때도 맛좋고 분위기 좋은 곳으로 초대를 하지 않는가. 서먹한 사이일지라도 같이 식사를 하고 나면 친해진다. 성공적 처세에 있어 음식접대는 필수가 아닐까. 인심도 음식을 만들어 내는 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조금이라도 덤으로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 먹을거리는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볼 때나 생각을 할 때 입안에 침이 고인다. 식욕과 미각의 관계를 수학공식에 대입하면, 맛의 함수가 나올 것 같다. 식도락을 즐기는 맛의 함수에 건강한 행보의 행복지수를 더한 천으로 짠 깃발을 올려본다.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니 엔돌핀이 돈다. 타향살이의 자기 위안이 내 심층에 깔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 <맛의 함수> 중에서 -
‘음식의 맛을 안다는 것은 삶을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명제는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음식은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특히 문학과 음식의 만남은 윤영자의 감각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조합을 선사한다. 수필 속의 미식 문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킨다.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게 된다. 미식 문화는 우리에게 다양한 맛과 향을 상상하게 해준다. 수필 속의 음식은 종종 우리의 입맛을 자극하고, 먹고 싶은 욕망을 일깨운다. 이 수필에서 윤영자는 음식이 단순히 우리의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다. "성공적 처세에 있어 음식접대는 필수가 아닐까."라고 말하며, 우리를 그 수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미각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쾌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바로 ‘맛의 함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필 문학의 생명은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데 있다. 주제의식의 올바른 의미화는 제재를 중심으로 해서 주제를 겨냥할 때 구축된다. 위 인용 단락은 이 작품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미식문화를 말하면서 ‘맛의 함수’라는 것을 들고 성공적 처세에 도움을 주며, 행복지수를 높여주고, 타향살이의 자기위안이 되기도 한다는 근거를 내세운다. 이는 맛의 함수에 대한 절묘한 구체화가 아닐 수 없다. ‘음식의 맛을 안다는 것은 삶을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대목은 중용의 ‘지미’를 연상케 할 정도로 멋진 의미화다.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니 엔돌핀이 돈다.’는 작가의 음식에 대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우리는 음식문화가 주는 삶의 안정성에 젖게 되는 것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규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자세와 실천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드러나는 법이다. 좌절과 상실감으로 주저앉을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행복으로 가는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작가는 맛의 함수로 잘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강풍은 우리 생활에 큰 피해를 주지만 바람은 우리 삶에 필수적이다. 녹조 현상이 성하면 한 번 뒤집어 주는 것으로 바다의 생태를 살릴 수가 있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겨울바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바람, 물, 흙, 태양과 불이 상생하는 오행의 윤리로 운행된다. 쪽색은 바람이 있어야 예쁜 색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묘한 매력이 있다. 자연의 위력은 엄청나다. 인간의 노력과 힘이 없어도 바람은 자연염색과는 뗄 수 없는 존재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계절에 따라 같은 염료와 매염제를 사용했어도 내 생각과는 달리 다른 빛깔로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람의 위력이지 않는가. 진정 나의 색깔은 어떤 색으로 비추어질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 <바람이 전하는 색> 중에서
바람은 자연염색과는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말해주는 이 수필의 주제는 ‘바람의 위력’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타인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마음,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서 염색의 신비를 알려주고자 하는 윤영자의 예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공명을 울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배려가 있을 때다. 윤영자는 염색에 관한 한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염색전문가로 남고자 한다. 고운 쪽색을 만들어 내려면, 24시간 구워낸 조개껍질 분말을 넣고 힘차게 저으면 걸쭉한 상태의 쪽색 원료가 만들어지는데, 이런 과정들이 힘들어 천연염색이 어렵다고 한다. 염색할 천을 재빠르게 그 물속에 넣고, 물속에서 반복적으로 끝과 끝을 마주 잡고 바람과 함께 털면서 흔들어 주어야 한다니, 쪽색을 생성시키기까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는가. 그녀는 땀의 가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이는 그녀가 남달리 열정이 많고 신념이 확고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색을 갖기 위해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전원풍경에다 자신의 염색생활을 보탠 것으로써 색을 사랑하는 이의 노력이 회화적인 색채감으로 잘 드러나 있다는 게 윤영자 수필의 최대 장점이라 하겠다. 우리에게 바람은 영원한 모성이다. 그 바람으로 흙 위에 씨가 뿌려지고 결국에는 바람 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섭리다. 그녀의 수필은 오염되고 인정이 메말라 삶의 공간으로서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 도시가 아닌 식물성적인 푸르름이 존재하는 시골을 배경으로 하기에 힐링의 시간을 준다고 하겠다. 항상 아니 영원히 풀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작가 윤영자가 우리 주변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늘 쪽빛 천의 정조에 삶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이 수필들로 인해 식물성적인 푸르름의 쪽빛 색감를 맛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바람의 신비가 사라지면, 그 신비스러운 쪽빛을 어디에서 보겠는가.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어느 누구도 한국적인 것이나 전통적인 것에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럴 만큼 여유가 없는 디지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 특히 시니어들은 컴퓨터화된 기계나 기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적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윤영자 수필가의 한국적이며 전통적인 것에로의 천착은 바람직하다 하겠다. 윤영자가 한국적 정조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강한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하겠다. <섶>은 우리 옷인 한복의 특성을 접하고, 그 중에서도 ‘섶’이 옷의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전통한복에 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복은 동정 깃과 섶이 아주 중요하다. 그것이 옷의 자태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깃은 목선을 살리고 옷 전체를 어울리게 한다. 동정은 깃의 품위를 올려주고 한복을 착용하는 사람의 용모를 깔끔하게 보이게 한다. 옷의 중심인 섶은 기둥과 같다. 두루마기를 보면 길쭉한 섶이 모양을 잡아준다. 한복에는 안섶과 겉섶이 있다. 두루마기나 저고리를 여밀 때 겹쳐지는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안섶이고, 옷고름을 여미는 깃과 함께하여 옷의 미와 중심을 잡아주는 멋진 부분이 겉섶이다.
- <섶> 중에서 -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전통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급급한 문학은 일시적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다. 윤영자는 이제까지 문학을 자기 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해온 데서 벗어나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전통을 이어가는 사회적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적 소재에 대한 수필을 많이 써내고 있는 윤영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섶> 역시 우리 옷의 뿌리인 한복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착이 담긴 글이다.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그 시대와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자기의 희생을 소진하며,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문학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윤영자는 대대로 이어져 오는 조상들의 체취와 한국혼의 정서를 문학으로 그려내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다. <섶>은 전통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표백된 글이다. 우리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전통복식으로서 조상 대대로 입어온 한복의 가치를 고양시킴으로써 작가는 우리 조상의 얼과 정성이 담긴 고유의 전통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윤영자의 글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옛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섶이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진리를 품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서로 도우며 염려하고, 주위를 살피며 살아가는 섶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져본다.’는 결말부 진술에서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온전한 삶을 살아가리라는 작가의 자세를 볼 수 있다.
새해 첫날이 하얀 백지라면 섣달그믐은 까만 먹물이 머금은 색과 같다고 생각해본다. 한해를 계획하고 살면서 마음의 가계부로 낙서된 가슴이 습자지에 먹물이 스며들어 까만 색깔로 변해가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계단씩 쌓아가는 세월의 높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급한 마음 없이 그대로 살아가면 저절로 길이 열린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은 말 못하는 동물과는 다르게 참고 견디면서 기다리고 살아간다면 좋은 일이 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기죽기죽거基竹基竹居하면 절로송송개節路松松開라. 이 글귀는 내게 살면서 인내심을 가지라는, 너무 나서지 아니하고 묵묵히 바라보면서 상대를 이해하며 살아가라는 지침이 되었다.
- <섣달그믐달> 중에서 -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살아가면서 삶에 지침이 되었던 아버지의 말씀을 작품화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사람은 말 못하는 동물과는 다르게 참고 견디면서 기다리고 살아간다면 좋은 일이 있다.”는 말씀과 조우하면서 작가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배려심과 인내심을 잃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느낀다. ‘너무 나서지 아니하고 묵묵히 바라보면서 상대를 이해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하고 작가는 자신을 처절한 반성대 위에 놓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문학적 향취가 풍겨나는 것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 될 때, 문학적 감동은 배가되는 것이다.
작가는 ‘새해 첫날이 하얀 백지라면 섣달그믐은 까만 먹물이 머금은 색과 같다’고 생각해본다. 한 해를 계획하고 살면서 마음의 가계부로 낙서된 가슴이 습자지에 먹물이 스며들어 까만 색깔로 변해가는 느낌을 가지며 그 연유를 생각해 보는데, 작가는 그것을 ‘한 계단씩 쌓아가는 세월의 높이’로 여긴다. ‘세월의 높이’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문학적 전략은 작가의 문학적 기량을 말해준다. 작가의 성찰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그려내는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섣달그믐달을 까만 먹물로 시각화해서 그것을 아버지의 어록으로 전치시켜낸 부분이라 하겠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성찰의 자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윤영자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연에서 얻은 지혜를 체화시켜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다. 자신의 반성적 성찰과 어른으로부터 배운 지혜를 잘 조합해서 주제의식으로 일구워내는 일만 해도 가치롭다고 하겠다.
오늘은 소중한 인연과 함께하는 희망찬 삶을 그린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그리움의 텃밭을 생각한다. 행복한 마음 부자가 된 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텃밭 주인이 되어본다. 사랑도 기쁨도 함께 넘치는 날에 씨앗은 물과 비료를 먹고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인연의 열매가 풍성해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넓은 땅을 가진 주인보다 영양 있는 작은 땅을 일구며 사는 인생이 진짜부자가 아닐까. 정성과 비료가 잘 배합된 질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자가 인생텃밭의 주인이 아닌가라고 자위하면서 마음속 깊이 되새겨본다. 텃밭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배려와 인내로 상대를 이해하고 내 매력이 제 기능을 다 하는 그때 내게 돌아오는 상대의 후한 반응으로부터 비로소 내 자부심의 알찬 텃밭이 될 수 있는 에로틱 캐피탈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 <인생텃밭> 중에서
작가는 인생텃밭을 가꾸면서 인생을 반추하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성찰에 있다. 작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고마움과 진한 사랑이 시냇물 되어 흐른다. 그 수고로움은 환희의 마음으로 터를 잡는다. 작가 안에 만들어진 밭에 볕이 들어오고, 비도 머금는다. 바람을 견디며 힘을 키우는 중에 벌레는 사라지고 밭은 양생 맞는 작물끼리 어깨를 맞대고 함께 성장하는 보금자리가 된다. 윤영자는 그 속에 행복을 가꾸어 가는 것을 ‘인연의 텃밭’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마음을 나누며 산다는 것에는 항상 관심과 배려와 기다림이 필요한 일임을 그녀는 안다. 작물의 텃밭도 인생의 텃밭과 같지 않은지 묻고 싶어진다는 작가의 물신주의에 대한 거부는 배려의 태도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이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인연 텃밭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면서 인생의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싶어 한다. 인연화합의 역동성에 모든 세상사의 가치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오묘함을 깨닫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며 아픔의 늪을 헤매고 있다. 인연과 함께하는 마음 행복 부자가 된 그녀의 삶, 그 무엇을 향해 힘껏 치닫는 생명력이 번득이는 인간관계의 싱그러운 축제 속에서 작가는 삶의 희망을 마신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풀어내는 인생 텃밭에 대한 차분한 묘사와 사색은 포근한 여인의 따사로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윤영자가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친구를 자기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곧 텃밭이다. 인연과 동행이 되고자 하는 것은 그녀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다운 삶의 발견이다. 새 생명의 기지개와 만나며 희망의 기대감을 갖는 작가의 전도에는 밝은 빛만 가득하다. 작가가 인생텃밭을 가꾸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풀꽃처럼 여린 여심에 정감어린 시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인연화합의 축제가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을 안겨주기에 텃밭을 기반으로 축조된 그녀의 삶은 하나같이 감동을 준다.
정독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문우들은 정이 넘쳐난다. 남해여행의 마지막 날은 또 다른 문우가 장어로 점심을 대접했다. 나는 큰 별 같은 권대근 교수님의 작은 문학관이 빛날 수 있는 그날까지 여름날의 온도처럼 격려하고 지원하려 한다. 남해에서의 일박이일은 날마다 경이롭고, 식지 않는 바람이며 감사함의 연속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문학관이 아니어서 더욱 찬란했다. 무게감도 경박하지 않아서 은연중 ‘작은’이란 글자에서 겸손함과 진솔함이 배어나온다. 인간미와 사방으로 꽉 찬 책에서 풍기는 예술의 혼이 나를 감동하게 했다. 작은 문학관을 나오면서 나는 나의 문학에 대한 꿈과 열정과 용기가 식지 않기를 기도했다. 남해를 다녀와서 그런지 따뜻한 바람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 <식지 않는 바람> 중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작가가 문학동료들과 남해문학기행을 통해 발견한 ‘작은’이란 형용사에 대한 역설적인 해석이 눈길을 끈다. 작가가 ‘권대근작은문학관’에서 찾은 가치덕목은 겸손함, 진솔함, 인간미, 열정 등이다. 이 작품은 남도를 여행하면서 가슴에 서리는 정감과 공감을 수필화한 것이다. ‘인간미와 사방으로 꽉 찬 책에서 풍기는 예술의 혼이 나를 감동하게 했다. 작은문학관을 나오면서 나는 나의 문학에 대한 꿈과 열정과 용기가 식지 않기를 기도했다. 남해를 다녀와서 그런지 따뜻한 바람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는 결말부 의미화 문장은 이 수필의 압권이다. 이 진술은 이번 여행의 목적이 여행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문학적 열정에 대한 작가의 진정한 기원과 기도가 ‘식지 않는 바람’으로 의미화되어 이 수필은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 그녀의 정서는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이런 멋진 의미화는 자연과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윤영자는 기행을 통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수필이 주는 첫인상은 따스함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의 글은 그녀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과 체온이며, 그것이 정서화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리얼하게 펼쳐진 삶의 따뜻한 기록이 된다고 하겠다. 작가는 남해 가면 꼭 파독간호사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코로나로 인한 인원제한에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다. 어릴 때 목사님의 딸이었던 윤명희의 안부를 묻고, 작으나마 직접 선물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 다른 동료에게 기회를 준 사례만 보더라도 윤영자 인성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면 서서히 어둠이 찾아온다. 밤은 공포감을 던져 주지만 저편 희미한 가로등은 길목을 비춰주어 나를 안도하게 해준다. 저 작은 가로등이 내 마음속 깊은 등불이 되어 주기에 어두움을 견딜 수 있지 않은가. 이 등불마저도 비바람에 시달려 꺼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주위를 환히 비춰주는 길가의 가로등이야말로 광명이고 희망일 수 있다. 생활전선에서 종종걸음으로 숨을 몰아쉬며 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로등은 구세주와 같다. 밥과 같다.
- <흔들리는 가로등> 중에서 -
이 수필은 전이의 미학이 빛나는 수필이다. 어둠과 빛의 대립항을 이용해 현실이 각박하여 여유를 즐기고 있지 못하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가로등 빛이 필요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위기를 경험한 환자 가족으로서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아무런 준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진심어린 부탁이 이 글에 담겨있어 감동을 준다. 남편이 코로나 백신 휴유증으로 쓰러져 대학병원으로 가서 급한 불을 끄고 한숨을 돌렸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뇌경색이란 병명을 얻고서 시끄러운 공간에서 하루 지내고 일반병실로 가서 일 주일 치료 후 귀가하였던 코로나 시절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 이후, 작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 어둠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나 제언을 수필을 통해 던진다. 어둠을 지켜주는 가로등이 흔들리면, 사회는 비상상태다.
든든한 사회적 자산이 갑자기 쓰러지는 일들을 ‘흔들리는 가로등’에 견준 것은 정서를 객관화할 줄 안다는 뜻이다. 이런 역량있는 작가이기에 그녀의 글은 향긋한 풀내음을 풍긴다. 눈과 귀를 열어 사고의 유연성을 확인함으로써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가로등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안길 곳임을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가슴 속에는 안전에 대한 향수가 서려 있다. 그동안은 가계부양 또는 양육 문제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환경이 가정의 평화를 주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이 즈음에서 가로등 불빛처럼 환한 빛으로 내 주변에는 어두운 길목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그녀의 기원으로 새로 전개될 이웃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를 우리는 벌써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한 줄기 시원한 샘물 같은 청량감을 주는 작가라 하겠다.
Ⅲ.
윤영자의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적 자책감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어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윤영자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특히 수필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 등을 애써 감춰버리거나 미화시킬 때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작품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수필 독자들이 수필을 통해 만나려는 사람은 빈틈없이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처럼 부족한 면도 있고 단점도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모습을 엿보게 됨으로써 오히려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성찰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글맛이요, 손맛이다. 작가 자신의 보이지 않는 심경이 색감으로 잘 형상화되고 있는 이 수필집의 묘미는 전이의 미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윤영자의 수필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물줄기는 색의 강을 따라 흐르고 있다. 색에 대한 탐구는 윤영자 수필세계를 바로 바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하겠다. 윤영자 수필세계는 한마디로 ‘영원과 생명력의 단사丹砂, 황홀한 우연성의 미학,그리고 모성과 인정의 곳간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때로는 지성과 예리한 인식을 기저로 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가하면서 비판의 메시지를 담는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따스하면서도 인정스런 눈길로 자연을 품어 안는 서정적 경향을 띤다. 전자의 측면으로 보면, 사회 참여의 강한 의지와 지성적 용기를 드러내는 특징을 보이지만, 후자의 차원에서는 자연친화적인 세계가 초록 이미지의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하겠다. 이 뿐만 아니다. 그녀 수필세계의 또 다른 한 축에는 모성원리의 따스함이 스며나는 인정의 미학이 구축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서정과 인식 그리고 모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는 윤영자의 수필세계는 순수와 지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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