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화는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근대화’를 새롭게, 아니 오히려 옛 방식대로 다시금 인식해보는 게 좋은 시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근대를 전통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식으로 과거를 전복하고 새로운 것을 온전히 만들어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근대를 전통을 뒤집은 게 아니라 전통이라는 토양에서 발아한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 마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자본주의를 찾으려 했던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1905년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에 연재되었고, 1920년에 책으로 발간됐으며, 1930년에 같은 제목의 영역본이 나온 뒤 사회학의 고전이 됐다. (사진은 1934년 편집본 표지)
먼저 그렇다면 ‘전통’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축의 시대
전근대적 생활양식 전체를 전통이라고 포괄하면 너무 막연할 것이다. 여기서 쓸 수 있는 좋은 틀은 ‘축의 시대’라는 개념이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고등 종교가 유라시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개념은 논란이 여전히 있긴 해도 종교와 문명을 이해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이 시기에 등장한 고등 종교들이 이전의 종교와는 무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는 말 그대로 신화적 사회였다. 초기 국가에서 통치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신의 후손이라고 강조했다. 켄트 플래너리와 마커스 조이스는 [불평등의 창조]에서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평등 사회는 성과에 따라 지위에 차등을 두는 사회로 전환되었고, 지위의 항구적 차이가 생기자 상류층들은 ‘조상의 은덕’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했고, 끝내는 ‘혈통 자체가 다르고, 신과 이어져 있기에’ 세습이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하늘의 신이 곧 지상의 왕이 되는 제정일치 사회, 신왕(God-king)이 통치하는 국가가 등장했다. 이 사회에서 신왕은 절대적 권력을 가졌으며, 불평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신이 원하는데 가지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축의 사상은 무언가 다른 논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왕은 더는 신이 될 수 없었고, 그의 가계도 신과 상관 없었다. 이렇게 된 데는 ‘신’이 갖는 의미가 달라진 게 컸다. 축의 시대 이전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적, 도덕적인 판단을 거의 내리지 않았다. 자연현상을 주관하고 권력을 제공하고 은덕과 저주를 내리는 것이 그 시절 신들의 ‘역할’이었다.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를 보면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갖고, 능력의 제약도 많다. 그저 초능력이 조금 더 있는 영웅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고등 종교의 신은 이와 전혀 다르다. 야훼, 알라로 대표되는 일신교 문화권의 신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두 신은 인간으로 상상되기 힘들고, 천지 만물을 주관하고 심판을 내리는 전능한 신이다. 아라 노렌자얀은 이를 두고 “거대한 신(big god)”, “도덕적 신(moralizing god)”으로 표현했다. 성격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강조하는 다르마, 중국의 상제, 천명 등의 개념은 일신교의 논리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여준다. 세상을 주관하는 논리가 있으며 그것이 만물을 규정하고, 사회적 도덕과 윤리도 그런 이유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축의 사상은 훨씬 사회적, 윤리적인 면모가 강했다. 동시에 축의 사상은 ‘원리’를 강조했기에 그 시대 기준으로는 주술적인 면모를 제거하는 ‘합리화’ 기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순장과 같은 잔인한 풍습이 사라진 것도 축의 사상의 공이다. 원리에 따라서 그런 주술을 용납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축의 사상은 왜 만들어졌고 그렇게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일까? 신왕으로는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국가, 통치 원리로서 민족신화를 넘어서 보편성을 획득해야 했던 제국의 고민, 유목민의 침공으로 더 많은 이들을 동원해야 했던 필요성, 사회와 인간의 의미를 더 고차원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해준 물적 풍요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는데, 여전히 활발히 논쟁 중인 영역이기에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국가의 팽창, 이민족의 유입과 투쟁, 물적 풍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다소 타협하고 넘어가겠다.
여하간 이렇기에, 근대 사상의 주요한 근거가 전통 종교에서 도출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축의 사상은 그 고대 시대에 이미 주술을 몰아내고 세상에 원리를 세웠으며, 원리 하에서 인간의 본질적 평등함을 내세웠다. 농업 제국에서는 그것이 사회를 최적으로 유지시켜주는 선에서만 적용되었지만, 많은 민중 항쟁이나 체제 변혁가들이 종교의 도덕에 기대서 저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축의 사상이 통치와 저항 양측에 논리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럽 초기 근대의 사상가들이 천부인권, 자연권 등을 강조하며 신 앞에서의 평등을 이야기 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왜 근대성은 서양에서 출현하였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제시된다. 축의 사상은 유라시아의 복합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을 근대성까지 끌어올린 건 그렇다면 왜 서구 사회인가? 근대성의 기원을 종교에 둔다는 것은 결국 유럽의 기독교 혹은 그리스-로마 전통에 본질적 우위를 상정하는 서구중심주의를 반복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그 같은 설명이 지배적이기도 하였다. 나 또한 이런 식의 설명이 전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서구 근대는 서구의 전통과 종교를 바탕에 두고, 마치 지층이 쌓이는 것처럼 등장한 것이지 무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다만 비서구 사회가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열등’하거나 근대성과 상반되는가? 그렇게 보는 것 또한 무리다. 이슬람, 불교, 유학과 제자백가 등에서는 근대성과 이어질 수 있는 재료들이 많다. 물론 이 전통들이 무척 억압적 요소, 미신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만큼, 그 수준으로 가지고 있다고 봐야 공정할 것이다. 21세기의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은 자국의 과거보다 타국의 현재와 훨씬 더 공유하는 게 많지 않은가?
서구와 비서구의 분기를 만들어낸 것은 수세기 동안 서구 사회에 가해진 압박이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지구적으로 확대되는 무역 네트워크, 화약 도입으로 촉발된 군사혁명과 지정학적 경쟁의 격화, 그로 인해 강해지는 국가, 통념 파괴적인 지식의 폭발적 팽창이 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요컨대, 제국의 등장과 유목민의 위협, 물적 풍요가 축의 사상을 만들어냈다면 대서양 경제와 군사 혁명은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통해 기독교 교리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끄집어낸 것이다. 그 같은 압력을 받지 못한 이슬람권이나 중화권이 같은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동양의 ‘흥미로운’ 대답: 무타질라와 사공학
하지만, ‘같은 압력을 받지 못했으니 같은 결과가 안 나온 것이다’라는 것은 너무 부실한 답변 아닐까? 같은 압박을 받았는데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유력한 비서구 문명인 이슬람권과 중화권에서 등장했던 흥미로운 조류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는 압바스 왕조 시기의 무타질라(학파)다. 압바스 왕조 시기는 이슬람의 황금 시대로서, 당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지던 경제적, 과학적 발전은 이미 상당히 유명하다. 경제사학자 셰브케트 파묵은 압바스 황금기가 이슬람 성립 직전에 중동과 동지중해를 강타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비롯한 전염병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다는 설명을 했었다. 마치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토지 대비 노동력을 줄임으로써, 생존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고 이것이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상업의 발전과 경제적 팽창 조류에 맞물려 바그다드에서는 독특한 신학 조류가 유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무타질라파다.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무타질라파는 인간 이성과 논리를 이슬람의 절대적 준거로 삼아야한다고 했으며, 지금은 악명 높아진 이슬람의 꽉막힌 샤리아 해석과는 정반대되는 개방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쇄적 전통과 대비되는 인간 이성과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이 같은 신뢰는 무타질라파를 이슬람의 역사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으나, 압바스 왕조가 쇠락하면서 점차 사회적 인기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적 신학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슬람 과학도 이 시기 정체하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의 근대 사상을 받아들인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키려 했을 때 무타질라파를 다시 불러내면서 재조명 받게 된다.
두번째는 남송에서 유행하였던 사공학파(事功學派)다. 남송은 금, 대리, 이후에는 몽골과 대치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강제 받았으나, 동시에 상업적 농업과 거대한 산업 경제를 이루었던 국가였다. 남송이 처한 이런 독특한 상황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양한 사상이 만개할 토양이 되어주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유학, 나아가 소위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조류였다. 이 조류는 깨우친 도덕적 인사들로서 사대부, 그들이 참여하는 정치, 그리고 유교 원칙에 따라 사대부와 협치하는 도덕적 군주 등을 강조했다. 주자학은 남송 멸망 이후 급속하게 세를 확대하면서 마침내 동아시아 전역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송에서 주자학은 진량, 섭적 등이 주도하는 사공학과 경쟁해야만 했었다. 사공학파는 상업이 고도로 발달했던 송의 중심지, 절강에서 발달하여 절동학, 절학 등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남송이 당면한 지정학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국가 권력을 강화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상업에 대한 자유방임을 통해 국부 전체를 늘려야 한다는 파격적 주장을 주로 하였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량과 주희의 왕패 논쟁인데, 진량은 전통 종교가 보통 강조하는 동기 윤리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결과 윤리를 더욱 강조하고, 특히 ‘고대의 이상’보다는 당면한 현실에서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며 그 예로 한고조와 당태종을 들었다. 이슬람권과 다소 유사하게, 사공학파는 서구 근대 사상과 전통 중국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근대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다시 불려나와 재해석되곤 하였다.
만약 압바스 황금기나 남송 시대에 아메리카 발견과 지구적 상업 네트워크의 등장, 화약 도입으로 인한 군사 혁명과 항구적인 지정학적 경쟁을 맞이했다면 무타질라파나 사공학파를 뛰어넘는 다른 무언가가 나올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국가는 기후변화, 내륙아시아에서 제기되는 위협에 굴복하였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물은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타고 서유럽으로 유입되어 마침내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