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이 개관한지 7년, 퇴조일로(退潮一路)의 한국선풍을 진작하기 위해서 세워진 무문관에서 만 6년을 수행하고 지난 6월1일 퇴방한 제선스님의 글을 싣는다.
스님은 선을 “심일경성(心一境性) 정려(靜慮) 정적(靜寂)”이라고 말한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이란 “통일된 하나의 마음이 갖는 경지”이며 정적(靜寂)이란 “일체의 망상이 끊어진 심성(心性)”이며 정려(靜慮)는 “번뇌가 없는 순찬무잡(純澯無雜)한 생각”을 말하므로 선(禪)의 수행은 순일(純一)한 정진으로 얻어진다고 말한다. 또 스님은 순일한 정진으로 얻어진 선의 힘이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默)·동(動)·정(靜) 속에 미칠 때 비로소 각자(覺者)의 생활(生活)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각자의 생활을 위해서 육년이란 긴 세월을 무문관에 앉아 수행정진한 스님은 1912년생으로 1940년 윤포산(尹胞山)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득도했다. 득도한 이후 지리산 칠불암, 진산 태고사, 오대산 등에서 안거를 지냈다. 오대산에 안거할 때의 일화. 불조혜명(佛祖慧命)을 이어받기 위해 용맹전진하던 스님이 잠시 정(定)에 들었을 때 암자에 불이 났다. 스님은 자신이 그 불을 이길 수 있을지 시험하기 위해서 피하지 않아 그 때문에 스님은 크게 화상을 입었다. 화상을 입은 스님의 심경을 심두멸각화요량(心頭滅却火猶凉)이라는 옛 선사의 시에 비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 스님의 글을 얻어 싣는 것은 동학(同學)과 후학(後學)에게 보기가 돼 선풍을 진작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다. 지금 스님은 제방(諸方)을 순행(巡行)중이다.
우리 불교도들이 불교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다수라고 본다. 그래서 현실은 기복(祈福)불교로 흐르고 있다. 기복도 불교임에는 틀림없으나 정신수준이 얕은 인간들을 위하여 만부득이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그러므로 기복을 위주로 하는 신앙은 미신이요, 정신은 아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 부처님 가르침 올바로 알지 못하고 믿기만 하면 미신의 그물에 빠지게 되고 알고도 믿지 않으면 사견에 떨어지게 된다. 알고 믿는데서 최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우리불교들은 마음에 깊이 새겨 부처님이 가르치신 지상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나는 천견을 돌아보지 않고 불교진리 일단을 신도대중을 위하여 피력하여 본다.
부처라 함은 무슨 뜻이며 중생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부처라 함은 인도말로 ‘붇다’라고 하여 깨달았다는 것이며 중생이라 함은 미혹하였다, 또는 실성(失性)하였다는 뜻이다.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실성하였느냐? 마음을 깨닫고 마음의 성품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냐. 우리 인생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 움직이는 동물전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깨달은 마음은 어떠한 것이며 미혹한 마음은 어떠한 것인지?
깨달은 마음은 말로써 해명할 수도 없으며 그림으로 그려 보여줄 수도 없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을 깨닫는 정당한 방법에 의하여 깨달아서만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도대중을 위하여 부처와 중생을 어느 정도만이라도 인식이 되도록 풀이하여 보려한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여 마음거울이라고 명칭을 하여둔다. 마음거울에 때라고는 묻지 않았다면, 또는 온갖 때가 산더미 같이 묻었다면 어떠할까. 전자는 깨끗하고 맑고 밝을 것이요, 후자는 탁하고 어둡고, 추잡할 것이다. 바로 같은 한마음이면서도 때가 묻고, 묻지 않은 관계로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때 없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이 마음은 한 없이 밝다. 우주 간에는 이 마음의 광명을 가릴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태양의 광명이 밝다하여도 비치는 한계가 있고 비치는 한계 내에서도 많은 장애물이 있고 인위적으로도 얼마든지 차단작업을 할 수 있다. 때 없는 마음 광명은 비치는 한계가 없다. 우주전체를 두루 비춰 남음이 없다. 산속이나 물속이나 바위 속이나 땅속이나 막히는 일이 없이 다 통하여 비친다. 우주만물 전체가 이 마음광명 속에 들어 숨길 수 없다.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고 현재도 그러하다. 우리 인간도 현재 이 광명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이 광명을 부처님은 불사의(不思意) 광명(光明), 무애(無碍)광명, 편조광명이라고 명칭 하셨다. 또 때 없는 마음으로는 모를 것이 없으며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 크기로는 광대무변한 허공과 허공 중에 나열된 수 억조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계와 그 모든 세계 내에 존재하는 만물들과 기원과 종말, 동식물의 유무, 동물들의 수한 생활 상태를 포함하고 작은 것으로는 인생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물체, 즉 현미 확대경을 통해 볼 수 있는 전자 원자 분자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체를 극유진이라 하여 이 극유진도 아침에 창틈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극히 작은 물체이다. 이 작은 극유진을 82만3543분의1로 분해한 그 하나를 극미라 한다. 이 극미 중에는 굳어지고 따뜻하여지고 축축하여지고 움직여지는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천지우주 만물은 이 작은 극미가 집합하는데서 창조된다고 하시었다. 때 묻지 않은 마음은 위에 명시된 바와 같이 광대무변한 공간과 무수한 세계와 세계 내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달관한다. 이 많은 세계들은 정(靜)·예(穢) 양토로 구별한다. 정토는 제불정토 제불세계 불국토라고 한다. 부처님도 한 분만이 아니라 몇 수억만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보니 부처님 사는 세계도 그만치나 많은 것이 된다. 어찌 정토라고 하느냐.
그 세계는 인간세계와 같이 잡다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결한 금 은 보석 같은 고귀한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아름답고 깨끗하다. 그러나 깨끗한 물질로 구성된 세계라 하여 정토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미한 중생들만이 사는 예토 중에서도 천국은 정토 못지않게 아름다운 물질로 창조되어 있다. 정토라 명칭하게 된 요인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생의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데 있다. 그들은 호의호식이나 성적향락이나 권력 금력이나 그러한 지위라도 탐내는 마음이라고는 없다. 이 세계 인민을 인도하시는 이가 대성인인 부처님이시고 그 밑에는 마음을 깨달은 현성들이 많이 모여 있는 일반 민중들은 인생 우주의 최고 진리성이 자기마음이란 것을 확신하고 마음을 깨다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여 진리탐구 생활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그들의 생활이요, 생활은 그들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제불정토라고 명칭 한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정신적으로 해결된다. 한 생각이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욕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다. 마음에는 만물의 원소가 충만하여 있어 항구불멸이다. 정신수준이 고도로 높은 인생은 자기 마음에 있는 만물의 요소를 어느 것이든지 자유로이 섭취할 능력이 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부처님 당시, 그 제자 중에 성과를 중한 16명이 죽지 않고 현재 살고 있으며 신선들도 식물을 먹지 않고 공기를 흡수하여 살고 있다. 정토인민들의 수한은 정토에 따라 차이가 있다. 수 억 만년, 수 천 만년, 수 백 만년, 작아도 백 만년 이상을 살게 된다. 그러나 육체의 존재기간이지 마음은 죽음의 타락이 없다. 대성현의 보좌를 향하여 급속도로 향상, 전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나 부처님이 될 자격을 보장받고 있어 부처님 후보자들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