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건 엄마에 대한 추억과 사진 한 장. 엄마는 사진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몫까지 채워가며 우리 남매를 길러야만 했습니다.
그게 힘겨워서 였을까? 중학생이 되던 해 여름 아빠는 새엄마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말씀을 우리 남매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아빠의 매 타작이 시작 되었고, 오빠는 어색하게 "엄마"라고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난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부를 수 없었습니다.
왠지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돌아가신 진짜 엄마는 영영 우리들 곁을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으로 피멍이 들수록 난 입을 앙다물었습니다. 새엄마의 말림으로 인해 매 타작은 끝이 났지만 가슴엔 어느새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새엄마를 더 미워하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 방에 있던 엄마 사진을 아빠가 버린다고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엄마 사진 때문에 내가 새엄마를 더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때부터 새엄마에 대한 나의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새엄마는 분명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 만큼 강렬했습니다. 난 언제나 새엄마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 해 가을 소풍날이었습니다. 학교 근처 계곡으로 소풍을 갔지만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습니다. 소풍이라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점심 시간이 되고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 계곡 아래쪽을 서성이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새엄마가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김밥 도시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웃집 정미 엄마한테서 소풍이라고 전해 듣고 도시락을 싸오신 모양이었습니다. 난 도시락을 건네받아 새엄마가 보는 앞에서 계곡물에 쏟아버렸습니다.
뒤돌아 뛰어가다 돌아보니 새엄마는 손수건을 눈 아래 갖다 대고 울고 있었습니다.
얼핏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증오와 미움 속에 중학시절을 보내고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입 진학 상담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와 새엄마는 담임 선생님 말씀대로 가까운 인근의 인문고 진학을 원하셨지만 난 산업체 학교를 고집했습니다. 새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산업체 학교에 원서를 냈고 12월이 끝나갈 무렵 경기도에 있는 그 산업체로 취업을 나가기로 결정됐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 가방을 꾸리는데 새엄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정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경기도에 도착해서도 보름이 넘도록 집에 연락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산업체 공장 생활은 그렇게 시작 되었고 낯섦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옷 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맨 아래 검은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분명 누군가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투 봉투 속에는 양말과 속옷 두벌 그리고 핑크빛 내복한 벌이 들어있었습니다. 편지도 있었습니다.
가지런한 글씨체....새엄마였습니다.
두 번을 접은 편지지 안에는 놀랍게도 아빠가 가져간 엄마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엄마사진을 간직했다가 편지지 속에 넣어서 내게 준 것입니다. 이제껏 독하게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눈물에 씻겨 내렸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그 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습니다.
첫 월급을 타고 일요일이 되자 난 보은행 버스를 탔습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려 들판에 쌓여있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내복 새엄마 아니 엄마는 동구밖에 나와 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빗자루가 손에 들린 엄마 뒤에는 훤하게 아주 훤하게 쓸린 눈길이 있었습니다.
"새엄마.. 그 동안 속 많이 상하셨죠? 이제부턴 이 내복처럼 따뜻하게 엄마로 모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