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4번째 시간으로서 “단번과 완전” 一度と完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10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 10절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0.なぜなら、キリストが死なれたのは、ただ一度罪に対して死なれたのであり、キリストが生きておられるのは、神に対して生きておられるのだからです。
여기서 저는 특별히 ‘단번에’라는 말씀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단번’이라는 말은 한 번, 두 번 할 때의 한 번, 즉 횟수로서
1회라는 뜻도 있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버렸다’라고 한다면, 여기서 ‘단번에’라고 하면 단1회라는 뜻만이
아니라 한꺼번에, 또는 완전하게 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 로마서 6장 10절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절 말씀과 함께 보아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1.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는 율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해 봤자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이는 우리가 이미 공부한 로마서 3장 20절에 나와 있었지요.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율법이 있는 덕분에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주셨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처음에는 아, 내 죄 때문에 이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구나. 뭐, 이러면서 반성의 마음, 회개하는 마음도 가졌겠지요.
그런데 이제 조금 지나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 어차피 짐승 한 마리 갖다 바치면 해결되는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제물, 반성도 없고 회개도 없는 그와 같은 제물을 기뻐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 11절~13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もう、むなしいささげ物を携えて来るな。香の煙、それはわたしの忌み嫌うもの。新月の祭り、安息日、会合の召集──わたしは、不義と、きよめの集会に耐えられない。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점차 사람들은 회개도 없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는 그와 같은 제물들을 바칩니다. 부자들 중에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보이려고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얄팍한 잔머리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온전하지 못한 제물은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안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제물은 아무리 값이 많이 나간다고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모두 다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시각으로 기록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런 주장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이 해놓은 것이지만, 이런 분류가 우리 구원과 성경 이해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느낍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분류가 예수님의 논점을 흐리게 하는 부작용까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성경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는 성경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그리고 그 표현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어
표현을 잘못 번역한 것이며, 그나마 좀 나은 번역은 ‘마지막 만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십니다.
애굽의 왕이 안 내보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게 되는데, 그 중에서 열 번째 재앙,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게 되는 마지막 재앙을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エジプトの地の長子は、王座に着いているファラオの長子から、ひき臼のうしろにいる女奴隷の長子、それに家畜の初子に至るまで、みな死ぬ。
이제 애굽에 있는 각 가정 중에서 장자를 모두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이제 큰 일입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재앙은 애굽 사람이나 애굽 사람의 소유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나 짐승들이 그 대상이에요.
이렇게 된다면 당시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들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가정에서도 장자가 죽게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이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12장
3절~12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절~12절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に次のように告げよ。この月の十日に、それぞれが一族ごとに羊を、すなわち家ごとに羊を用意しなさい。
もしその家族が羊一匹の分より少ないのであれば、その人はすぐ隣の家の人と、人数に応じて取り分けなさい。一人ひとりが食べる分量に応じて、その羊を分け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の羊は、傷のない一歳の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を子羊かやぎのうちから取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は、この月の十四日まで、それをよく見守る。そして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は夕暮れにそれを屠り、
その血を取り、羊を食べる家々の二本の門柱と鴨居に塗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して、その夜、その肉を食べる。それを火で焼いて、種なしパンと苦菜を添えて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
生のままで、または、水に入れて煮て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頭も足も内臓も火で焼か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を朝まで残してはならない。朝まで残ったものは燃やさなければならない。
あなたがたは、次のようにしてそれ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腰の帯を固く締め、足に履き物をはき、手に杖を持って、急いで食べる。これは主への過越のいけにえである。
その夜、わたしはエジプトの地を巡り、人から家畜に至るまで、エジプトの地のすべての長子を打ち、また、エジプトのすべての神々にさばきを下す。わたしは主である。
이를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흠 없는 수컷 어린 양을 잡으래요. 그리고 두 번째로 그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門柱)와 인방(鴨居)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문설주는 출입문 좌우에 세로로 있는 기둥을 말하고, 인방은 그 문설주 위에
가로로 있는 기둥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잡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것이지요.
이게 글로 적혀 있으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당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성인
남성이 60만명 정도라고 하니까, 단순계산으로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하더라도 30~40만 가정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가정집에서 모두 양을 잡고 출입문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랬으니 어땠겠어요. 그 일대가 온통 피냄새로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피를 발랐으면 이제 그 어린양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이랑 같이 먹으래요. 그러니까 고기 굽는
냄새에, 어린 양의 피 냄새에 보통 난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명령을 하셨을까 하면, 그래요. 뭐, 이제부터 먼 길을 떠나게 되니까 그 이전에 든든히 먹고 영양보충을
해두라고 그러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선 왜 어린 양의 피를 그 집 출입구에 바르느냐 하면 그 이유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その血は、あなたがたがいる家の上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しるしとなる。わたしはその血を見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過ぎ越す。わたしがエジプトの地を打つとき、滅ぼす者のわざわいは、あなたがたには起こらない。
이렇게 출입구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쳐서, 장자를 죽이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가시려고 할 때에 그
어린 양의 피를 보시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겠다, 건너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넘어가다’ ‘건너뛰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유월절 내용을 보면 이는 예수님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계시록까지 반복해서 예수님을 흠 없는 어린 양이라고 기록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가로와 세로로 된 기둥에 바른다는
것은, 이는 분명 예수님이 달리신 피 묻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내리시려고 하다가도,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보시면, 사망의 무서운 심판이
우리를 넘어가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때 보면 당시 유월절에 먹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어린 양의 고기입니다. 이 양 고기는 다른 음식들과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양고기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셨는데, 그 장면이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이른바 마지막 만찬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장면은 마태복음은 26장, 마가복음은 14장, 누가복음은 22장, 요한복음은 13장, 이렇게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만찬인 유월절 만찬 자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기에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찬
자리에 양 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4장 22절~25절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一同が食事をしているとき、イエスはパンを取り、神をほめたたえてこれを裂き、弟子たちに与えて言われた。「取りなさい。これはわたしのからだです。」
また、杯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た後、彼らにお与えになった。彼らはみなその杯から飲んだ。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これは、多くの人のために流される、わたしの契約の血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神の国で新しく飲むその日まで、わたしがぶどうの実からできた物を飲むことは、もはや決してありません。」
왜 그 자리에 어린 양 고기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제물로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人の子の肉を食べ、その血を飲ま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のちはありません。
여기서 인자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은 저주 받은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었지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예수님께서는 흠이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로서 십자가로 하는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세례 요한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웠던 놀라운 선지자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저주 받은 죄인으로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시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바쳐지는 속죄제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레위기 6장 25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アロンとその子らに告げよ。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についてのおしえは次のとおりである。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は、全焼のささげ物が屠られる場所、主の前で屠られる。これは最も聖なるものである。
번제라고 하는 것은 불로 태워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불로 태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면, 먼저 장작을
펼쳐놓고 그 위에 제물을 놓은 다음 불을 붙여야 하겠지요. 즉, 예수님 또한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위에 바쳐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속죄제의 제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들린 놋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더라도, 자신들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이 닥쳐오면
곧바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시면 그들의 그 나쁜 버릇이 등장합니다.
민수기 21장 4절~5절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彼らはホル山から、エドムの地を迂回しようとして、葦の海の道に旅立った。しかし民は、途中で我慢ができなくなり、
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는 모세였으며,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곧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시기는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로 나와서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1세대들의 나쁜 버릇이 얼마나 깊게 남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뭐라고 해요? 민수기 21장 5절 후반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그들이 광야를 가리켜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고 해요. 예, 맞습니다. 광야는 원래 그런 곳이에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만나’인 것이지요.
출애굽기 16장 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人が住んでいる土地に来るまで、四十年の間マナを食べた。彼らはカナンの地の境に来るまでマナを食べた。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는 척박한 땅인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 대략 추산하기를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40일도 아닌 40년이나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만나’였던 것이지요.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만나 만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만나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는, 말하자면 전무후무한 완전 식량이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자 넘치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서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이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찮은 음식’이라면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하면,
민수기 21장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蛇は民にかみついたの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多くの者が死んだ。
하나님께서는 불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독사가 되겠지요. 이 불뱀을 보내서 그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축복을 ‘하찮다’고 하다니요. 이와 같은 망언이 어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러셨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7절~9절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정말 저 같았으면 이런 사람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인내심이 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만 하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참
쉽죠?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불뱀처럼 만들고는 그것을 장대 위에 높이 달아 놓았더니 그것을 사람들이 바라보자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뱀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상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사람은 분명
죽음에 이르게 되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달린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예,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뱀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사람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징되는 것이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5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죄는 누구에게 있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상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인 불뱀을 장대 위에 높이 올려서 저주를 받게 하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라는 장대 위에 올려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러 주셨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도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垂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과거에 아무리 값진 제물을 바쳤다 하더라도 이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당해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바로 단번에, 한꺼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10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다고 기록하고 11절에서는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께 대하여’라는 말씀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크고 놀라운 기쁨과 축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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