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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14강 -1 (2011. 4. 4.)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 7. 유인물
一心頂禮 盡十方三世(진시방삼세) 一切諸佛(일체제불)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일체존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일체현성승)
我弟子等(아제자등) 講論三藏(강론삼장) 唯願三寶(유원삼보)
爲作證明(위작증명)
南無本師釋迦牟尼佛(나무본사석가모니불)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隅(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
큰스님께 선채로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잠시 입정을 하겠습니다.
왕복서 읽겠습니다.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
唐 清涼山 大華嚴寺沙門 澄觀(淸涼國師)撰
(당 청량산 대화엄사사문 징관(청량국사)찬)
往復(왕복)이 無際(무제)나 動靜(동정)은 一源(일원)이라
含衆妙而有餘(함중묘이유여)하고
超言思而迥出者(초언사이형출자)는 其唯法界歟(기유법계여)며
剖裂玄微(부열현미)하고 昭廓心境(소확심경)하며
窮理盡性(궁리진성)하고 徹果該因(철과해인)하며
汪洋沖融(왕양충융)하고 廣大悉備者(광대실비자)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인저
故我世尊(고아세존)이 십신초만(十身初滿)에
正覺始成(정각시성)하사 乘 願行以彌綸(승원행이미륜)하시며
渾 虛空爲體性(혼허공위체성)하시니
富有萬德(부유만덕)이요 蕩無纖塵(탕무섬진)이로다
↑ 8강-1
湛智海之澄波(담지해지징파)가 虛含萬象(허함만상)이요
皎性空之滿月(교성공지만월)이 頓落百川(돈락백천)이로다
不起樹王(불기수왕)하사 羅七處於法界(라칠처어법계)하시며
無違後際(무위후제)하사 暢九會於初成(창구회어초성)이로다
盡宏廓之幽宗(진굉곽지유종)하사 被難思之海會(피난사지해회)
하시니 圓音落落(원음락락)에 該十刹而頓周(해십찰이돈주)하시고
主伴重重(주반중중)하사 極十方而齊唱(극시방이제창)이로다
雖空空絶跡(수공공절적)이나 而義天之星象(이의천지성상)이
燦然(찬연)이요 湛湛亡言(담담망언)이나
而敎海之波瀾(이교해지파란)이 浩澣(호한)이로다
若乃千門潛注(약내천문잠주)라 與衆典爲洪源(여중전위홍원)이요
萬德交歸(만덕교귀)나 攝群經爲眷屬(섭군경위권속)이로다
↑ 9강-1
其爲旨也(기위지야)가 冥眞體於萬化之域(명진체어만화지역)하고
顯德相於重玄之門(현덕상어중현지문)이로다
用繁興以恒如(용번흥이항여)하고
智周鑑而常靜(지주감이상정)이로다
眞妄交徹(진망교철)이라 卽凡心而見佛心(즉범심이견불심)이요
事理雙修(사리쌍수)라 依本智而求佛智(의본지이구불지)로다
理隨事變(이수사변)이라 卽一多緣起之無邊(즉일다연기지무변)이
요 事得理融(사득이융)이라 則千差涉入而無礙(즉천차섭입이무애)
로다 故得十身歷然而相作(고득십신역연이상작)하고
六位不亂而更收(육위불난이갱수)로다
廣大卽入於無間(광대즉입어무간)이요
塵毛包納而無外(진모포납이무외)로다
↑ 10강-1
炳然齊現(병연제현)은 猶彼芥甁(유피개병)이요
具足同時(구족동시)는 方之海滴(방지해적)이로다
一多無礙(일다무애)는 等虛室之千燈(등허실지천등)이요
隱顯俱成(은현구성)은 似秋空之片月(사추공지편월)이로다
重重交暎(중중교영)은 若帝網之垂珠(약제망지수주)요
念念圓融(염념원융)은 類夕夢之經世(류석몽지경세)로다
法門重疊(법문중첩)은 若雲起長空(약운기장공)이요
萬行芬披(만행분피)는 比華開錦上(비화개금상)이로다
↑ 11강-1
若夫高不可仰(약부고불가앙)이라 則積行菩薩(즉적행보살)도
曝鰓鱗於龍門(폭시린어용문)이요 深不可闚(심불가규)라
則上德聲聞(즉상덕성문)도 杜視聽於嘉會(두시청어가회)로다
見聞爲種(견문위종)이라 八難(팔난)에
超十地之階(초십지지계)하고 解行在躬(해행재궁)이라
一生(일생)에 圓曠劫之果(원광겁지과)로다
師子奮迅(사자분신)에 衆海頓證於林中(중해돈증어임중)이요
象王廻旋(상왕회선)에 六千(육천)이 道成於言下(도성어언하)로다
啓明東廟(계명동묘)하니 智滿不異於初心(지만불이어초심)이요
寄位南求(기위남구)하니 因圓不逾於毛孔(인원불유어모공)이로다
剖微塵之經卷 則念念果成(부미진지경권 즉염념과성)하고
盡衆生之願門 則塵塵行滿(진중생지원문 즉진진행만)이로다
↑ 12강-1
眞可謂常恒之妙說(진가위상항지묘설)이요
通方之洪規(통방지홍규)며 稱性之極談(칭성지극담)이며
一乘之要軌也(일승지요궤야)로다 尋斯玄旨(심사현지)하고
却覽餘經(각람여경)하니 其猶杲日麗天(기유고일려천)에
奪衆景之耀(탈중경지요)요 須彌橫海(수미횡해)에
落群峯之高(낙군봉지고)로다
是以菩薩 搜祕於龍宮(시이보살 수비어용궁)이요
大賢闡揚於東夏(대현천량어동하)로다
顧惟正法之代(고유정법지대)에도 尙匿淸輝(상닉청휘)어늘
幸哉(행재)라 像季之時(상계지시)에 偶斯玄化(우사현화)하고
況逢聖主(황봉성주)하며 得在靈山(득재영산)하야
竭思幽宗(갈사유종)하니 豈無慶躍(기무경약)이리요
↑ 13강-1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는
卽無盡修多羅之總名(즉무진수다라지총명)이요
世主妙嚴品第一者(세주묘엄품제일자)는
卽衆篇義類之別目(즉중편의류지별목)이니
大以曠兼無際(대이광겸무제)하고
方以正法自持(방이정법자지)하고
廣則稱體而周(광즉칭체이주)하고 佛謂覺斯玄妙(불위각사현묘)하
고 華喩功德萬行(화유공덕만행)하고
嚴謂飾法成人(엄위식법성인)하고
經乃注無竭之涌泉(경내주무갈지용천)이로다
貫玄凝之妙義(관현응지묘의)하며 攝無邊之海會(섭무변지해회)하며
作終古之常規(작종고지상규)로다 佛及諸王(불급제왕)을
並稱世主(병칭세주)오 法門依正(법문의정)을
俱曰妙嚴(구왈묘엄)이니 分義類以彰品名(분의류이창품명)할새
冠群篇而稱第一(관군편이칭제일)이니라
斯經(사경)이 有三十九品(유삼십구품)하니
此品(차품)이建初(건초)라
故云大方廣佛華嚴經世主妙嚴品第一(고운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제일)이라하니라
↑ 14강-1
참으로 날씨가 아주 화창한 전형적인 봄날입니다.
산하대지에는 만물이 이렇게 소생하고 곳곳에 매화꽃ㆍ벚꽃 활짝 피어서 세상을 아주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꽃으로 수놓아가는 이런 봄의 전경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화엄경의 이치가 마치 우리들 세상 사람들 삶에 저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아름다운 보살행으로 수놓아 가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화엄 꽃으로 장엄하다ㆍ아름다운 행위. 다시 말해서 보살행. 보살행으로써 인간 세상에 모든 삶을 아름답게 꾸며갈 때, 그것이 화엄이 아니겠는가?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그 왕복서 일곱 번째, 이제 끝이 됩니다. 왕복서 마지막인데요.
금방 우리가 읽었던
제10門,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 [略釋名題(약석명제)] 그랬는데요. 1, 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雙標二目(쌍표이목)]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는
卽無盡修多羅之總名(즉무진수다라지총명)이며
世主妙嚴品第一者(세주묘엄품제일자)는
卽衆篇義類之別目(즉중편의류지별목)이로다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는 경전의 총명이며, 세주묘엄품 제1이란 곧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다른 이름이다.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는,
제목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말한 것은 卽無盡修多羅之總名(즉무진수다라지총명)이다. 그랬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흔히 “8만 대장경”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經ㆍ律ㆍ論(경률론) 三藏(3장)이 기본이 되고, 뒤에 또 禪藏(선장)이라고 하는 것이 첨가 되지요. 그래서 사실은 四藏이 됩니다. 이 禪藏은 三藏하고 엄격히 따지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四藏이라는 말을 써도 사실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대에서는 선불교 전적들이 다른 어떤 분야의 책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경보다도 많고ㆍ논보다도 많고ㆍ율보다도 많습니다. 특히 이 한국 불교는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禪藏을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뭐 아무튼 그런 것을 모두 우리가 생각을 해서 無盡修多羅입니다. 다 함이 없는 修多羅지요. 그 뒤에 또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그 나름대로 경전 구절을 해석 하면 그것이 또 疏(소)가 되고ㆍ그것이 또 抄(초)가 되고ㆍ그것이 또 論(논)이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끝없이ㆍ끝없이 또 펼쳐져 나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 화엄경은 경문. 즉 원문뿐입니다. 그런데 청량스님께서는 그 원문을 처음에 疏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하셨어요. 疏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일차 해놓고 보니까 아 이것이 疏가 간략하게 돼서, 또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재차 疏에서 다시 해석을 붙인 것이 抄가 됩니다. 그래 “疏 抄” 이렇게 말하지요. 疏와 抄가 2차적으로 해석이 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또 우리가 보면, 우리 나름대로 해석을 또 붙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가면 갈수록 불어나고, 가르침이 자꾸 새로운 어떤 시대에 맞게 말하자면 첨가가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초기에는 사실은 경전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떤 기준을 딱 정해놓고는 “그 기준에 맞지 아니한 것은 성경이 아니다.” 라고 해가지고 전부 배제를 했습니다. 그것도 보면 불교하고 반대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꾸 깎아냅니다. “아니다ㆍ아니다ㆍ아니다.” 해서 꼭 어떤 원칙에 맞는 것만, “기독교성경이다.” 이렇게 정했습니다. 한 때 그렇게 정해가지고 지금 新ㆍ舊約(신구약)이 딱 정해졌고, 그 전에는 그 보다 상당한 량이 더 많았답니다. 그런 반면에 불교는, 지금 누가 경전을 쓰든지ㆍ논문을 쓰든지 하면 그것이 전부 불교 전적 속에 자꾸 포함이 됩니다.
經ㆍ律ㆍ論, 三藏의 역사가 그랬고, 禪藏의 역사가 그랬고 하듯이요.
그야말로 無盡입니다.
修多羅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을 修多羅라고 하는데요.
정확하게 번역하면 契經云(계경운) 이렇게 되어 있지요. 12부를 이야기 할 때, 句句(구구)도 이야기하고, 12부라고도 나누는데 그 속에 契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修多羅인데요. 契經이라고 하는 것은 契자는 계합할 계자인데, 무엇에 계합하는가 하니, 契理契機(계리계기)라. 이치에도 계합하는 것이고, 아무리 중생들을 구제하는 방편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진리에 안 맞으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진리에 안 맞는 그런 방편설이 물론 많아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에 맞아야 된다는 것이고, 또 契機라. 중생의 근기에 맞아야 됩니다. 아무리 우수한 진리라 하더라도 중생의 근기에 안 맞으면 그것 또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修多羅는 “이치에도 맞고, 중생을 구제하는 근기에도 맞는 학설이다ㆍ맞는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참 그런 것들도 너무 아주 정확하게ㆍ논리 정연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요.
화엄경은 그 많고 많은 경전을 전부 포함해서, 禪藏이고ㆍ律藏이고ㆍ經藏이고 할 것 없이 전체를 다 아울렀을 때 한마디로 뭐라고 하느냐?
大方廣佛華嚴經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無盡修多羅之總名. 그랬잖아요. 참~ 이런 표현도 아주 기가 막히지요. 예를 들어서 천태지자스님 같은 이들은 화엄경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만, 그런 스님들은 법화경을 우선으로 보거든요. 이런 말을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요.
하지만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청량스님은 화엄경을 만나서 내가 그 죽을 곳을 얻었다. 豈無慶躍(기무경약)가? 라고 하는 왕복서 구절에, 지난 시간 마지막 구절이지요. 거기에 당신이 또 설명을 붙이기를 아~!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냐?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라고 할 정도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듯이, 청량스님이 보기에는 모든 가르침. 불교의 그 어떤 가르침이라든지, 밀교 경전이든ㆍ현교 경전이든ㆍ선불교 저술이든 간에 다 포함해서 한 마디로 하나의 경전 이름으로 할 수 없느냐? 할 수 있다 이겁니다. 뭐냐?
大方廣佛華嚴經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전체 경전의 대표 이름이다. 이 뜻입니다. 감히 이런 말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원각경 좋아하는 사람은 원각경이 제일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할 수도 있겠고ㆍ능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능엄경이다.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청량스님의 안목은 그렇습니다. “모든 불교 전적의 총론이다.”
世主妙嚴品第一者(세주묘엄품제일자)는,
世主妙嚴品第一이라고 하는 것은
卽衆篇義類之別目(즉중편의류지별목)이다.
그러니까 39품이 있잖아요? 약찬게 안에도 잘 나와 있는 그것이 39篇이 된다는 뜻입니다. 39篇이 있는데 그것의 내용도 물론 다르지요. 義類라. 내용도 각각 다릅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하나하나 분류해서 이름 할 때 세주묘엄품ㆍ여래현상품ㆍ보현삼매품ㆍ화장세계품ㆍ세계성취품. 이런 식으로 낱낱 다른 제목이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내려가서 간단하게,
2,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석다[雙釋二目(쌍석이목)]
大以曠兼無際(대이광겸무제)요
方以正法自持(방이정법자지)요
廣卽稱體而周(광즉칭체이주)요
佛謂覺斯玄妙(불위각사현묘)요
華喩功德萬行(화유공덕만행)이요
嚴謂飾法成人(엄위식법성인)이요
經乃注無竭之涌泉(경내주무갈지용천)이로다
대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은 정법을 스스로 가짐이요, 광은 체에 합하여 두루함이요, 불은 현묘함을 깨달음이요, 화는 공덕만행을 비유함이요, 엄은 법을 꾸며 사람 이룸을 말함이요, 경은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댐이다.
大以曠兼無際(대이광겸무제)요. 첫 시간에 화엄경 제목을 설명할 때 간략하게 말씀드린 부분인데요.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설하다. 했습니다. 大ㆍ方ㆍ廣ㆍ佛ㆍ華ㆍ嚴ㆍ經할 때, 大라고 하는 것은 뭐냐?
曠兼無際다. 널리 두루두루 겸했다. 전체를 다 겸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겸했느냐? 無際다. 제한이 없다. 끝이 없다. 한계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한계 없이 넓고 넓다는 뜻이 大方廣佛華嚴經할 때 그 大다. 그랬습니다.
경허스님은 뭐라고 하셨지요? 大만 대가 아니라, 담뱃대도 대요ㆍ산에 있는 대도 대요ㆍ무슨 대도 대요ㆍ곡식 되는 대도 대요. 제가 처음에 그것을 만나고는, 경허스님이 화엄경 제목 해석한 것을 만나고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정말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허스님 아니고는 이런 해석 할 수가 없다. 아마 청량스님도 이렇게는 해석 못할 것이다.’ 하는 정도로 그런 어떤 감동을 받았습니다. 曠兼無際라고 하는 것 참, 무한히 큰 것을 의미하는 그런 大方廣佛華嚴經이다.
方以正法自持(방이정법자지)라.
方은 우리가 행동이 아주 모범일 때 바를 正자 겸해가지고 “방정하다.” 그러지요? 아주 정확하다ㆍ절도 있다ㆍ뭐든지 어디든지 흐트러짐이 없다. 예를 들어서 신을 정리 하든지, 방석을 정리 하든지, 그야말로 얼마나 아주 절도 있게 정리를 잘 해 놨는가?
그와 같이 이 바른 법이라고 하는 것은 大方廣佛할 때 이 方자 안에 그런 의미를... 이 세상의 모든 바른 이치. 참되고 바른 이치를 다 方자에다 담았다. 하는 것입니다. 정법을 스스로 가진 것. 거기에 다 포함시키고 있는 것. 이런 말입니다.
경허스님은 뭐라고 했지요? 大方廣佛華嚴經하는 이 方만 방이 아니라,
큰방도 방이요, 지대방도 방이요, 방자가 붙은 것은 다 方이지요.
大方廣佛華嚴經의 그 方만 방이냐? 이렇게 해서 정말 화엄경의 깊고 넓은 뜻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廣卽稱體而周(광즉칭체이주)라. 체에 칭합 하여 두루 하다. 넓을 廣자니까요. 大方廣佛할 때 그 광자의 뜻은, 진리의 본체에 칭합해서, 그러면 “진리의 본체” 라고 하는 것은 어디 있지 아니한 곳이 없지요. 그래서 “두루 하다.”모든 곳에 다 펼쳐져 있다. 이런 뜻입니다.
佛謂覺斯玄妙(불위각사현묘)라. 부처 불. 大方廣佛할 때.
우리는 “대방광불ㆍ화엄경” 이렇게 읽지요? 이것은 4ㆍ3調(조)로 읽는 우리 습관 때문에 그러는데요? 사실은 “대방광ㆍ불화엄경” 이렇게 읽어야 맞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띄어서 읽으려면요.
대방광불ㆍ화엄경 ←이것은 4ㆍ3調, 우리 전통 한국 사람의 언어 습관에 의한 것이지, 정확하게 읽으려면 대방광ㆍ불화엄경. 꼭 “대방광ㆍ불화엄경” 이라고 원칙을 지켜서 읽는 스님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는 밑으로 붙여서 읽어야 된다는 이런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佛謂覺斯玄妙라. 그랬지요? 佛은 玄妙함을 깨달았다. 아주 깊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華喩功德萬行(화유공덕만행)이다. 우리가 꽃ㆍ꽃. 여기(법회 실)도 꽃으로 장엄해 놓으니까 아주, 한결 분위기가 좋게 보이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꽃이라고 하면, 사실은 이런 식물로써의 꽃이 아니라, 아름다운 행위ㆍ아름다운 말씨ㆍ아름다운 몸짓ㆍ아름다운 마음씨. 身口意(신구의) 3업을 통해서 아주 꽃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때,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꽃입니다.
身口意 3업을 통해서 아름답게 표현해야 세상이 아름다워 집니다.
옆 사람이 아주 좋아합니다ㆍ이웃 사람이 좋아합니다ㆍ이웃 나라가 좋아합니다. 그러면 아주 척박한 땅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 사회는 정말 아름다운 사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功德萬行이라고 했잖아요. 功德萬行을 비유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꽃이라고 하는 것은 功德萬行을 비유한 것이다.
공덕은 뭡니까?
그저 남을 위해서 사는 것ㆍ남 잘 되도록 하는 것ㆍ남을 배려하는 것. 그것이 공덕입니다. 큰 일이든ㆍ작은 일이든 간에 무조건 남을 배려하는 일이, 남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것. 이것이 功德萬行이거든요.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고ㆍ우리 세상의 물질로 비유하자면 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꽃을 가지고 장엄 해놓은 것과 같다.
嚴謂飾法成人(엄위식법성인)이라. 嚴이라고 하는 말은 뭐냐?
飾法 = 법을 장식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嚴입니다. 장엄할 때도 嚴자를 쓰지만, 飾이라고 하는 말도 嚴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꾸민다ㆍ장식한다.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그 법을 통해서 사람을 성숙시킨다. 사람을 만든다. 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정말 成人의 가르침이 없고,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이 갖고 있는 본능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수많은 成人들이 나와서 그렇게ㆍ그렇게 가르쳤건만, 그렇게 많이 가르쳐줬지만, 지금도 이 세상은 참 삭막하고ㆍ험하기 이를 데 없고, 뉴스에는 전부 그저 잘 못한 것ㆍ부정 저지른 것. 온갖 그런 사람의 잘 못한 것만 뉴스로 등장하듯이 세상이 그런데, 만약에 成人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지요. 飾法成人이라. 참 좋은 말입니다.
經乃注無竭之涌泉(경내주무갈지용천)이라.
經이라고 하는 것은 이에 다 함이 없는ㆍ끝이 없는 어떤 샘물을 대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經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思考(사고)ㆍ우리의 행동. 여러 스님들이 일선에서 포교를 하시든지ㆍ법문을 하시든지ㆍ간단하게 1:1로 신도님들을 만난다든지ㆍ관광객에게 간단한 무슨 전각을 하나 설명한다든지 하는 것. 이 근거가 결국은 뭔가 하니, 전부 經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부 經에서 나온 겁니다. 경이 근거가 돼가지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편리하게 이렇게 설명되고ㆍ저렇게 설명되고ㆍ그 설명을 우리가 그냥 구두로 이렇게 들어서, 선배 스님들로부터 구두로 들어서 이런 것이다ㆍ저런 것이다ㆍ불교는 이런 것이다ㆍ참선은 어떤 것이다ㆍ부처님은 어떤 분이다ㆍ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다. 라고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 근본은 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은 우리불교의 고전. 한 마디로 합해서 그렇게 봅시다. 經뿐만이 아니라 선불교의 모든 전적까지 다 포함해서 이 전통적인 우리 고전은, 모든 불교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思考를 할 것인가? 그 사고의 근거가 경전과 어록이 됩니다. 또 우리가 전법을 한다ㆍ포교를 한다ㆍ어디 가서 설법을 한다ㆍ어디서 강의를 한다ㆍ아니면 논문을 쓴다. 전부 그 근거가 무엇이 되는가 하면 우리 불교의 고전들입니다. 經ㆍ律ㆍ論, 三藏과 이 선불교 전적들이지요.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아니해 놓으면, 늘 어디 가서 교수 노릇을 하든지ㆍ어디서 포교를 하든지ㆍ설법을 하든지ㆍ주지를 살든지 해도 항상 딸려요. 밑천이 딸려요. 그래가지고 늘 마치 세금을, 한 1년 치 세금을 못낸 장사꾼 같이 심정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