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삼은 아시아삼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이 일반적이었지만 중국 의학계에서도 빠른 속도로 수용되었다. 북아메리카 인삼을 중국에 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프랑스의 모피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캐나다에서 다량의 인삼과 모피무역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프랑스 모피 상인들의 성공담이 퍼져나가자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다른 유럽 출신 상인들도 유럽 교역에 가세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동원해 캐나다와 미국의 산속을 뒤지게 했다. 인삼이 중국에서 은의 여덟 개 가치로 거래된다는 풍문이 자자한 가운데 북아메리카의 유럽인들은 이 엄청난 기회를 잡으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1740년대 후반이 되자 그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원주민들은 인삼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산속을 뒤지고 다니느라 캐나다 지역에서는 수확철이 되어도 일손을 구할 수 없었다. 영국령이나 프랑스령이나 상황은 똑같았다. 인삼을 캐고 파는 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그어놓은 국경선마저 의미 없게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인삼을 팔아 담요나 음식 등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는 현금을 손에 넣었다. 선교사들은 인삼으로 ‘돈맛’을 알게 된 원주민 사회가 타락에 빠질 것이라며 크게 걱정했다. 캐나다의 모피 상인들이 원주민들을 동원해 캐낸 인삼을 부지런히 수출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인삼이 발견되었다. 미국 곳곳에서는 19세기 서부의 골드러시와 흡사한 ‘삼 찾기’ 붐이 일었다. 인삼의 발견은 당시 미국 식민지 지식인들 사이에 엄청난 뉴스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738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인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자신이 발간하는 신문에 실었다.
“인삼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중국의 식물이 우리 주에서 발견되었음을 알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식물의 효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알려졌습니다."
원주민들은 인삼을 채집해서 번 돈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삼을 찾아 나서던 당시 미국에서 인삼에 애국주의적 색채가 가미됐다. 18세기 미국의 지리서, 여행기, 생활책력, 심지어 교과서는 미국 여러 지역에서 인삼이 발견된 사실을 뉴스로 삼으며 인삼을 그 지역의 특산품이나 미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으로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