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용서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제 마음이 어느 때
불쑥 용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발견하면
다시 고통스러워집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식적이고
형식적인지 오로지 참담할 뿐입니다.
어쩌면 용서한다, 용서한다 하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을 다 보낼 것 같습니다.
용서를 한다는 게
상대방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용서하기란
헤엄을 치지 못하는 제게
한강을 헤엄쳐 건너가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움은 저를 먼저 멍들게 합니다.
아니, 멍들게 한다기보다
저를 먼저 파괴해버립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일이
그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길을 가다가 지하철을 타다가 갑자기
두더지처럼 불쑥 미움이 치솟아 올라
저를 괴롭힙니다.
사랑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분명히 사람을 미워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고
자기가 건너가야 할 다리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제가 미워하는 사람들은
한때 저와 친했거나 가까웠던 사람들입니다.
절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때 저와 관계가 좋았던 사람들입니다.
개중에는 지금도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았던 마음이 언제 무너져
미움의 싹이 텄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작은 일에서 미움이 싹터
크게 증오의 열매를 맺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친했던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미움이란 원래 가까움과 친밀함을
먹고 싹을 틔우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면
미워할 필요조차 없었을 겁니다.
미움의 원인은
대부분 저를 무시하거나
배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았거나
저의 자존심과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거나
경제적인 손실을 입힌 일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인격을 무시한
일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미움은 단순히
미움으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저를 파괴하고 제 인생을 파괴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 인생을
바꾸어 버리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 용서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은 용서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잊을 수 있게는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
말 마디마디가 희미해집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미워했더라?’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감정의 격렬함은 옅어지고
감정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 찌꺼기조차
차차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시간의 힘에만 맡겨 버리고 있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으면
스스로 잊기라도 해야 합니다.
가장 잊어 버려야 할 일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우리이지만
의지를 갖추고 잊어버리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용서를
청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지금껏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일에만 마음을 썼지,
남이 나를 용서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했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소홀했다기보다 아예 외면하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서로 똑같은 무게를 지닌 일임에도
어쩌면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이
몇 배나 더 많을지 모르는데도,
저는 제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일은 등한시해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남의 잘못을 절대로 잊지 않고
앙심을 품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남이 나한테 잘못한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나도 남한테 잘못했을 터인데도
남이 나한테 잘못한 일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께서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라는
내용의 글을 쓰신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주 갖는데,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을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 남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추기경의 이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 같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맞아. 나는 용서할 처지에 있는 게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거야.
내가 누굴 용서할 생각을 하기 전에,
내가 용서받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해.
그리고 그런 생각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용서를 청해야 해.
청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용서해주겠어?
나도 청하지 않으니까 용서해주지 않잖아.
남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는 거야.’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사람보다
용서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려고 하니
먼저 제 잘못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남이 나를 용서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내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잘못을 깨닫는다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좁쌀만 하고
남의 잘못은 대들보만 하게 보였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라는 예수의 말씀이 딱 맞는 말이어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뭔데?”
하는 생각이 뱀의 혀처럼
끊임없이 날름거려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했다 하더라도
막상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얼른 용서를 청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온갖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저의 잘못을
언제가 무조건 용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용서에는 이렇게 자식을
용서하는 모성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시의 모성적
면모라고 하기도 합니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중에
오랫동안 탕자로 떠돌다가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반가이 끌어안으며 맞이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습니다.
성서에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탕자가 배경이 된 그림입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아들의 어깨 위에 놓인
아버지의 두 팔을 의도적으로
하나는 남자의 팔로,
다른 하나는 여자의 팔로 그려놓았습니다.
그것은 렘브란트가 신의 사랑과 용서에는
모성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용서해 주는 사람은
렘브란트 그림에 나타난 아버지처럼
그렇게 우월성이 없어야 합니다.
용서해주는 사람의 우월성이
용서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용기를 짓눌러서는 안 됩니다.
용기가 짓눌리면 결국
용서를 청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엄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하고 말할 때,
단 한 번도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알았다. 이 녀석아”
하시면서 늘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아빠, 잘못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아버지라는 권위성과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라고 묻기보다
“앞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용서해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의 늙은 어머니처럼 미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내어
진실의 얼굴로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용서는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참다운 용서는
상대방을 위안해주고 안심하게 해줍니다.
참된 용서에는 위안과 격려가 있습니다.
어머니처럼 무조건적입니다.
예수도 진정 용서하려면
조건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 정호승의 산문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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