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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도봉산도 한때 입장료를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8년부터 2007년 국민불편 해소 차원으로 없어졌다니,
정확히 20년이었네요. 기간이 짧다보니 입장권 도안 모으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네 뒷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북한산에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생각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만큼 입장료가 있던 그때 그 시절 재미있는 이야기 많았죠.
샛길에 대한 정보도 공유되었고^^, 연간탐방권이라는 제도도 있었고요.
아래는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1'에서 조승익과 최병기님의 글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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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서울시로부터 인수받은 북한산을 관리하기 위해 전국 공원사무소에서 1명씩 차출되었다. 당시만 해도 지방사무소에서 북한산 근무를 희망하는 직원은 드물었다.‘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다’라는 말대로 서울은 인심이 각박하고 우리 봉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곳이라는 인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첫 근무지인 우이분소에서는 1988년 11월부터 공원입장료를 징수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12월 6일부터 공원입장료 징수를 시작했다.
징수 첫날, 예상대로 서울 시민들의 저항도 거셌다.
전년도에 서울시에서 입장료 징수를 시도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적도 있었다 한다.
자유롭게 이용하던 북한산을 돈을 주고 입장하는 것이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년도에 서울시에서 입장료 징수를 시도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고 하는데...
같은해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서울시는 반대하고 있군요...~~~
더 검색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네요.
입장료 징수의 논리는 쓰레기 청소비가 주라는 것도 보이고요..
참고로 입장료는 어른 400원, 어린이 140원입니다.저시절 버스비는 얼마였을까나...
12월 1일부터 1주일간 입장료 징수에 대한 집중적인 홍보를 한 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탐방객과 실랑이를 벌인 날보다 벌이지 않은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매일 다툼의 연속이었다.
관내 사찰과의 협의, 마을 주민과의 협의를 거쳐 주요 입구에 매표소를 설치하였다. 매표소 안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반발도 극심했다. 삶의 터전을 잃을까 걱정이 많던 주민들이 어렵게 설치한 매표소를 밤새 부수기도 했다
당시 북한산은 아침저녁으로 약수터에 가는 사람, 배드민턴, 탁구 등 동호회 활동을 위해 동네에 마실가듯 산에 가는 사람, 모험심이 넘쳐 다녀보지 않은 길을 찾기 위해 주말마다 이곳저곳 등산하는 사람, 음식점에 가는 사람, 수백 곳에 이르는 사찰에 가는 사람 등 다양한 탐방객이 혼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입장료 징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가려는 탐방객들과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별별 에피소드가 다 있었다.
그러다 보니‘봉이 김선달보다 더한 놈들’‘, 국회의원(?)보다 더한 놈들’,‘산적 같은 놈들’등
평생 들을 욕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욕을 배가 부르도록 먹었고,
욕을 먹어서 그런지 입안이 까칠해 입맛도 없었다.
그런데도 철옹성 같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 덕분에 가뜩이나 많은 북한산의 샛길은 더욱더 늘어갔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 가
직원들이 전대(돈가방)를 차고서 입장료를 받았다.
'
공단에서는 시민들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징수 방법 변경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냈고,
수개월이 걸려서야 입장료 징수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점점 정착된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가 2007년에 국민 불편 해소 차원에서 폐지되니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입장료 문데...
이 문제는 시민들과 등산잡지의 입장도 들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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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31일 입장료를 놓고 찬반이 가열되는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경향신문 기사 중의 사진입니다. 숲속 길 오른쪽의 저 건물이 무엇이었을까요?
산길로 한참 들어온 것 같은데..혹 엄홍길씨 아버지가 하던 상점 그런거였을까요?
전문을 읽으시려면
내 인생의 강적, 북한산
나마‘감사하고 수고 많이 했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공단 생활은 1985년 지리산국립공원에서 시작됐고 북
한산과의 인연은 1988년부터였다. 1987년에 서울시로부터 인수
받은 북한산을 관리하기 위해 전국 공원사무소에서 1명씩 차출되었
다. 당시만 해도 지방사무소에서 북한산 근무를 희망하는 직원은 드
물었다.‘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다’라는 말대로 서울은 인심이
각박하고 우리 봉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곳이라는 인식이 많았기 때
문이다.
지방 공원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온 나로서는 모든 것이 낯설고 생
소하였다. 특히 북한산국립공원의 첫 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산은
무질서한 이용으로 인해 온통 망가지고 훼손되어 국립공원이라는 말
이 무색할 정도였다. 주말이면 수만 명의 탐방객이 밀려오는데 새까만
머리가 도로를 꽉 채워 검은 물결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휴일에
쉴 수 있는 자연이 가까이 없는 서울사람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 근무지인 우이분소에서는 1988년 11월부터 공원입장료를 징수
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관내 사찰과의 협의, 마을 주민과의
협의를 거쳐 주요 입구에 매표소를 설치하였다. 매표소 안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반발도 극심했다. 삶의 터전을 잃을까 걱정이 많던
주민들이 어렵게 설치한 매표소를 밤새 부수기도 했다. 이런저런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12월 6일부터 공원입장료 징수를 시작했다.
징수 첫날, 예상대로 서울 시민들의 저항도 거셌다. 전년도에 서울
시에서 입장료 징수를 시도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적도 있었
다 한다. 자유롭게 이용하던 북한산을 돈을 주고 입장하는 것이 불편
하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장료를 징수하기 위해 주 입구에 매표소를 설치했다. 도선사 길
의 경우에 도로를 막아 놓은 상태에서, 차를 타고 오는 사람과 걸어서
오는 사람을 분리해서 입장료를 받았다. 매표소 전방 10m 전부터 직
원들이 서서 매표소 쪽으로 탐방객을 유도하고, 차량에 대해서는 직원
들이 전대를 차고 10명 정도가 이동매표를 했다. 사찰 버스나 관광버
스가 오면 직원 1명이 버스에 올라가 입장료를 징수하고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별별 에피소드가 다 있었다.
“동네 뒷산을 가는데 왜 입장료를 내라고 하느냐!”
“물 뜨러 가는데 왜 입장료를 받느냐!”
“나는 입장료 못 내니 법대로 해라!”
욕하고 싸우려드는 일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입장료 내고 가라
고 잡는 직원에게 험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땐 직원들도 사
람이기 때문에 욱하고 치받지만 맞대응 못하는 입장이라 분기를 꾹꾹
눌러 참느라고 힘들었다.
차량매표할 때는 더 힘들었다. 차를 세우면 서지 않고 가기도 하고,
서지 않고 가는 차를 막는 직원을 차 앞에 매달고 20m 정도 달리다
서는 경우도 허다했다. 비까지 오는 날이면 하루가 엄청 길고 피곤했
다. 매표소가 없는 탐방로에서 이동 매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표소도 없는데 왜 입장료를 받나?”
“입장료 받는 것이 합법적이냐?”
“당신을 어떻게 믿고 돈을 주느냐?”
돈 내기 싫어서 샛길로 오고선 억지 부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
게 우여곡절을 거쳐 점점 정착된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가 2007년에
국민 불편 해소 차원에서 폐지되니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
기만 하다.
그 당시 공원 현장 업무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업무는 불법단속 업무
였다. 초창기 북한산국립공원은 불법 시설물과 불법 행위의 천국이었
다. 공원 내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노점상이 성업 중
이었다. 도로변이나 주요 공터엔 하루에 수백만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형 노점상과 리어카나 좌판을 이용한 노점상이 있었다.
매표소를 지난 계곡 주위에서도 고정 움막을 짓고 좌대를 깔고 하
늘이 안 보일 정도로 천막을 친 채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음식물 조리
과정에서 기름을 닦은 설거지물까지 계곡에 버려 수질 오염을 가중시
켰다. 고지대의 주 능선 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쉼터 변에는 어
김없이 노점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 버너에 물을 끓여 국수나 라면,
막걸리를 팔았다.
물론 단속도 힘들었다. 식용유와 고춧가루를 섞은 설거지물을 뿌리
는 것은 다반사고, 차바퀴 밑에 들어가 버티면서 물건을 못 가져가게
했고, 가스통에 불을 붙여 접근을 못하게도 했다. 이런 저항을 뚫고 강
제 철거를 한 날 밤이면 산불이 9곳에서 동시에 발생하기도 했다.
도봉산의 경우 서원 터까지 2km 구간의 도로변에 수백 톤의 흙을
쏟아 붓고 화단을 조성하여 노점상 터를 줄여나갔다. 물론 직원들이
직접 작업했는데, 비용은 예산 한 푼 지원 없이 기업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현장에서 압수한 노점상의 물건이 분소 창고에 산더미였다. 어떤
노점상은 자기 물건을 절도했다고 직원을 경찰에 고소해 직원이 경찰
에 붙잡혀 갔다 나오기도 했다. 산속 노점상 철거도 쉽지 않았다. 단
속 시 탐방객이 합세해서 방해했고, 철거한 물품을 가지고 하산하는
일도 힘들었다. 여기저기 땅을 파서 분산시켜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순찰 시에는 그걸 숨겨놓을 만한 장소를 찾아 땅속을 두드리면서 보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48249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물찾기 아닌 비밀 아지트를 찾기도 했다.
땀 흘리고 올라온 탐방객에게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꿀맛이겠지
만 그걸 보는 사람에게는 불쾌감을 주었다. 많이 마시면 고성방가에
넘어져 다치거나 토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이야 그런 곳에 쾌적한 자
연의 향기가 있지만 당시에는 시큼털털 좋지 않은 냄새가 진동을 했
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순찰 시 그곳을 지날 때면 노점상을 단속하
고 그들과 부딪쳤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혼자서 피식 웃곤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단속해온 결과, 현
재 북한산에는 노점상이 없다. 도선사 광장에 있던 마지막 노점상도
2011년 말에 완전히 없어졌다. 노점상이 차지하였던 장소는 탐방객의
주차 공간, 보행 공간,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국립공원의 청소 업무에는 변천 과정이 있다.
1970∼80년대에는 쓰레기를 땅속에 파묻었고, 90년대 초반에는
소각하여 재를 파묻었고, 중반부터는 땅속에 파묻은 쓰레기를 파내
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환경보호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면서 환
경단체의 감시나 고발도 공원 관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
을 했다.
초창기 여름철의 북한산 계곡은 글자 그대로 진풍경이었다. 삼겹살
구워 먹기가 대세였다. 오전 11시 정도면 계곡 전체가 뿌옇게 연기로
뒤덮이고 삼겹살 냄새가 진동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밥을 하여 삼
겹살을 구워먹고, 물에 발을 담그고 화투를 치며 놀다가는 게 서민들
의 피서였다.
토, 일요일에 탐방객이 놀다간 자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고,
전 직원들이 총동원되어 대청소를 했다. 수백 톤의 쓰레기를 수거하
여 썩은 물과 구더기가 뚝뚝 떨어지는 마대 자루를 지게에 지고 하산
했다.
땅속에 묻은 매몰 쓰레기도 수백 톤 파냈다. 탐방로 상 쉼터 주변
과 야영장에는 매몰 쓰레기가 가득했으며 노점상 주변도 마찬가지였
다.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쓰레기가 묻혀 있는 지역은 땅을 두드리면
소리가 울린다. 북한산에 묻힌 매몰 쓰레기를 2년간 수백 톤 캐냈고,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지 않은 쓰레기가 나오곤 한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정책도 변천이 있었다. 우선 자기 쓰레기 되
가져가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때 동참자에겐 쓰레기량에 따
라 사은품으로 입장권을 줘 다음 방문 시 무료입장이 가능하도록 하
였다.
수백 개 있던 쓰레기장도 단계적으로 철거했다. 산 정상과 야영장
에 있는 것을 먼저 철거했고, 그 다음으로 중지대나 도로변에 있는 것
을 철거했다. 마지막으로 저지대에 있는 쓰레기장을 철거하고 탐방로
입구에 분리수거대를 설치하여 가져오는 쓰레기를 받아오다가, 2007년
부터 그린포인트 제도 도입과 동시에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가져가도
록 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제도가 정착되었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50251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국립공원에서 무질서 행위를 막고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취사 및
야영을 금지하는 제도를 1991년도에 북한산에서 시범 도입했다. 몇 달
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단속을 시작했다. 공원 입구에서는 버너 등 취
사도구 반입을 통제했고, 분소별 단속조를 편성하여 주요 계곡을 순
찰하면서 단속했다. 위반자가 대부분이어서 어디서부터 단속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 단속에 협조하는 사람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했지만, 비협
조자는 경찰 지원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형평을 기하기 위하여 비협
조자의 경우는 버너를 압수하여 나중에 찾으러 오라고 하는데, 버너
를 보관할 장소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홍보와 단속
을 병행하여 1년이라는 단시간 내에 취사·야영 금지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었고, 이러한 금지 제도는 전 공원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탐방객 수가 많다 보니 북한산에는 크고 작은 산불이 잦았다. 초창
기에 일요일이면 보통 2∼3건의 산불은 보통이었다. 한 장소에서 진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장소에서 산불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원인
은 대부분 이용객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북한산에는 100여 개의 무당터가 있었다. 호랑이굴,
거북암 등 주요 이름 있는 무당터는 당시 상계동의 34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의 프리미엄이 형성되어 매매될 정도였다. 연초나 입시철이면
점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무슨‘도사’,‘보살’,‘동
자’들이 살았다.
산불을 줄이기 위해서 이러한 무당터를 하나하나 정비해 나갔다.
자진해서 나가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강제 철거했다. 무속인들이 무
당터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하다 보니 철거도 쉽지 않았다. 무당터 안
에서 꼼짝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럴 땐 여러 명이 불끈 들어 강
제로 데리고 나온 후 곧바로 철거했다.
“급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삼대가 빌어먹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갖은 욕설과 악담을 퍼부어 철거하는 직원들을 찜찜
하게 만들었다. 철거 후에도 상습적으로 재발되는 곳은 암모니아 냄새
가 나는 물질을 뿌려 아예 접근을 못하도록 했으며, 매일 산불취약 지
역을 밤 10시까지 야간 순찰하여 산불을 예방했다. 철거한 무당터도
찾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잊힌 장소가 되었다.
북한산 정릉계곡에는 큰 수영장 2개소가 있었고, 계곡 변에 14개의
매점이 성업 중이었다. 수영장과 매점은 말년에 김두한 씨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살기 위해 한남물산과 합작하여 서울시에 기부 체납
하는 조건으로 지었다.
수영장은 계곡을 막아 지었으며 계곡물을 끌어 염소로 소독한 후
수영장 물로 사용했다. 소독된 수영장 물로 계곡수가 오염되었고, 14
개의 매점은 계곡에 시멘트좌대를 만들고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천
막을 치고 영업했다. 설거지한 생활용수는 계곡으로 버려져 계곡 오
염의 주범이었고, 수영장 오픈 시기에는 건달이나 조폭들이 수시로 드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52253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나들며 위협하는 횡포도 많았다. 조직폭력배들이 야밤에 분소 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놓는 사고도 있었고, 밤에 쳐들어와 근무 중인 직원을
집단구타하는 일도 있었지만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무소에서는 기부체납된 수영장과 매점에 대해 서울시로부터 철
거 승인을 받아 행정대집행으로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세입자들의 저
항이 거셌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세입자를 보호하는 가운데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 철거를 완료했다. 이듬해에는 계곡을 막고 있던 수영장
도 마저 철거하여 정비했다. 14개 매점도 철거하면서 그곳의 운영자들
에게 휴게소 두 동을 지어 먹고살도록 배려했다.
당시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였던 정릉계곡이 지금은 완전 복원
되어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매년 봄이면 청둥오리가 새
끼를 낳아 기르는 청정계곡으로 변했다.
북한산 내 차량 운행이 탐방객에게 불편을 주는 문제도 골칫거리였
다. 특히 북한산성 지역과 송추, 도봉산 지역이 그랬다. 도봉산 지역은
초창기에 관내 사찰 스님들과 차량통제 시설 설치를 위해 협의하는 것
부터 골치 아팠고, 설치 후 정착될 때까지도 수많은 진통을 겪었다. 설
치한 그날 밤에 파손되곤 하여 전파사에서 껍질만 있는 공갈 CCTV를
구입하여 설치하기도 했다. 직원들이 잠복근무도 하여 결국은 정착시
켰지만 북한산성과 송추 지역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송추 지역은 마을 입구에 있던 매표소를 마을 끝으로 옮겨 당장의
문제를 해소하였으나 북한산성 지역은 문제가 달랐다. 차량통제소를
지나 2km의 계곡 변에 55가구의 주택과 음식점, 그리고 20여 개의 사
찰과 암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운행하는 차량수가 100여 대나 됐다.
특히 일요일, 공휴일에 사찰에서는 신도들을 실어 나르는 차량과
음식점에서 운행하는 차량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빨리, 한 번이라도 더 운행하기 위한 운전자의 과속과 난폭운전으로
탐방객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적음과 먼지로 탐방 불편 민원이 국민신문고나 환경부에 제기되
었고, 통제소나 분소를 직접 방문하여 항의하는 민원이 헤아릴 수 없
이 많았다. 이런 혼잡한 상황 때문에 직원들도 통제소 근무를 기피했
고, 등산로 순찰조에 편성되기만을 바랐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민간담회를 통해 협조를 당부했고, 도로에 직
원을 배치하여 과속 단속도 해봤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민
끝에 주민 차량 운행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셔틀버스를 구입, 운행
하도록 했으나 이마저도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여 중단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산성과 송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이주시키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54255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는 것만이 해결책이다’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이주대책 사업이 급물살
을 타기 시작하여 두 지역 이주 대책의 타당성에 대한 연구용역이 완
료되었고 공원 계획에 반영되어 용지 보상비가 책정되었다.
당초 송추 지역은 북한산성보다 추진이 빨랐으나 주민공청회 등
진행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사업 진척이 잘 안 되었
다. 하지만 북한산성 지역은 큰 수영장 등을 협의매수 후 철거하는 데
초창기 사업비 대부분을 사용함으로써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08∼9년에 이주단지 조성 공사를 완료하였고 북한산성 이주 대책을
공고하였다.
이주단지 분양계획이 공고되고 이주 대상자 중 사무소 방침에 협조
하는 자는 분양추첨 우선순위를 주어 이사 후 건물이 철거되도록 유
도함으로써 이주단지 분양을 완료하였다. 또한 이주단지를 친환경적
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민·관이 참여하는 이주단지건축심의회를 구성,
사전 검토와 심의를 통해 신속히 허가하여 이주할 집을 짓도록 했다.
본소에 근무하던 나는 이주사업 중 가장 힘든 시기인 2010년 초
에 산성분소장으로 발령받았다. 나는 북한산성 마을 이주 및 철거를
연내에 마무리 지으라는 소장님의‘말 없는 특명’을 받았다고 생각
했다.
처음 소장님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가장 복잡한 시기에 왜
하필이면 나야?’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관할 분소장의 입장에
서 현장을 둘러봤을 때의 느낌은 본소에서 근무할 때와 또 달랐다.
마을 전체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마구잡이로 나가자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주를 반대하였던 사람들과 세입자들은 우리 직원들을 바라보는
눈과 행동이 살벌하여 마치 악에 받쳐 있는 듯하였다.‘과연 이 사람
들을 연내에 아무 탈 없이 이주시킬 수 있을까?’걱정이 앞섰지만, 우
선 전체 이주 대상 건물주와 세대주, 세입자를 3번씩 만나 인사드리면
서 이주 계획에 대하여 여쭤봤다.
이주에 찬성하였던 주민 대다수도 겉으로는 조속히 이사하고 이주
단지가 건축되면 입주하겠다고 말하였으나, 내심은 보상금을 충분히
받고 건축이 다 될 때까지 현장(북한동)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특히 장사가 잘 되는 집일수록 더했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구체적인
대책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내려갈 때 같이 이사 가겠다.”
“집 구할 돈이 없어 이사 못 간다.”
이렇게 그들은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은 전체 대상자 현황을 놓고 성향 분석을 했다. 그리하여 이주
단지가 완공되면 이주할 그룹, 입주권을 팔고 나갈 그룹, 대책이 없는
세입자 그룹,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눠서 대처하기로 했다.
이주단지에 입주할 대상자에게는 신속하게 설계하여 건축을 하도
록 촉구했고, 입주권을 팔고 나갈 대상자에게는 이사할 장소를 빨리
물색하여 이사하도록 유도하고 마땅한 장소도 알선해줬다. 이주단지
에 건축물이 완성되어 입주식을 할 때나, 타 장소로 이사하여 개업식
을 할 때에는 사전에 가게 운영에 필요한 물품이 뭔지를 파악한 후 준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56257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비하여 분소 직원들과 함께 방문하여 축하를 해 주었다.
매일 마을을 한 바퀴씩 돌면서 추진 사항을 점검하고 이주를 촉구
했다. 아울러 영업이 잘되면 하루라도 더 장사를 하고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자유롭게 차량이 운행되는 것
을 막아야 했고, 여름철에 계곡을 찾는 사람들을 못 오게 하는 방법
과,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우선 계곡을 국립공원 특별보호구로 지정하여 사람 출입을 못 하
도록 했다. 계곡 변에 산재한 주택이나 가게를 철거하기 전이라 정식
통제 시설도 설치할 수 없는 여건이었고 예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어렵게 통제용 목책과 로프를 구입하여 본격적인 여름 물놀이
철이 오기 전에 직원들이 땡볕에 직접 구덩이를 파고 로프를 설치하였
고, 매일 통제요원을 배치하여 출입을 못 하도록 관리하였다.
마침 그해에는‘북한산 둘레길’을 개설하는 일까지 겹쳐 전 직원
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둘레길이 지나가는 노선을 검토하는 일부
터 만만치 않았다. 100% 사유지를 경유해야 하는데 소유주의 동의를
받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일단은 접촉하여‘주민들이 이용하는 길을 확장하지 않고 그대로
사람만 다니도록 조성하겠다. 탐방객으로 인한 불편 사항과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겠다’고 사정하고 설득하여 대부분의 길을 연결하였다.
말이‘둘레길’조성이지 첫해는 직원들이 몸으로 때워서 완성한‘골
병길’이었다.
좁은 길은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길로 넓히고 다듬어 만들었
다. 주변에 산재한 쓰레기를 수십 톤씩 치웠고, 둘레길 밖에 설치되어
효용이 감소된 펜스 수백 미터를 직원들이 직접 이설하였다. 둘레길을
탐방하던 노조위원장이 비 오는 날 직원들의 작업 현장을 보고 분개
하여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직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항의까지
했을 정도였다.
둘레길 추진도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묘지 뒤로 있던 기존 길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 조상님들에게 좋지 않
다고 소유주들이 철조망으로 길을 막아 작업자들을 곤란하게 했다.
둘레길 작업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본격적으로 이주 사업에 매달렸
다. 우선 계곡에 사람들이 출입 못 하도록 주말에는 6명씩 근무자를
배치하여 통제했다. 상가로부터 위협과 갖은 욕도 많이 먹었다. 이런
가운데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이주단지에 건축물이 하나둘씩 완공되
어 영업이 시작되었다.
이주단지 입주 대상자에게는 일정 기간 안에 영업을 접도록 촉구
했고, 손님을 모시러 가고 오는 행위를 못 하도록 차량 통제를 강화했
다. 아울러 사찰 신도를 운송하는 차량도 신도증을 검사하여 신도가
아닌 사람은 이용을 못 하도록 했고, 위반하는 차량은 당일 출입을 못
하도록 패널티를 부여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분소에 와서
난동을 피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치받는 화를 삭히
기가 어려워 몸을 덜덜 떨 때도 있었다. 퇴근할 때만 해도 다음날 그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58259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사람을 찾아가 작살을 내주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그쪽에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화는 내지 못하고‘언제
이사할 거냐?’하는 말만 하고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날마다 도장을 찍는 가운데 이주단지에 건축 중인 세대가
이사하면 즉시 건물을 부숴만 놓고 치우지 않은 채 방치했다. 남아 있
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빨리 이사하도록 하는 심리적 효과를 노린 것
이다.
건물 주인이 직접 영업을 해왔던 곳은 어느 정도 정리가 돼 나가고
있었는데 세입자들의 경우는 해결 방안이 안 보였다. 매일같이 설득
해도 효과가 없었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시간만 끌었다. 일단은
말로 해선 안 듣는 가구들을 파악하여 강제 명도집행을 본소에 요청
했다.
더불어 차량통제소에서부터 식당 영업을 위한 부식재료 운반 차
량의 통행을 차단했다. 효과가 있었다. 물론 직원 퇴근 후에는 배달이
가능했겠지만 대부분 낮 시간 영업을 하는 가게들로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주 대상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딱한 사정이 있는 사람
도 많았다. 한 아주머니는 건물 등기를 손자 명의로 해놓아서 입주권
을 받지 못한 데다가 보상금마저 남편이 수령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이
사 갈 집조차 구하지 못해 몹시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나를 볼 때마다‘공단놈 왔네!’하고 욕부터 했던 보살님은 입주권
수령 자격이 되지만 잘못된 주위 정보를 듣고 신청을 안 해 끝내 입주
권을 받지 못했다. 본인이 희망하지 않으면 집이 철거되지 않고, 나중
에 다른 사람보다 보상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웃 주민의 엉터리
정보 때문이었다. 이 보살님은 결국 강제로 퇴거당했고 소송을 하였지
만 입주권을 받지 못했다.
애먹이던 세입자들이 한두 집 이사 가고 장사가 안 되는 겨울철로
접어들자 영업을 해왔던 세입자들도 이사하기 시작했다. 북한동의 겨
울은 빨리 찾아오고 봄도 늦게 온다. 겨울철 눈 쌓인 북한동 마을은
여기저기 집도 헐리고 전기가 꺼져 밤이면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같
이 스산하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남은 주민들도‘더 이상 살
데가 못 되는구나’하는 생각들을 했으리라 판단된다.
추운 겨울에는 강제퇴거를 할 수 없어 새해에 날이 풀리면 해야겠
다는 계획을 가지고 겨울을 넘겼다.
겨울 동안에는 무너뜨려 놓았던 건축물을 철거하고 폐기물을 운반
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겨울철이니 먼지가 덜 나서 다행이었다.
날이 어느 정도 풀린 다음해 2월에는 끝까지 남은 다섯 집을 강제
퇴거시키는 명도집행을 통해 철거함으로써 북한동 이주 사업이 마무
리되어갔다.
폐기물 처리, 철거지 정리, 철거지 탐방로 보수 작업이 완료됨으로
써 북한동 마을의 이주 사업은 한 건의 사고도 커다란 민원도 없이
막을 내렸다. 55가구 154동이 철거 정비된 것이다. 누구도 장담 못 했
고‘과연 공단에서 해낼 수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사업을, 그것
도 단기간에 끝마친 나로서는 무척이나 보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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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 이하 전 직원들의 결집된 힘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북한산 둘레길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다.
힘들었지만 나를 믿고 묵묵히 따라준 분소 직원들이 고맙고, 늦게
나마‘감사하고 수고 많이 했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평생 산지기나 해먹을 놈!
조승익 _ 한려해상국립공원사무소
1987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창설된 이후 입장료 징수, 공원
청소, 불법행위 단속, 인허가 등 본격적인 공원 관리가 시작되었다. 지
금이야 공원 자원의 보호·보전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탐방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공원 내 주민들과의 유대 관계 유
지 등 지역 사회를 위한 활동도 겸하고 있지만, 초창기 공원 관리는 불
법행위 단속 분야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고질적인 계곡 내 영업 행위, 불법 시설물 철거, 무속 행위 등
이 성행하였는데, 그중 불법 시설물을 철거할 때에는 조직폭력배 개입,
생계형 영업 등에 따른 어려움이 많았다.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는 기
업형 영업 시설을 철거할 때는 라이터를 켜면서 큰 가스통을 들고 당
장이라도 폭발시킬 듯이 직원들을 위협했고, 불법 영업으로 생계를 유
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울며불며 애원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몸을 자해
하기도 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육탄으로 막아서
서 남자 직원들이 어찌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무속 행위에 사용되는 불법 시설물을 철거할 때에는 선배 직원들
이 꼭 시키는 것이 있었다. 철거 전에“어명이오!”라고 외치는 것인데,
이렇게 외치지 않고 철거를 하면 귀신이 붙는다고 했다. 미신이라 생
각은 하지만 지키지 않으면 정말 귀신이 붙을 것 같은 찝찝한 마음에
더 크게“어명이오!”를 외치곤 했다.
어떤 직원은 평소 매표소를 통과하는 아주머니 중 무속인으로 보
이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는 제지하여 배낭에 들어 있는 술
이나 명태, 음식 등을 확인하고 되돌려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무속인들은 어김없이 욕을 퍼부었다.
“평생 산지기나 해먹을 놈! 하는 일마다 안 되게 기도하겠다!”
그렇게 불길한 욕을 무수히 얻어먹어서인지, 그 친구는 이상하게도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마다 떨어져 무려 12번 만에 면허증을 취득하였
다.“나한테 귀신 붙었나봐”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공단이 창립되고 1년이 지난 1988년 12월 6일부터 북한산에서도 입
장료를 징수하게 되었다. 12월 1일부터 1주일간 입장료 징수에 대한 집
중적인 홍보를 한 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탐방객과 실랑이를 벌인
날보다 벌이지 않은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매일 다툼의 연속이었다.
당시 북한산은 아침저녁으로 약수터에 가는 사람, 배드민턴, 탁구
국립공원을 지키는 파크레인저 1권 _ 234235part 4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주어요
등 동호회 활동을 위해 동네에 마실가듯 산에 가는 사람, 모험심이 넘
쳐 다녀보지 않은 길을 찾기 위해 주말마다 이곳저곳 등산하는 사람,
음식점에 가는 사람, 수백 곳에 이르는 사찰에 가는 사람 등 다양한
탐방객이 혼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입장료 징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고,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가려는 탐방객들과의 실랑이는 피
할 수 없었다.
만일 한두 사람을 무료로 들여보내게 되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
이 커져 이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입장료 징수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내 한 몸 바쳐 북한산을 지키겠다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그런데도 철옹성 같은 벽을 뚫고 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 덕분에 가뜩이나 많은 북한산의 샛길은
더욱더 늘어갔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
가 직원들이 전대(돈가방)를 차고서 입장료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봉이 김선달보다 더한 놈들’‘, 국회의원(?)보다 더한
놈들’,‘산적 같은 놈들’등 평생 들을 욕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욕
을 배가 부르도록 먹었고, 욕을 먹어서 그런지 입안이 까칠해 입맛도
없었다.
주말이 되면 탐방객들이 몇 천 명씩 몰려오는 통에 아침부터 녹음
기처럼 입장료 징수의 필요성과 사용처를 알려주어야 했고, 테이프가
늘어나듯 지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공단에서는 시민들
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징수 방법 변경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냈고,
수개월이 걸려서야 입장료 징수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야 국민들이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공원을 출입하고 직원들
도 다른 공원 관리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엇
보다도 입장료가 폐지되어 국민들이 부담 없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
삶의 질이 향상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성숙한 탐방
객들이 타인의 손길에 의해 자연을 아끼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환경을
생각해서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고가 연일 계속되던 그 시절. 가끔은 그때를 떠올리면 묘
한 향수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다시 그 상황으로 간다면?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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