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했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아이섀도 색들이 얼굴을 통과한다 저 눈부신 몸에 든 색들
드러낼 방법이 없고 드러날 표정이 없다
눈 화장을 한다
부드러운 붓질은 마지막 기도
색의 선악으로 장식된 기억들 그녀의 숨소리를 기억하는
식물들 아낌없이 구멍 뚫린 시간들 저녁 햇살이 묻은 오랜
기다림
시간이 지워진 최후의 처음으로 그녀는 너무 빨리 도착해
버려 너머를 흡수하는 것은 이음매를 갖는 일
노랑은 보라, 보라의 이음매는 그녀, 그녀의 색들이 문양
속에 빛나고 우리는 유리를 통과한다
목요일 미사가 끝나고 손바닥 안에 고인 기억들이 종소리
로 출렁인다 우리는 유리에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
몸의 간이역에서 마지막 열차는 떠나고 그녀의 그림자는
되돌아오는 것을 놓친다 화장은 붉은 유리를 통과하는 것
어둠이 속살뿐이라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다
꽃잎지방
붉은 꽃덩굴이 사라졌으므로
나비경첩에서 나비가 살아 움직인다
한 개의 향이 피오오른다 죽어서도 죽은 사람의
붉은 기도가 되는 나무
동서가 구분되는 빨강과 백색의 잎들과 위태롭게
서 있는 과수 아닌 과일들
물음과 상관없이 헤엄쳐 온 슬픔이 불립문자를 쓴다
초인종이 울리지 않아 현관문을 열어두면
이제 모든 것은 꽃의 소관
병풍 앞 떨어진 꽃과 지방의 표정이 같다
나비가 자정을 물고 경첩 속으로 들어간다
시집<<포도에서 만납시다>>에서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산맥>> 등단
2021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