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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1913-1974)
1913년에 전라도 신안군에서 태어나서 22세 때 동경의 금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대학 미술부에 입학하였다. 이해에 이과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l
이듬해(37년)에 귀국하여 서울에 화실을 마련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하였다. 신사실파를 유영국, 이규상,(나중에는 장욱진도 참여) 결성하여 전시회를 가졌다. 49년 서울대 교수직 사임, 1952년 홍익대 미대 교수로 취임하다. 이중섭, 백영수가 신사실파에 가입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46세인 1956년에 도불하여 59년에 귀국할 때까지 파리에서도 개인전을 가지는 등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1961년에 홍익대 미대 학장이 되고 꾸준히 미술 활동을 하였다.
1970년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를 그려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만년에는 뉴욕에 가서 개인전을 가졌다. 국전 창설부터 꾸준히 심사위원을 하였다. 주변에서도 인간적이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30년 대 후반에 추상화로 경도하여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평도 들었다. 일본의 자유미술협회전에 출품한 ‘론도’는 서구적 모던 아트를 수용한 작품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김환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은 선이 간결하다. 밝은 채색으로 그림이 명랑한 분위기를 보인다. 고전적인 소재를 재구성함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풍긴다. 그는 한국 도자기가 자기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만큼 담백하고, 깨끗하며, 한국적인 정서가 묻어난다.
뉴욕에서 활동한 말년에는 수수지향적인 조형주의에서 그림을 그렸다. 초기 작품이 구상적인 요소를 구비하였다. 그러나 뉴욕으로 간 말년의 그림은 추상화되었다.
1930년대에 한국적인 미를 추구한다면서 나온 주장이 향토색이었다. 그러나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추구한 한국적인 미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하였다. 미술이라는 조형미 속에 한국의 정서를 투입하였다. 소재만으로 표현한 정서가 아니고 미술이라는 예술로 승화하여 표현한 한국미이다.
수화 김환기
(1913-1974)
1913년에 전라도 신안군 가좌도(지금은 안좌도)태어나서 1921년 4월에 가좌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에 서울로 유학하여 중동중학교에 다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내므로 그의 작품이 한국적 서정성이 짙다는 것도 유년기의 시골 생활이 연유한 것이리라. 아름다운 고향 풍경은 그의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1931년에 일본 도코로 가서 22세 때인 1935년에 동경의 금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대학 미술부에 입학하였다. 이해에 이과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l
1933년에 고향으로 와서 결혼을 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대학 미술부에 다니면서부터 그의 미술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쳤다. 대학에서 파리에서 새로운 미술 사조를 배우고 돌아온 교수로부터 입체파, 미래파 등을 배웠다. 이때부터 추상미술 쪽으로 나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내면화되어 있는 한국 정서를 추상미술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 백만회(1936)를 설립하여 활동했다.
이듬해(37년)에 귀국하여 서울에 화실을 마련하였다. 1940년에는 서울의 정자 옥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42년에 첫 부인과 이혼했다.
1944년에 고희동의 주례로 김향안(변동림)과 결혼식을 올렸다. 성북동에 있는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구입하여 신혼살림을 차린 것을 김향안이 글로 남겼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하였다. 신사실파를 유영국, 이규상,(나중에는 장욱진도 참여) 결성하여 전시회를 가졌다. 서구 양식을 실험하면서 한국 정서를 표현하려 시도했다. 49년 서울대 교수직 사임, 1952년 홍익대 미대 교수로 취임하다. 이중섭, 백영수가 신사실파에 가입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해군의 종군화가로 활동했다.
이때의 작품 경향은 소재를 전통적인 것에서 취했다. 달, 백자, 산, 강, 꽃, 여자, 나무 등으로 한국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하려 했다.
46세인 1956년에 도불하여 59년에 귀국할 때까지 파리에서도 개인전을 가지는 등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파리에서도 한국적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파리 체재 중에도 추상미술을 지키려 일부러 루불 박물관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화면은 푸른색으로 가득 찼다.
1961년에 홍익대 미대 학장이 되고 꾸준히 미술 활동을 하였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한국에서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1963년에 상 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한 후에 바로 뉴욕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뉴욕에서 머물렀다.
이 시기를 그의 ‘뉴욕 시기’라고 말한다. 자연의 모티브는 사라지고, 순수한 조형 요소인 색, 면, 선으로만 화면을 채웠다. 1964년에 뉴욕의 아시아 하우스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때의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70년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를 그려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만년에는 뉴욕에 가서 개인전을 가졌다. 국전 창설부터 꾸준히 심사위원을 하였다. 주변에서도 인간적이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30년 대 후반에 추상화로 경도하여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평도 들었다. 김환기의 경력을 요약한 자료를 보면, 그는 자신이 목표로 정한 미술(추상화)를 위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길을 찾아나셨다. 그는 한국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화가였고, 안락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을 찾으려 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뉴욕으로 떠났다. 죽을 때까지 머문 뉴욕의 생활이 편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선이 간결하다. 밝은 채색으로 그림이 명랑한 분위기를 보인다. 고전적인 소재를 재구성함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풍긴다. 그는 한국 도자기가 자기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만큼 담백하고, 깨끗하며, 한국적인 정서가 묻어난다. 뉴욕에서 활동한 말년에는 수수지향적인 조형주의에서 그림을 그렸다. 초기 작품이 구상적인 요소를 구비하였다. 그러나 뉴욕으로 간 말년의 그림은 추상화되었다.
1930년대에 한국적인 미를 추구한다면서 나온 주장이 향토색이었다. 그러나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추구한 한국적인 미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하였다. 미술이라는 조형미 속에 한국의 정서를 투입하였다. 소재만으로 표현한 정서가 아니고 미술이라는 예술로 승화하여 표현한 한국미이다.
그는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라고 말했다.해방 전후 김환기는 김향안과 결혼하고 서울 성북동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미에 심취하게 된다. 1944년부터 6~7년간 매일 조선 백자 항아리와 목공예를 살 정도로 그 애정이 각별했다.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는 예술의 원천이었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평범한 둥근 모양, 평범한 백색…. 그는 특히 그 평범함에 주목했다. 거기엔 어떤 기교도, 위대한 미술품을 만들려는 도공의 욕심도 느낄 수 없었다. 도공의 무심(無心)은 자연과 일치했고, 그 결과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그릇을 탄생시켰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론도, 61 + 71.5 cm 캔버스에 유채. 1938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韓國美術大賞展)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觀照)와 아취(雅趣)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半抽象)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작품으로 〈론도〉,〈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3]
그의 작품 중 〈론도〉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기도 하였다.[4] [5]
김환기의 추상화를 마구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꼬집는 평론가도 있었다.
원동석 1977년 계간 미술 평론상 당선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났는가에서 수화는 민중정서의 현실을 외면 그는 환상의 미를 창조하였으나 과거 속에 영원세계를 설정함으로써 민중의 현실과 만나지 못한 관념의 유희에 빠졌다 그관념의 유희가 상고취향이라는 점에서 유한 계층의 풍류취미와 상통한다고 볼 것이다 그의 예술관이 얼마나 역사적 시대의식에 무관심하였는가는 6.25비극과 4.10혁명을 거치면서도 아무런 현장의 증언도 남긴작품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피난열차가 전쟁체험의 유일한 작품이긴 하나 무기력한 현실 도피의 감정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로 남는다‘ 라고 비판한다[6]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이 경신됐다. 이 모두는 김환기의 그림 한 점이 85억2996만원(6200만 홍콩달러)에 최종 낙찰된 날은 2018년 5월27일 이다.
2018년의 봄-여름에는 대구 미술관에서 김환기 특별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을 3기로 나누어서 전시했다. 김환기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 나누는 방법이다. 여기에 인용하겠다.
일본 동경 시대(1933-37)와 서울 시대(1937-56)작가는 1930년대 초기 일본 유학시기에 입체파, 미래파 등 서구 전위 미술 경향을 진취적으로 시도했으며, 여러 실험과정을 통해 전위적 화풍을 지속하였다. 1937년부터 1956년까지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여러 문인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깨닫게 된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바다, 산, 달, 매화, 구름, 나무, 항아리 등의 자연과 전통을 근간으로 한 소재들을 화면의 중심 모티브로 하되, 한국의 고유한 서정의 세계를 밀도 있고, 풍요로운 색채로 구현하였다.
파리 시대(1956―59)와 서울 시대(1959-63)김환기가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엥포르멜 경향이나 추상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작가는 서울 시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자연 소재와 색채를 어어 가고자 했으며, 곡선이나 선에 대한 실험을 지속했다. 파리에서 작가는 그곳의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문화를 체득했지만, 고국을 떠나 있으면서 더욱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예술가로서 고유한 정신과 노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파리 시기에 주로 항아리, 영원 관념의 매개인 십장생, 매화 등의 소재들을 분할된 평면 속에 재배치하여 담아낸 추상 정물 작품들을 작업했고, 두 번째 서울 시기의 작품들은 산, 달, 구름 등 한국의 자연 소재들을 모티프로 했지만 형태를 단순화하여 간결한 추상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출품한 작품의 경향 또한 달을 주요 모티브로 푸른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두터운 질감의 반추상 작품들이었다. 자연풍경을 형상화한 서정적인 작품들을 통해 국제무대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던 예술 의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뉴욕시대(1963-74)작가는 뉴욕에 정착하여 예술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점화 양식의 추상 회화를 발전시켰다. 뉴욕시기의 초반, 1964년에서 1965년으로 넘어가면서 화면에 자연의 모티프는 사라지고, 순수한 색면과 색점, 색선의 단순한 추상적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작가가 이전까지 진행했던 두터운 질감이 사라지고, 물감을 얇게 펴 발라 번짐 효과를 이용한 제작 기법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스케치, 과슈 작업, 십자구도의 유화, 종이나 신문지 유화 작품과 같이 다양한 매재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1970년 첫 점화가 나오기까지의 끊임없는 조형적 실험과 물성 연구의 회화적 방법론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했다. 1970년대의 전면점화는 유화 물감이라는 서구적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한국화에서의 먹의 번짐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번짐과 스밈, 농담의 조절, 겹침의 기법을 통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자적인 조형양식이다. 대형 화면 위에 색점을 찍고, 그 주변을 네모로 둘러싸는 기본 단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수많은 점 단위들이 무리를 이루거나 회전하면서 전체적인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푸른 색채의 전면점화로 구성된 특별한 공간을 통해 작가가 평생도록 담아내고자 했던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울림의 세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요새 제 그림은 청록색(靑綠色), 점(點)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한 줄기 점의 파동(波動)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 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화백이 1966년 미국 뉴욕에서 서울의 시인 김광섭(1905∼1977)에게 보낸 편지다. 홍익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1963년 뉴욕으로 간 김 화백은 외로움과 멀리 고국의 벗·자연 등에 대한 그리움을 특유의 점화(點畵)를 비롯해 편지·일기 등에 담아냈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을 모티브와 제목으로 삼은 1970년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대표적이다. 그 절절한 그리움의 정서는 궁핍한 삶과 겹쳐져 김 화백에게 예술적 영감(靈感)의 원천이면서 새로운 미학 양식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 화백의 부인 김향안(1916∼2004)은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1960년대 ‘뉴욕 타임스’ 지질(紙質)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하도 종이가 좋아서 신문지에 유채를 시도한 수화는 종이가 포함한 기름과 유채가 혼합돼 빛깔에 윤기가 돌고 다리미질한 것과도 같이 팽팽해지는 효과가 나오는 것이 재미난다며 한동안 종이 유채 작업에 몰두했다.”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던 김 화백은 고육책으로 신문지를 화폭으로 삼다가 한지·보드지·갱지·공책·포장지 등으로도 확장했다. 김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인 점화도 궁핍의 산물인 종이 작업의 결과인 셈이다.
김향안은 두 번 째 결혼한 부인이다. 김환기가 생존했을 때도, 죽고 나서도 김환기라는 작가를 알리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김향안은 이상과 결혼하여 몇 달을 살았다. 이상이 죽자 언니(화가 구본웅의 어머니) 집에서 함께 산다. 이때 김향안은 무명의 서양화가 김환기를 소개받았다.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데다 딸을 셋이나 둔 남자였기에 김환기는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하고 편지로 서신을 교환하며 마음을 표현했다 한다. 김향안의 부모는 자식이 있는 남자와 개가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사랑은 믿음이고,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라며 1944년, 김환기와 재혼했다. 김향안은 수필가이고 본명은 변동림이다.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과 연을 끊으며 남편의 성을 따라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1974년 김환기 화백의 죽음 이후 김향안은 고인의 작품을 모으고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78년 환기 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죠. 1994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인의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인 환기 미술관을 부암동 산기슭에 열었습니다. 미술관 설계는 당시 보스톤에서 활동하던 세계적 건축가 우규승이 맡았고, 퐁피두 미술관 관장이었던 도미니크 보조도 참여했습니다. 요즘은 서촌과 부암동이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미술관을 찾는 발길도 예전보다 많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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