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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금욕주의자였다.
철저하셨다.
그런 분이라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적엔 달랐다.
상당한 '애주가'였다.
이 글은 아버지가 애주가였을 당시, 그때 내가 경험했던 일들을 회상하며 기술하는 한 편의 그리운 회상록이다.
이런 말이 있다.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반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 보니 그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소싯적엔 어른들의 음주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우리집은 '옥구군 나포면'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산을 몇 개 넘으면 '익산군 웅포면'이었다.
완전히 다른 고을이었다.
지금은 록키, 알프스, 텐산, 티벳 등을 즐겨 찾는 까닭에 전 세계의 고산들과 상당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꼬맹이 시절엔 그 고갯마루를 넘는 일이 어찌 그리도 멀고 험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어린 개구장이의 눈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가끔씩 동료분들과 약주를 들고 오셨다.
술을 드셨어도 자전거로 통근하시는 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그 당시 농촌의 '신작로'엔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번씩 자동차가 지나갈 뿐, '소달구지'와 '리어카', '자전거'가 그 길의 주인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던 때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약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아버지는 술 때문에 귀가 시간이 매우 늦어지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만취하신 모습을 보이셨다.
필을 받아 많이 드셨는 지, 삶이 팍팍해서 그랬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혹 대취하셨다.
시골에선 대부분 막걸리였다.
각 고을마다 양조장이 하나씩 성업 중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어린 자식들에겐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주셨지만 본인은 절대로 숟가락을 들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마당 너머 어두운 대문만을 바라보시며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셨다.
가타부타 별로 말씀도 없이 두 손을 모아 기도만 하셨다.
밤이 깊어 질 때까지 아버지의 자전거 소리가 나지 않으면 엄마는 끝내 입을 여셨다.
"기욱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배나무꼬쟁이'까지 한 번 나가보자"
"아아, 웬수같은 '배나무꼬쟁이'여"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싫었다.
우리 마을을 나서면 '배나무꼬쟁이'까지 약 2킬로 정도 되는데 민가도 하나 없이 칠흑같이 어둡고 험한 산길만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에겐 거의 공포에 가까운 산길이었다.
희미한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엄마는 내 손을 꼬옥 붙들고 조심스럽게 산길을 올라가셨다.
우리 형제는 3남2녀였다.
그런데 58년 개띠 형은 중학교 때부터 도회지(군산)로 나가 친척집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기에 방학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그랬던 탓에 시골에서의 일들도 잘 알지 못했다.
그 다음이 61년생 누이 그리고 64년 생 나였고, 내 밑으로 67년 생 남동생 그리고 늦둥이 여동생이 있었다.
우리집은 터가 매우 크고 넓은 편이었다.
본채와 변소가 꽤 떨어져 있었는데 밤에 무서워 변소도 못가는 여린 누이는 크고 작은 가정일에서 늘 제외였다.
안방 청소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정도를 제외하곤 어머니가 누이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랬다.
대안이 없었다.
어머니 판단으로는 으스스한 밤중에, 무서운 산길에 그나마 위안이 될 자식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소싯적부터 좀 야무진 편이었다.
내 스스로의 평가가 아니었다.
부모님도 늘 그리 말씀하셨고, 동네 어른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리 얘기하셨다.
그래서 꼬마였을 때 내 별명은 '찌락소'와 '차돌이'였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1학년 마치고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 지원하여 입대했다.
직업군인(부사관,장교)을 제외하고 일반 사병이 갈 수 있는 가장 혹독하고 악날한 부대였다.
기왕지사 짬밥을 먹을 바엔 치열하고 눈물겨운 곳에서 나를 연단하고 싶었다.
(참고적으로 형은 면사무소 방위로, 동생은 경남 양산에서 육군 사병으로 복무했음)
입대 당시에 조국에 대한 충정은 2차 문제였고 입에서 단내 나도록 고강도 특수훈련들을 깡그리 씹어먹고 싶었다.
그게 1차 목표였다.
아무튼 '배나무꼬쟁이'까지 가는 그 길은, 어린 마음에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 귀곡산장 같은 곳이었다.
더욱이 밤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랬던 길이었기에 어머니는 훗날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가 어린 국민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캄캄한 밤에 '배나무꼬쟁이'까지 갈 땐 니가 옆에 있어서 큰 위안이 됐었지"
나도 무척 떨리고 무서웠지만 엄마 앞에선 절대로 표시 내지 않았다.
아니 낼 수 없었다.
엄마는 어질고 신앙심이 좋은 분이셨지만 겁도 많았고, 드라마나 주변의 슬픈 일을 보시면 어김없이 줄줄줄 눈물을 쏟으셨다.
하염 없었다.
눈물샘이 깊었던 만큼 마음도 곱고 따뜻한 분이셨다.
이버지는 '선생님'이셨다.
학교는 익산군 웅포면에 있었다.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5킬로 정도였는데 그 사이에 제법 큰 고갯마루인 '배나무꼬쟁이'가 있었다.
꽤 높은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우리 동네까지 약 2킬로, 학교가 있는 동네까지 약 3킬로 정도였다.
각각 끝 마을이자 첫 마을이었다.
두 동네 사이엔 민가가 전혀 없었다.
구불구불하고 후미진 산길이 전부였다.
특히 고갯마루 밑으로는 '금강'이 흘렀고 강물 때문에 엄청나게 큰 절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밤이 되면 아무리 '강심장'일지라도 누구나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는 그런 험하고 후미진 곳이었다.
이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자전거로 통근하셨다.
신작로이긴 했지만 자갈도 많았고 군데 군데가 움푹 움푹 패여 있어 노면상태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거칠고 비탈진 산길이었다.
그 옛날에 '포장도로'나 '가로등'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궁핍하고 가난했던 그 시절엔 꿈 같은 얘기였다.
시커먼 그믐밤이면 부엉이 소리, 낯선 산짐승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어린 꼬마는 등골이 오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 앞에선 절대로 요란을 떨지 않았다.
당시엔 2킬로 정도의 산길이 왜 그리도 멀고 길게만 느껴졌을까?
성인이 된 뒤로 그 길을 가보면 정말로 작고 아담한 고갯길에 불과했다.
2킬로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나는 어려서도, 커서도 운동을 좋아했다.
운동에 열심일 땐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을 주로 했었다.
나의 주특기였다.
그야말로 숱하게 참전했다.
제주도 200킬로 울트라 레이스(32시간 33분), 한반도 횡단 311킬로 울트라(66시간 48분), 설악산 & 지리산 종주 트레일 런 등 수도 없이 많은 대회에 참전하여 완주했다.
그러나 소싯적 칠흑같은 밤에 '배나무꼬쟁이'까지 아버지를 마중하러 갔던 그 2K의 길이 나에겐 제일 멀고 두려운 길이었다.
숱한 대회에 참전하다 보니 수백 킬로 코스라도 소싯적 길보다는 훨씬 더 가까웠고 용이했다.
'천리(400K)행군'조차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엄청난 '패러독스' 같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고갯마루.
그곳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모자는 또 얼마나 아버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매번 그랬다.
그렇게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다 보면 여지없이 젊고 씩씩한 남정네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기소리처럼 작았지만 점점 사자후처럼 크게 들렸다.
만취한 아버지가 가까이 오고 계신 거였다.
살면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그렇게 반갑게 느껴졌던 경우도 없었다.
그 노랫소리는 모자에겐 곧바로 '공포감의 해제'를 의미했다.
아버지는 혹여라도 넘어지실까봐 탁배기 한 잔 걸치신 날엔 꼭 자전거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오셨다.
본능적으로 아셨는 지, 삶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취중에도 안전에 대해선 무척 신경을 많이 쓰셨다.
그래서 취하신 날엔 절대로 자전거를 타지 않으셨다.
객기를 부리다가 넘어져 풀숲에 고꾸라지거나 남의 논으로 돌진했던 적도 없었다.
내가 결혼한 뒤로 '장인어른'과 술을 자주 마시곤 했는데, 한참 때 장인께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통근하셨단다.
그런데 취하신 날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셨는데 신작로를 달리시다가 코너를 돌지 못해 딱 2번, 남의 논으로 직진해 벼포기를 이불삼아 거기서 잠든 적이 있었노라고 말씀하셨다.
"하하하"
나는 아버지와 대작하면서 배꼽을 잡은 채 파안대소를 터트렸었다.
잊혀지지 않는,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난픽션 하이 코메디였다.
정말로 귀엽고 솔직하신 아버지셨다.
그랬던 장인도 퇴직 후엔 술을 딱 끊으셨다.
두 분 모두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오늘따라 더욱 그립고 뵙고 싶다.
아무튼 취하신 아버지가 '배나무꼬쟁이'를 넘어 우리 동네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셨는데 그 곡은 언제나 동일했다.
딱 한 곡이었다.
아버지의 십팔번은 '배호 선생님'의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늘 그 노래였다.
'마애비문'이나 '마애석불' 같이 어린 자식의 귀에도 그 노랫말은 아예 각인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람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 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과거에 아버지는 '배호 선생님'이 부르셨던 그 기법과 분위기 그대로 노래하셨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장사익 선생님'의 앨범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들으며 계속 흥얼거린다.
몹시도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장사익 선생님'의 창법은 여전히 찰지고 구수하며 쫀득거린다.
그리고 노랫말이 정말로 맛깔스럽다.
그랬던 아버지가 어느날 가족들 앞에서 '금주'를 선언하셨다.
'신앙생활' 때문이었다.
술을 드셨을 때에도 찬송과 기도에 열심이셨지만 한번 사는 인생, 온전하고 순결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론 진심으로 그런 삶을 엮어가셨다.
수도권에 사는 자식 집에 오셨을 적에도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교회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새벽기도를 그 교회에서 하실 생각이었다.
낯선 동네에 가시거나 심지어는 여행 중에도 숙소에서 교회까지 가는 길과 시간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드셨다.
지성이었다.
정말이지 매 순간 성심을 다하셨다.
'아버지'와 '막걸리'.
이 두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은 뭔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언제나 저릿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둔중한 무게감이 내 가슴팍을 때리기 때문이었다.
내 조부모님은 금슬이 무척 좋으신 분이셨다.
결혼 후에 내리 딸만 셋을 낳으셨고 그 다음에 아들 둘을 두셨다.
집안의 대가 끊기는 줄 알고 할아버지는 노심초사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우리 가문의 27대였고, 내가 28대 손이었다.
내리 딸만 셋을 낳으시고 아들을 얻으셨으니 그 기쁨과 행복감이 얼마나 크셨겠는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어떤 고초나 난관이 닥치더라도 장남의 교육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르셨다고 했다.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거치며 전국이 철저하게 황폐화 되었던 나라.
모두가 가난했고 빈궁하기 짝이 없었던 대한민국.
그 당시 우리나라의 '교통상황'도 역시 말이 아니었다.
'육상교통'이 형편 없던 시절, '금강수계'에선 선편을 이용한 내왕이 거의 대체불가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했다.
6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내가 어찌 그 당시 상황을 100% 알 수 있겠는가.
나도 부모님으로부터 몇 번 들은 얘기였다.
멀게는 공주부터 부여, 강경, 성당, 웅포, 나포, 서포를 거쳐 군산까지 배로 왕래하는 것이 제일 편했고 빨랐다고 했다.
물류의 중심도 그 당시엔 '육운'이 아니라 '수운'이었단다.
충분하게 납득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린 장남을 군산에 유학보내셨던 조부모님도 가끔씩 아들에게 건네 줄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다녀셨단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승선인원 규정과 수화물 적재 원칙 등 사회 제반 시스템에 대한 '안전규정'이 존재했을 리 만무했다.
과적에 따른 침몰사고로 청상이셨던 할머니는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신 채 하늘나라도 떠나셨고, 그 충격으로 할아버지도 몸져 누우셨다고 했다.
눈물나는 시대의 질곡이자 파랑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시름시름 삶의 의욕을 놓으시다가 끝내 치매가 찾아왔다고 했다.
수많은 전답 관리도 그렇고 할아버지의 병 수발도 그렇고, 사정이 영 마뜩찮아 집안 어르신들이 모여 상의하신 끝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셨다고 했다.
"양수야. 각설하고 집안 사정이 지금 말이 아니니 서둘러 결혼하거라. 이미 논의한 혼처도 있고 사돈 댁에서도 좋다고 하셨다"
(학생 때 아버지의 이름은 '양수'였다)
고 1짜리 앳된 학생에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날벼락'이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었다.
어리긴 했지만 자신이 생각해 봐도 많은 전답에,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에, 자신의 학업과 미래에 대한 꿈까지 이것저것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가문 어르신들의 엄중한 명령이자 당부가 줄을 이었을 게 뻔했다.
그렇게 열일곱 어린 학생과 열아홉 예쁜 처녀는 집안 어르신들과 동네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 속에서 전통혼례를 치르셨다.
'달콤한 신혼' 같은 단어는 그야말로 사치에 불과했다.
혼례복을 벗자마자 시아버님의 대소변부터 치워야 했던 앳된 신부 그리고 가문에서의 역할과 책임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제대로 숨을 쉬기에도 버거웠을 어린 가장의 심정.
얼마나 힘겹고 무거웠을까 싶었다.
그로부터 학업과 병든 아버님 모시기, 농삿일, 학교 졸어하고 최전방으로 군입대, 태어난 자식들, 교편생활, 신앙생활, 가문에서의 역할 등등 아직 20대 청년에 불과했던 남자의 어깨엔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알 지도 못했던 '삶의 멍에'가 그렇게 묵직하게 씌워져 있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할 수도 없었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할머니의 황망한 소천과 할아버지의 병환, 그리고 꿈엔들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급박한 결혼까지, 그 청년에게 '대학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말도 꺼낼 수 없었던 절박한 형편이었다.
그 청년은 곧바로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옹골지게 뛰어야만 했었다.
그냥 달린 것이 아니라 사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임중도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온갖 세파에 담대하게 맞서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었을 터였다.
그 청년은 박봉을 쪼개고 또 쪼개 4-5년에 한번씩 꼭 농토를 구입했다.
부모님에게 '토지'는 '신앙'과 '가족' 다음으로 당신의 삶을 견인했던 강력한 화두였다.
내가 개구장이로 온 들판을 헤집고 다닐 때 우리집 사랑채에는 건장한 '일꾼 삼촌'이 함께 살았는데, 그 삼촌은 일년 내내 우리집 농삿일을 주도적으로 하셨고 추수가 끝나면 약정된 세경을 나락으로 받아가셨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산 삼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우리집 농사를 다 짓고 가을이 되면 세경을 받아 정산했던 '아저씨'도 있었다.
아버지는 초창기엔 '일꾼 삼촌'과 동거를 선택하셨지만 나중엔 각자의 처소에 살되, 농싯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그 댓가를 지불하는 패턴으로 변경하셨다.
아무튼 바쁘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아버지가 아직 사춘기의 티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던 어린 학생 때, 어머니의 속절없는 소천과 아버지의 치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자신 앞으로 던져진 느닷없는 혼사, 그런 천형 같고 쓰나미 같았던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제대로 한번 목놓아 울어본 적도 없던 20대 청년은,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하늘나라에 계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던 듯했다.
어머니도 농번기엔 하루 종일 들판에서 사셨고, 아버지도 퇴근 후엔 곧바로 리어카에 '퇴비'를 나르거나 '피사리'를 하셨고, 풀을 베고 '농약'을 살포하시는 등 매양 동분서주하셨다.
좀처럼 쉬는 날이 없었다.
근면과 성실의 대명사였다.
그랬다.
정말로 팍팍하고 힘겹게 '가문의 재건'을 위해 홀로 외로운 길을 가셨다.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됐지만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를 언제나 '비탈진 삶'으로 내모셨다.
절대로 편안함을 구치 않으셨다.
그런 삶의 양태 덕분인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나는 절감했다.
해마다 조금씩이라도 가산이 늘었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의레 그랬던 대로 동네 어려운 가정 곳곳에 소리 없이 쌀가마니를 전달해 주셨다.
교회에 헌금도 무척 많이 하셨다.
내가 글 초반에 아버지의 음주 얘기를 게재하다 보니 아버지가 마치 '고주망태' 같은 삶을 사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두세 달에 한번 정도였고, 대부분의 날들은 주경야독 하듯이 투잡, 쓰리잡을 하면서 정말로 뜨겁게 사셨다.
그 열정과 집념을 나도 꼭 닮고 싶었다.
진정성 가득한 남자의 길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가장의 모습이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배나무꼬쟁이', 그 어둠 속 멀리에서 들렸던 "삼각지 로타리~~~"는 엄마와 나에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반가움이었다.
그 노랫소리는 '가족애'를 의미하는 살가운 울림이었다.
무서움에 덜덜 떨던 내겐 더욱 그랬다.
아버지가 소천하신 지 벌써 3주기.
가끔씩 한 사내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들 때면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이 아들도 '돌아가는 삼각지'를 혼자서 조용히 듣기도 하고 불러보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릿해 지고 줄줄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가삿말이 골수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금강의 강바람이 세차게 내 볼을 때리며 지나갔던 '배나무꼬쟁이'에서의 깊은 밤.
그 아련하고 교교했던 분위기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또한 어두운 밤하늘로 우렁차게 울려퍼졌던 건장한 아버지의 그 노랫소리가 지금도 가끔씩 내 가슴팍을 알싸하게 흔들며 지나간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듣고 싶은 그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
내 노래 수준은 별로지만 이 아들의 애절한 노랫소리가 하늘나라까지 울려퍼졌으면 좋겠다.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서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2011년 2월 17일.
심야에, 아버지를 그리며 일기 한 편 쓰다.
첫댓글 집안의 사연도 한 시대가 읽히고 글도 맛깔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멋진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을 존경합니다.
그 길을 따라 오늘도 힘찬 걸음을 하는 형을 사랑합니다.
다음에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같이 불러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