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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은 조선 후기 사회적, 경제적 혼란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지배 계층의 착취와 외세의 간섭에 큰 고통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학의 평등 사상과 민중의 권리 주장에 힘을 얻어 전봉준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농민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주요 목표는 부정부패한 관리의 처벌,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개혁, 그리고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주적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전주 화약 당시 제시된 27개조 요구 사항에는 이러한 요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관리의 부정 방지, 조세 제도 개선, 그리고 농민 생활 안정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은 당시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며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운 대표적인 인물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의 의병 운동과 독립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 저항 운동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비록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끝났으나, 이들의 희생과 정신은 이후 독립과 평등을 위한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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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90년쯤 동학에 들어가, 1891년에 전라도 태인의 접주가 되었다. 1894년, 전봉준, 손화중 등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전주 화약 이후 남원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남부 지역에서 집강소를 이끌었다. 그 해 11월,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청주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졌다. 12월 27일, 태인에서 붙잡혀, 이듬해 1월8일,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봇짐 장수외 등짐 장수를 합쳐서 이르는 말로, 봇짐 장수는 귀금속이나 세공품 같은 사치품을 보자기에 싸 들고 다니면서 파는 상인이고, 등짐 장수는 값싼 일용 잡화를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파는 상인이다. 보부상은 규율이 엄한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나라에서는 보부상들이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권리를 지켜 주는 대신, 외적의 침입을 막거나 반란을 억누르는 데 이용하곤 했다.
동학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81년 동학에 들어가, 얼마 뒤 전라도 무장의 접주가 되었다. 1894년, 전봉준,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나주 지방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이끌었다. 1895년 1월 6일 전라도 흥덕에서 붙잡혀, 4월 23일 전봉준과 함께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전주 화약 이후, 농민군이 전라도 각 고을에 설치했던 자치 기관이다. 전주의 총본부를 따로 두고,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두어, 전주 화약 때 전봉준과 정부 사이에 맺었던 사항을 실천했다. 우두머리인 집강 아래 치안, 성찰, 징세 등의 일을 맡은 별감들이 모여 그 고을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였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의 이야기는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저항과 민중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조선 후기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이루지 못했지만,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의 희생과 열망은 이후 의병 운동과 독립 운동으로 이어져 한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한 민중의 외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의 이야기는 여전히 정의와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그들이 남긴 희생과 열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합니다.
출처: https://babyclub.tistory.com/199 [천사들의 합창 edu·ca·tion:티스토리]
국회로 가는 국민의 발 이삭빛시인 우리의 발은 개미 발이다 어둠마저 멈춰 버린 깜깜한 밤 겨자씨보다 작은 발걸음으로 별처럼 촛불을 켜고 국회로, 국회로 줄지어 어둠을 뚫고 나간다 어느새 뜨거워진 맨발들, 녹두장군이 되어 가슴 속 햇불을 하나, 둘 꺼내든다 신도 가장 힘들 때 생명을 만들었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그러니 우리는 하늘 끝까지, 수십 번 넘어져도 일어서서 한 걸음 더 개미 발로 걷는 것이다. - 윤석열 대통령 비상 계엄령 선포의 날- 2024. 12. 03. |
우리의 의로운 깃발을 들고 여기에 이른 것은
안으로는 못된 관리를 처단하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적을 내쫓고자 함이다 - 동학농민운동 백산 격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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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30주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발발된 동학혁명은 세계사에서도 빛나는 민중항쟁
특히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들까지를 적시한 반제 반봉건의 사상은 실로 위대한 포고이다.
위대한 포고인 '백산격문'과 신동엽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백산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쫒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약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 정월 호남창의대장소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시인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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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억압받는 민중이 일어나 정의와 평등을 외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전봉준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며 부패한 권력과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닌, 부당한 세력에 맞선 역사적이고 의미 있는 혁명이었습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전봉준은 훈장)
1. 동학농민운동의 배경과 원인
조선 말기,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착취, 여기에 서민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정부 정책이 더해지며 민중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1. 세도정치와 부패: 권력층은 이익을 위해 백성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농민은 생계를 잃어갔습니다.
2. 동학의 확산: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즉 인간도 하늘이라는 사상을 통해 평등을 강조했으며, 점차 민중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았습니다.
3. 농민들의 분노: 권력에 대한 반감과 함께 동학 사상이 확산되면서 농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설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2. 전봉준, 민중의 지도자로 나서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동학을 접하고 민중의 고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 혁명적 리더십: 전봉준은 백성의 고통을 대변하며, 농민군을 결집시켰습니다.
2. 황토현 전투: 전봉준의 지휘 하에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힘을 과시했습니다.
3. 군중의 지지: 전봉준의 뜻에 동참하는 민중이 늘어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성과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다양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점차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1. 전주화약: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은 전주화약을 통해 임시 휴전을 선언하고 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2.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갑오개혁의 계기가 되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3. 민중의 각성: 이 운동을 통해 민중은 스스로의 힘을 인식하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히 실패한 혁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보여준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1. 민중의 권리 선언: 이 운동은 민중도 하나의 정치적 주체임을 선언한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2. 대한제국 수립에 영향: 동학농민운동 이후 정부는 자주적 개혁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3. 민중운동의 토대: 전봉준의 뜻은 이후 독립운동과 더불어 20세기 민중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억압받던 조선 민중이 권리를 외친 강력한 저항의 소리였습니다. 이 운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며, 민중의 힘과 정의를 강조하는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 전봉준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지금도 여전히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민중의 소리에 더 귀 기울여 보세요!
[출처]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민중의 소리|작성자 위드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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