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부고(訃告) / 한정숙
의외였다. 외사촌 큰오빠 이름이 전화에 떴다. 그러니까 5년 전 둘째 아이 결혼식장에서 뵙고 따로 전화를 하거나 만난 일은 없었다. 순간 연락할 만한 내용을 짐작해 봤다. 요양 병원에 계시는 외숙모님이 돌아가셨을까? 구순이 넘었고 치매를 앓고 있어서 그럴 만도 하겠다 생각하며 문자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부고였는데 돌아가신 분이 생각지도 못한 오빠였다. 그동안 연락이 없었으므로 그저 아팠으려니 짐작하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빈소는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으로 일흔 둘이었다. 고인의 나이나 나와의 친족 관계를 보더라도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목포에서 세 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다. 2층 빈소 입구에 세워진 '진도고등학교 1회 졸업생 일동'이라는 화환 리본에 눈길이 간다. 여동생과 같이 들어가니 외삼촌댁 가족이 먼저 와 있다. 30년 만에 보는 언니도 있고, 얼굴도 모르는 조카도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대사란 참 대단하다. 평소라면 몇 차례 약속을 해도 만나기 힘든 친척들을 단숨에 보게 한다. 미국에 출타 중인, 고인보다 세 살 위인 우리 오빠가 옆에 안 계셔서 쓸쓸했다.
여느 장례식장에서처럼 조문객들은 평소 고인의 학창 시절과 장성하여 활동했던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삼촌은 4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만 서울에서 살았고, 다른 자식들은 고향인 진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터전을 닦았다. 조화 리본에 쓰인 것처럼 오빠는 진도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었다. 개교하면서 밴드부를 창설한 그 학교에서 트럼펫을 배웠는데 친정엄마는 큰조카가 공부는 안 하고 나발만 분다고 걱정하셨다. 책 보는 일을 제일로 치는 우리 집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오빠는 학교에서 악기를 배우는 것 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고등학교 때 가출하여 광주와 서울에서 악단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 어머니는 외삼촌이 자식 때문에 속 끓이는 것이 안타까워 늘 오빠를 탓하면서 전해 들은 외지 생활 이야기를 툭 던지곤 하셨다. “아이고야, 세상에 그놈이 이 추운 겨울에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울었단다 야. 부모 떠나 얼마나 서러웠겠냐. 그러다가 하도 손이 곱아서 빨래를 쓰레기장에 던져 버렸단다.” 하시며 혀를 끌끌 찼다. 집에서 살았으면 양말 한 짝이라도 빨았겠냐 싶었던지 엄마는 속상한 티를 내셨다.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한두 번이었을까마는 오빠는 고향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 악단에 들어가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뒤늦게 마련한 흑백텔레비전에서 악단이 나올 때마다 “혹시 우리 기철이 나오는가 봐라.” 하시며 고개를 길게 빼시곤 하셨다.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나발 부는 오빠를 최고의 나팔 수로 자랑했다. .
그러니까 지금은 동아리 시간인 클럽 활동 때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배우고 더욱 정진하여 악기 연주를 일생의 업으로 삼았으니 고인의 의지도 참으로 남다르다. 트럼펫을 불었던 오빠는 색소폰으로 악기를 바꿔 활동했고 교회에서도 찬송가 연주로 재능 기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 오빠가 20여 일 전 다리가 많이 아프다며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간단하게 치료할 일이 아니라며 더 큰 병원을 권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하던 중 큰 병이 확인되었고 손쓸 수 없는 지경으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가족들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옆자리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조카들이 소리를 참으며 흐느낀다.
손님맞이방 앞면의 모니터에선 고인이 생전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력이 화면을 바꿔 가며 소개된다. 환우들과 노약자를 위한 자선행사에서 단정하고 멋스러운 노신사가 악단을 지휘하며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이 참 만족스러워 보인다. 또 세상을 달리하기 직전까지 송파구립실버악단을 이끌었다고 하니 자랑스럽고도 부러웠다. 본인으로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뜻있게 살았다며 성공한 인생이라고 가족들은 입을 모았다.
꿈의 씨앗을 뿌리고 가꿀 때 눈물로 고단함을 달랬을 고인은 꿈 너머 꿈까지 이루었으니 이젠 스스로 토닥토닥 위로하며 안도의 눈물을 흘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