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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 의정 유송당(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하고, 광주 용진 무수동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ㆍ정임당ㆍ김동원ㆍ이아계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하였다. 임당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광음무내서여천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하였다.
◉ 서자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과 조신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자기 힘 헤아리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ㆍ병조 두 조랑(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와 팔도감사와 양계 병사, 그리고 개성 유수와 승지는 모두 화현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과 삼사재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은 호가 석천이며 해남 출신으로, 시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하였다.
◉ 세상에 유생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 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과 소강절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이 있으리라.
◉ 동호의 저자도는 절승이다. 전조(고려) 때 정승 한종유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 쌍 잠들었고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의 세심정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 이굉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하였다. 그 후 병난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 최해, 가정 이곡, 목은 이색, 초은 이인복, 그리고 흥령군 안축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의 향리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 이조년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와 학사 부자통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그대 동이(우리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이 이 시를 《청구풍아》에 기록하고, 주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 김귀영과 지사 강섬,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 송찬과 좌윤 목첨과 참판 신담과 대사성 이기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 참판과 이 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 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송찬)과 이공(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명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 묵재 공이 같은 방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과 그 아우 김홍윤이 연방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이 축하 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