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창녕인물비사(1)
八서당 건립, 「창산지」 편찬한 명환 한강 정구 창녕현감
<창녕신문> 2025년 3월 10일부터 소설가 김현우의 <이야기/ 창녕인물비사>를 연재하게 되었다.
八서당 건립, 창산지 편찬한 명환 한강 정구 창녕현감
『창녕군지』 창녕현의 <환적宦績>을 살펴보면 조선조 때 창녕현감에 금유琴柔, 박한주朴漢柱, 다음에 정구鄭逑 등 세 분의 성명이 올라 있으니 이들이 명환名宦이라 알려졌다.
사실 그 이전에도 여러 현감이 다녀갔겠지만 선조16년(1583. 계미)에 도임한 이효남李孝南 이전의 고을 수령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단종 때(1453년) 창녕현감으로 재직하다 단종 폐위에 사직하고 옥야 내동에 은거한 하척河滌(고려 우왕 1384~세조 1458년)과 성종 25년(1494)에 옥천사 재건을 하려다 신돈의 일로 물의가 일어 중도 포기한 이기담李基聃 현감이 밝혀져 있을 뿐이다.
금유는 동국여지승람에 창녕현의 명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구도호부사, 강릉부사,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세종 때의 문신이다.
오졸자迕拙子 박한주(?~1504)는 연산군 때 간관이며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때 문과 급제한 후 정연 헌납, 창녕군수를 거쳐 예천태수, 간관으로 갑자사화(1498년) 때 참형을 당했다. 함안 사람으로 사우祠宇가 있다.
문목공 한강 정구(1543~1620)는 남명과 퇴계 문인으로 성리학자요 명문장가였다. 심학心學 예학禮學에 정통하였으며 문학, 의학, 서예, 풍수지리, 점술, 지지地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한 데다 매우 실용적이었다.
43세 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선조 13년(1580) 4월이었으며 후에 사헌부지평으로 이임하였다. 그 시절 한 고을 수령으로 제수받으면 임금 앞에 나아가 사은숙배했는데 고을 수령으로 지켜서 선치를 서약하는데 그것을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했다.
수령칠사는 고을을 잘 다스리는 요체인데 첫 항목은 농상이 진흥됨(農桑興)이었다. 곧 농사를 잘 짓고 양잠을 잘하면 생활이 풍족해져 굶주리지 않게 되면서 호구가 늘어날 것이니 두 번째는 호구증戶口增이었다. 학교가 일어나고(學校興), 군정이 잘 닦이며(軍政修), 부역이 균등하고(賦役均), 송사가 간편하며(詞訟簡),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없음(奸猾息) 등이었다.
한강이 창녕현감으로 제수받아 선조 앞에 나아갔을 때 임금이 물었다.
“지방관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한강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학교의 정사政事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
수령칠사의 첫 항목과는 어긋났다. 선조는 한강의 깊은 뜻을 알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대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구나. 지방관으로 나가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나 선정을 베풀도록 하라.”
선조는 지방 수령으로 가는 한강을 크게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냈다고 한다.
한강은 임금님 앞에서 말한 학교를 세워 백성을 가르치고자 창녕 고을 안에 여덟 곳 강학소(서당, 서재)를 세우고 교생을 모집하고 직접 순회하며 강회를 열거나 부용당 성안의, 승선 성천지, 백암 조광계, 안여경 등 선비들을 학당 책임자를 두어 가르쳤으니 곧 팔재八齋라 이르는데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창녕현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먼저 경내에 팔서당을 설치하고 돌아가면서 가르치니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가 가득하였다. - 爲先境內 置八書堂 周行敎授 絃誦洋洋
한강이 세운 팔재는 유어의 팔락재와 만진정, 대지의 물계정(후에 서원) 고암의 관산재(후에 서원)와 백암정, 창녕 술정과 옥천정, 성산 부용정 등으로 팔재에서 강마講磨한 이들은 한강의 생질 옥촌 노극홍, 숙인 노희, 퇴호 노용과 불온당 성창원, 호은 노극형, 국필 노충언, 성람 , 옥계 하준의 등과 영산현 부곡의 외재 이후경, 복재 이도자 형제와 벽진 이씨 문중 젊은 선비들까지 찾아와 배웠으니 이때부터 학문이 크게 진작되어 창녕이 문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두 번째 한 일은 창녕현의 역사와 인물들을 정리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하여 풍속을 순화하고자 했다. 또 대대로 문·무신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문헌으로 고징하고자 했다. <창산지>는 지금 전해지지 않았지만 7년 후 함안군수로 가서 편찬한 <함주지>가 전해져 지방사를 기록한 중요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창산지>가 전해졌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인데 유감스럽다.
한강은 학교 진흥 외에 일 처리를 공정하게 관리하였고 한 번도 사사로운 대접이나 선물조차 받지 않았으며 송사는 공정하게 판결을 내렸다. 효제孝悌를 독실히 하고 절의를 장려하며 유학을 숭상하고 제사를 중히 여기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이임 후에 은택을 추모하여 옥천에 영당(생사당)이 세워지고 사림에서 관산서원 등 팔재에 배향하였다.
선조 40년(1607) 정월 28일, 도천 우강에 있는 곽재우의 망우정을 방문하고 곽재우, 신초, 이후경, 노극홍 등 35명의 인근 유현들과 낙동강을 선유하니 <용화산하동범록>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낙강선유는 그 시절 가장 큰 유림 행사로 널리 알려졌다.
성천부사, 충주목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1613년) 대사헌으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임하고 고향 성주 백매원으로 돌아가 제자를 가르쳤다.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명문장가로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경현록」 등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 영의정으로 추증되니 시호가 문목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