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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찾아라 한국 인디아나존스들 ( 5회~10회)Ⅰ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6.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 발견…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석탑 해체 중 새어 나온 1370년前 황금빛에 모두가 ‘동작 그만’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 보수 현장에서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탑의 심주석을 가리키고 있다. 7년 전 첫 번째 심주석 안에서 백제시대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익산=김재명 기자
"솔직히 다보탑이나 석가탑 해체보수 때에도 느끼지 못한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실수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4일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서쪽 석탑 해체보수 현장. 석탑 1층 기단 위에서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탑의 중심 기둥 돌)을 바라보던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6)은 떨리는 목소리로 7년 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모시게 된 경과를 기록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배 소장이 “여기서 희대의 유물이 나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되짚는 동안 현장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목봉(木棒)을 내리쳐 상층 기단부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2009년 1월 14일 오전에도 이곳은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당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됐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황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장엄구였다. 통상 심주석 아래 심초석(心礎石)에 들어 있는 사리장엄구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맨위 사진)와 사리호(아래 사진). 사리봉영기 금판 위에 붉은색 주칠이 칠해져 글자가 선명하다. 이 중 ‘백제 왕후는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명문은 백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배병선은 유물 촬영 사진을 들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최맹식 당시 고고연구실장(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이난영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규식 보존과학연구실장(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등 전문가 29명으로 ‘유물 수습팀’이 구성돼 현장에 급파됐다.
심주석 안 26.5cm 깊이의 구멍(사리공)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호가 온갖 구슬들에 파묻힌 상태였다. 첫눈에 봐도 지금껏 발굴된 백제 금속 유물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수습팀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유물을 꺼내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사리공에는 사리호, 금으로 만든 사리봉영기, 은으로 만든 관식(冠飾), 청동합(靑銅盒), 금 구슬, 유리구슬, 유리판 등 9900여 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안치된 순서와 반대로 유물을 꺼내야 손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공간에 유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굴절거울 등을 동원해도 안치된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사리호와 사리봉영기 가운데 무엇을 먼저 꺼낼지 의견이 엇갈렸다. 배병선은 고민 끝에 사리호부터 꺼내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사리봉영기가 사리공 벽면에 걸쳐 있어서 밑이 살짝 뜬 상태였어요. 금판에 새긴 글자 위의 주칠(朱漆·붉은색 옻칠)이 떨어져 나갈까 봐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사리호랑 직접 붙어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금 구슬을 꺼낼 땐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하나씩 건져 올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유물의 손상을 막으려면 신속한 수습이 필요했다. 이틀에 걸쳐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강행군을 벌였다. 배병선은 발견부터 수습 완료까지 사흘 동안 6시간만 자고 버텼다.
사리봉영기의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꿨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확인시켜 줬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익산=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7.황룡사지의 비밀 캔 김동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30t 심초석 들어올리자 생각도 못한 유물 3000점이 우르르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22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목탑 터에서 심초석 위에 놓여 있는 막음돌을 가리키고 있다. 막음돌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가 불탄 뒤 심초석 내 사리가 들어 있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경주=박영대 기자
“아이고마 보는 사람 심장이 다 떨어지겠습니더.”
1978년 7월 28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터 발굴 현장. 포항제철의 크레인 기사가 최병현 조사원(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소리쳤다. 30t 무게의 목탑터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올리자마자 최병현과 동료가 그 아래로 들어간 것. 이들은 심초석 밑에 혹 유물이 묻혀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심초석을 옮겨서 내려놓을 때 잔존 유물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워낙 무겁다 보니 크레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동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9)의 입술도 바싹 타들어 갔다.
22일 팔순에 가까운 김동현은 38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약 8만 m²의 광활한 황룡사 터 한가운데 있는 9층 목탑 터로 서서히 걸어갔다. 심초석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들어올릴 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갑자기 3년 전 월지(안압지) 목선 사고가 머릴 스치더군요.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1978년 황룡사지에서 발굴한 대형 ‘치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5년 경주 월지 뻘층에서 인부들이 목선을 파낸 뒤 옮기는 과정에서 목선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김동현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지만 곧 반려됐다. 그는 심초석을 옮기며 그때의 악몽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다행히 돌은 무사히 빈 땅에 안착했다.
사실 당시 누구도 탑의 심초석 아래를 발굴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태여 무거운 심초석을 들어내 발굴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황룡사 터 심초석 발굴 때에도 일부 학자들은 사고 위험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동현의 생각은 달랐다. 탑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가장 아랫부분의 기초를 확인해야 한다고 봤다. “난 발굴에 들어갈 때 인문학적인 요소 이상으로 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요. 천마총 발굴 땐 소요 인력이나 흙, 돌의 양을 수치로 계산해 봤습니다. 정통 고고학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죠.”
심초석 아래는 그의 예상대로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이 설치돼 있었다. 평평하지 않은 자연 지형에서 거대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의 존재였다.
심초석이 놓였던 자리를 10cm가량 파내자 청동거울과 금동 귀고리, 청동 그릇, 당나라 백자항아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탑을 세울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를 부처에게 바친 공양품과 액땜을 위해 땅속에 묻는 예물인 진단구(鎭壇具)였다.
이것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장례용 의례품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사 공양품으로 발원자가 착용한 귀고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것이 신라시대 당시 실생활에도 쓰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게다가 이 귀고리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연도(645년)를 통해 시기가 확인되기 때문에 다른 신라 귀고리의 양식이나 편년을 비교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됐다.
1978년 7월 28일 무게가 30t에 이르는 황룡사지 목탑 터 심초석을 당시 포항제철에서 빌린 크레인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엇보다 고고학계가 꼽는 황룡사지 발굴의 최대 성과는 황룡사의 가람 배치가 1탑(塔) 3금당(金堂)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것이다. 즉,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나란히 세운 황룡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알아낸 것이다.
1978년 이전까지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전 도쿄대 교수가 1930년 논문에서 주장한 ‘1탑 1금당’이 정설이었다. 광복 33년 만에 일제강점기의 부실한 발굴 성과를 우리 손으로 극복한 것이다.
“1980년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갔는데 지도교수에게서 ‘황룡사 발굴 현장에 압도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최고로 치는 황룡사 출토 유물은 높이 2m짜리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입니다.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신라인들은 이 거대한 치미를 통째로 가마에서 구워 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사찰은 나무로 짠 틀에 동판을 붙여 치미를 겨우 흉내 냈죠. 황룡사는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압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경주=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8.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 배기동 교수
-1978년 미군 병사가 주운 돌, 세계 고고학계 발칵 뒤집어
배기동 한양대 교수가 4일 경기 연천군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등 출토 유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1978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천=최혁중 기자
4일 경기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곳곳에 화려한 전시물과 행사용 텐트가 들어서 보통의 유적지와는 색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날 열릴 연천군의 ‘전곡리 구석기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올해로 24년째를 맞는 이 축제는 발굴로 불편을 겪는 전곡리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64)가 처음 만들었다.
올해는 나흘 동안 관람객 60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행사장을 둘러보던 배기동은 “한때 개발제한 때문에 주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만 구석기 축제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한국 고고학의 대부 삼불 김원룡 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22∼1993)의 추모비가 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반백의 노(老) 교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입을 뗐다. “삼불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삼국시대 마구(馬具)를 전공하려고 한 그에게 삼불은 구석기 연구를 권했다. 이를 계기로 배기동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을 25년에 걸쳐 발굴하게 됐다.
1980년대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 발굴 당시 모습(위 사진). 여기서 출토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아래 사진)는 양쪽 면을 갈아 두 손을 모은 듯한 모양이다. 배기동 교수 제공
1981년 11월 1일 오전 10시 전곡리 발굴현장. 한탄강변의 질퍽한 모래흙을 2m가량 파내려갔을 때 서울대 화학과 학부생 한 명이 “무언가 나온 것 같다”며 배기동을 찾았다. 타원형의 돌이 흙 사이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꽃삽과 붓으로 조심스레 돌을 노출시키던 배기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간 흔적이 뚜렷한 옆면이 나타난 것. “처음에는 자연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파보니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어요. 그때까지 발견된 주먹도끼들 가운데 가장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양쪽 면을 갈아 타원형 모양인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다. 프랑스의 생아슐 지방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약 14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생겨나 10만 년 전까지 사용됐다. 고고학계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찍개 등에 비해 복잡한 가공작업을 거쳐야 해 고(古)인류의 진화 과정을 풀 열쇠로 보기 때문이다. 학계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쓰임새가 많다는 이유로 ‘구석기의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부른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할 뿐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에 의해 발견됐다.
모비우스의 학설이 무너지고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보웬이 삼불에게 주먹도끼를 보여준 이듬해부터 시작된 전곡리 발굴에 참여할 당시 배기동은 27세 청년이었다.
그때 발굴단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은 현재 고고학계 중진이 됐다. 최성락(목포대 교수) 임영진(전남대 교수) 이영훈(국립중앙박물관장) 박순발(충남대 교수) 김승옥(전북대 교수) 등은 주말마다 현장을 찾아와 작업을 거들었다. 당시 배기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현장에 지은 유물전시관에서 아내와 기거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지까지 와서 주말을 희생한 후배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발굴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1983년에 서울 용산의 우물업자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토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면 2m 높이의 흙을 한꺼번에 퍼내야 했는데, 당시엔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우물 파는 기술을 응용해 긴 관으로 토층 샘플을 담는 데 겨우 성공했다. 1986년 발굴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굴착기로 땅을 파면서 6·25전쟁 때 매설된 지뢰들이 드러난 것. 만약 삽으로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고고학계는 전곡리 유적의 연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전곡리가 한국 선사고고학의 개척지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질학 등 자연과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한 첫 사례로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4만∼5만 년 전과 30만∼40만 년 전으로 엇갈린 연대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연구방법을 지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연천=김상운 기자 ]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9.고구려 ‘아차산 보루’ 발굴 - 최종택 고려대 교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4보루 출입 시설 앞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등산로. 가파른 산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1시간을 걷자 어른 키 높이의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도 보인다.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보루 중 4보루다.
명칭은 4보루이지만 1997년 아차산 보루 중 처음 발굴됐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답게 한강과 중랑천 주변은 물론이고 멀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최종택 교수가 2005년 아차산 3보루에서 고구려 토기를 발굴하고 있다(위 사진). 1997년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後部都○兄’ 명문 토기. 최종택 교수 제공
○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을 찾다
1997년 10월 25일 아차산 4보루 중앙부에서 둥근 토기 접시 하나가 나왔다. 토기 조각은 여럿 나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최종택은 고고학자가 일생에 한 번도 만져 보기 힘든 ‘대박’임을 직감했다. 반으로 쪼개진 접시 한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던 것.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명문을 차근차근 해석했다. ‘후부도(後部都)’였다. 그런데 일부러 깬 듯한 그릇 단면에서 글자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단면에 낀 이끼로 추정컨대 오래전에 깨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한 명문을 찾아내야만 했다.
용마산 2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서울대 박물관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최종택 교수 제공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은 이듬해 7월 30일 결국 발견됐다. 처음 반쪽을 찾아낸 곳에서 남쪽으로 불과 2, 3m 떨어진 지점이었다. 파낸 흙을 따로 쌓아 둘 공간이 없는 산성 발굴의 특수성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즉 1997년 발굴에서 ‘후부도’ 조각이 나온 지점을 경계로 남쪽 면에 흙을 쌓으면서 나머지 반쪽을 놓친 것이다. “9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반쪽을 찾아냈을 때의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날 발굴단원들과 거나하게 한잔했지요.”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토기의 각종 명문들. 서울대 박물관
나머지 반쪽 그릇에는 ‘○兄(형)’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다. 두 쪽을 모두 합치면 ‘後部都○兄’. 최종택은 후부(後部)를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나눈 일부 행정구역으로, 도○형(都○兄)은 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형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보인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 쇠솥 나온 ‘구의동 보루’ 기습에 전멸 당한 듯
구의동 보루의 온돌 아궁이에서 출토된 쇠솥.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는 출토 토기의 양식을 감안할 때 서기 500년경 축조돼 백제-신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난 551년경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였다. 최종택은 장수왕이 한강을 빼앗고 남진을 본격화한 475년 이후부터 500년 직전까지 고구려는 보루 없이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본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투구.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의 고고학 증거들은 551년 후퇴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한강변에 있는 데다 소규모(10명) 병력만 주둔해 백제군의 공격에 가장 취약했던 구의동 보루에서는 쇠솥과 무기류가 꽤 출토됐다. 반면 약 100명의 군사가 산 위에 자리 잡아 기습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에서는 쇠솥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기류도 별로 없었다.
다음은 최종택의 해석. “구의동 보루는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에 비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 고구려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쇠솥과 무기를 챙겨 철수한 걸로 보입니다. 심지어 이곳 지휘관의 투구가 아궁이에서 발견됐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 지휘관이 철수에 방해될까 봐 무거운 투구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죠.”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최종택 교수 제공
끝으로 20년 가까이 아차산 발굴에 몰두한 그에게 남은 학문적 과제를 물었다. “고구려 연구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출토 유물이 적어 부실한 편입니다. 특히 토기나 마구 등 유물을 통한 편년(연도를 설정하는 것) 연구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고구려 박물관을 세워 남북을 아우르는 고구려 연구, 교육의 허브를 만드는 꿈도 갖고 있어요.” [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0. 경주 용강동 석실분 발굴 - 조유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아무도 기대 안한 폐고분서 국내 최초로 토용 수십점 발굴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지난달 25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1986년 발굴 당시 봉분 위를 덮었던 쓰레기와 흙을 걷어내고 석축을 조사하고 있다(아래 사진). 경주=김재명 기자
“아이고 망측시러버라. 뭐 이래 생긴 게 여깄노….”
1986년 7월 18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 발굴 현장. 한 대학원생이 흙이 잔뜩 묻은 조각상 하나를 조유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4)에게 가져오자 이를 본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유전과 발굴단원들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남근(男根) 형상이었다. 신성한 무덤에 남근상이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호기심에 서둘러 흙을 닦아 낸 단원들은 조각상의 실체를 접하고 더 놀랐다. 남근이 아니라 얼굴 없는 여인의 전신상이었다. 진흙에 뒤덮이는 바람에 여인상을 남근상으로 오인하는 촌극을 빚은 것. 한국 고고 발굴 역사에서 최초로 발견된 토용(土俑·인물이나 동물을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난달 25일 30년 만에 용강동 고분을 다시 찾은 조유전은 “여기가 발굴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국가사적 제328호로 지정돼 깔끔하게 복원 정비된 고분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이었다. “예전에 논밭투성이였어요. 집은 고작해야 두세 채 있었을까. (고분을 가리키며) 여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지.”
조유전은 1986년 6월 16일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지시로 용강동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앞서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요청을 계기로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발굴을 건의했다. 그는 고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쌓인 봉분 위로 오래전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있었다.
봉토는 여기저기 파였고, 외곽 둘레돌(호석)은 상당수가 뽑혀 나가 집 정원 장식용 등에 쓰였다. 무엇보다 봉분 표면에 여러 개의 도굴 흔적이 뚜렷했다. 높이가 10m가 넘는 데다 거대한 돌무지가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과 달리 용강동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은 약 3m 높이로 규모가 작아 도굴 피해가 극심했다. 이미 수차례 도굴을 당한 폐고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여기서 유물이 나올까….’ 신라 왕경 유적 발굴로 시간에 쫓기던 조유전은 내심 “빨리 끝내자”고 생각했다.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통한 얼굴의 여인 토용(왼쪽 사진)과 서역(아라비아)인의 얼굴을 가진 남성 토용. 이들 토용은 신라가 당나라, 실크로드와 교류한 흔적을 담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했던가. 발굴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토용으로 나른했던 현장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조유전은 단원들에게 “여인상의 머리를 반드시 찾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시신이 안치된 현실(玄室)과 연도(羨道·고분 입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를 가득 채운 돌과 흙무더기를 일일이 채질하고, 시신 받침대(시상)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여인상의 머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시상 앞 남측 방향에서 채색된 인형(人形) 토용 28점과 말 모양 토용 4점, 토기(土器) 15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현실 벽면을 따라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7점도 함께 출토됐다. 신라의 매장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대거 발굴된 것이다.
○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흔적
고고학계는 용강동 고분을 신라의 대외 문화 교류사를 푸는 핵심 열쇠라고 본다. 토용의 외형과 복장에서 당나라와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조유전이 용강동 고분에서 최고로 꼽는 서역(아라비아)풍의 인물 토용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턱수염이 수북한 이 토용은 언뜻 봐도 우리 조상이 아니에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신라 귀족의 호위무사가 된 외국 용병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당시 순장(殉葬) 대신 인형으로 주인 곁을 지킨 게 아닐까….”
통통한 얼굴형의 여성을 선호한 당나라의 영향으로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토용은 한결같이 후덕한 인상이다. 복색도 당풍(唐風)이 뚜렷이 반영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년)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였고 문무왕 4년(664년) 부인들의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꾼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이 무덤이 신라가 당나라 복식을 채용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중국식 의복을 받아들인 연대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만큼 용강동 고분은 신라 후기 석실 고분과 토기의 연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