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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주석 ♡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시작을 아담으로 시작하지 않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담은 최초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처음으로 형성된 사람인 것이다. 이로써 육체적인 족보의 의미보다는 영적인 혈통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갑자기 보내신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창13:16, 롬4:16-17) 것을 이루시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임을 밝힌 것도 예수 그리스도는 왕통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 집안의 왕국이 이 세상 끝까지 존속할 것이며 한 왕은 해와 달이 비치는 한 왕좌에 올라 있을 것이라는, 보다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시72:5, 시89:29, 삼상7:8-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바이블
1절 원어에는 Bivblo"(비블로스)가 있는데 유일하게도 이곳에서 한번만 언급된다. 영어의 바이블 The Bible, 도이치어의 비벨 Die Bibel, 프랑스어의 비블 La Bibl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비블리아 Biblia에서 나온 것이다. 이 라틴어는 그리스도의 ta biblia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그리스어의 비블로스 biblos의 복수형이며 <책>을 의미한다. 고대 필사 재료였던 파피루스, 즉 종이 풀의 줄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열 네 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세 그룹으로 아브라함-다윗왕까지(2-6절), 다윗왕-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12-16절), 바빌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예수님까지(12-16절)로 나누었다. 17절에서 각 그룹은 열 네 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그룹에서는 역대상1장-3장으로 보아 세 세대가 빠져있다. 도한 세 번째 그룹은 열 세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윗(dWID;)의 이름에 포함된 히브리어 자음의 수치의 합이 열 넷이 된다는 데에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거룩하고 권위 있는 왕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룻은 모압 여자였고 라합은 기생이었으며 다말은 간부(奸婦)였다. 마태는 유대인 사회에서도 심한 성차별의 문화가 존재함에도 그것도 상식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여인들을 포함하였다. 족보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낳았다(ejgevnnhsen:에게네센)는 주로 법적인 혈통을 말하는 단어이다.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동정녀 마리아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지만 법적으로도 분명히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와 교훈(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족보의 비교) 마1:1-17, 눅3:23-38
사람은 누구나 족보가 있다. 다만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 족보를 추적하여 따라가면 결국은 아담과 하와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진화론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인류의 조상을 우랑우탄과 같은 동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사람 외에 다른 동물은 언급되지 않는다. 누가가 누가복음 3:23-38절을 기록할 때 "사람들이 아는대로"(눅 3:23)라고 언급함으로 당시에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탓하거나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지 이해하고 인정하는 족보임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인류 최대의 족보인 셈이다. 물론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의 족보는 곧 하나님이 직접 잉태케 하심으로 사실상 요셉의 족보를 따라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아들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요셉의 족보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추적하다보면 중요한 시기에 나뉘어지는 곳이 있다. 이 때 어느 쪽으로 이어지냐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후세에 사람이 없거나 이름을 낼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족보는 끊어지게 마련이다.
첫 번째 분깃점은 아담의 아들들 가인과 아벨과 셋으로 나뉘어진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게 되고 아벨 대신 난 아들 셋으로 인류의 족보는 이어지며 셋의 8대손인 노아까지 이어진다. 노아는 셈(황인종의 시조) 창 11:10-27과 함(흑인종의 시조) 창 10:6과 야벳(백인종의 시조) 창 10:2로 이어가는데 예수님의 족보는 셈으로 이어지며 9대 손인 아브라함까지 간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이곳 아브라함부터 시작한다. 마태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언급하기 싫었는지 모른다. 마태는 단순히 인류의 족보가 아닌 믿음으로 시작하는 족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마태복음 1장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보는 이 시각에는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일치하는 부분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3대에 걸쳐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난 두 아들로 나누어지는데 마태복음은 솔로몬으로 이어지며 누가복음은 나단으로 이어진다. 마태복음은 왕통으로 이어지는 솔로몬을 따르게 되고 누가복음은 평범한 사람 나단으로 이어간다.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며 누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누가복음에서 제일 많이 언급된 인자(人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의 차이를 두고 잘못되었다고 보는 시작도 있으나 잘못이 아니라 누구를 따라 가느냐 하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서 누가와 마태 는 서로 다른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다. 마태는 솔로몬 이후 유다왕국의 남유다 왕들의 족보로 이어간다. 이 왕통계보는 악한 왕으로 알려진 시드기야왕 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B.C. 586년(왕하 24:18)에 마감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유다 왕들을 통해서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바벨론 통해서 멸망하게 하신다. 그 후 여고냐로부터 요셉까지 12대가 내려가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되신다. 마태가 이러한 유대의 왕들을 따라 족보를 따라갈 때 누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빼곡이 적어넣는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보다 훨씬 복잡하고 길게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그 인물들이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이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죄인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다. 결국 아담이후 내려오는 인간의 족보는 죄의 얼룩 그 자체였다. 마태는 왕들을 따라 족보를 이어왔지만 유대의 대부분의 왕들은 악한 왕들 뿐 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말한다.
1:18-25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은 '약혼'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유대인의 정혼한 사이는 법적으로 나누일 수 없으며 정혼한 기간 중에 어느 한편이 죽으면 과부나 홀아비가 되어 살았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용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신 것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여자의 후손(창3:15)이 되게 하신 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신다. !Ihsou'"(예수)는 (그가 구원하시리라)라는 말에는 번역상 예수라는 말 다음에 "구주"라는 말을 덧붙여 넣어야 의미를 살릴 수 있다.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박사(magi)라는 칭호는 페르시아와 갈대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주는 것인데, 이 칭호가 페르시아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가 드린 예물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드렸다고 해서 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확히 몇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별이 움직였다는 것은 단순히 동방박사의 경배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별을 움직여 그가 메시야 임을 증거한 것이다. 이 예물에 대해서는 황금은 인성(그가 왕이심), 몰약은 죽음을 위함이요, 유향은 그의 신성(하나님)이심을 위해서 드려진 것이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별이 안내하여 예수님께 왔지만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한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13-18 애굽으로의 피난
동방박사들은 헤롯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여 요셉은 주의 사자의 인도(마2:13)로 위기를 피하게 된다. 애굽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라고 말씀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내셨다. 이 일로 헤롯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으며 자신의 왕권에 위기를 느꼈는지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유아 학살은 출1:16에서도 있었다.
2:19-23 나사렛으로 귀향
2:23 나사렛에서 성장하시게 된 이유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이 예언의 구절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마태는 구약의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참고 딤후3:16). 필자가 발견한 부분은 Nazwrai'o"(나자렡) 이말은 "네젤" 왕관(王冠)이란 뜻이 있고 또한 이 말은 [싹트는 것]을 의미하는 어원에 나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싹트시었다(사11:1). 22절 아켈라오. 헤롯이 죽은 후에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명령에 의해 헤롯의 세 아들이 통치하였다.
3:1-17 세례요한의 전파 및 요한의 세례
마태는 그의 독자들이 오랫동안 세례자로 알려졌던 요한과 친숙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우리는 모르지만 세례요한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본래 엣세네파 공동체(Essene Communities)에 속했는지 아니면 최근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어 알게된 쿰란종파(Qumram sevt)였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사야 40:3의 예언대로 예수님 앞에 유대 광야에 나타난 것이다.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4:5)한 바로 그 선지자였다. 세례 요한의 강력한 설교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좋은 발판이 되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앞에 올 사람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Iwavnnh"(요한)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모든 사람은 죄가(원죄: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 있어서 세례를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표본이 되시고자 겸손히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신학자 레버토프는 "물은 다만 표면을 적신다. 그리고 깨끗케하여 주기는 하나 영구적인 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령께서는 그가 일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나 마음 속까지 이르시고 거기에 생명을 가져다 주신다"고 하였다.
4:1-11 광야에서의 시험
tovte(토테)는 부사이지만 그 때에가 항상 앞에서 기록된 일 "직후에"의 의미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관복음서들은 모두 예수의 시험이 그의 세례 직후에 뒤따라 일어났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이 시험은 사역에 앞서 금식하신 후에 일어났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사십 주 사십 야(마태복음서에는 사십 야라는 말만 나옴)를 금식한 것(출 34:28)과 같이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지만 마귀는 육체적인 약점이 있는 예수님께 덤벼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적인 양식보다 더 중요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참고 요4:33, 요6:55). 다시 마귀는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시험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순순히 응하셨다. 그 시험을 피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히 맞이하여 마귀를 이기신 것이다. 마귀는 교묘하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뛰어내리라고 충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마귀의 속임수였음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다. 세 번째의 시험은 천하를 보여주고 그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천하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며 마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에 예수님은 단순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심으로 사단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셨다. diavbolo"(마귀)는 참소하는 자, 대적하는 자, 비방 중상하는 자의 뜻이 있다. 마귀는 영육간에 허약한 사람을 통해 잘 역사 한다. 또한 건강한 사람에게도 교만과 욕심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 한다. 예수님은 시험은 당신이 시험받고 사단에게 순순히 응해야될 이유가 없었지만 이 시험을 받으심으로 육체로 오심과 우리에게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본을 보여주셨다.
4:12-25 갈릴리 사역의 시작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태만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곳에 사신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침략자들에게 짓밟혀 황폐케 된 지역에 큰 빛이 비취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사9:1-7)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ajmfivblhstron(암휘불레스트론)는 투망과 같은 그물로 둘러싸고 끌어당기는 그물을 말한다. 전도하는 것 역시 그물을 치고 잡아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면서 그들의 사명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를 성전이나 회당에서 찾지 않으시고 복음을 듣고 있는 바닷가의 어부를 선택하셨다. 예수의 초기 사역에는 상호 보충적인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도와 병 고침이다. 이것은 23절에서 요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5:1-12 산상보훈의 여덟 가지 복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시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국이었으며 자유와 행복이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이들에게는 남을 비판하는 능력은 발전했으며 율법주의와 더불어 패배의식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기쁨과 소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나 하나 설명해 가셨다. 이 말씀은 듣는 청중들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더불어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1절 산에 누가복음에는 평지로 나와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으로 보고 있다. 기자는 이 기쁜 소식의 말씀의 시작을 입을 열어 가라사대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입을 여시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그분의 말씀이 곧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언급된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pneuvmati(푸뉴마티) 심령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즉 사람들은 이제껏 복의 조건에 있어서 외부적인 요소만을 찾았는데 그 복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the poor in spirit)은 심령이 약한 자들(the poor-spirted)이 아니다. 영어 번역에서 다소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만한 자들이 아닌 겸손한 자들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 애통하는 자들 당시의 민족적으로 개인적으로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되었을 것이다. 고난의 비참과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적개심과 마음의 상처를 씻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온유한 자들은 역시 애통하는 원망과 저주의 마음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온유한 마음을 자길 것을 말씀하신다. 결국 이러한 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될 것을 말씀하셨다. prosh'lqon(프라에이스)는 가까이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내, 사랑, 겸손을 의미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악에 대한 승리의 나라가 온전히 설 때를 기다리며 바른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만족을 얻게되는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제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 대한 긍휼한 베푸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원망과 저주의 마음이 없고 나아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지 않는 순결한 마음을 말하신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는 자신을 통해서 불화와 갈등이 있는 곳에 평안을 가져다 주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부름을 받게 된다. 대칭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화평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할 때도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약속하신다.
5:13-16 빛과 소금의 비유
12절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profhvta"(프로훼-타스) 예수는 [우리 전]에 있던 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너희 전]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원 전부터 존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마11:9, 요1:1-4). 소금은 부패를 막는 힘이 있으며 음식에 맛을 나게 한다. 즉 소금은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맛을 잃으면 mwranqh'/(모-란데)는 "무미건조하게 되다, 바보가 되다, 어리석음을 드러내다, 어리석게 만들다, 맛을 잃다"는 뜻이 있는데 문학적으로는 "업신 여김을 받다"는 뜻이 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 집에는 방안의 한 구석에 등불을 놓기 위해 불쑥 튀어나온 등경이 있었다.
5:17-48 율법의 완성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 주신 십계명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율법이다. 그러나 십계명 외의 생활 율법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게 되는 것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제사 율법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양이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다시는 양을 잡아 하나님께 대속 물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10장 참고) 실제로 생활 율법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되어버린 경우가 흔하였다. 즉 마음에서는 멀고 행위만을 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율법에 대해서 재정리해 주시는 것이다.
다섯 가지로 율법에 대해서 먼저 지적하신다.
1) 살인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殺人)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審判)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21)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에 있는 자(요일2:9),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일3:15)라고 행위 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원론적인 부분을 지적하신 것이다.
2) 간음
"또 간음(姦淫)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27)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 참고 욥31:1, 잠6:25)
3) 맹세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盟誓)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3)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誓願)하였거나 마음을 제어(制馭)하기로 서약(誓約)하였거든 파약(破約)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민 30:2, 참고 레19:12, 약5:12)
4) 보복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21:24) 모는 문제를 폭력으로 풀려고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며 용서를 바라신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21)
5) 이웃 사랑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怨讐)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同胞)를 원망(怨望)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참고 눅10:29-37) 폐하다 katalu'sai(카타루-사이) 이 말은 집이나 장막을 헐어버리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4:18, 26절 진실로 ajmhvn(아-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만 사용하셨으며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가 사용된 적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진실로라는 모든 단어는 원어의 [아멘]이다.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하신 말씀에서 그 실제적인 대조는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과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신 말씀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이 이 말씀에서 잘못 끌어낼 결론(그리고 그들이 그 뒤에 덧붙인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과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신 말씀 가운데 있다.
6:1-8 구제와 기도 규례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제하는 일은 [의]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구제와 의는 거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다. 2절에 사용된 구제하는 일은 구원의 공로가 되는 한 행위였다. 또한 의라는 말은 dikaiosuvnh(디카이오쉬네)라는 말로 공정, 정의, 경건의 의미가 있고,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uJpokritai(휘포크리타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자를 뜻하는데 자신의 의를 속여서 드러내는 가증한 행위를 말한다. 이들은 구제와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앞에 진실성 없는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저 없이 지적하시고 제자들에게 8절 저희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구제와 기도할 때 은밀한 중에 할 것을 권하고 계시며 또한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지적하신다. 중언부언에 원어의 두 단어가 나타나는데 battologhvahte(바토로기아:말더듬) 필요없는 말의 반복이고 polulogiva/(포뤼로기아:다변) 쓸데없는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6:9-15 주기도문
주기도문에는 여섯 가지 청원이 들어 있는데, 처음 셋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요 두 번째 셋은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내용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의 대상을 보다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설명하시고 보다 친근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유대인들이 외식하는 기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나의 의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위한 거룩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헬라어 동사는 복합 동사가 아니지만 주석가들이 그랬듯이 [임하옵시며]를 도래하게 하옵소서(ad-veniat)로 읽어도 의미는 동일하다. 사상 사람들에 의한 불법한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먼저 구하고 우리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첫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둘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셋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넷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치신다. 남의 죄를 사해주지 않고 자신의 죄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한 자신의 구원의 문제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해서 구할 것은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사단은 언제나 줄곧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것에 대한 훼방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그 모든 문제가 절대자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주기도문에서 한글성경(개역)에 나타나지 않은 [대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말은 원어의 kai;(카이)로 볼 수 있다. 이 뜻은 그리하여, 그러므로, 마찬가지로의 뜻이 있다.
6:16-18 금식 규례
예수께서는 앞에서 언급한 기도의 교훈으로 돌아가도 있다. 역시 금식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식적으로 하나님께 한다는 것이며 참된 금식의 의미를 설명하시고 있다.
6:19-34 재물 규례
쌓아두지 말라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 곧 죄를 낳고 그 욕심은 그칠 줄을 모른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 물질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계획성 있는 물질의 사용을 위해서 절약하고 저축하는 것을 탓하시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서 인생의 모든 목적이 물질을 모으고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외식 적인 기도만을 하는 이들에게 구제를 위해서 이러한 물질을 사용하여 실제적인 바른 행동을 요구하고 계신다. 바로 이런 물질의 사용이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며 그곳에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이다. 재물 mammwna'"(맘모나스) 갈대아 어로는 의지하고 있는 것, 믿고있는 것을 뜻한다. 20절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동록(혹은 녹)으로 번역된 헬라어 brw'si"(브로시스)는 문자적 [먹히움]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해충에게 먹히움]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부패하다] 보다는 [다 먹어버리다](R.V.)가 나은 번역이다. 이렇게 하늘에 쌓아두면 세상에 먹고살 염려가 있는 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고 하시면서 공중의 나는 새와 들풀과 모든 것을 결국은 하나님께서 키우시고 자라나게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도록 하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신다.
7:1-6 판단 규례
비판하지 말라 남에 대해서 단순한 판단을 넘어서 정죄하는 행위를 경계하고 계신다(눅6:37, 롬14:3). 결국 이러한 비판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경고한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티 kavrfo"(칼포스) 나무의 부스럭이와 들보 doko;n(도콘) 지붕을 바치는 중심이 되는 기둥에 비유하고 있다. 깨닫지 못하느냐 깨닫지 katanoei'"(카타노에이스) 깊이 생각지 않는다, 숙고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죄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자(렘2:35)나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는 사람(잠20:12)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스스로 돌아 볼 것(애3:40)과 자기를 먼저 살필 것(고전11:28)을 충고하신다. 6절에서는 성도가 무지한 혼합주의로 세상과 타협할 것을 경계한 말씀이다(고전6:14)
7:7-12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
7절의 현재 명령법들의 강세는 반복적이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에 지쳐서는 결코 안 된다. 끈기 있게 믿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신다. 누가복음 18:1-7의 끈질긴 과부의 비유도 이와 같은 주님의 간절한 부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요청들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기를 꺼려하는 어떤 요소들을 극복해내는 데에 필요한 것으로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열릴 것이니라는 ajnoighvsetai(아노이게세타이) 열다, 열리다라는 동사 ajnoivgw(아노이고)의 미래형으로 능동적으로 사용될 때 문을 열다(행5:19), 성전을 열다(계11:19)로 쓰이고 수동적으로 사용될 때 하늘이 열리다(요1:51), 입이 열리다(고후6:11)로 사용되었다. 12절에 기록된 말씀은 5-7장에서 가르친 일반적인 개요가 된다. 이 구절은 사실상 부정적인 문구로 되어있는 유대인 형식의 황금률 [무릇 네가 싫어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하지 말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마태복음에서만 기록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은 자칫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황금률에서만 머물지 않고 좀더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7:13-29 하늘나라 생활의 증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은 두 길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셔서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암시하셨다. 사람이 나아갈 길은 결국 두 길 밖에 없다는 사실로 예레미야 21:8에 기록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다. 두 길에 대해서 구약성경 시편1:8, 신명기 21:8, 30:9에 나타난다. 이 좁은 문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10:9)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는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를 부른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설령 예수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였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또한 어떠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믿음을 말하셨다.
반석(마16:18 주석을 보라) 이 말씀을 강력하게 하심으로 메시지는 힘이 있으셨고 사람들은 권세 있는 말씀에 놀랐다. 이제 보다 분명히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
8:1-4 문둥병자를 고침
레위기의 율법은 문둥병자에 관한 상세한 규례를 포함하고 있는데 문둥병자를 육체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였다. 문둥병자로 판명이 되면 부정한 자요, 진 밖으로 추방해야 했다(레위기 13장을 보라) 그리고 이들의 병이 고쳐지면 그들의 깨끗케 됨에 대한 감사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다(레위기 14장).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무엇이 담겨있다. 이에 대해서 마가만이 [민망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 공관복음서 모두가 예수님께서 율법에 정한 규례들에 상관치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일로 율법을 어기게 되신 것이지만 이차적으로 제사장들에게 필요한 검사를 받기 위해서 보내셨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며 또한 예물을 드리게 함으로 구약에 명한 율법도 존중하게 하신 것이다.
8:5-17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고침
이 기사는 앞서 문둥병자의 고침에 이어 예수께서 손에서 능력이 나타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15절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는 병이 나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준다. 이러한 병 고치심에 대한 것으로 질병에 대한 치료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8:18-22-27 제자들과 바다를 잔잔케 하심
이러한 병고침이 있은 후 제자 중 하나가 예수를 쫓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예수님은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셨고 21절의 또 제자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청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다양한 문제가 나타났으며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23절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는 그래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연에 대한 권세가 있음을 확인시켜 줌으로 그가 메시야 임을 자연스럽게 알도록 했다.
8:28-34 귀신을 쫓아냄
무덤 사이에서 나와 무덤은 동굴로 만들어진 것으로 팔레스타인의 무덤들은 동굴 무덤이었으며 집에서 살 수 없는 문둥병자나 각종 병자들은 이런 곳에서 살았다. 29절 하나님의 아들이여 uiJe; tou' qeou (휘에루-데우-)라고 위쳤다. 보통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단순히 인자(人子)라고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다. 귀신에 대해서도 그의 말대로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함으로 예수님의 권세는 보다 분명해 지셨다. 아직도 의심이 있는 제자들에게 확고히 그가 자연에 대한 권세와 사람의 질병에 대한 치료의 능력, 귀신을 다루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단순히 사람들의 치료와 자연에 대한 마술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표적으로 삼으신 것이다.
9:1-8 중풍병자를 고침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라고 말하심으로 환자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병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믿음 pivstin(피스티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의 믿음을 말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이들은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prosevferon(프로습헤로) 인도하다, 바치다, 헌납 하다의 뜻이 있다.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에 즉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육체적인 병 고침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9:9-13 마태를 부르심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마태 자신이 기록함으로써 세리 전체가 어느 정도 부정부패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불러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마태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기록하면서 죄인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마태가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 들이는 일은 곧 자신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세리들은 동족들로부터 멸시와 죄인이라고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마태를 부르시면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했다는 비난을 듣게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죄인, aJmartwloi;(하말로-로이) 이 말은 죄에 몸을 바친자 곧 악한일을 상업적으로 행하는 자란 뜻이다(롬3:23).
9:14-19 금식에 대한 교훈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리세인들은 그들의 금식에 대한 규례를 기계적으로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이 문제는 먼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들고 나왔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약간은 건방진 태도로 물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의 선생(요한)이 예수께 베푼 세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이런 형식적인 금식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고 진정 금식할 날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문제에 대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교훈과 말씀은 새로운 것임을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 nevon(네온) 새로운 이란 시간적으로 새로운 곧 [만들어지지 얼마 안된]이란 뜻이다. 새 (부대) kainouv"(카이누-스) 여기서 새로운 이란 질적으로 새로운 곧 [결코 전에 사용한 일이 없는]이란 뜻이다.
9:20-38 생명과 시력과 말을 회복시키는 자
이제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생겨났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예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고 이를 실천에 옮겼을 때에 그의 명은 낳았다. 안심하라, Qavrsei(달세이) 격려하다, 용기를 갖다의 뜻이 있다(참고 막10:49, 행23:11 에서는 담대하라로 번역했다.). 혈루증, 현대 의학의 전문 용어로는 메노르하기아(menorrhagia) 영어 발음은 메너라지어로 월경과 다출혈증이다. 예수님이 이어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사람들의 많은 이적을 체험했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문제에 대해서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고 손을 잡으시니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 일로 또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27-31절은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부분이다. 두 소경은 예수를 메시야의 명칭인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청에 응하기 전에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고 질문을 던지심으로 그들의 진실을 확인하셨다. 32-34절 역시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귀신 들린 자 벙어리가 나아왔다. 33절 무리라는 언급은 이러한 이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는 암시이다. 35절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주요 사역 방향이 나타난다. 첫째, 두루 다니사 둘째, 가르치시며 셋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넷째,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병 고침에만 매달리신 것이 아니라 기회만 되면 이들을 가르치셨다(가르치다 didavskw(디다스코)의 원어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마4:23, 마7:29, 마9:35, 마26:55, 막1:22, 막6:6, 막12:35, 막14:49, 눅4:31, 눅5:17, 눅13:10, 눅13:22, 눅19:47, 눅21:37, 눅23:5, 요6:59, 요7:28, 요8:20).
10:1-16 열두 제자 선택과 파송
1절에서는 제자(maqhta;") 배우는 학생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이어 2절에서는 사도, ajpostovlwn(아포스롤론-) 보냄을 받은 자, 전권 대사, 사자의 뜻이 있는 사도로 바뀌었다. 사도의 명칭을 사용한 사람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맛디아(행1:16-26), 바울, 바나바(행13:2)이다. 이들의 사명은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눅9:2). 잃어버린, ajpolwlovta(아폴로-로타) 죽다, 잃다의 뜻으로 목자가 잃어버린 양(요3:16) 또 집으로 가는 길중에 잃은 양이다. 목자를 잃은 양은 목자를 찾아 헤맬 것이며 간절히 찾고있는 양이다. 목자없는 양의 비유는 민수기 27:17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참고로 열왕기상 22:17에도 [약하여졌고와 널리 흩어졌다]고 하였다.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고생하며와 유리함이라]고 번역되었다. ㅍ예수님은 먼저 이들에게 천국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는 이방 세계에 복음화 할 사명도 부여받게 된다(마28:18-20).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6절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절 천국이 가까웠다 전파하라, 8절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10절 전대나 - 주머니 가지지 말라, 12절 평안을 빌라, 16절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다. 10절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여행을 위하여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간결하게 가라는 말씀이요 영적인 의미로는 세상의 물질이나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가라는 것이다.
10:17-42 박해를 각오하라
17-18절은 이들이 이번 여행에서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게 될 훗날에 닥쳐올 고난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고 있다. 고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19-20절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21절 형제가 형제를 내어주지만 22절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다시 위로와 힘을 주신다. 28절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 두려운 대상이 아니요 실제는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눈앞에 보이는 두려움이 복음전파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34절 검을 주러 왔노라는 현재의 우리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당황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이 화평을 주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의 어려운 사회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화평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화평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검 뒤에 화평이 온다는 것이다. 검 mavcairan(마카이란)이란 칼, 단검을 뜻하지만 상징적으로는 전쟁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거짓된 평화, 잘못된 안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이 불가피 하다는 것을 말한다. 화평 eijrhvnhn(에이레-넨-) 화평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평(롬5:1, 엡2:14-17), 둘째, 하나님 안에서의 화평(빌4:7).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긴 화평(눅7:50, 빌4:6, 요14:1) 셋째, 지상의 평화(눅2:14, 사9:6, 사10:1-12). 37절 더, 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부모나 자식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uJpe;r(휘펠)은 "위의, 너머, 가로질러서, 대신으로, 보다 뛰어난"의 뜻이 있다. 42절 예수님은 그의 제자 중에 제일 작은 자 일지라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11:1-19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세례요한은 성경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그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에게 부잡힌 후 사해 근처의 마케루스 요새 감옥에 갇혀서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그가 자신을 헤롯 안디바스와 헤로디아의 악한 계교의 마수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의 선생에게 근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이적사건에 대해서 전했을 것이다. 요한은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고 질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이사야가 행하리라고 예언한 바를 그대로 행하고 계신다는 안위 적인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사35:5, 사61:1을 보라). 요한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증거할 사명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말4:5에 언급된 엘리야 였다). 이 때에 예수님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부른] 놀이의 예화를 들고 계시다. 서로의 놀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놀이란 서로가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 것인데 피차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의의를 모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11:20-30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교훈
예수는 초기 사역부터 소외 받고 있는 도시들, 곧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마4:12-17). 그 가운데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과 같은 도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도시 사람들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들이 당할 심판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더 저주를 받게될 것을 경고했다. 20, 21절 회개치 metenovhsan(메타노에산) 예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고도 회개치 않은 고을들에게 사용된 이 단어는 ...후에 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meta(메타)와 이해하다라는 동사 noevw(노에오)가 합쳐진 '뉘우치다'라는 동사이다. 원어의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언급된 곳은(마11:20, 21, 마12:42, 눅10:13, 눅11:32, 계9:20, 21, 계16:9, 11)이다. 25절 슬기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들이고 어린 아이들은 누구(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26절 감사의 말을 여는 첫 말로서 옳소이다 naiv(나이)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 분명히'의 뜻이 있다.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나이다]라고 번역해도 된다. 28절 쉬게 하리라 ajnapauvsw(아나파우소-) '너희들을 젊게 하여 주리라, 일하는 중에 휴식을 주다'는 뜻으로 새로운 힘을 더해 주시겠다는 뜻이다(요3:3-6, 마12:43, 계4:8). 29-30절 멍에 zugovn(주고스) 랍비들은 학교를 멍에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랍비의 가르침과 달랐으며 이 멍에는 가벼운 것을 의미한다(빌4:3).
12:1-8 안식일의 주인 예수
시장하여라는 포함하여 마태는 안식일에 "추수함"으로써 율법을 범하게 된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지 도발적인 욕구에 의해서가 아님을 강조했다. 바리세인들도 익히 알만한 다윗의 일을 말함으로 그들이 안식일만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꾸짖으셨다. 구약의 사무엘상 21:1-6절의 기록된 사건을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다. 마태복음 9:13에서도 인용하신 호세아 6:6을 상기하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셨다. 마태가 아는 대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막2:27).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로 독자들의 눈을 집중시키고 있다. 8절 만일 다윗이 율법을 "범할"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윗보다 더 크신 메시야 자신은 더욱 그러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율법아래에 있지 아니함을 말하고 있다. 헬라어 시장하여 ejpeivnasan(에페이나산)는 시작을 뜻하는 단순과거이다. 따라서 [시장하게 되었다]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이것이 생략되었다.
12:9-21 안식의 참된 의미
10절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자세히 전하고 있다(눅6:7을 보라). 안식일이라고 해도 생명이 위급한 상태이면 고쳐주는 것이 합법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다렸다 안식일 이후에 고쳐주는 것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과도 무관하고, 자신을 송사 하려고 말했던 그 사람의 손마른 병을 고쳐주셨다. 12절 더 귀하냐 diafevrei(디아페레이) 율법에 얽매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뜻. 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목숨에 관계된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일 지라도 그것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임을 알도록 했다. 상한 갈대 suntetrimmevnon(숨테트림메논) 꺽어진 갈대를 뜻하며 여기서는 마귀에게 짓밟힌 마음을 뜻한다. 꺼져가는 심지 또는 tufovmenon(연기나는 삼대) (투훼메논) 불이 거의다 꺼진 심지나 삼대가 타고 있는 것을 뜻하며 여기서는 실오라기 같은, 거의 소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21절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달 될 수 있다는 뜻을 밝히시고 아울러 이루리라는 말로 복음이 이스라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고전2:7, 롬11:25). 참고 :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39가지 안식일 금법은 육체적 노동과 관련 있는 조항들이 있다.
12:22-37 성령 훼방 죄
바리세인들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예수가 메시야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그들의 비상한 그들의 학문에 비추어 졸렬한 억지 주장을 펴게된다. 그만큼 예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놀라 말하는데 바리세인은 이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는 말로 방해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이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스스로 멸망할 일을 사단이라고 하겠느냐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바알세불과 사단을 동일체로 간주하고 계신다. 유대 문헌에서는 [귀신의 왕]에 대한 명칭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이들의 이러한 방해에 대해서 31, 32절에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가 된다. 오는 mevllont(멜론티) '...하려고 하다, ...할 것이다'의 뜻이 있는 이 단어는 현재의 세상에 만족을 얻으려고만 하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뿐만이 아닌 오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36, 41, 42절 심판 krivsei(크리신) 결정, 재판의 뜻으로 그리스도는 심판 주(요9:39)로 오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자(요12:42), 산자와 죽은 자(딤후4:1), 의인과 악인(전3:17)모두 심판을 받는다.
12:38-45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34절에서와 같은 꾸중을 들은 이들은 비아냥거리며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표적은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부활하시게 될 그 사건인 것이다. 바리세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필수 조건으로서 요구한 표적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과 병 고치는 일이 아닌 필시 어떤 다른 표적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요구에 일일이 응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이러한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43절 물 없는 곳으로 사막이나 광야를 가리키는데, 이곳은 귀신이 사는 곳으로 믿어졌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것이나(레16:10),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마4:1-11)도 관계가 있다.
12:46-50 예수 가족의 방문
마태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의 가족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 악한 세대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가는 마가복음 3:21에서 그들이 온 목적에 대해서 밝히고 있으나 마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함이다.
13:1-52 일곱 가지 천국비유
마태복음에서 기록한 비유 중에 두 비유(씨뿌리는 비유와 해석 막4:1-9, 13-20, 눅8:5-15, 겨자씨 비유 막4:30-32, 눅8:18-19)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서에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누룩비유(눅8:20-21)는 누가복음에서도 발견되고 그리고 네 가지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가라지 비유와 해석, 감추인 보화, 극히 값진 진주, 그물 비유).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길가와 돌밭 :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비유의 방법을 종종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들과 비교하여 쉽게 가르치시려고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믿음으로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진리 이해에 있어서 그 명료성과 심오성을 더해주는 것이지만 불신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 13장에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 째가 바로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진리 등을 상징하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복음 전도자, 등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먹어 버렸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새는 사단 을 가리키고 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세속적 교훈, 장로들의 유전, 철학 등으로 이미 다져져 복음을 받아들여 지킬만한 마음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들의 교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것인데 이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천국은 세속적 지식이나 이성적 사유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돌밭 petrwvdh(페트로-데-) 토양이 깊지 않아서 씨가 발아를 했다가도 뿌리가 없어 볕이 뜨거우면 곧 말라죽는 밭이다. 흙이 엷게 덮인 돌이나 바위투성이의 밭, 이런 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쉽게 발견되는 토양이다. 이는 복음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생겼을 때에 믿음의 뿌리가 없으므로 쉽게 믿음을 버리는 심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에 ejpi;(에피) 씨를 뿌리기 전에 이미 가시의 씨가 뿌려져있었음을 보여준다.
(2) 가시 떨기 :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가시떨기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심령 속에서 잘 자라게 하나 가시 떨기도 함께 자라게 함으로서 말씀의 성장을 가로막아 질식하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세상의 염려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불신자들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주에 대한 염려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를 먹여 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 염려는 하나님의 감화력을 약화시켜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리의 유혹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과 추구로 신자의 영적 필요를 소외시킴으로서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유해질수록 축적욕을 가중시키는 반면 그 인격에서 관대성을 감소시키고 그 자리에 비정한 마음을 채워놓는다. 신앙에 있어서 이 '가시떨기'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앞에서의 돌밭인 환난과 핍박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과 핍박은 외적요인 이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내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얼마동안 성장하다가 가시떨기에 의해 그 성장이 중단되고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신앙적인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지속되어야하는 생명활동이므로 결코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거나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까지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다(엡 4:13).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성령의 능력이다.
(3) 좋은 땅 :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서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말씀이 아니라 깨닫는 말씀이다. 말씀을 깨닫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다.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이다. 순수하고 선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내적 사역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성장에 옥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의 은혜는 이러한 마음 속에서 말씀이 잘 성장하여 결실 하도록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과 돌밭과 같은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고 가시떨기와 같은 세속적 염려와 물질적 탐욕을 정화시킨다. 성령의 감동은 말씀이 결실 하도록 수욕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게 하고 항상 끊임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게 만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함으로서 (갈5:22-23) 신자를 성결되게 하고 그 신앙적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 하신다. 이처럼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를 많이 맺는 `좋은 땅'으로서의 모범이 된 신자는 교회 역사상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생의 말씀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사도요 수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함으로서 신약 교회의 위대한 초석이 되었다. 신약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말할 때 결코 베드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13:24-30, 36-43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1) 좋은 씨 :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 안에 선악이 함께 공존하는 실상을 가리키신 말씀이다. 이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셨다. 그리고 '가라지'를 심는 자는 마귀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추수 때는 세상 끝이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설명하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으나 여기서는 '좋은 씨'가 천국의 아들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씨를 이 세상인 밭에 뿌리는 사람은 '인자'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단순히 대속 사업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은 구속 사역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속 사역이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씨 뿌리는 일, 즉 대속 사역의 은혜를 받을 자들을 선택하는 일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삼 년 공생애 기간을 가지셨고 이 때에 좋은 씨앗을 뿌리셨다. 예수께서 뿌린 씨앗은 매우 좋은 씨앗이어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복음의 결실을 맺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즉 성도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좋은 씨가 정선된 씨앗이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한 자들이다. 좋은 씨가 유익한 씨앗이듯이 성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자들이며, 좋은 씨가 혹한에도 잘 견디듯이 성도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한다. 그리고 좋은 씨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듯이 성도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하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좋은 씨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건설을 위한 가장 좋은 씨앗들이다.
(2) 가라지 zizavnia(지자니아) 이것은 검은 빛이 나며 독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 났을 때는 좋은 밀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미치광이 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라지를 뿌리는 자'는 마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39). 이 마귀는 하나님의 종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곡식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이다. 원래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가라지를 뿌렸던 자이다. 에덴 동산의 가라지는 하와였다. 다시 가인은 아담 가정의 가라지로 뿌려졌으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가정에서는 에서가 가라지로 뿌려졌다. 가인은 아벨과 함께 자랐으며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자랐고 에서는 야곱과 함께 자랐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마귀는 열 두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가라지로 뿌려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자라게 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라게 할 때에 마귀는 그 속에 가라지를 뿌려 놓아 곡식과 함께 자라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신자들 자신은 잘 구분하지 못하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은 분간할 수가 있다(27). 이처럼 마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는데 능한 자이다. 신령한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한 참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며 인정하시는 무형 교회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는 중생한 참 성도와 중생하지 아니한 거짓 성도가 함께 공존하는 교회이다. 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바로 가라지는 이 유형 교회 안에서 중생하지 못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평소에는 그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으나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거짓 스승, 거짓 목자, 거짓 그리스도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 교회 안에 있는 적들은 교회 박의 적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있으면서 그 해독을 암암리에 교회 안에 퍼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며 참 성도들이 희생과 봉사를 할 때 그들은 이권을 장악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3) 추수 때까지 연기되는 가라지 심판 : 이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이 가라지를 뽑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대답하고 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시며 그 종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르키고 추수 때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때이다. 하나님은 그 때까지 유형 교회 안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들을 공존하도록 섭리하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39절 원수 ejcqro;"(에크드로스) 엑도-미워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증오하는 원수를 말한다.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마13:25, 28, 39, 롬12:20, 고전15:26, 갈4:16, 약4:4 이다.
13:31-35 겨자씨 비유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을 정도로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이다. 그런데 이를 밭에 심으면 4∼5m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깃들어 안식을 얻는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천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겔17:23, 31:6). 겨자씨 한 알의 비유는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칠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믿음의 씨를 심으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점점 자라나 후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된 것이다.
<자료>
본래 이 비유는 마가복음과 Q자료에 다 들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유의 주요 특징들은 두 형태의 비유에 있어 비슷하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달리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어 이것이 Q자료의 특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새가 "가지들"에 둥우리를 친다는 언급(마가에서는 그늘이 강조됨)
2) 겨자씨 식물을 "나무"라고 말하고 있는 점
3) 겨자씨 비유가 누룩 비유와 연결되어 있는 점
마태복음에서의 "대조"와 "성장"이 강조되는 점
"밭에 심어지고"(성장)
"모든 씨 보다 작은 것"(대조)
"자라면"(성장)
"나물보다 커서"(대조)
"나무가 된다"(성장과 대조)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본래 비유에 반영되어 있는 "성장"과 "대조"의 요소를 각기 자기 상황에 따라 비유의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가는 대조를
누가는 성장을
마태는 대조와 성장을 둘 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다.
13:44-52 감추인 보배와 진주 비유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배에 관한 비유는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산다는 선택의 비유이다. 좋은 것의 발견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즉 바꾸는 결단을 요구하신다.
13:53 배척 당함
예수를 배척한 사람들은 바리세인들 뿐만이 아니라 고향과 친척 중에도 있었다. 예수를 너무나 잘 알고있는 고향사람들은 그를 육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어린 모습부터 보아 왔기 때문에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친척 중에는 막6:3에서 나타난 예수 누이의 남편들, 곧 처남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1-21 세례요한의 죽음
세례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세례요한이 그들의 불륜적 행위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바스이며(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헤로디아는 그의 이복동생 헤롯 보에투스의 아내이자 조카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백한 불륜이었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책망하고 지적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바로 죽이지는 못하고 군중들의 눈치를 보며 일단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헤로디아는 자기 딸 살로메를 이용해 헤롯으로 하여금 세례요한을 죽이지 않을 수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12절 세례요한의 죽음을 그의 제자들은 예수께 알렸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듣고 따로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가시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은 쫓아오고 병자들도 나아왔다. 예수님은 요한의 일로 잠시 쉬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에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고 먹을 것이 없었다.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였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축사하심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 오천 명이나 먹고 남았다. 이로서 단순한 병 고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내리신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처럼 먹을 양식에 대한 축복이 현실로 나타나는 기적을 보았다. 14절 나오사는 [배에서 내리사]의 뜻이다.
14:22-36 물위를 걸으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심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건너가라는 명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마가복음에서는 '벳새다'로 라는 말이 건너편 다음에 덧붙여졌는데 누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5천명을 먹이시기 전에 이미 벳세다에 와 계셨다. 맥네일은 제자들은 배를 타고 그 건너편으로(에이스 토 페란)가야 했고, 그들은 예수께서 해안으로 돌아서 걸어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앞서 출발했으나 바람이 거슬리므로 그들의 배가 그들을 태운채 게네사렛 호수 가운데 밀려갔던 것으로(34절) 가정할 때 틀림없이 조화가 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들이 폭풍을 만난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셨을 것이다. 그리고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주께서 친히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고 유령이라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사건은 오 천명을 먹이신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제자들은 이제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25절 tetavrth/ 네 번째, 밤 사경은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를 말한다. 로마인들은 밤을 저녁 6시에 다음날 새벽 여섯 시까지 세 시간 단위로 사 등분하였다. 27절 안심하라 Qarsei'te(달세이테) 원어의 이 단어가 나오는 마9:2, 22, 막6:50, 행27:22, 25을 보라
15:1-20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상종치 않았으며(마9:11), 전통을 중시하는 자들이다(눅11:38).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마23:13, 15). 장로들의 presbutevrwn(프레스붸테론-)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로 '랍비'를 말하며 이들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율법을 대대손손히 전해 주었다. 손을 씻지 nivptontai(닢톤타이) 식사전에 손을 씻는 것은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니며 장로들에 의해서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율법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을 때는 손목 위까지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위생상 좋은 습관임에는 틀림없으나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될 수는 없다. 주님은 사람들의 습관과 전통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11절의 비유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 놀라움을 표시하시고 !Akmh;n kai;(아크멘 카이)라는 말로 [아직도, 현시점에서 개역에는 '아직까지'로 번역되었다]라고 하시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셨다. 더럽게 하느니라 koinoi'(코이노이) 불결하다, 더럽히다의 뜻이 있으며 사람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평범한 것은 죄악 세상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막7:18).
15:21-31 가나안 여자의 딸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갈릴리의 무리들이나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니게 해안 도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다. 이 가나안의 여자가 나왔다. 두로와 시돈은 수로보니게 지역을 뜻한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엄밀히 말해서 이방 땅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하심으로 그 여인을 고쳐줄 마음이 없으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예수께서 와서 절하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애원하였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심으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셨을 때처럼(마21:43) 허락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여인에게도 믿음이 있다는 것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누가 더 났다는 평가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개인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을 뿐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이적이었다. 30-31절 갈릴리 호숫가에는 각종 병자(절뚝발이, 소경, 벙어)들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의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하시고 32절의 기적을 베푸신다.
15:32-39 칠병이어의 이적
불쌍히 여기노라 Splagcnivzoma(스플랑크니조마이) '동정을 느끼다, 간절히 열망하다'(막8:2)로 단순한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이적을 베푸시어 그들을 베부르게 하셨다. 34절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는 말씀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떡을 만들어 내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병이어의 사건(마14:17)때도 그랬지만 제자들에게 먼저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올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누어주고자 했으나 모자라기 때문에 축사하시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만들어 주셨다. 지금도 제자들에게 있는 모든 음식을 내어놓을 것을 말씀하셨다. 광주리 spurivda"(스푸리다스) 큰 광주리로 새끼로 엮어 그물로 만든 광주리인데 마14:20의 [바구니] 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마16:10). 39절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달마누나'(막8:10)로 가셨다고 기록했다. 달마누나는 마가단 지경에 속했었기 때문에 두 기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16:1-4 표적을 구하는 그리스도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이들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가단으로 달려갔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마12:38에서 표적을 구했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같은 사람들이거나 집단(이것은 이미 확인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중에서)인 것이다. 그리고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조직적으로 공격하고 방해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 믿음으로 어떤 표적을 보기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하시고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고 먼저 말씀하신(마12:38)것과 동일한 말씀으로 응수 하셨다.
16:5-12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zuvmh"(주메-스) 발효되어 퍼지는 성질이 있어(마13:33)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생각과 말, 죄악에 있어서도 누룩과 같이 퍼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16: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13절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방해를 벗어날 수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도착한 것은 제자들과 좀더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질문을 제자들에게 했다. 첫째는,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 자신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의 공통점은 예수를 메시야 곧 유일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구약의 인물들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선지자들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계신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보다 초월한 인물이라고 보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15절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예수님의 질문 속에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자 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이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과 천국 열쇠를 주셨다. 18절 반석 pevtran(페트란)은 땅에 깊이 박혀있는 움직일 수 없는 반석(엡2:20, 고후3:10)으로 이런 반석을 기초로 하여 지은 집은 사면에서 바람이나, 홍수가 밀려와도 요동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반석(벧전2:8)이시다.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반석(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soi(소이) 다른 제자에게도 주어졌음을 주의하라(마18:18, 요20:23, 행5:1-16).
16:21-28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예언
마태복음에 나타난 네 번의 수난예언(마17:22, 23, 마20:17-19, 26:1-5) 중 처음으로 예언된 것이다. 물론 비유로 요나의 표적을 이미 두 번 언급(마12:28, 마16:1)하심으로 암시하신 적은 있지만 제자들에게 직접 설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시점부터 예수님의 행보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시기가 임박해 오고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조금전 주의 칭찬을 받아 아마도 매우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제일먼저 말을 꺼냈던 베드로가 이번에도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재빨리 응답했다. 어쩌면 베드로는 또 한번의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거나 아니면 조금 전 있었던 예수님의 칭찬에 고무된 나머지 예의로서 한 말일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광야의 시험을 받을 때 사단에게 하셨던 것처럼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조금 전에 한 말도 자의로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단에 의해서 말하게 된 것이다. 사단은 아직 예수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음을 보게된다. 또한 베드로의 교만한 마음을 틈타 순간에 들어가 역사 했다. 넘어지게 하는 자 skavndalon(스칸달론) 사단의 유혹을 뜻하는 이 말은 '함정'이라는 명사로 실족케 하는 것(마18:7, 눅17:2), 거치게 하는 것(롬11:9, 롬16:17), 올무(고전7:35, 계2:14)로 사용되었다. 25절 잃으면 ajpolevsh/(제-미오-데) 어떤 사본에는 (제-미아)를 [개에게 던져주는 뼈 부스러기]로 사용했다. 찾으리라 euJrhvsei(휴리스에-) 찾다, 갖다, 보다의 뜻이 있으며 눅18:8에는 '보겠느냐' 요8:12, 벧전5:4에는 '얻으리라'로 나타난다.
17:1-13 변화산의 사건
변화산의 사건은 공관복음에 다같이 기록되고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몇 가지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면 중복하여 다시 기록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참고하여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변형되사 metemorfwvqh(메테몰훠-데-) 지금까지 숨겨져있는 본질이 형상으로 나타나는 일을 말한다. 엄청난 영광 중에 하나님에게서 들려온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말씀이었다. 2절 말씀에 "엿새 후에"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팔일쯤 되어"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약 1주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의 저자들은 먼저 사건일로 부터 당일까지와 중간날짜만을 계산한데서 생긴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이 오르신 산은?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은 다볼산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동방 정통교회는 주님의 산상변모일을 '다보리온(Tabor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볼산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다볼산의 높이는 588m 이며, 갈릴리의 남쪽에 있다. 갈릴리에서 이스르엘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둥근 모양의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을 히브리어로 "하르 타볼"이라고 하는데 "높은 산"이다. 또한 견해는 헬몬산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감람산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갈릴리의 다볼산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다가 주후 4세기경부터 다볼산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면서 사람들은 이 산을 다녀갔다. 많은 순례객들이 변화산이라고 찾다보니, 6세기경에는 베드로가 말한 초막 셋을 뜻하는 커다란 예배당 3개를 나란히 세웠다. 그러나 주후 614년 페르시아 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1099년 십자군의 점령과 함께 다시 기독교인들이 이 산에 상주하였다. 1113년 십자군이 패배하므로 살라딘에 의하여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이렇게 다볼산을 전통적으로 변화산이라고 말하였지만, 현재의 신학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까운 헬몬산이라는 생각을 더 굳히고 있다. 이 헬몬산은 갈릴리의 북부 지방인 골란고원이 있는데 이 고원 북쪽으로 2814m의 만년설이 쌓여있는 높은 산입니다. 이 헬몬산 지역은 비가 많이 오고, 눈도 많이 내리는 곳으로 연 강우량이 1000mm 넘게 내리고 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여행하고 계시는 것과 연관을 지을 때 변화산으로는 헬몬산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증거하기에 적당한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주님은 이들 세 제자를 데리시고 올라가셨는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세 제자만 아이의 죽은 방으로 데리고 가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을 때에 세 사람은 주님이 기도하시는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 두시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이 세 제자만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보기보다는 아마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먼저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께서는 세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다. 순간 얼굴은 해 같이 빛이 났다(마17:2). 그리고 주님의 흰옷이었는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 만큼 심히 희어졌다. 그리고 그 옷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다. 4절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모세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엘리야는 뒤에 나오는데, 본서 마가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이름으로 먼저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마가복음에서 이런 순서를 택하시는 것은 마가가 속하였고, 그가 주장하는 구속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오셔야 한다고 예언이 있는 분이었다. 나중에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하여 질문한 것과 연관을 시키기 위하여 엘리야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였다고 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종종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율법을 말할 때는 언제나 모세, 선지자들을 말할 때는 언제나 엘리야를 거명하게 된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 구약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격으로 앞장서고, 나서기를 좋아했다. 마태복음에는 "주께 만일 원하시면"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구약의 모세가 나타나시고,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볼 때 여기가 천국이었다. 이 때 제자들은 잠에 들어 있었는데,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깨어 일어나서 그 기쁨을 감당하기 어려워 초막 셋을 짓자고 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 때에 열심은 좋았지만, 약점과 영적인 무지를 드러내고 말았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을 함께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이만 예수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7절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높은 산에는 갑자기 구름이 와서 덮다가도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 나타난 구름은 빛난 구름이었다.
17:14-23 귀신들린 아이의 간질병을 고침과 두 번째 수난 예언
옮기라 Metavbhqi(메타빠) 유대인은 위대한 선생을 [산을 뽑아 버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유대인의 숙어에서 "산을 옮긴다"는 것은 [곤란 혹은 어려움 들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겨자씨 마13:31의 겨자씨 비유를 참고하라. 예수께서는 당신이 언제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하며 이제 곧 고난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음을 두 번째로 주지시킨다.
17:24-27 납세의 문제
반 세겔 divdracma(디드라크마) 반 세겔의 돈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지방세로 세관에 의해서 징수되며 매년 3월에 납입했었다. 그러나 디드라크마가 혹은 두 드라크마로 부르는데 당시의 통화 액면에는 없는 단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합하여 한 세겔을 내는 것이 관례였다. 세겔(Shekel)은 중량의 단위이며(창24:22, 출30:23,민7:13) 후대에 와서는 은화의 단위가 되었다. 시대를 따라 그 중량은 일정하지 않으나 11.42 그램 정도이다(약 1/2온스, 1/50므나). '반 세겔 받는 자들'의 반세겔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divdracma)로서 두 드라크마를 의미한다. 즉 헬라인의 이틀치 품값을 의미한다. 이 반세겔은 출애굽 당시 유대민족이 광야에서 인구조사를 한 직후 모든 유대인 남자가 내었던 생명을 위한 속전이었다. 즉 자신이 성장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계수 받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또한 생명을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을 인정하는 맘으로 속전을 내는 것이었다. 이 반세겔은 성전의 유지보수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생명의 속전을 내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생명을 구속당한, 즉 죄악과 사망에서 생명을 건짐 받으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가 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시고 성전세 납부를 하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18:1-21 다툼과 용서에 관한 교훈
18장은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질문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제자들은 상당히 궁금해하던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로 보아 이구동성으로 어떤 의미에선 미리 질문에 합의한 상태에서 묻는 것이다. 어린 아이 paidivon(파이디온) 원어는 단수로 곧 한 어린 아이를 말한다. 이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막9:33).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베드로의 자녀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또 어떤 구전에는 안디옥 교회의 목사가 된 "익나티우스"(주후 67-107년)가 이 어린아이였다고도 한다. 이 어린아이가 정확히 몇 살쯤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는 눅2:27, 마2:9에서는 '아기'로 나와있다. 이 단어는 아기부터 어린이까지 통용되는 말로 사용되었다. 10절 업신여기지 말라 katafronhvshte(카-타후로네-세-테) "내려보다, 얕보다, 경멸하다"의 뜻이 있다. 원어의 같은 단어는 롬14:3, 딤전4:12에 나온다. 14절 아버지의 뜻 qevlhma(뜻) e[mprosqen(앞) tou(그)' patro;"(아버지) 은 다시 원어로 정리하면 [아버지 앞에 그 뜻이 아니다]이다. 사람들이 하찬케 생각하거나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일 작은 것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참고, 마26:42, 요5:30에서는 원대로-원어 단어 qevlhma는 같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 한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것은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소자일 지라도, 처음부터 제자들은 자신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남을 업신여기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용서가 안 되는 문제도 모두 여기에 있다. 남을 우습게, 아래로 보는데서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끝없는 지속적인 용서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먼저 한정된 용서를 정하셨다면 우리 중에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24절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만 달란트의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고대의 역사학자에 의하면 유대 정부의 일년 예산이 일천 달란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돈의 액수로 따져 보면 웨인하우스의 화폐 단위에 의하면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현재의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한다면 일만 달란트는 3조원이다.
19:1-12 결혼과 이혼에 대한 교훈
마태복음 29, 20장은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유다로 올라가시던 중 베레아에서 전도하신 내용이다. 2절 좇거늘(hjkolouvqhsan)의 어근은 연결하는 접두사 켈류도스(길)에서 유래했으며 좇다, 따르다의 뜻이 있다. 이곳에서는 [제자가 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원어의 같은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요11:31 [따라 가더니], 눅9:11 [따라 왔거늘], 마27:55 [좇아 온]으로 나와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자의로 해석하여 이혼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창2:22, 마10:29). 이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창2:24, 고전7:10-11). 그러나 감음의 예외를 허락하셨다. 율법이 허락한 이혼은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예수님이 허락한 이혼 음행한 연고(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3절 아무 연고를 물론 하고, Kai; prosh'lqon aujtw'/(카타 파-산 아이티안) aujtw'/(아이티안)은 aujtov"(아우토스)의 어근에서 유래했으며 방향 없는 이라는 뜻이 있다. 당시의 바리새인은 두 파가 있었다. 힐렐파와 샴마이이 파인데 힐렐파에서는 아내가 불만스러우면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자유이다. 그러나 샴마이파에서는 간음만이 이혼의 이유가 된다고 하였다. 샴마이파의 주장은 예수님과 같았고 힐렐파의 주장은 달랐다.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에 이혼에 관한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으며 바리새파인들 끼리도 주장이 엇갈리는 싶지 않은 문제였다. 아마도 이들은 이러한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함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생각으로 질문한 것이다. 5절 부모를 떠나서 kataleivyei(카타레이프세이)는 "부모를 남겨두고"란 뜻인데 이는 결코 부모를 버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9절 음행 porneiva/(포르네이아) 원어의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음행 마5:32, 음란 고전6:13, 고후12:21"에 나타난다. 영어성경에는 fornication을 사용했다. 간음과 음행과 부당한 악덕을 포함한다. 11절 사람마다 ... 오직 타고난 자라야 pavnte" oi|" devdotai(판테스 호이스 데도타이), 예수께서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또한 그것을 권면하지도 않으셨다. 12절 고자 eujnou'coi(유-누-코이), 태어날 때부터 생리적으로 결혼하기 불가능한 자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지 아니하도록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고전9:7). 그렇다고 예수께서 독신생활을 윤리적이라고 권하지도 아니하시고 개인의 생각의 문제로 남겨 두셨다.
19:13-15 어린이에게 축복
공관복음에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복음서와 마가복음은 에서는 이 아름다운 기사가 이혼에 관한 기사 바로 다음에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자녀에 대한 문제를 인생의 중요한 결혼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저자에게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때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더 짙다. 마태복음서에 때에(Tovte)는 반드시 "그 특정한 시기에"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13절 안수하고 기도하심을(ejpiqh'/-손 aujtoi'" kai; proseuvxhtai-기도)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데려온 목적이 단지 안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병 고침을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출세를 위함도 아니었다. 다만 예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었다. 안수 기도는 구약시대부터 내려왔는데 레1:4 제물에 안수, 민8:10 레위인에게 안수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막6:5 병자안수, 행6:6에서 사도들의 안수가 있었다. 마18: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아니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순결 하라는 말씀이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았다. 마10:16절에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純潔)하라"고 했는데 어린아이는 어른보다는 순결하다.
②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외식이란 헬라어로 (uJpokrivsew", 휘포크리노마이)는 'uJpo, 휘포(밑, 아래)'와 '크리노(연극하다, 꾸미다, 속이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선행, 기도, 구제, 금식은 외식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덮어두고 무조건 타인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고쳐 주려는 행위를 외식이다.'
③ 겸손하라는 말씀이다.
마18:4절에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先鋒)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셨다. 어린이는 교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19:16-22 부자청년
20절에서는 "청년"으로 누가복음 18:18에서는 "관원"으로 기록된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떤 특별한 영웅적인 일을 행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부자청년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1) 부자 청년의 질문(마19:16)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 가를 질문 함(막10:17, 마19:16-17, 눅18:18)
율법으로 영생을 얻지 못함을 알지 못했음((롬3:20, 5:21), 요12:49-50, 롬6:23)
영생이란 유일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일임(요17:3, (요3:16, 요일4:10), 롬5:8)
2) 예수님의 대답(눅18:22)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잘못됨을 지적함(마6:20, 19:21, 막10:21, 눅18:22)
가지고 있는 재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심(막10:21, (눅14:33, 18:22)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지시하심((마4:19-20, 21-22), (마16:24, 막8:34, 눅9:23)
3) 예수님의 대답 후 청년의 반응(막10:22)
청년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마19:22, 딤전6:9-10, 눅16:9)
청년은 재물이 아까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음(막10:22, 눅18:24-25, 약4;4)
결국은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갔음((마19:22, 막10:21, 눅18:23-27), 눅16:9, 18:29-30)
2절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좇아갔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결국 세상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글성경(개역) 어찌하여 네가 나를 선하다 하느냐? 보다는 R.V.에서와 같이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가 본문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9:23-30 소유에 관한 교훈
24절 약대 kavmhlon(카멜-론) 여러 학설과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문자적으로 분명히 약대와 바늘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사용하신 곳, [눈에 있는 들보](마7:3), [약대를 삼킨다](마23:24)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재물에 관하여 원래의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요1:3, 행17:25). 이 재물을 우리에게 주심은 통용하고 나눔(행2:44-45, 히13:16)의 사용을 권하신다. 또한 이웃에 관한 소유를 탐하지 말며 이러한 탐심(사57:17)은 죄악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도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눔과 선한 목적의 물질 축복을 부정하거나 계획성 있는 사용을 위해서 저금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28절 새롭게 되어 paliggenesiva/(팔링게네시아) 갈라디아서 3:5에서는 이 말을 [신자의 새로운 출생]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를 말하고 있다. 사11:6-9, 롬8:19-23, 고전15:24을 보라. 29절 여러 배를 받고 eJkatontaplasivona인데 원어에서 이 말은 [백 배나 받고]이다. 이 단어가 막10:30에서는 "백배나"로 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20:1-16 포도원의 일꾼과 품삯
비유의 동기는 베드로의 질문(젊은 관원의 사건과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이) 주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어조를 탐지해 냈다. 그래서 그를 꾸짖고 책망하고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해석의 열쇠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먼저 된 자가 누구인가? 질문자인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며 충성스런 중진 일군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고 나중되는 것이 좋은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먼저 된 자들에게도 위험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험성이 없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원수요 영혼의 대적자가 있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만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위험성이 항상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포도원은 영적으로는 이스라엘, 또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참고, 사5:4). 교회를 포도원으로 비유하신 것은 포도원이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심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교회를 설립하는 자 라는 것(참고, 사5:2, 행20:28)과 포도원은 목재나 잎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원하는 까닭이다(참고, 갈5:22). 그러므로 포도원의 일꾼은 교회의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3절 장터 ajgora'/(아고라)는 로마의 포럼(forum, 공회, 광장), 직업을 구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나 구경나온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3, 5, 6절 제3시와 6시와 9시, 11시는 각각 오전 9시와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곧 해지기 시작 전이다. 14절 가지고 가라 a\ron kai; u{page(아-론 카이 휘파게)는 많은 품꾼이 불평하며 그 돈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아 그 돈이 상위에 그냥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15절 선하므로 ajgaqov"(아가도스) "선한, 은혜, 친절한, 좋은 것"을 말하며 일반적인 의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어의 같은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행9:36, 롬9:11, 고후5:10, 딤전5:25, 히10:24, 계18:17이다. 악하게 보느냐 ponhrov"(포네-로스)는 [적개심을 느끼냐?]란 뜻으로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다. 포도원의 주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마다 장터에 나가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이후부터 종말 때까지 쉬지 않고 우리를 부르신다(벧후3:9, 행2:39).
20:17-28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언
첫 번째 예언은 마16:21에서 두 번째 예언은 마17:14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 예언을 하신 것이다. 22절 잔 pothvrion(포테-리온) "마시는 그릇, 컵, 잔, 상징적의미로는 숙명 또는 운명" 여기서 [마시려는 잔]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지심을 의미한다(참고, 마26:39, 사53:4-6, 고후5:21, 갈3:13, 롬3:24, 벧전2:24). 26절 섬기는 자 diavkono"(디아코노스)는 종, 선생, 목사를 뜻하기도 하는데 원래의 의미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20:29-34 두 소경의 눈을 고침
30절 다윗(Dabid)의 자손이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참고, 마1:1, 마12:22, 마15:22, 계5:5). 34절 만지시니 h{yato(헤-푸사토) 이들을 고치시는데 예수께서는 만지시지 않아도 고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이다. 예수님이 손을 데면 모두 역사가 일어났다(참고, 대시며 마8:3, 마17:7, 막1:41, 막7:33 손을 대니 막5:27, 눅8:44). 보게 되어 ajnevbleyan(아네불데푸산) [그들은 우러러 보았다]란 뜻으로 그들은 처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막10:52).
21:1-11 예루살렘 입성
예수께서 스가랴서 9:9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루어진 것은 벳바게 마을 입구에서 나귀를 준비시킨 사실이 분명하다. 3절 주가 kuvrio"(퀴리오스) 이 칭호는 이미 예수께 사용되었다(마8:2). 이 명칭은 재림하여 심판하실 주님을 말하고 있어 특히 계시록에 많이 나타난다(계1:10, 계4:11, 계11:18, 계15:3 계19:16). 8절 겉옷을 길에 펴며 그 위로 지나가게 하고 다시 집어 드는 것은 임금에게 돌리는 하나의 존귀이다. 예후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왕하9:13에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9절 호산나 (@Wsanna;)이 말은 원래 [우리를 구원 하소서]인데 "도와 주소서, 베푸소서, 축복하소서"라고 해도 되며 점차적으로 이 말의 의미가 찬양이나 기쁨의 환호가 되었다(막11:9, 요12:13). 이 단어는 시12:2, 시44:27, 왕하6:26, 삼하14:4의 "히브리"어 h[;yvi/h(호-쉬-아-나)에서 유래된 말이다.
21:12-17 성전을 청결케 하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장 성전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 성전 문에 쭉 늘어서서 거룩한 예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의 상을 업으셨다. 주님의 진노는 불가항력적이었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76:7) 예수님이 또 분을 내신 것은 자신에게 오는 어린이들을 막을 때였다(막10:14). 사람들은 외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자들이 속아서 터무니없이 비싼 비율로 돈을 바꾸고 또한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제사에 쓸 짐승을 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상업적이면서 그릇된 제사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였다. 이들은 기도해야할 하나님의 집을 망쳐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3절 마가는 만민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이사야 56:7을 완전하게 인용하고 있다(막11:17). 13절 굴혈 sphvlaion(스펠-라이온) 팔레스틴에는 많은 동굴이 있었다(눅19:45, 막11:17). 성전을 이런 가장 악한(강도:lh/stw'n) 굴로 만든다고 하셨다.
21:18-22 무화과 나무 저주
성전을 "깨끗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 예배에 대한 메시야의 상징적인 하나님께 고발인 것 같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선민으로서의 유대 민족에 대한 상징적인 고발이었다. 무화과 나무는 보통 잎이 나기 전에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사28:4, 호9:10, 렘24:2) 잎이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찾아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실망시켰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죽은 나무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하심은 예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무는 즉시 말라버렸다. 그것은 20절에 곧 paracrh'ma(파라크레마)이라는 뜻은 R.V.는 "즉시"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예언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된 것이다.
21:23-27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있었던 "호산나"를 부르짖는 어린아이와 군중들의 소리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업으신 일들은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의 큰 분노를 유발시켰다. 1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그리고 23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막강한 권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는 세 그룹들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시는 것을 보고 직접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예수께 따져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24-26절에 있으며 27절은 그들이 대답지 아니함으로 예수께서도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심으로 그들의 질문에 응수하셨다. 그러나 사실상 28절부터 이어지는 비유는 그들에게 간접적으로 그의 권세와 그들의 잘못을 성명하고 있다. 예수의 권세는 세례요한 때부터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문제를 설명하시고 있다. 당시의 요한의 세례가 일반 사람들과 세리들 가운데는 반응을 얻었으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는 배척을 받았다(눅 7:29-30).
21:28-32 두 아들의 비유
권세에 대한 논의에 대답을 하지 못한 그들은 이제 그 대화의 주도권이 예수께로 넘어왔다. 예수께서는 그 기회를 잡으시고 그 첫 번째로 두 아들의 비유를 베푸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세리와 창기에 비해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는 바로 예수께 질문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21:33-41 악한 농부의 비유
마태는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는 도입화식(導入話式)으로 이 비유는 세 번째 것 중 두 번째로 두 아들 다음에 곧바로 같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졌음을 말한다. 이 비유는 하나의 우화와도 같이 이사야 5:1-2에 있는 말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농부 소작인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요, 그 실과를 가져오도록 보냄을 받은 종들은 선지자이며 그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포도원 ajmpelw'na(암펠로-나) 포도원은 유대인의 교회, 산울은 율법, 즙짜는 구유는 예루살렘, 망대는 성전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21:42-46 모퉁이 돌
비록 사람들(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일시적으로 배척을 당하시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이 곧 현재 말씀이 진행되는 이 이스라엘 성전의 새 성전 모퉁이 돌이 되실 것을 말하고 계신다. 구약에서 건축자들의 버린 이 돌은 시118:22-23의 기자가 본래 하나님께서 회복시킨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사용한 것이다. 42절 모퉁이의 머릿돌 kefalh;n gwniva"(케활렌-고-니아스) 이스라엘의 성전은 아취형으로 지어졌는데 두 기둥사이에 꼭대기에서 이어주는 돌로 건물의 제일 이어주는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돌. 44 절 이 돌위에 ejpi; to;n livqon tou'ton(에피 톤리돈 투-톤) 그리스도는 세가지 의미의 돌이라고 볼 수 있다. ① 이스라엘 사람(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 등)에게 있어서는 "부딪히는 돌"(롬9:32-33) ② 이방의 자생적 권력에 대해서는 "치는 돌"(단2:34) ③ 교회에 있어서는 "모퉁이 돌"(엡2:20-22).
22:1-14 혼인잔치의 비유
22장의 비유는 21장에 이어서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로 보아 알 수 있다. 천국에 초청하는 문제를 비유로 설명 하셨다. 4절 소와 살진 짐승은 천국 잔치를 위해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맞이하고 계심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현재 예수님과 토론을 벌이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과 상징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5절 돌아보지도 않고도외시하고 무시했다는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 7절 불사르고 구원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11절 예복을 입지 않은 예의 없이 결례를 행하고 있으며 구원의 초대에 응하지 않음을 말한다. 14절 택함을 입은 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말한다. 2절 혼인 잔치 gavmou"(가무-스) "예식, 결혼식"이라는 뜻으로 혼인 예식과 축복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4절 청한 사람들 keklhmevnoi"(케클레-메-누-스) 이것은 처음 초청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마20:16). 즉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유대인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9절 사거리 길에 oJdw'n(호돈-) "길, 진로, 도로"를 가리키는 말로 지방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길에 맞드린 곳으로 이방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말한다(마10:17, 막8:3, 눅24:32, 행27:28, 롬3:16). 12절 입지 않고 mh; e[cwn(메-엑콘-) 헬라어에는 두 개의 부정사(영어의 not에 해당하는)가 있다. 하나는 사실(事實)의 부정에 사용되는 oujk (우-)이고, 또 하나는 사상(思想)의 부정에 사용하는 mh;(메-)이다. 여기서는 mh;(메-)가 사용되었다.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은 단순히 실수가 아닌 그의 정신적인 생각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의도적인 것이다. 11절 입지 않은 것에는 실제로 예복을 입지 않은 oujk(우-)로 사용되었다.
22:15-33 세금 내는 문제와 부활에 대하여
마21:23에서 권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비유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에 따른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갑자기 세금문제를 들고나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가이사에게 내야 한다고 말하면 반유대주의자로 몰고, 안 내야 한다고 말하면 반로마주의자로 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답하심으로 이들은 더 이상 예수께 빌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성전에서 있었던 토론을 벌였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물러가고 이번에는 23절 그 날에 같은 장소는 아닌 것으로 보이나 같은 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교묘하게 질문하고 나섰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21절 바치라 !Apovdote(아포도테) "넘겨주다, 도로주다, 회복하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다]의 뜻이다.
22:34-46 계명과 예수 출신에 대하여
34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37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두 번째, 39절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심으로 이들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36절 어느 계명이 poiva ejntolh;(포이아 엡톨레) 당시의 율법사들은 계명을 신체적인 것 248개 일년의 일수 365개로 나누어 있었는데 도합 613개의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들은 율법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더 이상 예수도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이제 그 빌미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21:23부터 계속된 예수께 대한 집요한 공격은 결국 당시의 이스라엘의 모든 지식계층(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이 총 동원된 질문 공세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시며 모든 질문에 답하심으로 이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23:1-36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책망
이 장에서 마태는 여러 기회에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 분명하다. 주의할 것은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정죄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류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 것은 확실하나 모든 바리새인들은 아니다. 이 본문은 무리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마지막 공개강화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들의 올바른 주장은 인정하신다. 그들의 행실이 모두 바르지는 않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만은 존중을 받으리라고 하신다(2, 3절). 그러나 율법의 세목들에 대한 까다로운 준행을 고집하거나, 어떤 특수한 교훈이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합리하게 그 범위를 확대하거나, 사람들에 의한 율법자체들을 쓸데없이 만들어가는 것은 안내자가 아니라 압제자가 된다고 하셨다(4절). 이미 이들은 이러한 문제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절 경문 fulakthvria(휠락테리아) "성구함, 수호함" 인데 이 말은 [보호하는 부적들]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차고 다니던 경문(성구함)은 길고 가느다란 양피지에 율법의 구절들을 써넣은 다음 그것을 가죽 상자들에 담아서 봉한 것들이었다. 이 조그만 성구함들은 가죽끈으로 왼편 손목과 미간에 매어 졌다(신6:4-9, 11:13-21을 보라). 옷술 kravspeda(크라스페다)은 옷 가장자리에 단 술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 옷술을 크게하여 율법의 주된 교훈을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도 이 술이 달린 옷을 입으셨다(마9:20). 주께서 정죄하신 것은 옷술을 크게하여 나타내 보이려고만 하는 처사였다. 화 있을진저 Oujai;(우아이) 슬픔의 탄성을 뜻하는 감탄사로 마태복음서 본 장에서만 모두 7번 발견된다(13, 15, 16, 23, 25, 27, 29절). 주석가들은 유대인의 기호를 가진 저자가 7화를 모아 놓았을 가성이 짙다고 본다. 여기에 나오는 "화"들은 저주라기 보다는 슬픔에 더 가까운 표현들이 많다. 그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저주를 즐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슬픔에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보다는 [슬프도다 너희여]가 더 나은 번역이라고 본다. 이 단어는 눅6:24, 25, 10:13, 11:42, 43, 44, 46, 47, 52, 유1:11에 나타난다. 외식하는 uJpokritaiv(휘포크라타이)는 원래 "배우"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를 가리킨다. 15절 지옥 자식 uiJo;n geevnnh" 이는 문자적으로는 [게헨나의 자식(uiJo;n)]을 뜻하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한 표현으로 [내생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식]을 말한다. 바래새인들의 개종자들은 원래 바리새인들보다 더 바리새적인 열심을 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27절 회칠한 kekoniamevnoi"(케코니아메노이스) 손을 대면 부정해 진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무덤을 희게 칠한 것(행23:3). 그런데 그것을 주위하기 위한 색칠이 아니라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꾸민 무덤을 말한다. 35절 사가랴의 피까지 e{w" tou' ai{mato" Zacarivou(헤오-스투-하이마로스 자카리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역대하서가 맨 마지막 부분에 있기 때문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대하24:20-22).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는 최초의 순교자의 피와 최후의 순교자의 피까지 이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말하신 것이다.
23:37-39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
37절 예루살렘 !Ierousalh;m(히에루살렘)은 히브리어(!l;iv;Wry]) 평화의 터, 평화의 소유를 말한다.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마2:3), 유대인들(행21:31), 천국의 상징적으로 새 예루살렘(계3:12)으로 말한다.
24:1-28 종말의 징조들
1-3절은 24장 전체의 총론이며 4-41절은 적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와 예언부분이다(막13장, 눅17장). 3절 어느 때에 이런일이 povte tau'ta(포테 타우타) 제자들은 종말의 시기를 상당히 궁금해하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종말의 시기와 날짜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에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다. 그래서 4절 planhvsh/:미혹을 받지 않도록 (풀라네-세-) 부탁하신다(막13:5, 계20:3). 6절 삼가 두려워 말라 mh; qroei'sqe(메-드로에이스데) mh(메)는 "...하지 않도록, ...하면 안되므로"의 뜻으로 놀라지 말고 겁먹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미혹 받지 말고 놀라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 성경은 세상 끝 날에 나타날 큰 징조들을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징조들이다. 바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마24;14),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징조이다(롬11:25-27).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징조들'입니다. 말하자면 ①환난과 ②배도 행위와 ③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마24:5, 9-13, 21-28).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징조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징조들'이다. 그것은 하늘에 나타나는 징조, 곧 일월성신의 징조(마24;30, 눅21:25)들이고, 또한 땅의 징조들(마24:6-8, 눅21:25)이라고 하였다.
24:29-44 그리스도의 재림과 징조
30절 만일 이 구절이 재림에 대한 언급이라면 땅의 모든 족속은 곧 [세계의 모든 족속]을 말하고 그 언급이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그 번역은 [유대 땅의 모든 족속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슥12:12).
24:32-44 재림의 시기
34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으로 국한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장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그 시간적인 차이를 거의 무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동시에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종말이란 예수님의 초림 기간인 가까운 미래(예루살렘 멸망)도 종말이고 먼 미래 재림 때도 종말이다. 34절의 선언은 가까운 미래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전체적인 종말에 대해서는 마24:14에 언급하셨다. 예루살렘의 실제적인 포위 공격은 A.D. 70년 초에 시작되었고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9월 12일 경이었다. 30절 통곡하며 kovyontai(곺손타이) "그의 몸을 치면서 슬퍼한다"란 뜻(눅23:27, 행8:2, 계1:7) 36절 이 말씀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이 기대되는 종말 일을 스스로 정하는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헛된 거짓 날짜임에 틀림이 없다.
24:45- 충성된 종, 악한 종의 비유
42절 어느 날에 poiva/ hJmevra/(포이아-헤-메라-) 가까운 미래인지, 먼 미래인지, 평상시인지, 전쟁중인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어느 날,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44절 예비 e{toimoi(헤토이모이) "준비된"하라고 하신다(마25:10, 눅12:40, 행23:15). 51절 엄히 때리고 dicotomhvsei(디코토메-세이) 원래는 "두 갈래로 자르다"에서 파생한 이 말은 "채찍으로 때려 상처를 입히다"로 "매우 지독하게 때린다"라는 뜻이다. 충성된 종은 주를 두려워하며(골3:22), 작은 일에도 충성하고(마25:21), 시원하게 한다(잠25:13).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이며(눅19:13) 일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4:2).
25:1-46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교훈
25장은 종말론적인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24장부터 연결된 종말에 대한 설명으로 보면 된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그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를 가리키며 또한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준비된 상태에 따라 신랑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므로 어떤 공동체가 저절로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달란트 비유는 그 재능이 불공평하게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모두에게 재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재능을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활용하기를 권하신다. 재림때가 되었다고 갑자기 어떤 특별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에 가진 달란트를 활용하시기를 권하신다.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과 최후 심판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수님의 재림 즉시 심판이 시작된다. 한 무리에 섞여있으면서 비슷하지만 예수께서는 거짓 양을 구분해 내신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척해서는 안되며 주님을 사랑하는 척해서도 안되며 주여 주여(마7:21)를 부르짖는 것만으로도 안되며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안 된다(마7:22). 오직 진정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마7:22).
25:1-13 열 처녀 비유
열 처녀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오지만 누가복음 12:35-37절을 참고하면 유익하다. 이 비유에서는 유대인의 혼인예식을 사용함으로 24장에서 설명한 부분을 좀더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약간은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의 혼인예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혼인 관습에는 세 단계가 있었다. 첫째로 정혼한 단계가 있는데 신부와 신랑의 아버지 사이에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때 성립된다(the eugagement). 둘째로 약혼의 단계가 있는데 이것은 신부측 부모의 집에서 갖는 예식으로서 이 때 약혼 당사자들은 증인들과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상호 서약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주었다(the betrothal). 약혼하고 남편이 죽으면 과부로 간주되었으며 파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파혼을 하게 되면 결혼한 사람과 같이 이혼의 절차가 진행되어야 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대략 일년 정도가 지나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이 때 신랑은 그의 친구들과 동행하여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으로 갔다가 신부를 데리고 행렬을 이루어 혼인 잔치가 열리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열 처녀를 맞이하러 나아가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행렬일 가능성이 가장 짙다. 1절 등을 들고 등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니 공중 혼인 잔치에 대한 예언이다(벧후1:19).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는 엿새 후이고 누가 복음에서는 팔일쯤 되어 라고 했다. 마17:14을 보라. 이곳에도 일주일에 대한 기록이 이곳과 똑같이 나온다. 맞으러 eij" ajpavnthsin(에이스 휘판테-신) 반대방향에서 오는 자와 마주치는 것을 의미한다. 2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열 명밖에 안 되는 자들 중에서도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로 구별된다. 5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라고 하셨고(단12:1),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마24:21). 환난으로 인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신랑이 더 조급하게 기다려지게 된다. 6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밤은 어두움의 권세를 말한다(눅22:53). 7절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불을 준비 할새 기름을 가진 처녀들의 등불과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구별된다. 이미 신랑이 올 때는 늦었다.
25:14-30 달란트 비유
15절 달란트 tavlanta(탈란타)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당시의 화폐로 사용하던 금, 은을 말한다. 1金의 달란트는 약 15,000$, 1銀의 달란트는 약 1,000$이다. 예수께서 어떤(금, 은) 달란트를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다만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 길을 떠났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하며 칭찬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심히 책망했다.
달란트 비유의 교훈에서는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이 있다.
첫째, 달란트의 분배이다.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각각 재능대로 맡기신다. 달란트 분배가 다섯, 둘, 하나로 구분되어 있다. 다섯을 맡을 만한 사람에게는 다섯을 주셨고, 하나를 맡을 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를 주신 것이다. 달란트 분배의 원칙은 첫째는 주인의 뜻대로 이고, 둘째는 각각 재능대로 주신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맡은 그 달란트는 주인이신 주님께서 나의 가능성과 능력을 보시고 주신 것들이다.
둘째, 달란트의 관리이다. 16절 바로 가서라고 했고, 17절에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 같이 하여라고 했다. 이것저것 망서릴 필요 없이 달란트를 받자마자 즉시 장사하러 나갔다는 것이다. 주인이 달란트를 준 목적은 27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이윤을 남기라는 것이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달란트를 주신 것은 묻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달란트는 상급이다. 다섯을 더 남긴 종과 둘을 더 남긴 종에게 주신 칭찬과 상급이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1절을 보면 다섯을 남긴 종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다. 그리고 23절에도 보면 둘을 남긴 종에게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을 남겼느냐 다섯을 남겼느냐 하는 계수상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둘 다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각각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배해 주셨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배를 남겼다는 것이다.
25:31-46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26:1-5 유대인의 공회의 음모
마태는 예수께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 절기의 주간에, 로마 당국에 잡혀서 고난을 받게되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될 것을 알고 계신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3절의 그 때에 Tovte(토테)가 엄격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질 경우 대제사장의 궁에서 이미 산헤드린 공회의가 열려 예수를 공개적으로 잡아올 경우 갈릴리 사람을 중심으로 혹시 민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어 필요할 경우 명절이 지나고 체포할 수 있다는 결론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그들이 예수의 특별한 잘못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이미 합의된 무조건 적인 체포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26:6-13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
이 여자는 요한에 의해서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나로 밝혀졌다(요12:2). 이 여자의 낭비에 대해서 제자들은 모두 분을 내었다고 말하고 있다(마태는 직접적으로, 마가는 간접적으로). 이 여자의 일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여자도 이미 예수께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은 지금 향유의 값을 생각할 그런 계산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잠시후면 잡혀가시게 될 예수께 모든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왕에게 기름을 붙듯이 이 여인은 이 일을 행했다. 향유 muvrou(뮈-루-) 당시 왕의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26:14-16 유다가 예수를 팖
복음서에서 왜 이토록 유다가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상당한 난제였다. 요한은 그의 성품과 탐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요12:6),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함으로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음을 말한다. 스가랴 11:12에 보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가 있다. 예수께서 은 30에 팔릴 것을 예언한 부분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돈을 주고 판 또 다른 경우는 창37:28에서 요셉을 은 이십 개에, 삿16:18 들릴라가 삼손을 판 것을 볼 수 있다.
26:17-29 최후의 성만찬
세 공관복음서 모두가 다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 18절 성안 아무에게 가라는 명령은 헬라어 (톤 데이나)는 문제의 그 인물이 비록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인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전하도록 명령한 메시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메시지는 주께서 느끼고 계신 당시의 긴박감을 강조하고 있다. 18절 지키겠다로 번역된 동사 poiw'(포이오)는 예언적인 현재 시제로서 [내가 지키기로 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26절 내 몸이니라 ejstin to; sw'mav mou(에스틴토 소-마 무-) 떡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이 되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몸을 의미하고 있다"는 뜻이다. 28절 사함을 a[fesin(아훼신) 이 말은 "분류케 한다"는 뜻으로 죄를 죄인에게서 분류한다는 의미이다(마9:2). 성만찬 예식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세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28절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예레미야 31:34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누가복음에서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사야 53:11의 "나의 의로운 종이 ...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둘째로, 27절의 마시라는 초청에 응하기 위해서 26절 받아 다음에 먹으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셋째로, 29절 너희와 함께라는 말의 추가는 마19:28에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하셨던 더 복된 교제를 즐기게 되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만찬에 관한 기사는 마태가 좀더 자세히 전달해 주고 있는 것 같다.
26:30-56 겟세마네 동산
제자들과 만찬이 열렸던 다락방을 떠나 한적한 곳 감람산으로 가시는 동안(누가는 주께서 이곳에 가시는 습관이 있었다고 전한다) 자신에게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곧 닥쳐올 일을 대비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첫 몸부림 기도 후에 그의 세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갈릴리 바다에서 수 없는 밤을 새며 고기를 잡던 단련된 신체를 가진 그들이) 다시 한번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36절 겟세마네(Geqshmanh')는 파생어로서 감람원을 뜻한다. 그 장소는 잠근동산 또는 제한된 정원(hortus inclusus) 비슷한 어떤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요18:1). 문자적으로는 이 뜻은 "감람유를 짜는 통"이란 뜻이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으며 예루살렘 성에서 동쪽으로 15km정도 뻗쳐있었다. 46절 함께 가자 a[gwmen(아고멘) 이 동사는 보통 [나가오는 원수를 만나러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한다.
26:57-68 가야바에게 심문 당함
예수께서 잡히시는 기간에 이미 산헤드린 공회의가 열리고 있었던 사실이 57절에서 모여 있더라로 번역된 동사 sunhvcqhsan(쉰에크데산)은 과거 과거 완료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들은 예수의 죄목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였을 가능성도 보인다. 59절 찾으매 번역된 동사는 미완료 시제로 공회의가 이제 처음으로 증거를 찾기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있는 증거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가야바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진술에 대한 정확성 여부보다는 서로 의견이 일치를 보이는 최소한의 두 증인(유대의 증거인에 관한 율법)을 찾는 것이었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는 것이었다. 이는 60절에 암시하고 있는 데로 수많은 거짓증거들이 자원하여 나섰으나 일관된 증거를 제시하는 자들이 없었다. 여러 증인과 증거들 중에 한참을 지내며 본질이 왜곡된 상태에서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61절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말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께서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요2:19)고 하였던 것이지 "내가"헌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지을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은 분명히 예수께서는 요2:19에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여기에 짖는다라고 이들이 해석한 부분은 oijkodomh'sai(오에코도메-사이)로 사용하지만 예수께서 사용하신 말은 ejgerw'(에게로-)라고 하셨다. 이것은 "깨우다, 일어나다"의 뜻으로 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나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아울러 그들에게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죄목을 어떻게 찾으려고 노력하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죄목은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을 헌다는 것과 그것을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거짓 증거임에 확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생각하기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일 수가 있었다. 이것은 제일 무거운 고발 내용중의 하나였다(행6:13-14 참고). 63절 대 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진지하고도 합법적인 질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회피하지 않으셨다. 6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대제사장은 극도의 흥분을 나타내며 자기 옷을 찢고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음을 말하고 이 말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했다.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문제를 거리낌없이 대답함으로 해서 가야바로 하여금 더 이상 죄목을 찾는 수고를 덜하게 했다. 저는 사형에 해당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회의는 단독적으로 사형집행 할 권한이 없었다. 로마 행정관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내리도록 하려면 빌라도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도록 예수에 대한 공소사실을 제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이 가지려고 추측컨대 그들은 일단 정회하고 새벽녘에 다시모여 속개하여 이 일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마27:1). 그러는 동안에 예수께서는 67절에 사헤드린 공회의원 들이거나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이라고 볼 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치고 ejkolavfisan(에콜라피산) "주먹으로 치고" 구타를 당하신다.
26:69-75 베드로 예수 부인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멀찌기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주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심지어는 함께 죽겠다고 까지 장담한 그는 이 제판장에 들어와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께 가까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태만 기록하고 있는 58절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나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가 산헤드린 뜰에 앉아있을 때 여종하나가 예수를 따르는 자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 여자는 예수를 체포하려 갔을 때 귀에 상처를 입은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하나(58절)였다. 베드로는 이 여인의 질문에 반색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옆에 있던 자가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 물었을 때도 역시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은 특유의 발음이 있어서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눈치첼 수 있었다. 그는 닭울음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
27:1-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
1절 의논하고 sumbouvlion(쉼블리온)은 "서로 결의하다, 심의하여 통과시키다"는 의미로 예수에 대한 사형 선고가 합법화를 띠는 것을 말한다.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의 죄목은 앞장에서 이들이 모의한 "성전 모독죄"였다.
27:3-10 유다가 자결함
유다는 산헤드린 공회의에 예수를 넘겨주고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때가 늦었다. 이들은 그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유다는 그 돈을 성전 마루바닥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묵매어 죽었다. 사람들은 이 돈으로 본래 토기장이의 밭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피밭으로 알려진 밭을 사서 예루살렘에서 죽게되는 이방인들의 묘지를 삼았다는 것이다(렘32:7-9, 슥11:12-13). 사도행전 1:18-19에서 유다 죽음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라.
27:11-26 빌라도의 심문과 사형 선고
"본디오"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Pontivou(폰티우스)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인데 '다섯 번째'라는 뜻이다. 이는 다섯 번째 유대인 지역의 총독 빌라도라는 뜻이다. 그는 주후 26세에 총독이 되어서 36년에 결국 그도 자살하고 만다. 종교적으로 헌금한 돈을 유용한 일로 유대인들이 데모를 하게되고 그는 자기 군대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성이 로마 황제에까지 들려서 그는 남 프랑스로 유배를 떠난다. 그곳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주후 36년에 자살했다. 본문은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의 장면이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이사야53장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강포를 행하시지 않은 분이시지만 도살장에 끌려간 양과 같다고 한 것을 기억나게 한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한다(마27: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그는 마음에 놀랐다. 죄인으로 정죄 받아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서 있지만, 실은 예수님의 그 신적인 위엄 앞에 빌라도가 내심 두려워하면서 떨었다. 그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셨다. 그는 이미 예수께서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예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명절이 되면 죄수 가운데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애를 많이 쓴 것 같지만 결국은 24절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는 말로 자신은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25절 백성이 다 lao;"(라오스)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이 저주를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에 110만 명이 죽었고 지금까지 유대민족은 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27:27-31 희롱과 수욕을 당하심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게 된다. 본문은 이제 십자가 처형을 위한 예비적인 형벌로서 당하시는 고난과 모욕이다. 27절 관정 praitwvrion(브라이도리움) 이것은 헤롯 대제가 지은 궁전을 가리키며 이 때에는 유월절과 같은 특별한 기회에 로마 총독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물 동안 그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27:32-44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넘어지고 엎으러 져서(이미 많은 채찍으로 육체적인 힘에 한계가 있으셨다) 골고다 언덕까지 가시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힘이 센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지게하고 빨리 골고다까지 간 것이다. 37절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들은 예수를 조롱하는 조로 이 폐를 붙인 것이다. 42절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한말은 사단이 그를 광야에서 시험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고 한 것과 같은 의미로 전달된다. 십자가상의 마지막까지 사단은 군중들을 통해서 그에게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27:45-56 십자가에 달리심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뉘우고 양손바닥과 양발을 한곳에 모우고 그 위에 녹슨 대못을 박았다. 그 못은 잘 못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히는 못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내가 보는 가운데 박히는 무섭고 두려운 못이었다.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의 길이었다. 예수님은 제3시(아침9시)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막15:25). 그리고는 제6시(낮12시)가 되어서, 온 땅에 어둠이 임하기 시작했다(마27:45). 한 낮에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땅이 캄캄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제9시(오후3시)가 되어서는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51절 휘장 katapevtasma(카타메타스마)지성소와 성소사이에 있던 휘장을 말한다. 이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백성들의 죄를 대신 사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러 들어가는 곳이었다. 이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버렸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찢어진 것이면 아래로부터 찢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이기에 위로부터 찢어졌다. 또한 이 휘장은 양의 가죽과 같은 두꺼운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오늘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얇은 천이 아니다. 55절은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라고 기록했는데 사실은 다른 제자들도 거의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의 십자가형 앞에 제자들(남자)은 없었다. 한 사람이 남아있었지만 세 복음서 기자들은 그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마태 자신이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혹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7:57-66 무덤에 장사되심
예수를 좇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상태에서 감히 참형으로 죽은 예수의 시체에 관심이 있을리 없었다. 그러나 유대의 높은 지위에 있던 아리마대 요셉이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 나아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요셉의 마음이 결정되었고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하여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7절 저물었을 때에 안식일이 그 날 초저녁(eveninrg)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 장사 지내기 위해서는 요셉이 어둘 때가 아니라 해지기 전에 왔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되기 전에 무덤에 안치되어 했다. 예수의 사망과 안식일 사이에는 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요한은 요셉 말고도 니고데모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는데 요셉이 주동이 되고 니고데모는 돕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9절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세 복음서 기자들은 장례사건을 아주 간결하게 적고 있다. 곧 향유 문제는 요한만이 언급하고 있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요셉이 깨끗한 세마포를 구입했다는 말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예수께 제공했다.
28:1-1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다른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이 두 마리아는 다시 한번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 아마도 이들은 전날에도 예수님의 장사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무덤을 또 찾았다는 것은 지난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이 분명하다. 1절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유대인의 하루는 오후 6시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오후 6시에 마치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 미명 ejpifwskouvsh/(에피훠스쿠세)은 현재의 일요일 이른 아침, 밝아지기 시작할 때를 말한다. 2절 굴려내고 ajpekuvlisen(아페쿨리세)는 예수께서 나오시기 위함이 아니라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게 돌을 굴려낸 것이다. 마가는 이들이 온 목적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미리 사두었다가 그것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온 목적은 무덤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마태는 이미 장사지낸 굴은 봉인되었고 파수꾼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몸에 향유를 바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 향유는 필요 없게 되었다. 3절 희거늘 leuko;n(류-콘) "하얀, 빛나는" 밝게 빛나는 것을 뜻한다. 9절 만나 ajphvnthsen(휘펜-테-센) "만나다, 마주치다" 여자들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처음으로 만지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 사람을 만나신 것은
1)막달라 마리아에게(요20:14-18), 2)무덤에서 돌아가는 여자들에게(마28:8-10), 3)베드로에게(눅24:34), 4)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눅24:13-31), 5)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에게(눅24:36-43, 요20:9-24), 6)약 8일 후에 다시 도마와 제자들에게(요20:24-29), 7)디베랴 호숫가에서 7제자들에게(요21:1-23), 8)11사도에게(눅24:50-53, 막16:19-20)
28:16-20 마지막 명령
19절 모든 pavnta(판-타) "모든, 온, 만민"의 뜻으로, 이제 복음은 유대인과 그 땅의 경계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뿐만 아니라 족속 e[qnh(에드네)는 "이교도, 이방인"이란 말로 유대민족 위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의 모두 단수로 나타난다. 이것은 3자가 모두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름으로 o[noma(오노마) "이름, 권위, 대의"의 뜻으로 세 이름에 대해서 하나 하나의 이름을 별도로가 아니라 모두 단수로 묶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이 세 이름을 사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 무소 부제의 권위를 부여한 것은 제자를 삼아서 1)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분분한 모든 것을 2) [가르치고], 3)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이 문장을 다시 정리하면 eij" to; o[noma(에이스 토 오노마)인데 이것은 "그의 이름으로"보다는 [그 이름 안으로]가 더 충분한 의미를 전달할 것 같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최고의 약속을 주신다. e{w" th'" sunteleiva" tou' aijw'no"(헤어스 테스 쉰텔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는 현시대의 종말까지를 뜻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말하고 있다. 항상 pavsa" ta;" hJmevra"(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pavsa"(모든) hJmevra"(시간)에 대해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