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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북조 北朝 연대 기원전 북위 北魏
출처:중국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북위
북위(386년~534년), 선비족 탁발규가 세운 정권은 남북조 시대 북조 최초의 왕조이기도 하다. [1]
386년 탁발규 재상전 진사분오열 때우천에서 대왕을 자임하며 나라를 재건하고 도성악(定都盛樂,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와 린겔현)을 하였다.같은 해 4월에 위나라 왕으로 개칭하였다.398년 6월, 정식으로 정하다국호는 위[2]이며, 사명은 북위이다.398년 7월, 도무제(道武帝) 탁발규는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 대동시)으로 천도하여 황제라 칭하였다.439년 태무제는 북방을 통일했다.493년 효문제는 탁발홍천 도락양으로 대거 개혁하였다.
영희 3년(534년), 동위로 갈라진다서위와. 동위무정 8년(550년)에, 고양은 효정제선양(孝靜帝善 让)으로부터 북제(北齊)를 세운다. [3] 서위공제3년(557년) 선위위우문각, 북주 건립, 원위(탁발위)가 끝났다. [4] 386년 탁발규의 대국 재건에서 534년 분열까지 20제(정사본기자 12위)를 거쳐 148년을 향국하였다.
북위 시대에 불교가 흥기하여, 불교가 공전하였다.발전, 낙양 천도와 이풍이속은 북위의 중앙집권제도와 민족의 융합을 촉진했다.
"위"자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다'신주상국(神州上國)'이라는 명칭으로 국호를 정하였는데[5] 이전의 조위 정권과 달리 어떤 사서는 '후위(後偉)'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또 황실의 성으로 발문을 탁발하였다이후 성이 원씨로 바뀌어 탁발위, 원위씨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어명 위외문명 The Northern Wei Dynasty 별명대, 대국, 북위, 후위, 원위, 탁발위, 위조, 위국 시간 범위 386~534년 수도성악(首都盛樂, 386-398)평성(平城, 398-493)낙양(493-534)주요도시성악, 평성, 낙양, 장안, 업성, 고모장, 허창, 용성(龍城)의 공용어인 중고한어(中古漢語, 낙양아언)화오수, 영안오수, 영안오수 정치체제군주 전제정체 인구 0.35억 민족계토면적 2000000km² 개척자
카테고리
1국호
2 역사
▪ 건국의 전신
▪ 입국의 시초
▪남북 대치
▪한국화 개혁
▪ 쇠락의 길을 가다
▪ 육진의 난
▪ 하음의 변
▪ 양위 분열
삼강역
▪영토권
▪ 행정 구역
4 정치
▪ 중앙제도
▪ 지방관리
▪ 제도개혁
▪ 자귀모사
5 경제
▪ 농업과 수공업
▪ 비즈니스
▪ 균전제
▪ 과세제도
6 문화
▪ 중화학 운동
▪ 문학
▪ 조형물
▪ 종교
7인의 군사
8인의 대외 관계
아홉 살 인구
10 과학
▪ 농학
▪의 지리
11대 황제 가계
국호
북위의 국호는 본래 "위"와 "위"의 앞부분에 더해진 것이다방위(方位) 북위(北偉)는 북부의 '중국(中國)'을 가리키는 말로 삼국(三國)의 위(曹) 정권과 구별된다. [1] 북위 그리고 후위 [6] 탁발위[7] 원위[8]라는 호칭이다.북위 황족 출신의 탁발부는 머리를 땋는 풍습이 있어 남조로부터 삭두로( 索頭虏), 줄여서 소로( 索 。), 또는 위로(威 。)라고 불리었다.
역사학자 전여경의 고증에 의하면, 탁발규가 최초로 발단하였다.대왕으로 호칭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위지(威地)와 위지(威地)를 모두 통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용영과 위지(河東)지역을 다투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9] 398년 정식으로 국호를 '위'로 정하여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뜻하며, 강좌동진에게 '신주의 정통'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만 효문제 이전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대'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10]
역사
건국의 전신
원래 선비족 탁발부는 지금의 흑룡강에 살았다.연강 유역은 대흥안령 부근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동한 이전에 북흉노가 패배하여 서쪽으로 이주한 후, 탁발부는 부락장수 탁발문분(汾 拓诘汾汾)의 인솔 하에 역시 축출되었다.서쪽으로 이동하여 원래 북흉노의 주둔지, 즉 막북 지역으로 들어간다.
탁발부의 발원지, 가선동
탁발부의 발원지, 가선동
탁발력미 시기에 이르러, 탁발부는 또 남하하여 유목하였다.어운중(우운중, 지금의 내몽고자치구토크토현) 일대는 성악(盛樂, 현재 내몽고자치구와 링겔현)으로 옮겨가며 조위, 서진과 왕래했다.그러나 이때 탁발부는 여전히 씨족부족 연대단계에 있었다. [11]
315년 탁발력미지손 탁발아노인서진의 병주를 도운 유곤은 흉노족 류총, 갈족 석륵과 맞서 싸운 공로로 서진에게 대공(代公)이 되고, 나아가 대왕(代王)이 되었다.338년 탁발시익건대국을 건설하는 것은 모두 성악으로 가득 차서, 노예주점제라는 계급사회에 들어서서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376년, 전진천왕 부견공대, 탁발곧 그 아들 탁발식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전진이 와서 나라를 멸망시켰다. [12]
입국의 시초.
비수의 전쟁 후, 전(前) 진와해, 이전에 부견의 정복에 나섰던 각 종족들이 분분히 독립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386년에는 탁발시익건( 拓跋)의 손자인 탁발규(拓 。)가 구부를 규합하여 우천(牛川,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흥화현 서북동양하남)에서 부족대회, 즉 왕위를 대신하여 정식으로 대국을 회복하였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천이 멀어 천도하였다.같은 해 4월, 개국호는 위나라이며, 스스로를 위나라 왕이라 칭하였다. [13]
선비족이 사는 지역은 원래 흉노가 살던 곳이다.흉노족은 대부분 서이천과 남이했지만 모든 흉노족이 서이천과 남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며 일부는 그대로 남았고, 선비족이 온 뒤에는 이 부분에서 이동하지 않은 흉노족과 융합해 부족동맹을 형성해 흉노족을 선비부족연합 내에 편입시키고 혼인을 고리로 관계를 강화했다.씨족 부족 시대에는 정복으로 부족을 결속할 수 있었다.자연적으로 이 연맹에서 정복족과 피정복족의 지위가 반드시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다. [14]
부견이 시익건을 공격할 때, 철백부의 수장 유위진은 부견과 함께 시익건을 공격했다.시익건이 실패하자 유위진과 또 다른 철파족의 수장 유고인 두 대가 힘을 얻었다.부견은 이들에게 황하를 경계로 탁발씨의 고지를, 유위진부는 서쪽에, 유고인부는 동쪽에 각각 차지하도록 했다. [14] 유위진, 유고인은 모두 남부 헝가리 출신이다.한나라가 흉노와 화친하여 종녀를 흉노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헝가리 사람들은 대부분 유씨를 사칭하였다.이 두 대의 흉노는 또 모두 연루되었다탁발선비하여 유고인모는 탁발울률(平文帝)의 딸이다.시익건( 什翼 刘)은 종녀(宗女)로 유고인(劉庫仁)에게, 딸은 유위진(劉衛鎭)에게 시집갔다. [14]
탁발규가 탁발씨를 부흥시키려면 먼저 흉노의 유현(유고인의 아들), 유위진(유위진) 두 부족과 부족연맹의 지도권을 다툰다.유현은 탁발규가 즉위하기 전부터 탁발규를 살해하려 했고, 탁발규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현을 파병해 시익건의 소자 탁발굴 도서와 탁발규를 호송했다.탁발씨는 원래 어린 아들을 둔 관습으로, 굴을 돌보면 탁발규에게 큰 위협이 된다.여러 부락이 흔들려 소동을 일으켰고, 탁발규의 좌우도 탁발규의 생포 음모를 꾸몄다탁발굴의 돌에 호응하다.탁발규는 두려워하고, 북으로는 음산을 넘어, 하란부에 의지해 모용에게 구조를 요청하도록 사람을 보냈다.모용수는 모용린의 영병을 보내 탁발규(拓 。 。)를 구하고, 대패굴두(大 。 。 。)를 도굴하여 유위진에게 투신하여 죽임을 당하고, 부하들은 탁발규의 소유로 귀결되었으며, 이듬해(387년) 탁발규는 마읍 미택에서 유현을 대파하고 유현부족은 모용수에 의해 멸망되었다.탁발규는 유위진과 싸웠고, 결국 위진은 실패해 죽임을 당했고, 그 아들 혁련은 잔부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가 후친야오싱에 종속되었다.이에 황하 이남의 모든 부위가 평탄하여, 탁발규는 축산 명마 30여만 필, 소와 양은 400여만 마리를 노획하였다. [14]
탁발규는 선비탁발씨로 알려진 부족연맹의 지도력을 회복한 뒤 남북으로 발전했다.이 시기 탁발씨 북쪽에는 문화적으로 더 낙후된 차족과 유연족이, 남쪽에는 모용수가 세운 후연이 있었다.등국 4년(389년)에 탁발규는 차고를 무찔렀다.하이카는 유목부락이며 싸움을 잘하는 기병이다.고차족에 대한 정복은 탁발 씨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켰다. [14]
남북 대치
참견: 북위 통일 북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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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을 정복하다.
통일북방면
통일북방면
북위통일북방전쟁은 오호십육국 때 제후분쟁으로 진행됐다.상대가 많아 상황이 복잡다단하지만 상황을 잘 파악하고, 선제타격의 목표를 정하고, 능동적인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각개격파의 목적을 달성한다. [15]
북위는 등국 10년(후연건흥 10년, 395) 만에 북위를 공격하고, 탁발규는 강적(强敵)에 맞서 허약( 远敵)을 멀리하고, 피로( 。疲)하는 처방을 하는 한편, 상대의 군심을 와해시키고, 용맹하게 추격하는 데 주력해, 참합피(참고자지구 찬도시) 결전에서 4만~5만 연군을 섬멸시켰다.이때부터 양국의 힘의 대비를 바꿔 북위 세력이 중원으로 진입했다. [16]
입국 11년(396년)에 탁발규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40여만 대군을 거느리고 후연으로 남하하고, 탁발규는 대군을 이끌고 읍·극진양에 출마하여, 취병주·동하징싱관( 取合州)·동하징관(東下井星關)을 거쳐 항복한 후, 연장이 리선(李先)을 정동좌사(正東左長使)로 봉하였다.이어 승승장구하여 호타에 이르러 상산성(지금의 석가장시 교외의 동고성 일대)에 포루를 설치하고 일거에 성벽을 쌓을 준비를 하였다.후연상산은 그 당시에 구차하게 여러 성을 거느렸다.탁발규가 항복을 권고해도 성공하지 못하니, 장병이 대거 출동하게 하였다.성을 공격하여 창고를 연연케 하였으나, 병법을 잘 알지 못하여 지휘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고, 게다가 힘이 약하여 연군이 죽거나 다치고, 북위군이 성을 부수어 들어가 포로로 잡았습니다.그 뒤를 이어 위군이 연속하여 수십 개의 현을 점령하였다.중산예(中山), 허난성(河南省) 안양시 북쪽에서 허베이성 린장현(林長縣南), 신도(信都, 현재 허베이성 지주시) 등 3성만 연군이 장악하고 있다.11월에 위왕규는 많은 병력을 집결하여 연도중산을 공격하였다.아울러, 동평공탁발의를 시켜 병졸 5만을 거느리고 업성(業城)을 공격하게 하고, 우승 장군 왕건(王建)과 좌장군 이율공도(李栗公信都)를 시켜 일거에 제비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후연 고양왕 모용은 중산 남문을 굳게 지키고, 군중을 거느리고 위군의 번갈아 공격을 물리쳤다.위군은 사상자가 막심했다. 탁발규는 산성이 튼튼하고 삼엄하다고 보고 군사를 남쪽으로 이끌고 우세한 병력으로 신도를 신속하게 함락시켰다.이어 업성에 임해 몇 차례 강습이 불발됐고, 위군이 모용청의 야습을 받자 탁발규는 잠시 군을 이끌고 양성으로 물러났다.이때, 위나라 병주감군은 숙부의 뿌리 없는 제비를 추문하고, 위나라 도성으로 돌아가 난을 일으키도록 감독하였다.탁발규는 병사의 북상(北上)과 내란(內亂)의 종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제후군이 궁지에 몰릴까 두려워 앞뒤로 적을 맞아
그래서 나라를 보내 후연과 화해를 모색하고 동생을 인질로 잡아 잔류에 머무르게 하였다.연주 모용보는 위나라 내부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락하지 않았다.또 발보병 12만, 기병 3만7000명은 호타강 북쪽 기슭의 백자오(白 。 。 。, 현재 고성현)에 주둔하면서 발규의 결전을 주문했다.탁발규구화불성분하여 응전하다.수일 내에 통병들이 북상하여 호타하남안에 진을 쳤다.위군이 자리를 잡지 못한 틈을 타 모용보는 정병 1만여 명을 파견해 위영을 밤샘 기습하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연군은 강을 건넌 뒤 위영까지 내려와 북풍을 이용해 소영을 방화하고 맹공을 퍼부었다.위나라 군대가 잇달아 진루하여 불이 나면서 병장이 대란하였다.이때 탁발규는 잠을 자고 있다가 군 막사의 대란을 듣고 황급히 캠프를 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다.연은 백여 명의 비마를 거느리고 탁발규 대장 안으로 달려갔으나 탁발규가 버린 장화만 보일 뿐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탁발규는 탈영하자마자 북을 치고 말았다. [17]
어둠이 내리자, 케이트는 북소리를 듣고 황망히 징을 울리며 군대를 철수하였다.연나라 병사들이 징과 북을 함께 울리고, 그 까닭을 모르고 위나라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은 줄 알고, 갑자기 놀라 대란을 일으키며, 서로 짓밟고 쏘았다.탁발규는 즉시 전군을 모아 보병에게 영외에 횃불을 붙이라고 명령했고 기병은 연군을 향해 돌진하며 맹사했다.연군은 사면에 적을 맞았고, 또 위군 기병의 교대로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막심하고 난장판이 되었으며, 연장은 높이 자라 포로가 되었다.모용보는 잔병을 수습하고 강을 건너 북으로 도망가야 했다.위군은 사기가 높아져 탁발규의 통솔 하에 끝까지 추격하였다.당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이었고, 연군 병사들은 강을 건너다가 상처를 많이 입었고, 동사자의 시체를 베었다.도포를 버리고 무수한 무기를 버리다.모용보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군을 버리고 2만 석을 달려 중산에 돌아왔다.위군이 밤새 추격하여 중산성 아래에 이르다.후연상서랑 모용호가 모용보 미수를 죽인다.관문을 베고 위나라로 내려왔다. 모용보는 중산난보(中山難保)를 보고 1만 기병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용성(龍城,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으로 도망쳤다.한 때 번화했던 후연국도중산은, 마침내 황시 2년(397)에 10월에 갑신하였다.날은 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남조를 공격하다.
참견: 북위공송하남전
천흥원년(398), 탁발규 천도 평성(지금의 천도)산시성 대동), 정식으로 황제라 칭한다.탁발규가 패한 뒤 연은 중원으로 들어와 농업 생산을 독려했고, 노예주 귀족은 점차 봉건 지주로 탈바꿈했다.탁발규는 한족의 대주주를 통치 집단에 모집하여 선비 탁발부의 한화를 가속화하였다. [18]
이후 수년간 북위는 내실을 다지고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데 치중했다때로는 북부의 유연함과 관중의 후진과의 교전도 있었다.북위 천흥 5년(후진홍시 4년, 402년)에 북위대군은 성을 포위하고 원군을 나눠 섬멸하는 전법으로 현재 산시(山西)성 양분 서남쪽)에서 후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섬멸했다. [16]
영흥 원년(409)에 탁발규가 피살되고 그 아들이 탁해졌다.발사는 왕위를 계승하고, 사명은 명원제라고 한다.태상 7년(송영초 3년, 422년)에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의 병졸을 틈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하 유역을 따라 전면 개전하여 황하 이남의 호랑이 간(현재의 형양 서북), 낙양, 활대( 。臺, 현재 활현 동쪽) 등 군사 요충지를 탈취하였다.남조 송군은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완강한 저항으로 위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16]
태상 8년(423), 탁발사졸, 태자 탁발도는 왕위를 계승하여, 위태무제라고 불린다.이때 북방은 대하, 북량, 서진, 북연, 유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위가 차지하였다.탁발도웅은 병법에 정통하고, 역대 전쟁에서 항상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전쟁에 임해 용맹함으로 승리하였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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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국을 대파하다
참견: 북위 공격하통만성 전투
위시광 3년 (하승광 2년, 426년)~4년하왕혁(夏王赫)의 죽음과 제자(子者)의 참사를 틈타 하도통만성(夏都統萬城, 지금의 산시성 변 동북백성자)을 2차 대군으로 공격했다.약한 척하면서 하군을 전쟁에 유인하여 피곤하게 한 후, 은군은 하군을 진지로 나가 순풍으로 쳐부수고, 하군을 대파하고 만성을 통통하여 하왕, 공, 경, 장군, 학교 및 후비, 궁인 등을 만 명으로 하여, 말에서 세 번을 획득하였다.0만여 필, 소와 양은 수천만 마리. [19]
하는 북위에게 함락되었고, 하왕은 혁련창에 포로가 되었으며, 그 아우는 혁련이 되었다.평량(감숙화정)으로 도망쳐 즉위했다.431년 북위병단의 회수를 틈타 서진(西進)을 계속 서쪽으로 넓혔고, 청해호(靑海湖)에서 천비토곡(天非土谷)의 땀에 맞아 생포돼 북위에 헌화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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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함을 크게 깨뜨리다.
참견: 북위 공방전
북위시광 원년(424) 8월, 땀 뻘뻘 흘린다단( ()은 북위 명원제(明元帝) 탁발사(拓 。士)의 죽음을 듣고 6만 말을 타고 북위 운중(北位雲中, 현재와 링겔시베이)에 들어가 이민을 약탈하고 북위의 고도성락을 함락시켜 운중성을 포위했다.탁발도 세자 때, 열두 살에 원수가 강을 건너가 만리장성의 부드러운 침입에 맞서 변새의 군무를 정비하였다.유연한 전술에도 익숙해 많은 의견을 모아 2만 기병을 이끌고 구름 속으로 달려갔다.많은 인파를 등에 업고 구조에 나선 북위 태무제(太武帝) 탁도도소( 拓道所)는 50여 개에 달하는 포위를 했다.북위 장병들은 처음엔 공포에 떨었다.그러나 이 열여섯 살도 안 된 소년 황제가 "항상 병졸과 함께 시석 사이에 있다가, 좌우로 죽었다.부상자가 속출하자 제(帝)의 표정은 의연했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북위 장병들은 '사람은 보고도 보고도 보고도 못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먼저 유연했던 두 대장 다나, 사윤의 공격은 북위군에 의해 격퇴됐다.이어 위척근( 大将 北 魏) 대장이 북위군에 의해 사살되고, 위도( 。道) 대장이 대종심(大從深)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북위가 유연군에 돌격하자 유연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대패하고 말았다. [21]
이듬해 10월에 북위는 대대적으로 유연히 군사를 나누어 오도를 병합하였다진, 점점 더 무지막지해져서 살금살금 북으로 도망가네.
위제는 북쪽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유연함과 남조 송의 양면을 협공하였다위협과 설운에 둘러싸인 설욕은 혁연하( , 克夏), 극기도시 통만( 。 。지금의 산시징변 동북백성자)을 대파하고 유연한 타격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결심한다.신록가는 2년 4월에 신하들과 상의하여 유연함을 쳤고, 공경대신과 보태후는 송군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극구 말렸다.태 상경 최호는 송문폐하께서 천하를 다스리시고, 마음이 깊으셨다고 생각한다.두려움은 반드시 품, 감히 나 갈 길이 멀고 유연 것을 믿다 할 수는 없고 방비가 허수하력 오래 되면 흩어지기 때문에, 여름은 뭇 많은 사람들을 모아 방목하며 가을을 타고 남의 손에 닿는 오늘을 방목할 수 있는 일 거에 출격 준비 없는 틈을 없앴다. [22]
위제는 그 견해에 대해 극히 상찬하였는데, 결국 태위의 장손을 남겨 두기로 결정하였다.쑹(嵩)위위 누푸롄(樓福)은 진을 치고 교토를 지키며, 명사도장인 쑨한(孫漢)은 서도에서 대아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에서 흑산(黑山, 지금의 네이멍구 바린 우기 북한산)으로, 사막을 넘어 유연하게 합사(合射 。)하고 유연하게 다스렸다. [22-23]
신麚2년(429) 5월, 탁발도 유연을 잡다여름에는 군중이 방목하는 틈을 타 위제는 사막의 남쪽(지금의 몽골고원 대사막 이남 지역)까지 군대를 이끌고, 치중(辎重)을 버리고 경주마 겸 말( 。馬한 기마다 부마까지 포함)을 거느리고 전율수(올옹김하)로 달려갔다.유연무비, 임전공포, 민축의 공포로 뿔뿔이 흩어지고, 단단은 황급히 돔을 태우고,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동부에서 위군이 온 것을 보고, 대단제 피리가 먼저 군대를 인솔하였다.형을 구하려다 장손한 기병에게 요격당해 패하고, 그 수령은 수백 명을 죽였다.유연함을 깨뜨리고 고급차를 위복함으로써 북녘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다.유연함은 약해져 공격의 위세가 약해졌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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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를 공략하다.
연화원년(432) 오월, 탁발도감대이미 정비가 끝나자 평성 남교에 병마를 모으고 양초를 쌓아 북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같은 해 6월, 탁발도는 군대를 이끌고 북연을 토벌하였다.7월 위군이 유수(水水, 지금의 북동부 롼허)까지 행군한 이후 후방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탁발도는 즉시 안동장군 해근을 파견하여 유주와 밀운의 민중을 징발하고, 1만여 명의 딩탄족(高車)을 징발하였다위군의 민부로서 위군에 성공 기구를 실어준 뒤에야 급한 불을 껐다. [24]
위군 주력 계속 동진... 북연도-해근 북연도성룡성 외 회사. 두 길의 위군은 도중에 별다른 저항 없이 길을 따라 가던 북연수군과 관리들이 잇달아 북위에 투항하자 위군은 얼마의 노력 없이 용성을 포위하였다.또 3만여 명의 민중이 도재와 용외에서 참호를 파내면서 용성 내 수군(守軍)의 고립을 기도했다. [24]
그 해 8월, 북연황제 풍홍은 항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3만 명을 성 밖으로 내보내 위군에 도전했고, 패전했다.북위 창리공탁발구와 하간공탁발제부를 거느리고 북연군을 포위해 연군이 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이 패배로 북연의 관리와 장수들은 모두 매우 성실해졌지만, 상서고소만이 여전히 부하를 거느리고 저항하다 얼마 후 죽임을 당했다.형세가 불리해지자 풍홍은 고구려군을 요청하여 그를 보호하였다.용성의 백성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고구려로 떠났다.얼마 후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크게 죽임을 당하면서 북연은 멸망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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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량 항복.
참견: 북위멸북량대전
태연 5년(북량영과 7년, 439), 북북량주 저거목 건희( 。 。 。)가 "한세 위제벌에 가서 대패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유연한 망언을 퍼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번심이 있음을 알고, 조정의 의결을 거쳐 모주 최호의 말에 따르고, 불의에 허를 타고 바람을 쏘이기로 했다.6월에 위제는 병사를 거느리고 평성에서 출발하여 시종, 의도왕목수에게 태자 탁발황감국을 보조하게 하였다.대장군, 장락왕 혜경, 보국태 장군, 건령왕 탁발숭영병 2만둔막남으로 하여금 유연에 대비하게 하였다.아울러 공경에 초서(草書)에 명하여 북량주(北主主)의 목건(木犍)을 문책하라고 명하고, 12가지 죄상을 열거하여 친히 신하들을 거느리고 웨이쥔을 멀리서 맞이하도록 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이후 구름 속에서 황하를 건너, 7월에 군속의 국성으로 치중을 남기고, 제군들을 배치하였다.대장군, 영창왕 탁발건( 尚發健) 상서(尙書)는 유길(劉吉)과 상산왕 탁발소( 。山王拓 。所)를 공격수로 하여 양진(兩進)하게 하였으며, 표기대장군, 낙평왕 탁발비(樂平王 。 。丕) 태재(太才) 양평왕(陽平王杜超)을 뒤를 이어 평서장군 원하(元賀)로 삼았다. [25-26]
겐가는 고 남량주의 독발 녹단의 아들로, 남량원거고.장, 후에 북량함이 차지하였다.겐가는 위제에게 "고짱성 옆에는 4부의 선비(善非)가 있고, 개신( 。臣)의 조부(祖父)가 있어 귀순을 권유한다"고 말했다.위주께서 선함을 칭하셨다. 8월에 탁발건은 하서(河西, 하서의 회랑과 박수 유역 일대) 축산 20여만 명을 얻었다.북량주는 마중 나오려 하지 않고, 한편으론 사절을 파견하여 유연함을 구하고, 한편으론 동래군 동래군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만여 명이 고모 장성 남쪽에 출전하였는데, 북량병은 바람을 맞으며 패주했다.위제는 북량주에게 항복하도록 효유했고, 저거목건조는 위나라의 변새에 유연히 장군을 보내 위제가 귀사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하였고, 결국 폐성하고 고수하였다.그의 사촌동생인 저수조성이 항복하자 위제는 성안의 상황을 모두 알고 군사를 나누어 포위 공격하였다.위안성 부근의 모든 부하를 3만여 명으로 거느린 위안가 때문에, 위제는 고모를 전공하였다.장. 9월에 북량주저거목건의 조카 저거만년도가 위에게 하강하였다.고모장은 성이 무너졌고, 저거목건은 문무를 이끌고 5000명이 나갔다.북량력 39년 만에 죽다.이어 위군은 장예, 러두, 주취안 등을 공략해 모두 장수했다. [19] [25-26]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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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대치
16세의 탁발도가 즉위하여, 즉위하자마자 소승을 거두었다.북방의 부드러운 광기를 막아냈다.이후 탁발도는 유연에게 스스로 반격을 가했고, 13회에 걸쳐 유연하게 군대를 출동시켜 무북 일대를 정복하고 유연하게 하였다.다쿠발도는 427년 3만 기병으로 난공불락의 후샤통 만성을 무너뜨렸다.서기 431년에 호하를 멸하고, 히라야마 후를 평산하고, 서쪽으로 토곡혼을 쫓다가, 다시 436년에 북연을 멸망시켰다.439년 북침은 북방의 분단 할거국면을 통일로 되돌려 놓았다. [29-30]
이로써 북위는 북방을 통일하여, 전 진부견의 뒤를 이어 다시 북위를 통일하였다.북방을 통일하다.이로써 남방의 유송정권과 병립해 남북한이 대치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29-30]
탁발도는 조부와 아버지가 남긴 업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을 더하였다.자신의 웅재대략, 군사적 재능, 그리고 20년 가까운 통일전쟁 끝에 마침내 북방을 통일하고 북위의 봉건화 과정을 강화하여 북위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그러나 송을 벌목할 때, 유송의 남연, 서연, 예, 청, 지6주는 큰 파괴를 당하였으며, "자기도리가 침체되어, 원가의 정치가 쇠퇴하였다"고 하여, 인민들의 고난을 가중시켰다.또한, 북위의 대신이자 군사 모략가인 최호는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에게 큰 역할을 하였다.북위 왕조 3대 왕조의 중대한 군사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다모선단(多母善斷)의 공훈을 세웠으며, 북위 통일 중국 북방의 일련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9-30]
중국 문화 개혁
참고: 북위 효문제 개혁
탁발도사 후, 문성제탁발준, 헌문제탁발홍효문제 탁발홍이 차례로 즉위하면서 사회경제가 유목경제에서 농업경제로 바뀌도록 개혁을 단행했다.효문제 즉위 후 계급갈등 완화를 위해 지방 호강 세력을 제한하고, 펑 여사의 보좌를 받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예를 들면, 녹봉제, 균전제, 삼장제, 천도, 한화 정책 등, 극대하게북위의 경제사회 발전을 촉진하고 민족대통합을 촉진해 수당 통일의 전국적 여건을 조성했다.
490년(태화14년), 풍태후사, 위효문제는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가 친정(親政)한 후 첫 번째 큰일은 평성에서 낙양으로 도성을 옮기는 것이었다. [31] 위초, 선, 한관호 잡용.천도 후 관제를 고쳐 위진남조(威進南朝)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32]
북위 통치자는 한족 지주와의 더 나은 합작을 절실히 요구하였다이를 위해 이들은 민족적 한계를 더 허물고 중화(漢化) 정책을 펴야 한다.하지만 선비의 귀족이 모여 사는 옛 도평성에서는 한화를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31]
493년(태화 17), 효문제 남벌명의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다.낙양에 도착한 후, 그는 계속 남하할 것을 언명하였고, 군신들은 말 앞에 꿇어 앉아 말렸다.그는 군신이 남벌을 원하지 않는 심리를 이용해 낙양을 수도로 선포했다. [31]
효문제의 개제는 일부 보수적인 탁발 귀족의 것을 받았다반대합니다. 그들은 제도개정 전에도 보이콧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개정 중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저항했습니다.496년, 태자 탁발황이 평성으로 도망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효문제(孝文帝)에 의해 처형당했다.같은 해 겨울, 구귀족들이 평성에서 병변을 일으켰다.효문제는 반란을 평정하고 제도개편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장했다. [32]
쇠락해 가다
위효문제의 변법 이후 북방의 민족 모순은 다소 완화되었다.그러나 북위 정치의 부패가 날로 심해져[33] 이치는 퇴폐하고 있다.고양 왕 원옹부 겸 산해로, 집과 정원 등이 황궁처럼 호화로운데, 동복은 6천에 달하고 기생은 500에 한 끼 식비로 수만 위안이 들었다.하간왕 원침과 싸웠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은 서진의 석숭, 왕개두부(王恺都富)를 능가했다.아호장군이라 불리는 원휘가 이부 상서를 만들 때 매관매직은 모두 정가가 매렸으며, 사람들은 이부를 매관시장이라 부르며 이 관리들을 대낮의 강도라고 불렀다.지방주군에서는 자사태수( 刺史太守)가 모이고, 조세를 징수할 때 다시 척대두중량을 쓴다. [33]
무거운 병역과 부역으로 많은 농민들이 패가망신하였다.파산한 농민들은 호강에게 몸을 던져 종속농으로 전락하거나 부역을 피해 절에 들어가 승니가 된다. 위씨가 통제하는 집들이 갈수록 줄어들어 정부 수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갈등의 격화로 5세기 말~6세기 초 북쪽에서는 이미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34] 북위는 세금을 더 내는 것 외에 여러 차례 탈주자를 색출하고 도망가는 농민을 색출했다.연창 4년(515) 지주 스님 법경이 이끈 대승교 반란은 '신불출세, 구마 제거'를 공언한다[35].북위 정부는 십만 군대를 동원해서야 진압해 나갔다. [36]
북위 말기에는 각 민족 인민들의 의거가 북방 각지에 널리 퍼졌고, 명칭은 매우 많았지만, 주로 북방 변진봉기, 하북봉기, 산동봉기, 관롱봉기 등 네 가지가 있었다. [34]
북위 말기의 각 민족들의 대의는 8년 동안이나 이어져 지금의 하북산동내몽고영하감숙의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다.봉기군은 전투에서 북위의 많은 왕공 귀족과 주군의 목수를 죽이고, 지주를 주살하고, 독의 보루를 파괴함으로써 북위의 통치에 타격을 주었다.봉기군은 한(漢)선비흉노저(羌 。)강( 各) 칙륵(敕勒) 등 각 민족을 망라하고 있으며, 각 민족은 공동전투에서 서로의 연계와 이해를 증진시켰으며, 민족융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4]
육진의 난
효문제탁발홍
효문제탁발홍
6진은 북위 전기에는 유연정권을 공격방어하기 위해 평성북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로 설치한 6개의 군사거점으로 옥야진회삭진무천진무명진유현진회황진이다.북위 전기에는 유연이 가장 주적이었다. 북위는 주요 군사력을 6진에 집중하여 진도 대장을 설치하고 진은 선비귀족 중의 뛰어난 군사인재를 배치하였으며, 수비는 탁발연맹 각 부족의 목축민과 중원의 호강지주의 고위층 자제들이 수행하였다.북위가 북위를 통일하면서 유연정권은 북위의 타격에도 쇠락해 북위에 치명적 위협을 줄 수 없게 됐고, 6진의 군사정치적 위상은 가벼워졌다. [37]
효문제(孝文帝) 개혁 이후 문벌화(門化化)가 진행되면서 6진 통치자들은 아무리 큰 전공을 세워도 문벌에서 밀려나 북위 정부의 고위 정치무대에 진출하지 못했다.육진의 선비들은 여전히 원래의 선비족 언어와 관습을 유지하고 있어, 북위의 효문제한화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그들은 뤄양 측과 문화적인 차원의 투쟁을 유지하고 있다. [38]
523년, 기근이 발생한 정권이 만리장성 이북 지역 유연, 유연 정권에 장병이여 그 땀이 남 괴에 삼십만을 성폭행한 육진을 노략질할 것이 불 태워 죽이고 사람의 집 재산을 육진을 내고 빈 식량이다. [39]
북위 효명제는 어리고 젊은 호태후가 정사를 맡아 육진문제에 대해 간단히 구제 식량만 지급했을 뿐, 원래부터 적은 급료를 지급하였다.서기 523년 4월, 회황진 군민은 관청의 곡창고를 강탈하고 회황진장 우경을 죽였다.회황진 사건은 도미노 효과를 불러왔다.서기 524년 4월 옥야진 관할 고궐에 있는 흉노인들이 육한발릉을 부수고 수하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칼을 휘둘러 수주를 죽이고 봉기를 선포하였다.6진 군민이 분분히 봉기하여 6한 발릉이 "진원"으로 바뀌었고, 서관이 작위를 봉하여 6진 의군의 선두주자가 되었다.육한발릉의 의군은 옥야를 점령하였지만, 별수위호고도의 의군은 점령하였다.회삭진을 점령하다. [40] 북위 정부는 3도에 걸쳐 총수가 바뀌어 회왕 원욱, 상서령 이숭, 원연을 각각 북정대도독으로 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봉기군을 진압하였으나, 의군과의 싸움은 실패하였다.서기 524년 8월, 6진 동서 2편의 칙륵 추장은 모두 의군에 귀속되어, 의군이 6진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였다. [41]
북위는 유연한 사람을 용병으로 초청하여 6진 인민의 봉기를 진압하였다.6진은 줄곧 유연하게 보는 사람들의 장애물로 여겨져 왔으며, 서기 525년 4월, 유연하게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6진에 들어가 무천 서쪽에서 옥야로 향하였고, 원연의 위군에 맞추어 6진의군을 공격하였다.양면에서 협공하여 의군은 매우 열세에 빠졌고, 위대는 고독하게 전사하였다.원연은 또 서 칙륵 추장을 분열시켜 의군 세력을 약화시켰다.8월, 유연군은 위군과 합류하여 오원에서 의군의 주력군을 대패시키고, 육한발릉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의군은 위나라로 항복하였다.6진 20만 명의 포로가 된 백성이 하북 3주에 안치된 후, 바로 하북이 수해와 가뭄을 만나 먹을 곳이 없어 도망가는 현상이 나타나자, 20만 6진 군민이 다시 봉기하여 관용과 하북을 관용하였다.등지의 여러 민족도 계속해서 봉기하였으나, 결국 의기는 실패하였다. [42]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북위 정권은 곧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변진호강 그룹은 당시의 혼란을 이용해 세력을 키웠다.쓰쓰저우 슈용(산시 숴 현 북)의 치후 추장르 주룽은 베이진 허우창과 유민이 모여들어 세력이 가장 빨리 발전했다.
하음의 변
참견: 하음의 변
북위락양성평면도
북위락양성평면도
528년 북위도시 낙양에서 헤어졌다영태후를 낳아 정국을 장기간 통제하다친자식들을 독살하라명제 원휘. 그 후 영태후는 세 살 된 원쇠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진양(晋陽)에 주둔하고 있는 주(朱) 대장군은 효명제(孝明帝)의 복수를 빌미로 낙양으로 진출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었다. [43]
이주영계 계후부락 추장은 그 부침이 선하다.말을 타고 사격하여, 오랫동안 유연부의 남쪽에 저항하였다.아래는 북부 국경 수비의 중요한 요소이다군사력은 당시 가장 유력한 군사집단이었다.이를 막기 위해 이주영은 아들인 알주천광 등을 몰래 보내 낙양성에 들어가 펑청(彭城) 왕 원협(元勰)의 아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장락왕 원자유(元子由)와 상의해 낙양을 치고, 사후에 원자유제(元子有帝)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44-45]
그 후, 진주영은 진양에서 대군을 이끌고 나아갔다.낙양이 진군하다. 대군이 하양까지 진군하다(지금의 초작 맹주)때는주영이는 심복을 낙양으로 보내 슬며시 원자를 하양에 모셔 황제로 세운 것이 역사의 효장제다.이후 대주영은 대군을 이끌고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향했다. [44]
영태후가 소식을 듣고, 급히 대군을 소집하였다.주영이와 결전하였더니 결국 주영에게 돌아갔다영광스럽게 싸워서 낙화유수가 되고, 수도가 되다.낙양도 함락되었다. 영태후는 대세가 기울자 후궁빈빈과 함께 영녕사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라고 명령하였다.그럼에도 영태후를 놓치지 않고 영태후를 협박해 유제 원쇠와 함께 낙양에서 물러났고, 대군이 하음(황하 남안)까지 진격하자 영태후와 원쇠를 홍수가 밀려오는 황하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영태후와 원쇠(元钊)를 잔해한 뒤 정주영은 원자유(元子由)를 초청한 척 북중 백관을 데리고 하음(河陰)의 도저(道 。, 지금의 맹진동)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2000여 명의 원자유를 수행해 도저에 도착한 주지영은 미리 대기하던 병사들에게 문무백관 2000여 명을 모두 살해하라고 지시했고, 북위 제왕 중 원옹 원흠 원략 원탁 등도 이번 살육에서 살해돼 흉측한 하음(河陰)의 변을 만들어냈다.이번 사태로 이주영은 낙양으로 이주한 한화선비 귀족과 북위 정권에 출고한 한족 모두를 소멸시켰다. [44]
하음의 변란이 있은 후, 이주영은 황제를 칭송하고자 하였다.그는 그의 음모가 실현되지 않자 사람을 파견하였다소자유를 낙양으로 보내니자신은 살인을 너무 많이 해서 민분이 심해서 낙양성에 머물지 못하고 줄곧 진양에서 멀리 떨어져서 낙양을 조종하여 지휘하였다.이때 낙양성은 민심이 동요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부잣집 부자들이 동요를 두려워하여 집을 버리고 도망쳤고, 경성(京城)의 지난날의 번화가는 사라졌다. [44]
효장제는 비록 정주영의 부축을 받으며 하였지만황제를 만나도 그는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주영이를 없애야 한다는 일념으로북위의 황권을 다시 일으켜 세워 530년 효장제(孝莊帝)가 주영(朱榮)을 상경시켜 명광전에 38세의 나이로 입경시켰다.알주영의 사촌 동생인 알주세륭과 조카인 알주조는 이 소식을 듣고 힘을 합쳐 로양을 공격했다.주조는 성을 공격하여 효장제를 붙잡아, 먼저 효장제를 북위 황가 사원의 영녕사 탑에 가두어 두고,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진양으로 압송하였다.살해당하고 동시에 살해된 사람은 임회왕 원교, 성양왕 원휘 등 잔존 왕공들이다. [44]
그 후, 르주조는 진양, 파이르로 돌아갔다.주세륭 등은 낙양을 지켰다.그들은 낙양성에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격앙되었다사람들의 울분이 일어났다. 진주자사고환은 531년 틈을 타 낙양을 점령하고, 533년 진양에 진병하여 이주씨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국정을 장악하였다.그 사이 북위에는 주마등처럼 폐제(폐제)가 원엽, 원공, 원랑으로 이어졌다. [44]
두 위가 분열하다
고환이는 532년에 원수를 왕으로 세우고 즉위하였다효무제. 그러나 원수는 고를 용납하지 않는다.즐겁게 실권을 장악하다, 534.연년에 장안에 뛰어든 우문태.
534년 고환립원선견으로 황제가 되었다제, 즉 효정제이며 업에 천도하였다.(금현하남안양북에서 하북까지임장남), 이것이 바로 역사상 동위의 정권이다.천도 당시 고환(高欢)은 낙양성 내 주민 40만 가구를 업성(up城)으로 옮기고 낙양궁전을 헐어 철거한 건축자재를 업성으로 옮기면서 300년 된 금수제가 폐허로 변해갔다.이듬해 효무제는 우문태와 사이가 나빠져 우문태에 의해 독살당하고, 옹주 자사 겸 상서령 우문태립원보화위제(泰立元寶炬爲帝)가 되어 장안을 수도로 세운 것이 바로 역사상 서위정권(西偉政權)이다. [46-47]
동위, 서위 얼마 못 가 550년, 고환이의 아들 고양 접수동위황제 원선견의 선양북제정권을 수립했다. [3] 557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은 서위황제의 탁발곽 '선양'을 받아 북주정권을 수립하고 원위(탁발위)는 멸망했다. [48]
강역
영토 범위
북위는 강역이 넓어, 주로 중국을 통제하고 있다.북방 지역, 북에서 사막과 하류까지남으로 강회리, 남으로 강회리, 동으로 바다까지서지 유사. [49]
행정 구역
북위는 주·군·현의 3급제를 실행하고 있다.주요 주는 다음과 같다.
북위의 지도집
병주, 자주, 건주, 항주, 삭주분주사주예주형주낙주, 동형주, 동예주·남연주·상주·기주·유주·평주·영주·안주·정주·정주·영주·옹주·빈주·하주·화주·태주·동태주·경주·기주·기주·연주·청주·제주·서·남청주·제주·제주·하주·량주·돈황진·무천진·어진.
정치
중앙 제도
북위가 나라를 세운 후, 그 사회는 약진하였다.봉건제에 들어가 생산력이 있다.점차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통치방식에서는 전기에 노예제의 잔재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 특히 북방통일 이전에는 계속 전쟁중에 약탈한 인구를 노비 없이 왕족과 무공자들에게 하사하여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노동을 하였다.조세는 종주독호제가 시행되는 지역의 경우 가구당 연간 호조(戶調)가 백이필, 솜이근, 견1근, 조이십석, 거기에 지방에서 징수하는 조외비용이 1필2장이다.또 임의로 임시 모집을 늘리고, 툭하면 집집마다 삼십 섬, 오십 섬의 조를 내야 한다.당시 관리들은 정식 녹봉이 없었고 횡령, 뇌물, 고리대금업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태무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대장인 공손궤는 상당(현재의 산시성 장치북)으로 가서 단마(單馬)의 교편을 잡았고, 돌아와서는 차백대에 이르렀다. [50]
탁발 통치자는 민족 기개를 추진하였다.시책. 전쟁 중에.군대에 내몰린 각 민족은 앞장섰고, 기병은 뒤에서 몰아붙였다.태평진군 12년, 태무제가 우이(盱眙, 현재 장쑤의 우이 동북부)를 포위 공격하면서, 송수에게 편지를 써서, 성을 공격한 사람은 모두 내가 선비인이 아니니, 네가 그들을 죽여 그들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북위는 다른 민족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저강, 강, 노수호 등 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에 군진을 설치하고 통치를 했다.위율(威 逆)은 반(反)대역자를 모의하여, 친족 남녀는 소장을 불문하고 전부 처형하고 심지어 원시적인 차열법까지 시행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사 사건만 해도 멸족된 북방의 한족대성이 1000여 명에 이른다. [36]
북위 전기 낙후된 통치자식은 각 민족 국민을 움직이게 한다끊임없는 반항 투쟁.이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태평진군 6년 9월 현재 산시(陝西)산시(山西) 등지에 살고 있는 한(漢)저(羌)강(羌)도( 屠)도자( 屠) 등이 노수호인 가이우( 盖)의 영도 아래 행성(行城, 지금의 산시(陵西)에서 일어난 봉기( 起义義)다.여러 소수족과 한족이 압박당하여 인민들이 앞다투어 호응하여, 봉기군은 10여만 명, 동기동관(東關), 서쪽에서 룽시( 今西, 지금의 산시, 간쑤성 접경 지역)까지 빠르게 발전하였다.1년 후, 봉기는 태무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여 실패하였으나, 각 민족들의 공동 투쟁은 민족의 융합을 촉진시켰다. [36]
지방 관리
3장제는 지방 말단 행정이다조직, 그것은 다섯 집안을 규정한다.길이를 하나 세우고 길이를 하나 들이고 길이를 하나 더 만들어서 당장을 하나 더 세우라삼장의 직책은 호적을 검사하고, 농민을 관리하며, 조세를 징발하는 것이다. [51]
삼장제가 건립된 후 대체되었다위 초의 종주 감독제북위의 말단 통치기구는 더욱 완비됐다. [51]
제도 개혁
북위 효문제는 계단을 완화하기 위하여급 모순은 힘껏 제한을 가한다.지방 호강 세력은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선비의 귀족을 더욱 봉건화하였으며, 한족의 지주와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여 각 민족을 더욱 효과적으로 공동 통치하였으며, 풍태후의 보조를 받아 일련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연흥이년(472)정치를 오래 하고, 만 1년을 책임지다.한 단계 승진하거나, 성과가 미흡한 사람은 취임 직후에도 처벌, 강등된다.
연흥5년(475)은과거 주, 군, 주를 바꾼다.현이 조세를 받으려고 다투는 혼란은 정부가 현 1급에만 징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정하고, 징수 시에는 두장, 장척, 중칭의 사용을 금지한다.
태화8년(484) 공포포록제, 신명봉봉록 이외에는 비단 천으로 된 장물을 가득 탐내어 처형한다.이듬해 시행된 균전령에는 지방수재는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일정한 양의 녹봉을 줄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공유지를 사서는 안 되며, 사직할 때 후임으로 넘겨야 한다. [52]
태화9년(485) 반포균전령을 선포한 것이 옳으냐 아니냐?같은 성별의 성인 백성과 노비, 경우 모두 상세한 수전 규정을 두었다.수전은 노전과 상전의 구별이 있다.노전에 곡물을 심으면 장사를 할 수 없으므로 일흔 살에 나라를 되찾는다.뽕나무와 느릅나무, 대추나무를 심으면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도 남는 것을 팔아 부족한 부분을 살 수 있다.토지를 환수할 때 노인, 장애인, 홀아비 모두를 적당한 수준으로 돌보아 주다. [53]
북방의 광범위한 지역은 전란으로 인해호구유배, 전원잡초가 우거져 많은 땅에는 경작하는 사람이 없다.북위 정권은 재정 수입을 늘리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균전제를 시행했다.먼저 호적을 심사하고, 다시 호구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며, 새로운 조차제를 실시한다.노비와 소는 모두 밭을 받을 수 있다.균전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지주가 된 계급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고 시행함으로써 생산 발전과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북방은 황무지가 많이 개간되고 경작기술이 향상되었으며, 농업의 발전으로 양잠, 목축, 양조 등 농촌의 부업도 발전하여 북방의 황량하고 파괴된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태화 10년(486)에삼장제가 종주독을 대신하다이웃, 리, 당의 향관 조직을 채용하여 지방의 호강과 대량의 호적을 보호하도록 억제하다.
태화 10년, 효문제 쌍대조조정 제도도 상을 진행했다새 임대차 규정은 일부일부를 징수 단위로 하여 매년 1필씩, 조 2석을 납부하도록 하였다.15세 이상의 미혼 남녀, 경작에 종사하는 노비는 8명, 경작하는 소의 매 20마리는 각각 일부일부의 수에 해당한다.
태화18년(493)효문제, 목태 제거원비와 태자손 등 옛 귀족과 보수 세력의 반대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도성을 옮겼다.
수도를 옮긴 후, 선비족이 금지하도록 감독하였다.호복을 입고, 한족 옷을 고쳐 입다.복장. 조정에서 금선비어를 하고 한화를 개변하였으며, 선비의 귀족이 낙양에서 죽은 후 평성으로 귀장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으며, 그들의 본적을 허난 낙양으로 고치고, 선비의 성을 한성으로 개칭하였으며, 선비의 귀족 문벌화하여 한족 고문과 통혼할 것을 제창하였다. [32]
태화 연간에 백관 질량을 의정하다품, 구품, 매품또한 정, 종. 종품은 북위의 으뜸이다.19년, 가문과 관작 등의 기준에 따라, 대북 이래의 선비 양반들을 성·족으로 정하였고, 성은 고(高)로 하였고, 그 중 목·육·육·하·유·루·우·혜·위팔성을 따랐다.사성(四姓)이란 중원(中原) 한족인 고문(高門) 최노이(崔)정(李)정(鄭), 한족(漢族) 갑(甲)을(乙)병(兵)정(丁)의 네 가지 군(軍) 성(姓)이라고 하는데 후자가 맞는 것 같다.반정성족은 선비 귀족과 한사족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54]
효문제는 북방 사회를 개혁하였다경제가 뚜렷하게 발전되었다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고 상업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북방 소수민족의 봉건화를 가속화해 북위 사회 정치생활은 물론 중국 역사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가장 큰 영향은 민족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시켰고, 오랜 분단국면을 종식시키고 국가통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55]
자귀모사
북위의 궁정은 외세를 피하기 위하여.척은 도무제에서 정치에 관여하였다.탁발규는 후궁 여성이 사내아이를 낳아 세자로 세우면 반드시 사사(死死)하도록 하는 무자비한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를 시행했다.많은 사람이 황자를 낳으면 곧 죽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하지만 어린 아들은 여전히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소위 보태후(保太後), 즉 가정부로서 태자신군(太君)의 계위를 보살피고 태후(太後)로 봉직되었다.북위에는 황태후 3종류 중 하나는 황제의 생모, 다른 하나는 황제의 가정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임 황제 때 운 좋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살아남은 황후가 있다.선무제 원각(宣武帝元閣)이 재위할 때 선무제는 태자 원예의 어머니 호태(胡太)를 죽이지 않아 사실상 자귀모사 제도는 이미 종결되었다. [56-58]
경제
서진 말기, 탁발부의 수령.탁발아노 피서진더 나아가 왕을 대신하여 봉하다.동진함강 4년(338), 탁발시익건( 拓跋時 即 王位 王位)은 왕위를 대신하여 벼슬을 나누어 형법을 제정하는 등 국가기관이 갖추어졌다.탁발부는 이미 노예주가 점유하고 있는 계급사회로 들어갔다.탁발부는 북위를 건국한 후, 점차 봉건사회로 들어갔다. [36]
태화오수
태화오수
중국 북방은 서진영가지에서 유래하였다.난(310) 이후16개국 전쟁의 참화로 백성들이 병혁(兵革)으로 죽고 기근( 。 。)에 죽었으며, 인구의 50%가 채 안 되는 중원(中原) 지역은 몰락했다.북위 왕조의 한 반세기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 생산력은 점차 회복되고 발전했다.북위는 북방을 통일한 뒤 오랜 기간 각 민족이 함께 일하면서 생산관계가 조정되고 생산도 눈에 띄게 발전했다.특히 효문제 개혁 이후 자작농이 현저히 증가하였는데, 효명제 정광 이전에는 전국의 가구수가 이미 500여만 명에 달하여 서진태강 연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농업과 수공업 모두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북위 후기의 백성은 부유하여, 해마다 풍속에 올라 먹고 입는 것이 변변치 못하여, 먹을 것이 변변치 못하다고 한다.수공업 방면에서, 북위 후기 제강 기술은 새로운 성과를 거두었고, 상주 견구(相州 牵, 현재 하남 안양에서)는 야제하여 예기를 갖추었다.이익의 강철 칼. 상업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효문제 때 원숙은 하동태수가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장사를 하였다.태화 이전에는 북쪽의 상업은 거의 휴지 상태에 있었으며, 돈과 재물은 어디에 흘러들 것인가.상업의 발전에 따라 화폐는 유통을 회복하고, 태화 19년 후에는 다시 태화오수돈을 주조하여 이 돈은 경사와 전국의 여러 주진에서도 통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선무제 때 낙양의 상업이 상당히 번성하여 국제적인 상업 대도시가 되었다. [36]
농업과 수공업
효문제는 제도를 바꾼 후, 즉위하였다.장교호, 정부통제편자가 증가하였다. 효명제신구연간에 호구수는 서진태강원년도에 비해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대략 오백만여가구, 삼천여만구이다. [59]
관리의 개선, 부담의 논조정, 농민은 종사할 수 있다.생산, 농업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발전한다.이후 풍뎅이 말년까지 정치가 부패하고 계급 갈등이 첨예해졌지만 관청의 곳간은 알차게 차 있었다. [59]
북위의 목축업은 원래부터 매우 대단했다발달. 효문제 시대하남성에 또 목양을 베풀어 군마를 십만 필 길렀다.마치 치후르 주영의 아버지인 알주신흥에는 '알파카, 색다름, 곡경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59]
수공업도 진보했다.견포 생산량이 증가하다, 견포 생산량이 증가하다.가격이 내렸다. 위 초에는 한 필에 천 위, 효문제는 이삼백 위까지 내렸다.기름 짜기, 술 빚기, 제지, 소금 삶기, 제철 등도 발전했다. [59]
상업
북위 후기에는 상업도 하나 있다일정한 발전. 큰 도시.시에는 낙양, 업, 장안이 있다. [60]
낙양은 북방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무역센터이기도 하다.낙양서양문 밖에는 큰 시장이 있고 주변은 8리이다."시 동쪽에는 통상, 달화 2리가 있다.집안 사람들은 모두 도살상인으로 살아가 자재가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60]
당시 장사하는 사람은 열사를 제외하고장사꾼과 큰 장사꾼은많은 귀족관료들도 장사에 종사한다.북방 귀족들은 대부분 '남화'를 좋아했고, 관청은 남경에 서로 시를 지어 남조와 교역했다.그러나 사적인 거래를 금지하고, 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와이화이 시(市)'로 인해 치죄(治 。 。)되었다. [60]
효문제는 개조된 후에 다섯 수를 주조하였다돈, 그러나 적지 않은 지역은 그대로다."돈은 약간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60]
균전제
북 위는 초기 대북에서 행해졌다계구수용전485년(태화 9년)에 북위 정부는 과거에 준전령을 공포하였다.균전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균전제
균전제
십오 세 이상 노출된 남자곡식만 40무, 부인은 20무.윤종을 위하여 노전을 갑절 혹은 두 배로 수여하다.노전은 장사를 해서는 안 되며, 늙으면 수업을 면제받고 죽으면 낙향한다.
남자는 뽕밭마다 20무씩 주고,세업으로서는 한평생 갚지 않는다.20무의 뽕나무밭에는 반드시 규정에 따라 일정 수량의 뽕나무, 느릅나무, 대추나무를 심어야 한다.처음 밭을 받았을 때, 원래 뽕밭이 없었던 사람은 뽕밭으로 만들고, 원래 뽕밭이 부족했던 사람은 뽕밭으로 만들어 채웠다.남는 것은 배전(培田)으로 돌리고, 더 많은 것은 노전( 。田)으로 돌려주지 않는다.인구가 증감하면서 남는 부분은 팔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은 살 수 있지만, 매상은 벌어야 할 액수를 넘어서는 안 된다.뽕나무 고향이 아닌 곳에서는 마전에게 남자 열 무와 여자 다섯 무를 주었는데 이는 노전같이 받으니라
노비는 토지를 수용하여 양인과 같다.밭갈이 소 한 마리는 밭이 30무이니, 4무에 한한다.의노와 소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토지가 넓고 백성이 희귀한 곳에서는 힘써 경작한다.토착민들은 토착민들이 걸쭉한 곳에서는 농지를 받아야 하고, 전출을 꺼리는 사람에게는 뽕나무 밭으로, 노답 수에 부족한 사람에게는 배전을 주지 않으며, 가족들 밭에서 감량하여 나누어 줄 수도 없다.이사하려는 사람은 공황에 맡긴다.땅도 부역을 피할 수 없느니라
관리가 공전을 준 격으로 15경을 찌르다.태수십경, 치중별거팔경, 현령군승육경.이직 시 하임이 인계되어 전매할 수 없다.
참고 자료출처:[61]]
과세제도
효문제 개혁 이전에 북위의 세금은 부족인 공납과 목축민의 축산과 일반 농민의 조세를 위주로 하였는데, [62] 그중 농민의 조세를 최대 수입으로 하였다.북위는 호조백 2필, 솜 2근, 견 1근, 조 20석, 또 비백 1필 2장, 위지주고(威之州庫)를 차출해 그 밖의 비용을 대도록 했다. [63]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정부가 필요할 때 징수하는 물건의 종류와 수를 늘릴 수 있습니다.조세는 가구별로 받는 것으로, 가구 크기에 제한이 없고 효문제 개혁 전에는 30~40가구가 한 가구로 구성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이 같은 일반적 세수 외에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는 일이 잦고, 관리들도 관록이 없어 각종 구실을 대며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부역의 경우 병역은 선비인이 하기 때문에 병역은 경하다.역전의 정황은 사료(史料)가 부족해 알 수 없다.정부를 위해 일하는 노동잡역사가 많다는 것만 안다.이들은 예하, 군호, 영호, 부호, 능라호, 악호 등으로 편제돼 있다.
효문제는 개혁 후 관료기구에 녹봉을 제공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을 감소시켰다.세율을 올려 위효문제는 각 가구에 비단 세 필, 곡이 두 곡구 말을 증조하여 백관록에 충원하도록 하였다. [64] 또 태화9년(485)에 균전제(平田制)를 시행하였는데, 그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1.
15세 이상의 남자와 여자는 모두 논밭을 주고, 남자는 논밭 40무, 여자는 20무의 토지를 양도하며, 논밭의 정기휴가를 두 배로 하거나 다시 두 배로 해야 한다.만약 소 한 마리가 있으면 30무의 밭에 최대 4마리의 소를 주고, 많은 것은 논에 주지 않는다.노소가 병폐하거나 남자 정원이 없는 가정에서는 11세 이상, 가진 자에게는 모두 반부의 밭을 준다.노비처럼 남자와 여자의 표준에 따라 밭을 교배시키다.전답은 장사할 수 없다. 연로하거나 죽으면 환원할 수 없다. 그러나 칠십이상의 전답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
2.
남자가 뽕나무밭 20무를 주다.뽕밭은 국가에 돌려줄 필요 없이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있고, 20무 이상 팔 수도 있고, 20무 이상을 살 수도 있다.삼밭의 남자는 10무의 마전을 주고, 부인은 50무의 토지를 공급하며, 나이가 들어 몸이 죽은 후에 밭으로 돌아왔다.
3.
여분의 땅은 농민에게 빌려서 경작할 수 있고, 정부는 농민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하며, 단지 빈 황무지로 가는 것만 허용한다.
4.
주재지 장관에게는 공전(公田)을 주고, 15경을 지키며, 10경은 태수(太守)하며, 치중별(治中別 。八京), 현령군승(縣令)6경은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또 준전(準田)제에서 일부일처가 내야 할 전세를 '기민조(基民調) 일부일부(一夫一女)는 백(白) 한 필, 조(粟)는 두 섬이다.백성이 열다섯 살 이상 장가들지 않은 자는 네 사람이 일부일부조를 내고, 노비가 농사를 지으며, 여비가 직책을 맡은 자는 여덟 식구를 미취자로 삼고, 소를 갈고 스무 마리를 노비로 삼는다.삼베의 고장에서는 일부일부가 천 한 필을 놓고 소를 내려서 항복한다"고 말했다. [63]
문화
중화 운동
효문제 때 일련의 조치를 취해 중화운동을 하였다.
금북어. 선비인은 원래 본족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북위군중에도 선비어를 쓴다.조정에서는 신선과 한어를 혼용하였다.효문제는 천도 이듬해 6월 북속의 말로 조정에 말하지 말고 위반하면 거처를 면하라고 조서를 내렸다.구체적인 실행에 있어서는 30세 이상의 사람이 단번에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아직 강요하지 않으며, 30세 이하의 경우에는 조정에서 중국어를 사용해야 한다. [32]
호복을 입어서는 안됩니다. 선비의 옛 풍습은 머리를 왼쪽으로 잠그고 있고, 부인은 갓 쓰고 깃과 소매와 짧은 옷을 입었다.천도한 해에는 호복을 금하고 복장을 한의제(一意漢制에 의한다. [32]
성을 바꾸다.성씨는 한나라 사람과 달리 민족의 차이를 나타내며, 후나라와 한나라의 귀족들의 합작에 영향을 준다. [32]
이에 따라 천도 3년 만에 효문제는 선비의 복성을 탁발씨 원씨, 독고씨 유씨, 보육고씨 육씨, 구목릉씨 목씨 등 단음한성으로 바꾸라고 명했다. [32]
문학
문학적 측면에서 북조 민가는 북방 민족 대융합의 특징을 잘 나타내며, 품격이 강건하고, 언어가 질박하고, 감정이 진지하다.칙륵가, 수양버들송, 목란시가 그 대표적인 민요였다.양현의 낙양가람기는 지리적 명작이자 문학작품인 동시에 불교저술로 북위이천도 낙양의 40년 불교사료를 제공했다.《수경주》는 문학적으로도 글이 아름다운 여행기라 할 수 있다. [36]
조소
조각예술은 당시의 석굴사에 집중되어 있다.진한 이래 중국의 예술전통을 이어받아 해외, 특히 고대 인도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마애석굴은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서기금감숙, 동기금랴오닝, 현재까지 랴오닝성,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는 대동운강석굴, 하남 낙양용문석굴, 감숙돈황석굴, 감숙천천수의 맥적산석굴, 영정 병령사석굴, 산서태원의 천룡산만불동, 하남공현의 석굴사 등이 있다.이들 석굴사에는 고대 예술 장인들이 만들어낸 수만 개의 불상이 있어 당시 중국 조각예술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며 지금도 세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36]
종교
운강석굴
운강석굴
북위는 유목부락연합을 거쳐 나라로 급속히 이동하는 역사를 겪었고, 탁발선비인들은 글도 없이 자신만의 언어가 있었다.북위시대의 주요 종교는 불교, 도교, 조로아스터교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불교인데, 승니의 수가 이백만이 넘기도 했습니다.북위 도교는 주로 코첸의 개량을 거친 천사도이다.당시 불교계에서는 태무제(太武帝) 탁발도( 拓跋道)가 불교를 대거 멸망시킨 불도 양가의 투쟁이 치열했다.조로아스터교는 중국에서 현화교나 배화교, 주신은 후톈(胡天)으로 불리며 주로 입화(入華)하는 속특인들 사이에서 전파된다.문성제는 평성에 운강석굴을 팠다. [65-66]
북위는 대부분 국가와 개인 협찬으로 불교 예술이 성행했다.운강불교석굴은 약 460년에 지어진 것으로 천여 명의 장인들이 약 35년 만에 완공한 것으로 동굴 안에는 조각과 그림이 있다.그 후, 북위 효문제(孝文帝)도 용문에 석굴을 건설하였다. [67] 운강석굴의 불상은 비교적 정적인 모카빈 스타일에 속하며, 용문 형식은 유선상으로 찰랑찰랑거리면서 중국풍의 영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북위의 부장토기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프론탈리티(frontality)와 대칭을 강조한다.이와 함께 둔황에 있는 모고굴은 북위시대인 제243석굴 북위시대의 석가모니상처럼 둥글고 납작한 머리 모양에 인도 가사를 얹은 채 앉아 있다. [68]
군사
북위의 병과 민이 따로 떨어져 있는[69] 병과가 싸움에 사용하고, 백성이 뽕나무를 경작한다[70].반면 병사는 주로 선비와 기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며, 농업은 주로 한인들이 종사한다.병민의 구분은 곧 호한의 구분이며, 호한의 분치가 구현한 것이다.
병사도 그중 하나는 선비병, 다른 하나는 비선비병이다.
북위의 금려병력과 변방인 육진의 병사로 북위의 선비자로 구성된 선비병이다.이런 병대는 귀족적인 성격으로 지위가 상당히 높다[71]. 그러나 위문제의 한화가 있은 후 달라졌다.
비선비병 중에는 이고차병이 가장 중요하고, 금군과 육진 변병 모두 고차인이 있다.소수민족과 한인 군대도 일부 있다.
외교
태안 원년(455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는 내화를 보냈다.이후 서위까지 메신저의 왕래가 이어졌다. [72]
우호 왕래를 통해 대진 등의 석면포수은유리약재한혈마 등을 중국에 수입했다.중국은 비단, 동기 등을 대진, 페르시아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6세기 말 중국의 양잠술은 페르시아를 통해 대진에도 전해졌다. [72]
인구
북위 효명제신구연년(518년~520년) 호구통계는 약 500만호[73]로 집계되었으며, 가구 수 6인 가구 약 3,000만명은 북위 북쪽 군진(軍鎭)의 부호, 농관관리하의 민둔호, 국유목장의 목호, 승니 및 사찰의 부호 및 관부(官府)를 위해 봉역한 잡호, 기작호, 낙호, 미가, 미납호, 미가, 미가 등등을 고려하여 학자들이 고려하였다.
과학
농학
북위의 말년에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76]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농서이다.《제민요술》은 6세기 이전의 황하 중하류 지역의 농목업 생산 경험, 식품의 가공과 저장, 야생 식물의 이용 등을 체계적으로 총결산하여 중국 고대 농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36] 가사협, 익도(지금의 산둥) 사람고양군(지금의 산동 임치) 태수(太守) 등 벼슬을 지내며 농업 생산을 중시했다.중년 이후 농목업을 하며 농업생산노동과 방목활동에 직접 나서 농업생산에 대한 체험을 하고 다양한 농업생산기술을 익혔다.북위영희 2년(533년)부터 동위무정 2년(554년)까지 농업과학기술 거장이라고 썼다.《제민요술》을 쓰다. [77]
《제민요술(齊民要術)》은 전 10권으로 총 92편으로, 북위 농업 생산 지식의 집대성(集主成)이 된 진(秦)에서 북위까지이다.이 책에는 토양 정비, 비료 시용, 경작 세공, 가뭄 방지 토양의 습도 확보, 품종 선택, 식량과 채소 재배, 과수 재배와 접목, 가축의 사육과 치료, 식품의 가공과 저장, 그리고 야생 식물의 이용 등 매우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중국 북방의 농업 생산 기술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그중 많은 기술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77]
지리
북위에는 수경(水經)을 기강으로 하여 지리적 명작인 《수경주(水經柱)》를 쓴 산문가 역도원(郦道元)이 등장한다.《수경주》는 전서 30여만 자, 전서 40권이다.중국 전역의 1250여 개 하천을 비롯해 군(郡)도시(市)물산(物産)풍속전설(傳說)역사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비석에 새긴 묵적과 어가 민요도 적지 않게 기록돼 있다.《수경주(水經 长期)》는 중국의 오랜 역사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명청 이후 많은 학자들이 여러 방면에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광범위한 '역학'을 형성하였다.
《수경주》는 문필이 우람하고 아름다우며, 고대 지리 명작이자 산수 문학의 우수한 작품이며, 문학적 가치가 있는 지리 저작이다.역도원(郦道元), 자는 선장(善長), 범양탁록( 。 鹿)은 서기 468년 또는 서기 472년에 태어났다.역사서서에 따르면 역기는 원래 엄하기로 유명하다.그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며, 강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권세 있는 인물들이 그를 증오한다.이 때문에 그는 음해당해 죽었다. [79]
皇帝世系编辑
追尊先祖庙号谥号姓名生卒年月在位时间
传说时期、拓跋部的史前时期 | ||||
成皇帝 | 拓跋毛 | ? | ||
节皇帝 | 拓跋贷 | ? | ||
庄皇帝 | 拓跋观 | ? | ||
明皇帝 | 拓跋楼 | ? | ||
安皇帝 | 拓跋越 | ? | ||
宣皇帝 | 拓跋推寅 | ? | ||
景皇帝 | 拓跋利 | ? | ||
元皇帝 | 拓跋俟 | ? | ||
和皇帝 | 拓跋肆 | ? | ||
定皇帝 | 拓跋机 | ? | ||
僖皇帝 | 拓跋盖 | ? | ||
威皇帝 | 拓跋侩 | ? | ||
献皇帝 | 拓跋邻 | ?—213年 | ||
圣武皇帝 | 拓跋诘汾 | 213年—220年 | ||
代王时期 | ||||
始祖 太祖 (元宝炬改) | 神元皇帝 | 拓跋力微 | 174年-277年 | 220年-277年 |
文皇帝 | 拓跋沙漠汗 | ?-277年 | (追尊) | |
章皇帝 | 拓跋悉鹿 | ?-286年 | 277年-286年 | |
平皇帝 | 拓跋绰 | ?-293年 | 286年-293年 | |
思皇帝 | 拓跋弗 | ?-294年 | 293年-294年 | |
昭皇帝 | 拓跋禄官 | ?-307年 | 294年-307年 | |
桓皇帝 | 拓跋猗迤 | ?-305年 | (追尊) | |
穆皇帝 | 拓跋猗卢 | ?-316年 | 307年-316年 | |
文平皇帝 | 拓跋普根 | ?-316年 | 316年(40多天) | |
哀皇帝 | 拓跋始生 | 316年-316年 | 316年 | |
太祖 | 平文皇帝 | 拓跋郁律 | ?-321年 | 316年-321年 |
惠皇帝 | 拓跋贺傉 | ?-325年 | 321年-325年 | |
炀皇帝 | 拓跋纥那 | 325年-329年 | ||
烈皇帝 | 拓跋翳槐 | ?-338年 | 329年-335年 | |
炀皇帝 | 拓跋纥那 | 335年-337年 | ||
烈皇帝 | 拓跋翳槐 | ?-338年 | 337年-338年 | |
高祖 | 昭成皇帝 | 拓跋什翼犍 | 320年-376年 | 建国338年-376年 |
献明皇帝 | 拓跋寔 | ?-371年 | (拓跋珪追尊) |
皇帝列表
庙号 | 谥号 | 姓名 | 生卒年 | 年号及使用时间 | 陵墓 | |
烈祖 太祖 (元宏改庙) | 宣武皇帝 道武皇帝 (拓跋嗣改谥) | 拓跋珪 (什翼珪) | 371年-409年 | 登国386年-396年 | 盛乐金陵 | |
皇始396年-398年 | ||||||
天兴398年-404年 | ||||||
天赐404年-409年 | ||||||
太宗 | 明元皇帝 | 拓跋嗣 (木末) | 392年-423年 | 永兴409年-413年 | 云中金陵 | |
神瑞414年-416年 | ||||||
泰常416年-423年 | ||||||
世祖 | 太武皇帝 | 拓跋焘 (佛狸伐) | 408年-452年 | 始光424年-428年 | 云中金陵 | |
神麚428年-431年 | ||||||
延和432年-434年 | ||||||
太延435年-440年 | ||||||
太平真君440年-451年 | ||||||
正平451年-452年 | ||||||
- | 南安隐王 | 拓跋余 (可博真) | ?-452年 | 承平或永平452年(232天) | - | |
恭宗 | 景穆皇帝 | 拓跋晃 (天真) | 428年-451年 | (拓跋濬追尊) | 云中金陵 | |
高宗 | 文成皇帝 | 拓跋濬 (乌雷) | 440年-465年 | 兴安452年-454年 | 云中金陵 | |
兴光454年-455年 | ||||||
太安455年-459年 | ||||||
和平459年-465年 | ||||||
显祖 | 献文皇帝 | 拓跋弘 (第豆胤) | 454年-476年 | 天安466年-467年 | 云中金陵 | |
皇兴467年-471年 | ||||||
高祖 | 孝文皇帝 | 元宏 (拓跋宏) | 467年-499年 | 延兴471年-476年 | 长陵 | |
承明476年 | ||||||
太和477年-499年 | ||||||
世宗 | 宣武皇帝 | 元恪 | 483年-515年 | 景明500年-503年 | 景陵 | |
正始504年-508年 | ||||||
永平508年-512年 | ||||||
延昌512年-515年 | ||||||
- | 文景皇帝 (元宝炬谥) | 元愉 | 488年-508年 | 建平508年(37天) | - | |
肃宗 | 孝明皇帝 | 元诩 | 510年-528年 | 熙平516年-518年 | 定陵 | |
神龟518年-520年 | ||||||
正光520年-525年 | ||||||
孝昌525年-527年 | ||||||
武泰528年 | ||||||
- | - | 元法僧 | 454—536 | 天启525年(71天) | - | |
- | - | 元姑娘 | 528-? | 武泰528年(1天) | - | |
- | - | 元钊 | 526年-528年 | 武泰528年(43天) | - | |
肃祖 | 文穆皇帝 | 元勰 | 473年-508年 | (元子攸追尊) | - | |
- | 孝宣皇帝 | 元劭 | ?-528年 | (元子攸追尊) | - | |
敬宗 | 武怀皇帝 孝庄皇帝 (元修改谥) | 元子攸 | 507年-530年 | 武泰528年 | 静陵 | |
建义528年 | ||||||
永安528年-530年 | ||||||
- | - | 元颢 | ?-529年 | 孝基529年4月-5月 | - | |
建武529年5月-6月 | - | |||||
- | - | 元晔 | ?-532 | 建明530年-531年(117天) | - | |
- | 节闵皇帝 (元宝炬谥) | 元恭 | 498年-532年 | 普泰531年-532年 | - | |
- | - | 元朗 | 513年-532年 | 中兴531年-532年(165天) | - | |
- | 武穆皇帝 | 元怀 | ?-517年 | (元脩追尊) | - | |
- | 孝武皇帝 (元宝炬谥) 出皇帝 (元善见谥) | 元修 | 510年-535年 | 太昌532年 | 云陵 | |
永兴532年 | ||||||
永熙532年-534年 | ||||||
注1:女帝是傀儡,也没有举行即位典礼,基本不为史家承认。 注2:圣武帝之前的帝王缺少记载,有些史家认为是后来添加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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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
北魏(386年~534年),是鲜卑族拓跋珪建立的政权,也是南北朝时期北朝第一个王朝。 [1]
386年拓跋珪趁前秦四分五裂之际在牛川自称代王,重建代国,定都盛乐(今内蒙古自治区和林格尔县)。同年四月,改称魏王。398年六月,正式定国号为“魏” [2] ,史称“北魏”。398年七月,道武帝拓跋珪迁都平城(今山西省大同市),称帝。439年,太武帝拓跋焘统一北方。493年孝文帝拓跋宏迁都洛阳,大举改革。
永熙三年(534年),分裂为东魏与西魏。东魏武定八年(550年),高洋接受孝静帝禅让,建立北齐。 [3] 西魏恭帝三年(557年)禅位于宇文觉,北周建立,元魏(拓跋魏)宣告结束。 [4] 从386年拓跋珪重建代国至534年分裂为止,共历20帝(列入正史本纪者12位),享国148年。
北魏时期,佛教兴起,佛教得到空前发展,迁都洛阳和移风易俗促进了北魏的中央集权制度与民族融合。
因“魏”字具有美好伟大之意并且是“神州上国”之名而定为国号 [5] ,为别于此前的曹魏政权,某些史书因此别称为“后魏”。又以其皇室姓拓跋,后改姓元,故又别称拓跋魏、元魏。
中文名魏 外文名The Northern Wei Dynasty 别 名代、代国、北魏、后魏、元魏、拓跋魏、魏朝、魏国 时间范围386年 至 534年 首 都盛乐(386-398)、平城(398-493)、洛阳(493-534) 主要城市盛乐、平城、洛阳、长安、邺城、姑臧、许昌、龙城 官方语言中古汉语(洛阳雅言) 货 币太和五铢、永安五铢 政治体制君主专制政体 人口数量0.35 亿 主要民族汉族、鲜卑族 主要宗教道教、佛教 国土面积2000000 km² 开创者拓拔珪
目录
1 国号
2 历史
▪ 建国前身
▪ 立国之初
▪ 南北对峙
▪ 汉化改革
▪ 走向衰落
▪ 六镇之乱
▪ 河阴之变
▪ 两魏分裂
3 疆域
▪ 领土范围
▪ 行政区划
4 政治
▪ 中央制度
▪ 地方管理
▪ 制度改革
▪ 子贵母死
5 经济
▪ 农业和手工业
▪ 商业
▪ 均田制
▪ 赋税制度
6 文化
▪ 汉化运动
▪ 文学
▪ 雕塑
▪ 宗教
7 军事
8 外交
9 人口
10 科学
▪ 农学
▪ 地理
11 皇帝世系
国号
北魏国号本是“魏”,“魏”字前加方位“北”字,称呼“北魏”,乃指北部“中国”之故,同时也区别于三国的曹魏政权。 [1] 北魏还有后魏 [6] 和拓跋魏 [7] 、元魏 [8] 的称呼。因北魏皇族出身的拓跋部有辫发的习俗,所以被南朝蔑称为索头虏,简称索虏,或称魏虏。
据历史学家田余庆考证,拓跋珪最初改称代王,不久改号魏王,可能跟他与慕容永争夺属于魏地的河东地区有关,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 [9] 398年正式定国号为“魏”,取其美好伟大之意,并含有向江左东晋夸示自己是“神州正统”的意图,尽管如此,在孝文帝之前仍有相当多的人私下使用“代”为国号。 [10]
历史
建国前身
鲜卑族拓跋部原来居住于今黑龙江、嫩江流域大兴安岭附近,过着游牧生活。东汉以前,北匈奴被打败西迁后,拓跋部在部落首领拓跋诘汾的率领下,也逐步向西迁移,进入原来北匈奴驻地,即漠北地区。
拓跋部起源地——嘎仙洞
拓跋部起源地——嘎仙洞
到拓跋力微时期,拓跋部又南下游牧于云中(今内蒙古自治区托克托县)一带,后又迁居到盛乐(今内蒙古自治区和林格尔县),与曹魏、西晋发生往来,但这时拓跋部仍处于氏族部落联盟阶段。 [11]
315年,拓跋力微之孙拓跋猗卢因帮助西晋并州刺史刘琨与匈奴族刘聪、羯族石勒相对抗有功,被西晋封为代公,进而封为代王。338年,拓跋什翼犍建立代国,都于盛乐,迈入奴隶主占有制的阶级社会,逐渐强大起来。
376年,前秦天王苻坚攻代,拓跋什翼犍战败,不久被其子拓跋寔君所杀,前秦又来攻代,代国灭亡。 [12]
立国之初
在淝水之战后,前秦瓦解,以前为苻坚征服的各族纷纷独立,建立自己的王国。386年,拓跋什翼犍之孙拓跋珪(guī)纠合旧部,在牛川(今内蒙古自治区兴和县西北东洋河南)召开部落大会,即代王位,正式恢复了代国。 即位不久,因牛川偏远,便迁都盛乐。同年四月,改国号为魏,自称魏王。 [13]
鲜卑族所居的地区,原是匈奴故地。匈奴族大部分西迁和南移,但不是所有的匈奴人都西迁和南移了,还有一部分留在原地,鲜卑族来了以后,就与这一部分没有迁移的匈奴人融合起来,建立起部落联盟关系,把匈奴部落编入鲜卑部落联盟内,并以婚姻为纽带加强两族的关系。在氏族部落时代,通过征服是仍然可以建立部落联盟关系的。自然在这个联盟中,征服族和被征服族的地位不一定是完全平等的。 [14]
苻坚进攻什翼犍时,铁弗部首长刘卫辰曾与苻坚合作,向什翼犍进攻。什翼犍失败后,刘卫辰和另一铁弗族首长刘库仁两部强大起来。苻坚使他们以黄河为界,分别占有拓跋氏的故地,刘卫辰部居西,刘库仁部居东。 [14] 刘卫辰、刘库仁都出自南匈奴。因汉与匈奴和亲,以宗女嫁匈奴单于,故匈奴人多冒姓刘。这两部匈奴又都与拓跋鲜卑联姻。刘库仁母是拓跋郁律(平文帝)之女。什翼犍以宗女嫁给刘库仁,把女儿嫁给刘卫辰。 [14]
拓跋珪要复兴拓跋氏,首先就要与匈奴的刘显(刘库仁之子)、刘卫辰两个部落争夺部落联盟的领导权。刘显在拓跋珪即位前就谋害拓跋珪,拓跋珪即位后不久,刘显派兵护送什翼犍的少子拓跋窟咄和拓跋珪争国。拓跋氏原有立少子的习俗,窟咄之来,对拓跋珪构成很大威胁。诸部落都有动摇,引起骚动,拓跋珪的左右也阴谋活捉拓跋珪以响应拓跋窟咄。拓跋珪畏惧,北逾阴山,依于贺兰部,派人向慕容垂求救。慕容垂派慕容麟领兵救拓跋珪,大败窟咄,窟咄投奔刘卫辰,被其杀死,部众归拓跋珪所有;翌年(387年)拓跋珪在马邑弥泽大破刘显,刘显部落最后被慕容垂消灭。拓跋珪也和刘卫辰展开了斗争,最后卫辰失败被杀,其子赫连勃勃率残部南逃依附后秦姚兴。于是黄河以南诸部皆平,拓跋珪虏获畜产名马三十余万匹,牛羊四百余万头。 [14]
拓跋珪恢复了鲜卑拓跋氏的部落联盟领导地位后,开始向南北发展。这时期,在拓跋氏北面的是文化上更为落后的高车族和柔然族,在南面的是鲜卑慕容垂所建立的后燕。登国四年(389年),拓跋珪击败了高车族。高车是游牧部落,是善战的骑兵。对高车族的征服,增强了拓跋氏的战斗能力。 [14]
南北对峙
参见:北魏统一北方之战
●
征服后燕
统一北方
统一北方
北魏统一北方的战争,是在五胡十六国之时诸侯纷争条件下进行的。它虽然面临诸多对手,情况复杂多变,但能审势度势,确定先后打击的目标,采取灵活机动的战略战术,达到各个击破的目的。 [15]
北魏登国十年(后燕建兴十年,395),后燕攻北魏,拓跋珪面对后燕军的进攻,针对其恃强轻敌,采取示弱远避、待疲而击的方针,同时注重瓦解对方军心,奋勇追击,在参合陂(今内蒙古自治区凉城市)决战中歼灭四五万燕军。从此改变了两国力量对比,北魏势力进入中原。 [16]
登国十一年(396),拓跋珪乘胜进击,亲率40余万大军南下进攻后燕,拓跋珪率大军出马邑,克晋阳,取并州,东下井陉关,收降后燕将领李先,封其为征东左长使。继而长驱直入,直抵滹沱,在常山城(今石家庄市郊区东古城一带)下安营布垒,准备一举克城。当时,后燕常山太守苟延率众守城。拓跋珪劝降不成,便令将士大举攻城。苟延仓惶应战,但因他不甚懂兵法,指挥无方,加之双方力量悬殊,燕军死伤惨重,北魏军队破城而入,擒俘苟延。继之,魏军连占数十县。只有中山、邺(今河南省安阳市北至河北省临漳县南)、信都(今河北省冀州市)三城仍为燕军控制。十一月,魏王珪集结大批兵力攻打燕都中山。同时,命东平公拓跋议率兵五万攻邺城,命冠军将军王建、左将军李栗攻信都,准备一举灭燕。
后燕高阳王慕容隆守中山南门,率众力战,打退魏军的轮番进攻。魏军伤亡惨重。拓跋珪看中山城坚固森严,于是引兵向南,以优势兵力很快攻下信都。继之,兵临邺城,几次强攻不克,魏军营垒反遭慕容青的夜袭,拓跋珪只好暂时率军退驻杨城。此时,魏国并州监军丑提闻其叔父没根降燕,便督率所部人马杀回魏国都城作乱。拓跋珪闻知,准备撤兵北还,平息内乱。但又恐燕军穷追,腹背受敌。
于是,派国相涉延与后燕议和,并愿以其弟为人质留于燕。燕主慕容宝闻魏国内部有难而不许。同时,发步兵12万、骑兵3.7万屯于滹沱河北岸的柏肆坞(今藁城县),邀拓跋珪在此决战。拓跋珪求和不成,愤而应战。数日内统兵北上,在滹沱河南岸安营扎寨。慕容宝趁魏军立足未稳,遣精兵万余人夜袭魏营,企图先发制人。燕军过河之后,潜至魏营,利用北风纵火烧营,并发起猛攻。魏军营垒纷纷起火,兵将大乱。此时,拓跋珪正在睡觉,忽听军营大乱,慌忙弃营赤脚逃走。燕将乞特真率百余人飞马赶到拓跋珪大帐内,只见拓跋珪丢弃的衣靴,不见其人。拓跋珪逃出军营之后,立刻击鼓收众。 [17]
夜幕之下,乞特真闻鼓声以为中计慌忙鸣金收兵。燕兵闻锣鼓齐鸣,不知其故,以为遭到魏军伏击,顿时惊惶大乱,自相践踏,互相砍射。拓跋珪立即将全军集合起来,下令步兵在营外点燃火炬,骑兵向燕军猛冲猛杀。燕军四面受敌,又遭到魏军骑兵的轮番攻击,死伤惨重,乱作一团,燕将高长被俘。慕容宝只得收拾残兵,渡河北逃。魏军士气高涨,在拓跋珪的统领下穷追不舍。当时,正是风雪交加的夜晚,燕军士兵涉水渡河,加之多带伤残,冻死者尸体相枕。丢弃袍仗、兵器无数。慕容宝为保住性命,弃下大军,率步骑两万逃回中山。魏军连夜追击,兵临中山城下。后燕尚书郎慕容皓谋杀慕容宝未遂。斩关出城降魏。慕容宝见中山难保,便率一万骑兵杀出重围,逃奔龙城(今辽宁朝阳市)。繁华一时的后燕国都中山,终于在皇始二年(397)十月甲申日被魏军占领。
攻打南朝
参见:北魏攻宋河南之战
天兴元年(398),拓跋珪迁都平城(今山西大同),正式称帝。拓跋珪击败后燕进入中原后,鼓励农业生产,其奴隶主贵族也逐渐汉化转化为封建地主。拓跋珪招纳汉族大地主参加统治集团,加快了鲜卑拓跋部的汉化进程。 [18]
此后数年,北魏注重于巩固内部及既得地域,也时而与北部的柔然和关中的后秦交战。如北魏天兴五年(后秦弘始四年,402年),北魏大军以围城打援、分而歼之的战法,于柴壁(今山西襄汾西南)大败后秦军,歼灭3万余人。 [16]
永兴元年(409),拓跋珪被杀,其子拓跋嗣继位,史称明元帝。泰常七年(宋永初三年,422年),魏明元帝乘宋武帝刘裕病卒之机,凭借强大军力,沿黄河流域全面开战,重点进攻,夺取黄河以南虎牢(今荥阳西北)、洛阳、滑台(今滑县东)等军事重镇。由于南朝宋军善于守城,顽强抵抗,也使魏军付出了重大的伤亡代价。 [16]
泰常八年(423),拓跋嗣卒,太子拓跋焘继位,史称魏太武帝。此时,北方除大夏、北凉、西秦、北燕和柔然外,皆为北魏所占。拓跋焘雄才大略,通晓兵法,在历次战争中,常亲自率军出征,临阵勇猛,多获胜利。 [16]
●
大败夏国
参见:北魏攻夏统万城之战
魏始光三年(夏承光二年,426)至四年,拓跋焘趁夏王赫连勃勃薨,诸子相残杀之机,二次率军进攻夏都统万城(今陕西靖边东北白城子)。以佯弱诱夏军出战,引而疲之,然后隐军出夏军阵后,顺风冲击,大败夏军,克统万城,俘夏王、公、卿、将、校及后妃、宫人等以万数,获马30余万匹、牛羊数千万头。 [19]
夏被北魏攻陷,夏王赫连昌被俘,其弟赫连定逃往平凉(甘肃华亭)继位。在431年趁北魏兵团回撤之机攻下西秦继续西扩,在青海湖被鲜卑吐谷浑汗截击,赫连定被生擒献于北魏。 [20]
●
大破柔然
参见:北魏攻柔然之战
北魏始光元年(424)八月,柔然可汗大檀(即牟汗纥升盖可汗)闻北魏明元帝拓跋嗣去世,率6万骑攻入北魏云中(今和林格尔西北),杀掠吏民,攻陷北魏故都盛乐,包围了云中城。拓跋焘当太子时,十二岁远赴河套保卫长城抗击柔然的入侵,把边塞军务整顿的有声有色。对柔然的战术也颇为熟悉,于是他力排众议,亲自率2万骑兵急赴云中救援。柔然依仗人多,将赶来救援的北魏太武帝拓跋焘及所部,竟包围达五十余重。起初,北魏将士十分恐惧。但是这位不到16周岁的少年皇帝拓跋焘却“临敌常与士卒同在矢石之间,左右死伤者相继,而帝神色自若”。因此使得北魏的将士们“是以人思效命,所向无前”。先是柔然的两位大将大那、社仑所发动的进攻被北魏军击退。之后,柔然大将于陟斤被北魏军射杀,拓跋焘趁势率军大纵深地向前穿插,北魏奋力突击柔然军,柔然军顿时被搅得一片混乱,大败而逃。 [21]
次年十月,北魏大举征讨柔然,分兵五道并进,越大漠击之,柔然惊骇北逃。
魏帝为彻底摆脱北面柔然与南朝宋两面夹击的威胁,并雪云中被围之耻,在大败赫连夏,克其都城统万(今陕西靖边东北白城子)后,决心集中力量打击柔然。神鹿加二年四月,与众大臣商议击柔然,公卿大臣及保太后担心宋军进攻,均竭力劝阻。太常卿崔浩认为:宋闻陛下克统万,内心深怀恐惧,必不敢动;柔然自恃遥远,谓我力不能制,防备松懈已久,故夏则散众放牧,秋则聚众南掠,今乘其放牧无备出击,可一举灭之。 [22]
魏帝对其见解极为赞赏,遂决定留太尉长孙嵩、卫尉楼伏连镇守京都;命司徒长孙翰领兵由西道向大娥山,自率军由东道向黑山(今内蒙古巴林右旗北罕山),越过大漠,合击柔然可汗庭(今蒙古国哈尔和林西北)。 [22-23]
神麚二年(429)五月,拓跋焘抓住柔然夏则散众放牧之机,魏帝领军至漠南(今蒙古高原大沙漠以南地区),舍弃辎重,率轻骑兼马(每一骑兼有副马)奔袭,直逼栗水(今翁金河)。柔然无备,临战震怖,民畜惊骇奔散;大檀忙焚穹庐,绝迹西遁。大檀弟匹黎先在东部闻魏军至,率兵欲救其兄,途中遭长孙翰骑兵截击而败,其渠帅数百人被杀。大破柔然,威服高车,为稳定北方创造有利条件。从此,柔然势力大减,主动攻魏较少。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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攻克北燕
延和元年(432)五月,拓跋焘感觉部队已经休整完毕,便在平城南郊调集兵马,屯积粮草准备进攻北燕。同年六月,拓跋焘率军亲征讨伐北燕。七月魏军行至濡水(今河北东北部滦河)后,后方供给出现危机。拓跋焘当即派遣安东将军奚斤征发幽州和密云的民众及丁零族(高车)一万多人充当魏军的民夫,给魏军运送攻城的器具,这才解决了燃眉之急。 [24]
魏军主力继续东进,拓跋焘和奚斤在北燕都城龙城外会师。两路魏军在途中基本没有受到什么抵抗,沿途的北燕守军和官员接连向北魏投降,魏军没费多少功夫就合围了龙城。拓跋焘在和龙外又征发了3万多民众为其挖围堑,企图困死龙城内的守军。 [24]
是年八月,北燕皇帝冯弘不甘心就此投降,便派了3万人出城向魏军挑战,战败。北魏昌黎公拓跋丘和河间公拓跋齐率部合围北燕军,燕军死伤近万人。遭此一败,北燕的官员和将领们都老实了不少,只有尚书高绍仍然率部抵抗,不久后也被杀死。冯弘见形势不利,便邀请高句丽军保护他,率龙城百姓东渡辽水,投奔高句丽。不久,冯弘因为自大被高句丽长寿王杀死,北燕灭亡。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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降服北凉
参见:北魏灭北凉之战
太延五年(北凉永和七年,439), 北魏帝遣使至北凉,得悉北凉主沮渠牧犍喜于传播柔然可汗妄言:去岁魏帝伐我大败,不能复振。知其称藩怀有二心,经朝议,决定依从谋主崔浩之言,出其不意,乘虚攻凉。六月,魏帝率兵从平城出发,使侍中、宜都王穆寿辅助太子拓跋晃监国,又令大将军、长乐王嵇敬,辅国太将军、建宁王拓跋崇领兵2万屯漠南,以防柔然。同时命公卿草书遣责北凉主沮渠牧犍,列数其12项罪状,劝其亲率群臣远迎魏军,才是上策。随后自云中渡过黄河,于七月至上郡属国城,留下辎重,部署诸军:以抚军大将军、永昌王拓跋健,尚书令刘吉与常山王拓跋素为前锋,两道并进;骠骑大将军、乐平王拓跋丕,太宰、阳平王杜超为后继;以平西将军源贺为向导。 [25-26]
源贺为故南凉主秃发傉檀之子,南凉原据姑臧,后为北凉所占。源贺对魏帝言道:姑臧城旁有四部鲜卑,皆臣祖父旧民,愿劝其归附。魏主称善。八月,拓跋健获得河西(即河西走廊与、泊水流域一带)畜产20余万。北凉主未肯出迎,一面遣使求救于柔然,一面派其弟征南大将军董来领兵万余出战于姑臧城南,北凉兵望风奔溃。魏帝遣使晓谕北凉主出降,沮渠牧犍得报柔然将攻魏边塞,猜测魏帝可能还师,遂闭城固守。其堂弟沮渠祖城出降,魏帝俱知城内情况,于是分兵围攻。由于源贺引兵招慰城附近诸部下3万余落,故魏帝得专攻姑臧。九月,北凉主沮渠牧犍之侄沮渠万年率部降于魏。姑臧城溃,沮渠牧犍率文武5000人出降。北凉历39年而亡。继之,魏军又攻克张掖、乐都、酒泉等地,皆留将镇守。 [19] [25-26] [27-28]
●
南北对峙
16岁的拓跋焘即位,即位之初就以少胜多,顶住了北方柔然的疯狂入侵。后来拓跋焘主动反击柔然,先后13次出兵柔然,征服了漠北一带,使柔然臣服。拓跋焘于公元427年,用3万骑兵攻破了坚不可摧的胡夏统万城。公元431年灭胡夏,平山胡,西逐吐谷浑,又于436年灭北燕,439年灭北凉,使北方的分裂割据局面复归统一。 [29-30]
至此,北魏统一了北方,继前秦苻坚后再度使北方归为一统。从而与南方的刘宋政权并立,形成南北朝对峙的格局。 [29-30]
拓跋焘凭借祖父和父亲留下的基业,加之自己的雄才大略、军事才干,经过近20年的统一战争,最终统一了北方,加强北魏的封建化进程,使北魏政权更为巩固。但在伐宋之时,刘宋的南兖、徐、兖、豫,青、冀六州遭到极大的破坏,“自是道里萧条,元嘉之政衰矣”,加重了人民的苦难。此外,北魏大臣、军事谋略家崔浩,深为道武帝、明元帝和太武帝所器重。作为谋主,他参与北魏王朝三代帝王重大军事决策,多谋善断,屡建功勋,在北魏统一中国北方的一系列战争中起了重要作用。 [29-30]
汉化改革
参见:北魏孝文帝改革
拓跋焘死后,文成帝拓跋濬、献文帝拓跋弘、孝文帝拓跋宏相继登基,逐步实施了改革,使社会经济由游牧经济转变为农业经济。孝文帝即位后,为了缓和阶级矛盾,限制地方豪强势力,在冯太后的辅佐下进行了大范围的改革。诸如实行俸禄制、均田制、三长制、迁都、汉化政策等,极大地促进了北魏经济社会的发展,促进了民族大融合,也为隋唐统一全国创造了条件。
490年(太和十四年),冯太后死,魏孝文帝开始亲政。他亲政后的第一件大事,就是把都城从平城迁到洛阳。 [31] 魏初,鲜、汉官号杂用。迁都后,改定官制,一依魏晋南朝制度。 [32]
北魏统治者迫切要求同汉族地主进一步合作,为此,他们需要进一步消除民族界限,实行汉化政策。但在鲜卑贵族集中的旧都平城,推行汉化政策阻力很大。 [31]
493年(太和十七年),孝文帝以南伐名义,率二十万大军南下。到洛阳后,他声言继续南下,群臣跪在马前劝阻。他利用群臣不愿南伐的心理,宣布定都洛阳。 [31]
孝文帝改制遭到了一部分保守的拓跋贵族的反对。他们不仅在改制前进行抵制,在改制中和改制后也不断反抗。496年,太子拓跋恂企图逃回平城发动叛乱,被孝文帝处死。同年冬,旧贵族在平城发动兵变。孝文帝派军平服了叛乱,保证了改制的顺利进行。 [32]
走向衰落
魏孝文帝变法之后,北方的民族矛盾有所缓和。但是北魏政治的日益腐败, [33] 吏治逐步败坏。高阳王元雍富兼山海,其住宅、园囿像皇宫一样豪华,僮仆多达六千,妓女五百,一餐费数万钱。他与河间王元琛斗富,奢侈豪华程度超过西晋的石崇、王恺斗富。被称为饿虎将军的元晖作吏部尚书时,卖官鬻职都有定价,人们称吏部为卖官的市场,称这些官吏为白昼的劫贼。地方州郡的刺史、太守也聚敛无已,征收租调时,重新使用长尺、大斗、重秤。 [33]
繁重的兵役和徭役使大批农民家破人亡。破产农民纷纷投靠豪强,重新沦为依附农民,或逃避赋役,入寺为僧尼。 北魏控制的编户日益减少,影响了政府的收入。
由于矛盾的激化,在5世纪末至6世纪初,北方已不断爆发叛乱。 [34] 北魏除加重税收外,多次检括逃户,搜捕逃亡的农民。延昌四年(515)冀州僧人法庆领导的大乘教叛乱,公开宣称“新佛出世,除去旧魔” [35] 。北魏政府动员了十万军队才镇压下去。 [36]
北魏末年,各族人民的大起义遍布北方各地,名号繁多,但主要有四支:北方边镇起义、河北起义、山东起义和关陇起义。 [34]
北魏末年的各族人民大起义,前后延续了八年之久,席卷了今河北、山东、内蒙古、宁夏和甘肃的广大地区。起义军在战斗中杀死了北魏许多王公贵族和州郡牧守,诛戮地主,摧毁坞堡,有力地打击了北魏的统治。起义军包括了汉、鲜卑、匈奴、氐、羌、敕勒等各族人民,各族人民在共同战斗中增进了彼此的联系和了解,对民族融合也有积极影响。 [34]
六镇之乱
孝文帝拓跋宏
孝文帝拓跋宏
六镇,也称北镇,是北魏前期为了攻击和防御柔然政权,沿平城北由西向东依次设置的六个军事据点:沃野镇、怀朔镇、武川镇、抚冥镇、柔玄镇、怀荒镇。北魏前期,柔然是其最主要敌人.北魏将主要军事力量集中在六镇,每镇设置镇都大将,镇将由鲜卑贵族之中杰出的军事人才担任,而戍防的士卒多是拓跋联盟各部落的牧民和中原豪强地主的高门子弟。随着北魏一统北方,柔然政权在北魏的打击下也日益衰落,对北魏已经无法造成致命威胁,六镇的军事政治地位开始变轻。 [37]
孝文帝改革后,实施了门阀化,六镇的统治者们无论立了多大的战功,总是被排斥在门阀以外,不能踏入北魏政府的高层政治舞台。六镇的鲜卑人还依然保持着原来的鲜卑族语言、习俗,是北魏孝文帝汉化改革的最大阻碍。他们与洛阳方保持一种文化层面上的抗衡。 [38]
523年,塞北的柔然政权出现饥荒,柔然政权大汗阿那瓌率兵三十万南侵,在六镇进行了一场烧杀抢掠,将六镇人的家财粮食一掠而空。 [39]
北魏孝明帝年幼,年轻的胡太后听政当家,对六镇问题,只是简单地发放了一些赈恤粮款,赈恤粮款本就是杯水车薪。公元523年四月,怀荒镇军民强抢官府粮仓,并杀掉了怀荒镇镇将于景。怀荒镇的事情引发了多米诺骨牌效应。公元524年四月,沃野镇辖区的高阙戍兵匈奴人破六韩拔陵带着手下的兄弟们起事,挥刀杀掉了戍主,宣布起义。六镇军民纷纷起义,破六韩拔陵改元“真元”,署官封爵,成为六镇义军的领军人物。破六韩拔陵的义军占领了沃野镇,而别帅卫可孤领导的义军则占领了怀朔镇。 [40] 北魏政府先后三度易帅,分别以淮王元彧、尚书令李崇、元渊为北征大都督,率军北进,镇压起义军,但与义军的交锋却一再失利。公元524年八月,六镇东西两部敕勒酋长皆归附于义军,义军完全控制了六镇地区。 [41]
北魏请柔然人当雇佣军,镇压六镇人民起义。六镇一直是柔然人眼中的障碍,公元525年四月,柔然大汗率军十万,入六镇,从武川西向沃野,配合元渊的魏军向六镇义军攻击。在两面夹击下,义军很快处于劣势,卫可孤战死。元渊又分化了西敕勒酋长,削弱义军势力。八月,柔然军与魏军会合,在五原大败义军主力,破六韩拔陵下落不明,义军被迫降魏。六镇20万被俘兵民安置在河北三州之后,正逢河北遭遇水旱之灾,无处就食,出现逃亡现象,二十万六镇军民再度起义,关陇、河北等地各族人民也陆续起义,但最终起义失败。 [42]
激烈的阶级斗争使北魏政权摇摇欲坠。边镇豪强集团利用当时的混乱局面,各自发展势力。肆州秀容(山西朔县北)的契胡酋长尔朱荣聚集了北镇豪强和流民,势力发展最快
河阴之变
参见:河阴之变
北魏洛阳城平面图
北魏洛阳城平面图
528年,在北魏都城洛阳却发生了灵太后为长期控制政局,毒死自己亲生儿子孝明帝元诩。之后,灵太后另立3岁的元钊做了皇帝。驻扎在晋阳的柱国大将军尔朱荣素有政治野心,他以为孝明帝报仇为借口,率大军南下,准备进军洛阳。 [43]
尔朱荣系契胡部落酋长,其部善骑射,长期抵御柔然部的南下,是北部边防的重要军事力量,也是当时最有实力的军事集团。为保阴谋得逞,尔朱荣秘密派遣儿子尔朱天光等人悄悄进入洛阳城,与彭城王元勰之子、当时声望很高的长乐王元子攸商议里应外合攻打洛阳,并许诺事成后立元子攸为帝。 [44-45]
之后,尔朱荣便从晋阳率大军向洛阳进发。大军行进到河阳(今焦作孟州)时,尔朱荣遣亲信进洛阳,悄悄将元子攸接到河阳立为皇帝,这就是历史上的孝庄帝。随后,尔朱荣率大军从孟津渡过黄河直逼洛阳。 [44]
灵太后得知消息,急忙调集大军与尔朱荣决战,结果被尔朱荣打得落花流水,京城洛阳也被攻占。灵太后见大势已去,下令后宫嫔妃和她一道出家到永宁寺为尼。尽管如此,尔朱荣并没有放过灵太后,他胁迫灵太后、幼帝元钊和他一起退出洛阳,当大军行进到河阴(黄河南岸)时,尔朱荣下令将灵太后和元钊投入洪水滔滔的黄河之中。残害了灵太后和元钊以后,尔朱荣假装邀请元子攸带领朝中百官到河阴之陶渚(今孟津东)祭天。当2000多名朝中官员陪同元子攸到达陶渚时,尔朱荣下令早已守候在此的士兵将文武百官2000余人全部杀害,北魏诸王中的元雍、元钦、元略、元巶等人也在这次杀戮中遇害,制造了骇人听闻的河阴之变。经过这次事变,尔朱荣把迁到洛阳的汉化鲜卑贵族和出仕北魏政权的汉族大家消灭殆尽。 [44]
河阴之变以后,尔朱荣意欲称帝的阴谋并没有得逞,他派人将元子攸送到了洛阳,自己却因杀人太多、民愤极大不敢留居洛阳城,一直远据晋阳,对洛阳遥控指挥。这时的洛阳城民心浮动、一片混乱,富家大户害怕动荡危及自身,纷纷弃宅而逃,京城昔日的繁华荡然无存。 [44]
孝庄帝虽然在尔朱荣的扶持下做了皇帝,但他不甘心做傀儡,一心要铲除尔朱荣,重振北魏皇权。530年,孝庄帝下诏让尔朱荣进京,趁机将38岁的尔朱荣手刃在明光殿。尔朱荣的堂弟尔朱世隆和侄子尔朱兆得知消息,合力调兵攻打洛阳。尔朱兆攻入城中,抓住孝庄帝,先将孝庄帝锁在北魏皇家寺院永宁寺的塔里,不久将他押到晋阳杀害,同时遭捕杀的还有临淮王元诲、城阳王元徽等残余王公。 [44]
之后,尔朱兆回到了晋阳,派尔朱世隆等留守洛阳。他们在洛阳城里无恶不作,激起人们的愤恨。晋州刺史高欢于531年乘机攻占洛阳,并于533年进兵晋阳,消灭了尔朱氏的势力,控制朝政。在此期间,北魏皇位如走马灯一般,先后出现了元晔、元恭、元朗三位废帝。 [44]
两魏分裂
高欢在532年立元修为帝,即孝武帝。但元修无法容忍高欢掌握实权,在534年投奔长安的宇文泰。
534年,高欢立元善见做了皇帝,即孝静帝,并迁都于邺(今河南安阳北至河北临漳南),这就是历史上的东魏政权。迁都时,高欢将洛阳城内40万户居民迁到邺城,并大拆洛阳宫殿,将所拆的建筑材料运往邺城,致使这座300年的锦绣帝都逐渐化作一片废墟。第二年,孝武帝与宇文泰有隙,被宇文泰毒死,雍州刺史兼尚书令宇文泰立元宝炬为帝,建都长安,这就是历史上的西魏政权。 [46-47]
东魏、西魏均没维持多久,550年,高欢的儿子高洋接受东魏皇帝元善见的禅让,建立了北齐政权。 [3] 557年,宇文泰的儿子宇文觉则接受西魏皇帝拓跋廓“禅让”,建立了北周政权,元魏(拓跋魏)正式灭亡。 [48]
疆域
领土范围
北魏疆域广阔,主要控制着中国北方地区,北至沙漠、河套,南至江淮,东至海,西至流沙。 [49]
行政区划
北魏实行州、郡、县三级制,其主要的州有:
北魏地图集
并州、肆州、建州、恒州、朔州、汾州、司州、豫州、荆州、洛州、东荆州、东豫州、南兖州、相州、冀州、幽州、平州、瀛州、安州、定州、营州雍州、豳州、夏州、华州、泰州、东泰州、泾州、岐州、兖州、青州、齐州、徐州、南青州、济州、河州、凉州、敦煌镇、 武川镇、御夷镇、怀荒镇、柔玄镇、抚冥镇。
政治
中央制度
北魏建国后,其社会跃入封建制,生产力逐步发展。但在统治方式上,北魏前期仍然保留着浓厚的奴隶制残余,特别是在统一北方以前,继续将战争中掳掠的人口没为奴婢,赏赐给诸王贵族和有战功者,从事农业和手工业的生产劳动。赋税方面,在推行宗主督护制的地区,平均每户每年的户调是帛二匹,絮二斤,丝一斤,粟二十石,外加地方征收的调外之费帛一匹二丈。且任意增加临时征调,动辄每户要交三十、五十石粟。当时官吏没有正式的俸禄,贪污、贿赂、高利贷公行。太武帝统治期间,大将公孙轨到上党(今山西长治北),去时单马执鞭,回来则从车百辆。 [50]
拓跋统治者推行民族歧视政策。在战争中,被驱迫当兵的各族人民在前冲锋,鲜卑骑兵在后驱逼。太平真君十二年,太武帝围攻盱眙(今江苏盱眙东北)时,写信给刘宋守将臧质说,攻城的都不是我鲜卑人,你杀了他们,免得他们将来造反。北魏为了镇压其他民族的反抗,在氐、羌、卢水胡等族聚居的地区设置军镇,进行严厉统治。魏律规定犯谋反大逆者,亲族男女不论少长全部处死,甚至还在实行原始的车裂法。 仅国史一案中,被灭族的北方汉族大姓就达千余人之多。 [36]
北魏前期落后的统治方式,引起各族人民连绵不断的反抗斗争。其中规模最大的,是太平真君六年九月,杂居在今陕西、山西等地的汉、氐、羌、屠各等族人民在卢水胡人盖吴领导下于杏城(今陕西黄陵西南)爆发的起义(见盖吴起义)。诸少数族和汉族被压迫人民争相响应,起义军很快发展到十余万人,东起潼关,西至陇西(今陕西、甘肃交界处)。一年后,起义虽被太武帝亲自率军镇压而失败,但各族人民的共同斗争促进了民族的融合。 [36]
地方管理
三长制是地方基层行政组织,它规定五家立一邻长,五邻立 一里长,五里立一党长。三长的职责是检查户口,管理农民,征发租调力役。 [51]
三长制建立后,代替了魏初的宗主督护制,北魏的基层统治机构更完备了。 [51]
制度改革
北魏孝文帝为了缓和阶级矛盾,力求限制地方豪强势力,加强中央集权,使鲜卑贵族进一步封建化,并与汉族地主紧密结合,更有效地共同统治各族人民,在冯太后的辅佐下进行了一系列的改革:
延兴二年(472),政以久任,满一年升迁一级;治绩不好的即使就任不久,也要受到处罚,甚至降级。
延兴五年(475)为改变过去州、郡、县争收租调的混乱局面,政府确定只能由县一级征收,征收时禁止使用大斗、长尺、重秤。
太和八年(484)颁布俸禄制,申明俸禄以外贪赃满一匹绢布的处死。次年颁行的均田令中,又规定地方守宰可以按官职高低给一定数量的俸田。所授公田不准买,离职时移交下任。 [52]
太和九年(485)颁布了均田令,对不同性别的成年百姓和奴婢、耕牛都作了详尽的受田规定。授田有露田、桑田之别。露田种植谷物,不得买卖,七十岁时交还国家。桑田种植桑、榆、枣树,不须交还国家,可以出卖多余的部分,买进不足的部分。还授土地时对老少残疾鳏寡都给予适当的照顾。 [53]
北方广大地区由于战乱,户口流徙,田园荒芜,大量土地无人耕种。北魏政权为增加财政收入,稳定社会秩序,颁行均田制。先审定户籍,再按户口分配土地,实行新的租调制。奴婢和牛都可受田。均田制在当时地旷人稀的前提下施行,在不损害地主阶级既得利益的前提下施行,有益于生产发展和稳定的。北方大量的荒地被开垦,耕作技术也有了提高,农业的发展,使养蚕、牧畜、酿造等农村副业也发展起来,改变了北方荒凉残破的景象。
太和十年(486)以三长制取代宗主督护制,采用邻、里、党 的乡官组织,抑制地方豪强荫庇大量户口。
太和十年,孝文帝对租调制度也进行了相应的改革。新租调规定以一夫一妇为征收单位,每年交纳帛一匹,粟二石。十五岁以上的未婚男女,从事耕织的奴婢每八人,耕牛每二十头的租调,分别相当于一夫一妇的数量。
太和十八年(493),孝文帝排除穆泰、元丕及太子恂等鲜卑旧贵族和保守势力的反对,把都城从平城迁至洛阳。
迁都后,督使鲜卑族禁着胡服,改穿汉人服装;朝廷上禁鲜卑语,改说汉话;规定鲜卑贵族在洛阳死后,不得归葬平城,并改他们的籍贯为河南洛阳,改鲜卑姓为汉姓;鲜卑贵族门阀化,提倡他们与汉族高门通婚等。 [32]
太和年间,议定百官秩品,分九品,每品又分正、从。从品为北魏之首创。十九年,又按照家世、官爵等标准,将代北以来的鲜卑贵族定为姓、族,姓为高,族次之,其中穆、陆、贺、刘、楼、于、嵇、尉八姓,“皆太祖已降,勋著当世,位尽王公,灼然可知者,且下司州、吏部,勿充猥言,一同四姓。”所谓四姓,一说为中原汉族高门崔、卢、李、郑,一说为汉族甲、乙、丙、丁四种郡姓,后者似为确。班定姓族,使鲜卑贵族与汉士族得以进一步结合。 [54]
孝文帝改革使北方社会经济有了明显发展,手工业生产日益活跃,商业活动也日趋活跃。加速了北方各少数民族的封建化进程,对北魏社会政治生活乃至整个中国历史产生了深远的影响。最主要的影响是促进了民族的交流和融合,为结束长期分裂局面,重新走向国家统一奠定了基础。 [55]
子贵母死
北魏的宫廷为了避免外戚干政,在道武帝拓跋珪时开始实施残酷的子贵母死制度,即后宫女性只要生下男孩并被立为太子就得被赐死,以避免母以子贵的情况发生。很多人误以为只要生下皇子就要被赐死,其实这是错误的观点。但幼子还是需要人照顾,因此就有所谓的保太后,即当保姆照顾太子新君继位后被封为太后。北魏有三种皇太后,一种是皇帝的生母,另一种是皇帝的保姆,还有一种是前任皇帝时运气好没生儿子而活下来的皇后。到了宣武帝元恪在位时,宣武帝并没有赐死太子元诩的母亲胡太后,实际上子贵母死制度已经终结。 [56-58]
经济
西晋末年,拓跋部首领拓跋猗卢,被西晋封为代公,进而封为代王。东晋咸康四年(338),拓跋什翼犍即代王位,设官分职,制定刑法,国家机构逐步完备。拓跋部已经地进入奴隶主占有制的阶级社会。拓跋部建立北魏后,逐步迈入封建社会。 [36]
太和五铢
太和五铢
中国北方自西晋永嘉之乱(310)以后,经过十六国时期的战争破坏,百姓死于兵革,毙于饥馑,幸存的人口不足50%,中原地区一派凋敝景象。在北魏王朝一个半世纪的历史发展过程中,社会生产力逐步得到恢复和发展,。北魏统一北方后,经过各族人民长期的辛勤劳动和共同努力,生产关系得到了调整,生产有明显的发展。特别是孝文帝改革后,自耕农民显著增加,孝明帝正光以前,全国户数已达五百余万,比西晋太康年间增加一倍多。农业、手工业都有显著的发展。《洛阳伽蓝记》称北魏后期百姓殷富,年登俗乐,衣食粗得保障。在手工业方面,北魏后期炼钢技术有新的成就,相州牵口(在今河南安阳)冶制成锐利的钢刀。商业也逐渐活跃起来。孝文帝时,元淑为河东太守,当地许多百姓弃农经商。太和以前,北方商业几乎处于停顿状态,钱货无所周流。随着商业的发展,货币恢复流通,太和十九年,又重新铸造“太和五铢”钱,规定此钱在京师及全国诸州镇都可通行。宣武帝时,洛阳的商业相当繁荣,成为国际性的商业大城市。 [36]
农业和手工业
孝文帝改制后,由于立长校户,政府控制的编户增加了。到孝明帝神龟年间,户口数目比西晋太康元年增加了一倍多,大约有五百多万户,三千多万口。 [59]
吏治的改善,负担的调整,农民可以从事生产,农业有所恢复和发展。此后,直到神龟末年,政治虽然逐渐腐败,阶级矛盾日益尖锐,但官府的仓库还是装得相当充实的。 [59]
北魏的畜牧业原本就很发达。孝文帝时期,又在河南设牧扬,养战马十万匹。如契胡尔朱荣的父亲尔朱新兴有“牛羊驼马,色别为群,谷景而已”。 [59]
手工业也有所进步。绢布产量增加,绢价下降。魏初,每匹绢千钱,孝文帝以后降到二三百钱。榨油、酿酒、造纸、煮盐、冶铁等部门也有发展。 [59]
商业
北魏后期,商业也有一定的发展。大的城市有洛阳、邺和长安。 [60]
洛阳既是北方政治中心,又是贸易中心。洛阳西阳门外有大市,周围八里。“市东有通商、达货二里。里内之人,尽皆工巧屠贩为生,资财巨万”。 [60]
当时经商的,除了列肆商贩和大商人外,许多贵族、官僚也从事经商。北方贵族多喜欢“南货”,官府于南境立互市与南朝贸易。但禁止私人交易,许多官僚、贵族因“渡淮互市”被治罪。 [60]
孝文帝改制后,铸五铢钱,但不少地区仍是“钱略不入市”。 [60]
均田制
北魏初年在代北曾推行过“计口受田”制;485年(太和九年),北魏政府在以往的基础上颁布了均田令。均田令的主要内容是:
均田制 | |
均田制 | 男子年十五以上受露田(只种谷物)四十亩,妇人二十亩。为了轮种,露田加倍或加两倍授给。露田不准买卖,年老免课及身死还田。 |
男子每人给桑田二十亩,作为世业,终身不还。在二十亩桑田上必须按规定种一定数量的桑、榆、枣树。初受田时,原无桑田者,依制受田;原来桑田不足者依制补足,多余者将多余部分充做倍田;再多的也不充做露田来还授。随着人口的增减,多余部分可以卖出,不足部分可以买进,但买卖都不能超过应得分额。非桑之乡给麻田,男子十亩,妇人五亩,还受法和露田一样。 | |
奴婢受田与良人相同。耕牛一头受田三十亩,限四牛。还受依奴、牛有无而定。 | |
土广民稀之处,任力耕垦,不受限制。土狭民稠之处,增丁应受田而不愿迁移者,以桑田抵应受露田数;不足者不给倍田;又不足从家人田中减量分给。愿迁者,任到空荒之地,但不得逃避赋役。 | |
官吏给公田,刺史十五顷,太守十顷,治中、别驾八顷,县令、郡丞六顷。离职时移交下任,不得转卖。 | |
参考资料来源: [61] |
赋税制度
孝文帝改革之前,北魏的税收由部落贡纳、牧民的畜牧税为以及一般农民的租调为主, [62] 其中农民的租调为最大收入。北魏规定租调税收为“户调帛二匹、絮二斤、丝一斤、粟二十石;又入帛一匹二丈,委之州库,以供调外之费。”。 [63] 不过这是个一般办法,政府需要的时候可以增加征收物品的种类和数量。租调是按户收取的,户的大小没有限制,孝文帝改革之前,三五十家组成一户的情形很普遍。除了这种一般性税收外,政府经常因为战争而加开新税,官吏因为没有官俸,也常常以各种借口征税,给百姓带来很大的负担。
徭役方面,兵役方面由鲜卑人担任,因而兵役较轻。而力役的情况因为缺少史料,无法得知。只知道,为政府工作的工、杂役非常多。他们被编为隶户、军户、营户、府户、绫罗户、乐户等等。
孝文帝改革后,为了给官僚机构提供俸禄,以减少官吏欺压百姓。提高了税率,魏孝文帝定每户增调帛三匹、谷二斛九斗,充百官俸禄。 [64] 又在太和九年(485年)实行均田制,办法大致有四项:
1.
十五岁以上的男丁和妇人均可授田,男丁授露田四十亩,妇人二十亩,授田视轮休需要加倍或再加倍。如果有牛一头则授田三十亩,最多四头牛,多出的不授田。老少病残或者缺乏男丁的家庭十一岁以上和有病者均授予半夫之田。奴婢一样按照男丁和妇人的标准授田。授田不准买卖,年老或身死还田,但七十以上授田者不必归还。
2.
男丁授桑田20亩。桑田不必还给国家,可传给子孙,也可以可卖出多于20亩的部分,也可买桑田补足20亩。产麻地男子授麻田10亩,妇人50亩,年老及身死后还田。
3.
多余土地可以借给农民耕种,政府严格控制农民迁徙,只允许迁往空荒地区。
4.
规定驻地长官在所在地给予公田,刺史十五顷,太守十顷,治中别驾八顷,县令郡丞六顷,不许买卖。
政府在均田制的基础上重新规定了税收制度,一夫一妻应缴纳的租调为:“其民调,一夫一妇帛一匹,粟二石。民年十五以上未娶者,四人出一夫一妇之调;奴任耕、婢任织者八口当未娶者四;耕牛二十头当奴婢八。其麻布之乡,一夫一妇布一匹,下至牛,以此为降。” [63]
文化
汉化运动
孝文帝时期采取了一系列措施来进行汉化运动。
禁北语。鲜卑人原使用本族语言,北魏军中也用鲜卑语。朝廷上则鲜、汉语杂用。孝文帝在迁都后的第二年六月正式下诏:“不得以北俗之语,言于朝廷,若有违者,免所居官。”在具体实行上,因为三十岁以上者不能一下改变,尚不强求;三十岁以下者,在朝廷上必须使用汉语。 [32]
禁胡服。鲜卑旧俗披发左衽;妇人冠帽著夹领小袖短袄。迁都之同年,下令禁胡服,服装一依汉制。 [32]
改姓氏。鲜卑人多是二、三字的复姓,如拓跋、独孤、步六孤等。姓氏与汉人不同,标志着民族的差异,影响“胡”、汉贵族合作。 [32]
因此,迁都的第三年,孝文帝下令把鲜卑族的复姓改为单音汉姓,如拓跋氏改姓元氏,独孤氏改姓刘氏,步六孤氏改姓陆氏,丘穆陵氏改姓穆氏等。 [32]
文学
文学方面,北朝民歌充分体现了北方民族大融合的特征,风格刚健,语言质朴,感情真挚。《敕勒歌》《折杨柳歌》《木兰诗》就是当时民歌的代表。杨炫之的《洛阳伽蓝记》,既是一部地理名著,又是一部文学作品,同时又是一部佛教著述,提供了北魏迁都洛阳40年间的佛教史料。《水经注》从文学角度看,也不愧为一本文字优美的游记。 [36]
雕塑
雕塑艺术,集中表现在当时的石窟寺中。它继承了秦汉以来中国的艺术传统,也受到国外,特别是古代印度艺术的影响。摩崖石窟分布很广,西起今甘肃,东至今辽宁,保存至今的著名的有大同云岗石窟,河南洛阳龙门石窟,甘肃敦煌石窟,以及甘肃天水的麦积山石窟、永靖的炳灵寺石窟,山西太原的天龙山万佛洞,河南巩县的石窟寺等。在这些石窟寺中有古代艺术工匠所塑造出来的数以万计的佛像,代表了当时中国雕塑艺术的最高水平,至今仍是驰名世界的艺术宝库。 [36]
宗教
云冈石窟
云冈石窟
北魏经历了游牧部落联盟而迅速转移到国家的历史,拓跋鲜卑人有自己的语言而没有文字。北魏时期的主要宗教是佛教、道教和琐罗亚斯德教,其中最重要的是佛教,僧尼的人数曾发展到二百多万。北魏道教,主要是经过寇谦之改良的天师道。当时佛道两家的斗争十分激烈,太武帝拓跋焘曾经大举灭佛。琐罗亚斯德教教在中国称为祆教或拜火教,主神被称为“胡天”,主要在入华的粟特人当中传播。文成帝在平城开凿了云岗石窟。 [65-66]
北魏大部分时期,由于国家及私人赞助,佛教艺术十分兴盛。云岗佛教石窟约兴建于460年,由上千位工匠历时约三十五年后完工,洞窟内有雕塑及与绘画。之后,北魏孝文帝亦于龙门兴建石窟。 [67] 云岗石窟的佛像属较静态的罽宾风格,龙门的造像形式则较流线飘逸,开始展现中国风格的影响。北魏的陪葬陶器亦受到佛教影响,强调“正面性”(frontality) 及对称。与此同时,位于敦煌的莫高窟也在北魏时期发展较快,如第243石窟北魏时代的释迦牟尼塑像,巍然端坐,身上斜披印度袈裟,头顶扎扁圆形发髻。 [68]
军事
北魏兵民分开的 [69] ,兵用于打仗,民从事耕桑 [70] 。而兵主要由鲜卑及其他少数民族组成,农业主要由汉人从事。兵民之分也就是胡汉之分,也是胡汉分治的体现。
而士兵里面也分两种,一种是鲜卑兵,另外一种是非鲜卑兵。
鲜卑兵由代北部落的鲜卑人组成,主要担任北魏的禁旅和边防六镇的士兵。这种兵带贵族性质,地位颇高 [71] ,但在魏文帝汉化之后有所改变。
非鲜卑兵中,以高车兵最为重要,禁军和六镇边兵都有高车人。此外还有部分少数民族和汉人军队。
外交
太安元年(455年),波斯萨珊王朝遣使来华。此后直到西魏,信使往来不断。 [72]
通过友好往来,大秦等国的石棉布、水银、琉璃、药材和汗血马等输入到中国。中国的丝绸、铜器等输出到大秦、波斯等国。6世纪末,中国的养蚕术通过波斯也传入大秦。 [72]
人口
北魏孝明帝神龟年间(518年—520年)户口统计大约有500万户 [73] ,以户均口数6口计约有3000万人,因学者考虑到北魏北边军镇的府户、农官管理下的民屯户、国有牧场的牧户、僧尼及寺院的附户以及为官府供役的杂户、伎作户、乐户、盐户、金户等等未纳入官方统计的人群,而认为北魏实际户数达600万户 [74] ,实际人口达3500万人 [75] 。
科学
农学
北魏末年贾思勰所著《齐民要术》 [76] ,是中国现存最古、最完整的农书。《齐民要术》系统地总结了6世纪以前黄河中下游地区农牧业生产经验、食品的加工与贮藏、野生植物的利用等,对中国古代农学的发展产生有重大影响。 [36] 贾思勰,益都(今属山东)人。他曾经做过高阳郡(今山东临淄)太守等官职,非常重视农业生产。中年以后,他开始经营农牧业,亲自参加农业生产劳动和放牧活动,对农业生产有了亲身体验,掌握了多种农业生产技术。大约在北魏永熙二年(533年)到东魏武定二年(554年)期间,他写成农业科学技术巨著《齐民要术》。 [77]
《齐民要术》全书十卷,共九十二篇,集周秦至北魏农业生产知识之大成。全书内容十分丰富,其中包括土壤整治,肥料施用,精耕细作,防旱保墒,选种育种,粮食和蔬菜栽培,果树的培植和嫁接,畜禽的饲养和医治,食品的加工和储藏,以及野生植物的利用等,反映了当时中国北方的农业生产技术水平。其中许多技术直到现在还在应用。 [77]
地理
北魏还出现了一位地理学家、散文家——郦道元,他以《水经》为纲,写成地理名著《水经注》 [78] 。《水经注》全书三十多万字,全书四十卷。详细介绍了中国境内1250多条河流以及与这些河流相关的郡县、城市、物产、风俗、传说、历史等。该书还记录了不少碑刻墨迹和渔歌民谣。《水经注》在中国长期历史发展进程中有过深远影响,自明清以后不少学者从各方面对它进行了深入细致的专门研究,形成了一门内容广泛的“郦学”。
《水经注》文笔雄健俊美,既是古代地理名著,又是山水文学的优秀作品,是一部具有文学价值的地理著作。郦道元,字善长,范阳涿鹿(今河北省涿县)人,大约出生在公元468年或公元472年。据史书记载,郦道元为官素以严猛著称。他执法很严,不畏强权,因而不少权势人物都憎恨他。因为如此,他被陷害致死。 [79]
皇帝世系编辑
追尊先祖庙号谥号姓名生卒年月在位时间
传说时期、拓跋部的史前时期 | ||||
成皇帝 | 拓跋毛 | ? | ||
节皇帝 | 拓跋贷 | ? | ||
庄皇帝 | 拓跋观 | ? | ||
明皇帝 | 拓跋楼 | ? | ||
安皇帝 | 拓跋越 | ? | ||
宣皇帝 | 拓跋推寅 | ? | ||
景皇帝 | 拓跋利 | ? | ||
元皇帝 | 拓跋俟 | ? | ||
和皇帝 | 拓跋肆 | ? | ||
定皇帝 | 拓跋机 | ? | ||
僖皇帝 | 拓跋盖 | ? | ||
威皇帝 | 拓跋侩 | ? | ||
献皇帝 | 拓跋邻 | ?—213年 | ||
圣武皇帝 | 拓跋诘汾 | 213年—220年 | ||
代王时期 | ||||
始祖 太祖 (元宝炬改) | 神元皇帝 | 拓跋力微 | 174年-277年 | 220年-277年 |
文皇帝 | 拓跋沙漠汗 | ?-277年 | (追尊) | |
章皇帝 | 拓跋悉鹿 | ?-286年 | 277年-286年 | |
平皇帝 | 拓跋绰 | ?-293年 | 286年-293年 | |
思皇帝 | 拓跋弗 | ?-294年 | 293年-294年 | |
昭皇帝 | 拓跋禄官 | ?-307年 | 294年-307年 | |
桓皇帝 | 拓跋猗迤 | ?-305年 | (追尊) | |
穆皇帝 | 拓跋猗卢 | ?-316年 | 307年-316年 | |
文平皇帝 | 拓跋普根 | ?-316年 | 316年(40多天) | |
哀皇帝 | 拓跋始生 | 316年-316年 | 316年 | |
太祖 | 平文皇帝 | 拓跋郁律 | ?-321年 | 316年-321年 |
惠皇帝 | 拓跋贺傉 | ?-325年 | 321年-325年 | |
炀皇帝 | 拓跋纥那 | 325年-329年 | ||
烈皇帝 | 拓跋翳槐 | ?-338年 | 329年-335年 | |
炀皇帝 | 拓跋纥那 | 335年-337年 | ||
烈皇帝 | 拓跋翳槐 | ?-338年 | 337年-338年 | |
高祖 | 昭成皇帝 | 拓跋什翼犍 | 320年-376年 | 建国338年-376年 |
献明皇帝 | 拓跋寔 | ?-371年 | (拓跋珪追尊) |
皇帝列表
庙号 | 谥号 | 姓名 | 生卒年 | 年号及使用时间 | 陵墓 | |
烈祖 太祖 (元宏改庙) | 宣武皇帝 道武皇帝 (拓跋嗣改谥) | 拓跋珪 (什翼珪) | 371年-409年 | 登国386年-396年 | 盛乐金陵 | |
皇始396年-398年 | ||||||
天兴398年-404年 | ||||||
天赐404年-409年 | ||||||
太宗 | 明元皇帝 | 拓跋嗣 (木末) | 392年-423年 | 永兴409年-413年 | 云中金陵 | |
神瑞414年-416年 | ||||||
泰常416年-423年 | ||||||
世祖 | 太武皇帝 | 拓跋焘 (佛狸伐) | 408年-452年 | 始光424年-428年 | 云中金陵 | |
神麚428年-431年 | ||||||
延和432年-434年 | ||||||
太延435年-440年 | ||||||
太平真君440年-451年 | ||||||
正平451年-452年 | ||||||
- | 南安隐王 | 拓跋余 (可博真) | ?-452年 | 承平或永平452年(232天) | - | |
恭宗 | 景穆皇帝 | 拓跋晃 (天真) | 428年-451年 | (拓跋濬追尊) | 云中金陵 | |
高宗 | 文成皇帝 | 拓跋濬 (乌雷) | 440年-465年 | 兴安452年-454年 | 云中金陵 | |
兴光454年-455年 | ||||||
太安455年-459年 | ||||||
和平459年-465年 | ||||||
显祖 | 献文皇帝 | 拓跋弘 (第豆胤) | 454年-476年 | 天安466年-467年 | 云中金陵 | |
皇兴467年-471年 | ||||||
高祖 | 孝文皇帝 | 元宏 (拓跋宏) | 467年-499年 | 延兴471年-476年 | 长陵 | |
承明476年 | ||||||
太和477年-499年 | ||||||
世宗 | 宣武皇帝 | 元恪 | 483年-515年 | 景明500年-503年 | 景陵 | |
正始504年-508年 | ||||||
永平508年-512年 | ||||||
延昌512年-515年 | ||||||
- | 文景皇帝 (元宝炬谥) | 元愉 | 488年-508年 | 建平508年(37天) | - | |
肃宗 | 孝明皇帝 | 元诩 | 510年-528年 | 熙平516年-518年 | 定陵 | |
神龟518年-520年 | ||||||
正光520年-525年 | ||||||
孝昌525年-527年 | ||||||
武泰528年 | ||||||
- | - | 元法僧 | 454—536 | 天启525年(71天) | - | |
- | - | 元姑娘 | 528-? | 武泰528年(1天) | - | |
- | - | 元钊 | 526年-528年 | 武泰528年(43天) | - | |
肃祖 | 文穆皇帝 | 元勰 | 473年-508年 | (元子攸追尊) | - | |
- | 孝宣皇帝 | 元劭 | ?-528年 | (元子攸追尊) | - | |
敬宗 | 武怀皇帝 孝庄皇帝 (元修改谥) | 元子攸 | 507年-530年 | 武泰528年 | 静陵 | |
建义528年 | ||||||
永安528年-530年 | ||||||
- | - | 元颢 | ?-529年 | 孝基529年4月-5月 | - | |
建武529年5月-6月 | - | |||||
- | - | 元晔 | ?-532 | 建明530年-531年(117天) | - | |
- | 节闵皇帝 (元宝炬谥) | 元恭 | 498年-532年 | 普泰531年-532年 | - | |
- | - | 元朗 | 513年-532年 | 中兴531年-532年(165天) | - | |
- | 武穆皇帝 | 元怀 | ?-517年 | (元脩追尊) | - | |
- | 孝武皇帝 (元宝炬谥) 出皇帝 (元善见谥) | 元修 | 510年-535年 | 太昌532年 | 云陵 | |
永兴532年 | ||||||
永熙532年-534年 | ||||||
注1:女帝是傀儡,也没有举行即位典礼,基本不为史家承认。 注2:圣武帝之前的帝王缺少记载,有些史家认为是后来添加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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词条图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