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올 한해도 교회 전례력으로 보면 이제 몇 주 남겨놓지 않았다. 한해의 전례를 마무리하는 요즘 전례 말씀은 마지막 때와 죽음, 종말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전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시기에 맞추어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고군분투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과 율법 학자라는 자들은 예수님과 겉돌고 있고, 심지어 예수님을 박해한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다툰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마르 12,38. 이하) 하면서 마치 심신 깊은 양 행세를 한다.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요즘 표현으로 ‘1도’ 관심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마르 12,40ㄴ)임을 경고하신다.
제1독서 열왕기 상권(17,10. 이하)에서 사렙타의 한 과부가 등장한다. 요즘은 ‘과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상부(喪夫)한 여인’의 처지는 매우 어렵다. 밀가루 한 줌과 약간의 기름뿐인 이 여인에게 ‘하느님의 예언자’가 다가가 ‘빵 한 조각’을 청한다. ‘죽을 작정’이었던 가난한 여인이 그 전부를 내어 ‘하느님의 예언자’에게 대접한다. 마르코 복음(12,38. 이하)에서도 가난한 과부가 등장한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헌금하는 사이에 끼여 남루한 옷차림의 과부가 성전에 들어선다. 그녀는 ‘렙톤 두 닢’을 넣는다.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으로 노동자 하루 임금의 백분지 일’(가톨릭신문, 2021-11-07 [제3268호, 15면], [말씀묵상]. 참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궁핍한 사람에겐 적지 않은 돈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구차하게 느껴질 법한 금액이다. 그러나 금액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금액의 크고 작음이 의미 있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생각해 보라! 하늘나라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의 교회에는 신자들의 헌금과 봉사, 헌신이 필요하다. 지상의 교회는 하늘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다. 교회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헌금과 봉사, 헌신으로 유지되며 성장해 간다. 그래서 가끔 헌금과 봉사를 둘러싼 허세들이 공동체의 정신을 흐리게 한다.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즐겨하는 태도가 이따금 신자들의 태도에서 나타나곤 한다. 세속적인 생각으로 교회 공동체 조직을 바라보며, 자기의 역할과 소임에 대하여 경중을 따져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일에 바쁘다며 개인주의 신앙생활에 빠져있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채우지 못한 욕구와 환상을 교회의 신앙에서 추구하는 나머지 왜곡된 영성에 빠지기도 한다. 열심히 한다고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고, 몇 십 년 꾸준히 한다고 성숙한 신앙이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무엇이 아쉽겠는가? 헌금일까? 봉사나 헌신일까? 우리가 헌금을 하지 않는다고, 봉사나 헌신하지 않는다고 하늘나라가 더디 올까? 우리가 어떻게 살든 하느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하늘나라는 도래한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율법 학자처럼 위세와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공동체에서 이런저런 봉사를 통해 자신을 헌신하며 존재감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소망하는 사람들, 궁핍할지라도 하늘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간절한 사람들의 것이다. 자신이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여타 다른 것들은 그저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주변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은 그저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주변의 평가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인간관계에 의존적인 사람에게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마르 12,44ㄴ) 모두 헌금한 여인, 그녀의 가슴에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으리라. 소중함과 간절함이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위하여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히브 9,28) 하나뿐인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기에, 예수님의 제사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이 되었다. 단 한 번의 제사로 하늘나라를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이제 그분의 교회에서 우리의 헌금과 봉사, 헌신은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우리의 표현이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나라를 지금 이 지상에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영원하지 않을진대, 주인에게 쫓겨난 집사가 훗날을 대비하여 약삭빠르게 일 처리를 하듯이(루카 16,1. 이하),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도 ‘뱀처럼 슬기롭게’(마태 10,16) 대처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우리는 우리가 똑똑하게 살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의외로 어리석음에 빠져있을 수 있다. 세상의 똑똑함은 하늘나라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함일 수 있다. 세상에서 유능함은 하늘나라에서 사악함일 수 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 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율법 안에서 하느님을 보려고 하는 몇몇 율법 학자도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그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전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도 생명의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풍요로운 물질 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 일꾼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은혜로운 자들, 축복된 자들이 넘쳐나는 사회, 그런 교회 공동체가 된다면 하늘나라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