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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아홉 번째 주일
2012년 7월 29일 주일 대예배 설교문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
그동안 성서정과의 복음서 본문은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은 요한복음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마가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기적만 싹둑 잘라낸 채 이 두 사건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뒤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정과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두 가지 기적이 아닌
요한복음이 전하는 기적을 본문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의 기록이나 요한복음의 기록이나 다
엇비슷하겠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이 훨씬 더 정확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봅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너무도 중요하고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이 오병이어 기적일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실 때 큰 무리가 따라갔습니다. 이 큰 무리가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따라 간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표적”(sign)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이사와 기적을 말하지요.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한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때마침 이스라엘의 국가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거리는 시즌입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 큰 무리를 보시고
빌립에게 묻습니다. 4절 후반부를 보세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런 질문을 빌립에게
던지신 이유는 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함입니다. 과연 빌립의 믿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떠보시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즉각 빌립의 대답이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7절을 보세요.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놀랄 만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얼추 계산해보니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조금씩 나누어주어도 모자랄 정도라는
것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니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이 한 6개월 정도
일해야지만 벌 수 있는 액수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적어도 계산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빌립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계산이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빌립,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예산부터 따집니다. 얼마의 경비가 드는지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 예산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금 현재 얼마의 재정이 확보되어있고, 나머지 경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를 따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하나의 잘못도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이지요.
다만 한 가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의 빌립이 꼭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조금씩 나눠줘도 모자란다는 것이지요. 빌립은 계산만 할 줄 알았지 예수님이 먹여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는 돈이 아닙니다. 아이디어입니다. 이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인지, 그것부터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누가 이 일을
할 것인지, 일꾼을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서야 예산을 따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또 도저히 우리 능력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가진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기꺼이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나서면, 예산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다시 말해 돈이 먼저 있어서 사람이나 일이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보려는
생각과 자원하는 일꾼들과 일이 있는 곳에 돈이 따라붙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큰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빌립이 이와 같이 계산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끼어듭니다. 9절을 보세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빌립에 비해 안드레는 훨씬 더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빌립처럼 앉아서 계산기만 두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궁리를 하고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싸온 도시락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서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보리빵은 밀로 만든 빵보다 훨씬 더 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손가락
크기만 한, 바싹 말려 절인 정어리입니다. 보리빵이나 절인 정어리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자,
이렇게 안드레는 빌립과 달리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해보려고 나름대로 행동하는 사람인데, 그 역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9절 후반부를 보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 없는 두 제자가 보란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 날 그 자리에는 잔디가 많았는데
그 잔디 풀 위에 사람들을 앉히셨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던지 여자와 어린이들을 빼고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셨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분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직접 나눠주십니다.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나눠주시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의 기록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사람이 예수께서 손수 직접 빵과 물고기를 각자에게 나눠주셨다는 사실을 못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락을 선뜻 내놓아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능케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일절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소년의 이름이며, 아버지가 누구고, 고향이 어디이고 세세히 밝혀서 그 선행을 한 소년을 기릴 텐데
성경은 일절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소년은 자기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참 착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부각되어야 할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밝히 드러나야 하고 인간은
감추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던 무리들>
이제 오늘 말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서도 그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여기 부스러기는 먹다 버린 음식 조각이
아닙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원형 그대로의 빵과 물고기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큰 무리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4-15절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먼저 예수님을 참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선지자라는
고백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예수님을 강제로 임금 삼으려는 태도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입니다. “야, 이런
분을 왕으로 삼으면 이제 우리 일하지 않고서도 평생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구나.” “이런 분을 왕으로 모신다면 평생 양식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이 생각 때문에 예수님께 왕관을 씌워드리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왕은
백성들을 통치하는 그런 측면에서의 왕보다는 신하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는 주로 왕의 의무
측면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의 모습은 놀랄 만큼 이기적이고 피상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이나 말씀, 그 분의 삶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보통 사람들이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이사와 기적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을 따릅니까?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무엇인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게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리교회에 나와서 무엇인가 나에게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마음이 편하다든지,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든지, 어떤 이유로든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고,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이 예수님 때문에 배가 불러지니까 예수님을 칭찬하고, 심지어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표적을 보고서 예수를 믿는 것을 소비중심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교회가 나에게 알맞을까, 어떤 교회가 내 필요에 부응할까, 이것저것 계산해서 교회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쇼핑을 하러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은 소비자가 철두철미
자기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 이 백화점 저 백화점에 쇼핑을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이런 소비자신앙에 있습니다. 교회는 내 구미에 맞는 대로,
내 편리와 내 이기심에 따라 마음대로 고르는 물건이 아닙니다, 쇼핑센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명자들이 자원해서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
신자가 아닌 생산자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마치 회비를 내듯이 일정분량의 헌금을 내고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쇼핑몰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생산해내고 하나님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이 내리교회에 나온 우리는
소비자신자가 아니라 생산자신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EGO EIMI의 신비>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차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은
다시 홀로 산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런 뒤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지요. 오늘 봉독한 요 6:16-21절 말씀을 보면 날이 저물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은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배를 저어 한 십 여리쯤 갔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오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는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사나운 풍랑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신비한 모습을 보고서는
놀랐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20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내니.” “나다.
”라는 말씀이지요. 영어로 “I AM.”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EGO EIMI.”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고백했던 참 선지자, 아니 왕 그 이상의,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EGO EIMI,”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뜻이지요. 어두컴컴한 밤에 큰 바람과
성난 물결 위를 홀연히 걸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은 단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 이상의, 참 선지자 그 이상의,
이 세상의 왕 그 이상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줄로 믿습니다.
요 6: 1-15절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께서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이 은혜를 영광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한 큰 무리는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아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다음에 16-21절의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EGO EIMI,”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자기계시 사건은 매우 한 밤중에 매우 고독하게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우러러 보는 왕좌 위에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은혜가
군중들이 바라는 세상적인 영광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참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려고 했던 것이지요. 은혜와 영광, 이 둘은 모두 예수님께 적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세상적인
영광으로 바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봉독한 엡 3: 17-19절 말씀을 다함께 읽으심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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