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 동안 설허신 경전
종이에 쓰여진 경전은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고자 한 법문에 찌께기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께서 설하고자 한 법문은
종이에 담애... 담겨질 수가 없고,
담겨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 요긴한 법문의 껍데기, 찌께기 그 일부분만이 경전에, 책으로 된 경전에 표현이 되아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설하고자 한 법문을
왜 바로 설해 주시지 못하고 그 일부만을,
그 껍데기만을 설해 주셨으며
그것만이 왜 종이에 올려진 채 지금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최고에 법은
입을 가지고 설할 수가 없으며
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설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귀 먹고 눈뜨지 못한 중생은 언제 눈을 뜨고 귀가 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자비를,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서
사십구 년(49년) 동안을 팔만사천의 법문을 설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법을 통해서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참 법문을 들어야,
듣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말로써 설할 수 없고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경전에도 쓰여지지 않는 진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서
스스로 그 도리와 계합(契合)이 되는 길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정체(正體),
그 바른 그 진리의 체(體)는 종래로 절성색이여.
원래 소리와 색상을 여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무슨 그 자체(自體)에 소리가 있고 그 진리 자체에 모냥이 있다면 눈으로 볼 수가 있고
귀로 들을 수가 있겠지만,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을
볼랴고 그러고 들을랴고 그것을 찾은 즉슨은
자최가 없어. 볼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판치생모라든지 ‘시삼마(是甚麽)’라든지 ‘
정전백수자’라든지 이러헌 교외별전,교밖에 따로 전해진
이 최상승법 조사선은 용궁(龍宮)에 있는 경전(經典)
속에도 이것은 들어있지 않다.
‘용궁에 있는 경장에도 들어있지 않는다’
한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불법이 사태가 나가지고 모든 스님네를 학살을 하고
모든 경전은 닥치는 대로 불을 사르고, 그렇게 해서,
그리고 온갖 사찰은 다 파괴가 되고 이렇게 해서
인도땅에 불교가 자최가 없어졌습니다.
그때에 용왕(龍王)이
부처님의 유촉을 받아가지고
그 흩어져있는 경전을 다 모아서 용궁에다가 보관을
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궁에 가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그 안에 다 소장이 되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궁에 있는 경장 속에도 ‘판치생모’나 ‘
정전백수자’ 이러헌 것은 들어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그 교외별전에
최상승법 이 조사선을 통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이론을 떠나서 참구를 허면,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일체사량분별심을 여기에
사용을 허지 말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를 하면,
처음에는 화두 들 때는 의심이 있다가
금방 의심, 화두가 없어져버리고 딴 생, 딴생각이 들어오고 그렇지만 딴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을 없앨랴고
허지 말고, 그것을 누를랴고 허지도 말고,
성화도 대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현전허게 된다, 들어지게 된다 그 말이여.
앞에 화두가 떠억 나타나게 돼.
앉아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서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걸어갈 때에도 고대로 있고,
누가 옆에서 떠들고 있어도 고대로 있고,
장바닥에를 가도 고대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의단이 독로여.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머지 안해서 화두를 타파허게 된다.
그 화두를 타파하게 됨으로써
조사에 면목을 볼 수가 있고,
자기에 참 면목을 볼 수가 있고,
삼세제불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