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건너는 지루한 비행시간은 옆자리에 앉은 60대 초반의 일본계 페루인과의 대화로 심심찮게 채워졌다. 상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어교육 금지조치로 일어를 통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인지, 일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이 충분치는 못했지만 페루에 대한 사전지식을 어느 정도 전해들을 수 있어 유익했다.
우리가 착륙할 리마공항은 상파울로, 리오데자네이로와 더불어 남미로 가는 입구이며 남미 제일의 현대식 공항이라는 것, 페루의 수도 리마지방은 사계절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으며, 5월에 '잉카의 눈물'이라는 극히 적은 양의 비가 올뿐이라는 것, 일교차가 심해 '전천후 복장'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 백인 지배에 시달리고 소외된 사람이 많았다는 것, 국민 절반 이상이 문맹이라는 것, 물가는 인플레이션으로 7,000%까지 상승한 해가 있었으나, 일본계 새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는 35%정도로 호전되었다는 것, 생활수준은 교사의 초봉 월액은 100$ 정도, 은행원은 250$ 정도이며, 월수입 500$ 정도면 중산층에 속한다는 것 등을 말해 주었다.
피차카막 유적지의 흙집
우리 일행이 리마공항에 닿은 것은 0시 30분, 안내된 호텔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눈을 비비며 6시에 조식을 마치고 바로 잉카문명의 첫 답사지 피차카막 유적지로 향하였다. 황갈색을 띤 바닷물이 출렁이는 해안을 벗어나 모래 벌판을 달리던 버스는 피차카막 유적지에 당도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평양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모래언덕 위에, 흙으로 해의 신전과 달의 신전을 세우고 있는 등, 잉카 사람들이 모여 살던 흔적이 역력하다. 온통 흙담과 흙벽만 있을 뿐 지붕의 흔적은 없다. 아마도 이곳의 그때 사람들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 지대이니, 바람과 외적을 막기 위하여 둘레만 막고 하늘과 태양을 믿으며 낙천적으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곳과 리마 사이의 길가 동네에는 기둥 철근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미완성의 집들이 많다. 우선 아래층만 지어 입주하고 난 다음 형편 닿는 대로 증축할 속셈인 것 같다. 오가는 길에 건장한 남자 가이드는 입을 연다. "잉카(Inca)는 태양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잉카인들의 건국신화와 조상설화 등은 모두 태양과 관련을 갖고 있고 태양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했습니다. B.C 1000년 이전부터 문화가 싹터 왔으나 잉카가 찬란한 왕국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A.D 1200년경이며 1533년 스페인 침략 전까지 약 300년 동안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여러 사료와 고고학의 연구로 대규모의 토목 건축공사와 뛰어난 예술, 그리고 복잡한 사회계층 구조와 풍습이 밝혀지고, 수학·천문학·의학의 발달과 종교 조직 및 활동 모습이 밝혀져,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하며 자못 어조를 높인다.
인체의 배꼽에 해당하는 쿠스코
우리는 이번 기행의 주요 목적지인 쿠스코로 향했다. 쿠스코란 배꼽이란 말로 중심을 의미한단다. 이곳은 해발 3,560m나 되는 고원에 있는 도시이며, A.D 1200년경의 잉카제국 수도이다. 공항 출구를 나서니 길다란 댕기머리에 신사용 중절모 같은 알팔파초 모자를 쓰고, 이곳 특유의 얼룩무늬 보자기 멜빵을 맸으며, 키는 자그마하나 어깨가 쩍 벌어지고 얼굴이 둥근 인디오들이 눈에 띈다.
엄지손가락 끝마디 만한 알이 촘촘히 박힌 옥수수 반 자루가 주식으로 되어 있는 이 지방 음식으로 점심을 즐기고, 유적지인 이반 요새, 제례장이었던 겐코·탐보마차이, 산토도방고 성당들을 답사하였다. 일행은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고원 도시임을 이미 알고는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찔어찔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해짐을 막지 못한다. 일행 중에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하고, 이 지방 특유의 예방제 풀을 코에 대기도 하며 야단들이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여인은 외간 남자인 나의 옆구리에 힙을 들이댄 채 쓰러져 눕는다. 몹시도 괴로운 모양이다.
잉카문명의 특색이 대규모의 토목과 건축의 거석문화(巨石文化)라더니 과연 괄목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요새의 석성과 돌벽의 견고하고 정교한 축석술에 경탄한다. 수 미터 높이의 큰 돌을 운반해 온 것도 놀랍거니와 돌과 돌 사이의 이음새가 완벽하다. 직각으로 꺾인 성벽 모퉁이를 하나의 돌로 처리했다. 그리고 이것이 천여 년 후에도 일그러지지 않게 역학(力學) 처리한 것은 이 시대의 축석술과 건축술의 우수성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전성기의 잉카제국은 쿠스코로 연결된 모든 도로를 돌로 깔았고, 신전 하나를 짓는데 하루에 3만 명씩 80년 걸려 완성할 정도의 강대한 국력을 가졌다. 또 스페인 군대에게 인질로 잡혀간 왕을 구하려는 흥정용 황금이, 궁전의 한 넓은 방에 사람 키만큼 가득 차 있었다니 그 부(富)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했다는 유능하고 진솔함이 풍기는 여자 가이드는 말을 잇는다. "잉카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는 세계사를 통하여 가장 심했던 정복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신처럼 섬겼던 왕이 인질로 잡혀갔다가 나중에는 처참하게 처형당하는가 하면, 예부터 내려온 태양신 숭배의 신전이 마구 파괴당하고 그 자리에 교회가 세워지고 했으니 말입니다. 또한 혼혈의 나라로 불리고 있는 것도 폭력적 침략의 한 증거지요."
잠시 후에 해설은 이어졌다. "그때의 사람들은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이자 성지이기 때문에 태양이 가장 빛나는 곳이고 인체의 배꼽에 해당하는 도시로 믿었으며, 각기 다른 색깔과 크기의 끈으로 나타내는 결승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경제생활의 기본은 농업, 수렵, 토기제작, 금속공예 및 가축 사육이었으며, 옥수수, 만디오까, 감자, 후추, 코카, 고추, 담배를 재배하였고 키니네도 생산하였답니다. 이것들은 후일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고산지대의 호흡곤란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해설하는 안내양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이곳보다 해발 1,000m 정도 낮은 유카이 지방으로 서둘러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냈다.
격류의 계곡과 기찻길
우루밤바를 버스로 떠나 오얀타이탐보 역에서 열차로 갈아타고, 마추픽추를 답사한 후 쿠스코로 돌아가는 것이 오늘의 여정이다. 기차는 아마존강 상류의 한 지류를 따라 잉카의 고도(古都) 마추픽추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강의 흐름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기차와 경주라도 하는 듯 하였고, 바위에 부딪쳐 깨지고 합쳐지며 거세게 흐르는 강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한편 강가에 핀 샛노란 꽃 레다마들은 마치 노란 비단을 계속 깔아놓은 듯했고, 계곡 사이의 웃자란 숲은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마음껏 자랑한다.
관광객들은 저도 모르게 "야! 어유! 장관이다. 절경이다. 움직이는 시네마스코프이다." 등등 감탄사와 함성의 연발이다. 산허리의 흰 구름도 이 절경에 도취되어 떠나지 못하는 듯 싶었다. 헐떡거리는 기차는 때로 이마에 닿은 듯한 절벽 바위산을 지나면서 가슴을 조이게도 하고, 간간이 원주민 인디오 가족들이 초라한 집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다.
버스로 갈아타기 위하여 조그만 역에 내리니 잡상인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든다. "오네짱! 마당!"을 연이어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일본인 그룹으로 오인해서인지, 그 동안 일본인들이 주로 많이 다녀가서인지 모르겠다. 버스는 그야말로 심산유곡(深山幽谷) 속을 지나간다. 마지막에는 60도 가량의 비탈진, 커브 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올라간다. 가끔 오싹오싹 전율마저 느끼게 하는 험한 산길이다. 이렇게 찾아 올라간 곳이 옛 성새도시(城塞都市) 마추픽추이다.
마추픽추의 불가사의
마추픽추는 해발 2,300m의 험한 바위산 위에 있고, 우루방바강 줄기와 웅장하고 준엄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비경 속에 자리한다. 16세기 초 스페인 군에 쫓긴 인디오들이 이곳에 와서 신전과 궁전을 새로이 짓고, 잉카 왕도를 재현했다. 네모난 돌이나 거대한 화강암으로 신전과 성벽을 쌓고 수로와 못을 만들었으며,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 경작지를 만들었다. 이 밖의 유적으로는 궁전, 주거지, 왕녀의 목욕탕, 묘지, 제사장들의 거주지, 교수대, 해시계, 돌절구 등이 있다. 셋으로 된 계단과 세 개의 턱이 있는 돌기둥은 우리가 성자(聖字)로 여기는 '三'의 숫자와 상통되어 흥미롭다. 좋은 신, 보통 신, 나쁜 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태양의 신, 바람의 신, 물의 신을 나타낸 것 같다고 안내양은 말한다. 높은 봉우리 위에 있는 돌 해시계에 손을 얹으면 복이 온다하여 관광객은 앞다투어 손을 얹는다. 필자도 내 나이 또래의 백인과 함께 돌에 손을 얹은 채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약 34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곳인데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정복사를 연구하는 빙햄 교수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의문스럽게 사라진 이곳 인디오의 행방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빙햄 교수는 '사라진 잉카의 도시'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집단으로 매장된 172구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그 중 75%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과 추측이 일고 있다고 한다.
태양과 가까워지려는 집념에서인가, 외적을 피하고 방어하자는 수호차원에선가, 하필이면 왜 이렇게 높고 험한 돌산에 신전 및 성곽과 함께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을까? 어떻게 이 거석(巨石)을 예까지 날라 왔으며, 놀라운 공학과 미학은 어디에서 배워 왔을까?
철학과 기술은 태양의 신으로부터 배우고, 거석을 다루는 힘은 바람의 신으로부터 배웠으며, 일시에 사라진 잉카인의 피는 물의 신으로부터…… 순간 저 하염없이 흐르는 우루밤바 강물은 잉카인의 눈물로 비추기도 한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잉카의 인걸과 백성을 지켜봤을 저 산과 강은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도 불가사의, 저렇게 생각해도 불가사의 투성이다.
다시 열차로 2시간 정도 달려 쿠스코로 돌아온 것은 저녁 어둠이 깔릴 무렵이다. 고지대 호흡 곤란으로 고생하던 몇몇 사람은 미리부터 괴로운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하루 사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해 보였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쿠스코에서 하룻밤을 참아 넘기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일찍 자리를 차고 일어나 산책 겸 거리 구경에 나섰다. 진행 중인 유적지 발굴 현장이 눈에 뜨이고, 길가에 전시한 잉카의 옛 그림을 재생한 대형 벽화가 인상적이다. 행인들과 거리 모습이 인디오 문화와 메스티조 혼혈 문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서둘러 공항으로 나가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행의 모습은 마치 광산 막장을 다녀 나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사람처럼 환하고 가벼워 보인다.
리 마
페루 수도 리마에 되돌아오니 처음 만났던 건장한 현지 남자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반긴다. 숨쉴 사이도 없이 찾아간 곳은 유명한 황금박물관이다. 순금 허리띠와 금관 장식이 신라시대의 것과 너무 흡사하여 놀란다. 세계적으로 넓다는 이르마스 광장, 토속 종교를 압도하는 산프란시스코 성당 등을 두루 살폈다. 쉬는 시간에 2/4인디오를 자칭하는 우리 가이드는 외할머니가 인디오, 외할아버지는 스페니쉬, 친할머니가 인디오, 친할아버지는 니그로, 그러니까 자신의 몸에는 2/4인디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라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혼혈의 나라임을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잉카는 원래 다부일처제(多夫一妻制)였고, 엄격한 신분사회였다는 것도 덧붙여 알려 준다.
6일 간의 바쁜 잉카문명 답사를 마친 우리는 아쉬움을 페루에 남긴 채 아즈텍 및 마야문명을 답사하기 위하여 멕시코로 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