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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물론(活物論)적인 수사가 돋보이는 시의 표정들/ 이경철(시인, 문학 평론가):시인뉴스 포엠 (poetnews.kr)
활물론(活物論)적인 수사가 돋보이는 시의 표정들/ 이경철(시인, 문학 평론가)송유미 시집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 애지출판사 간행
활물론(活物論)적인 수사가 돋보이는 시의 표정들
— 송유미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 애지출판사 간행
이경철
눈송이 머리에 이고 달리는 화차에서
주르르 흘러내린 조개탄을 아이들 줍지요.
까만 조개탄은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지요.
불이 붙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보석이지요.
-「검은 염색공장 아이의 일기」부분
█기억, 감성의 원점으로 거슬러 오르는 항해
이 시집 원고를 받아보기 바로 전, 원로와 신인 시인들 6명이 함께한 방담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요즘 신인들의 시는 통 알아들을 수 없다’, ‘이러다가 시에서도 세대 간의 소통단절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게 아니냐’는 기성시인들의 불만과 우려에 대해 신춘문예에 당선돼 갓 등단한 신인들의 솔직한 답변을 듣기 위해 기획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원로들은 “우리들은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로 무언가 절실함이 있었다. 그 절심함으로 우리는 서로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시인들은 그런 절실함의 체험이 없어 그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요즘 젊은 시를 진단했다.
이에 대해 젊음 시인들은 “궁핍을 모르고 자라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나갈 곳이 없다. 그래 청춘백수시대라고들 하지 않나. 나오자마자 낭떠러지인 그 절망감에 자꾸자꾸 개인화, 내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통의 단절을 부른 게 아닌가한다”고 항변했다.
말장난이니, 소통단절이니 힐난은 받지만 자신들도 시대와 자신에 솔직 하려고 애쓴다는 말에 원로들은 그런 시대나 세대의 단순한 반영을 넘어 뭔가 ‘전망’을 요구했다. 리얼리즘이나 현실주의적 전망을 아우르는 인간의 위의와 깊이를 지켜내기 위한 범 휴머니즘적 전망이 시를 영원히 시답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위 연장선 위에서 송유미(宋侑眉)의 이번『검은 옥수수밭의 동화』시집은 강한 흡인력이 있다. 기억의 끄트머리까지 파고들면 이런 부류의 어둠과 외로움과 슬픔이 똬리 틀고 있음에 공감케 하는 힘이 있다.
가령, 어둠은 내리는데 굴을 따러 갔다거나, 장에 나간 엄마가 안 돌아올 때 집에 혼자 남은 아이가 느끼는 감정. 우리네의 원초적 감성(영혼)을 잘 짜인 구성과 이미지 등 능숙한 시적 문법으로 흔들어놓고 있다.
해서 이번 시집은 감성의 원형을 찾아 나서는 동화로 읽힐 수 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적확한 이미지들이 그런 탐색의 길을 깜박이며 비추고 있다.
감성적 동화이면서도 이번 시집은 우리네 삶과 사회의 실존적 깊이와 휴머니즘적 넓이를 지니고 있다.
김종길 시인은 송유미의 시에 대해 “자연과학자나 분석철학자한테서 볼 수 있는 치밀함과 엄밀성으로 시를 빈틈없이 다정다감하게 짜나가는 시인이다.”고 평한 바 있다. 시인이자 연출가인 이윤택은 그녀의 시는 ‘손바느질로 촘촘히 뜬 파스텔 색조의 조각보’로 이야기했다. 최재봉 한겨레신문 문학 전문기자는 송 시인의 시의 바탕은 ‘울음’으로 보았다.
이 글의 ‘프롤로그’로 올린 시구에서 ‘조개탄’ 이미지의 변주를 보시라. 가난했던 어린 시절 연탄이 대중화되기 이전, 조개탄을 난방용으로 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석탄가루를 반죽해 다이아몬드형으로 빚은 까만 조개탄.
“눈송이를 머리에 이고 달리는 화차”에서 흘린 조개탄들을 주워 난로에 넣으면 그 틈 사이사이에서 금방 불꽃의 혀가 날름거리던, 배고프고 춥던 시절의 한 끼 식량같이 귀하게 여겼던 검은 조개탄.
시인은 기억 속의 그 조개탄을 찾아가 다이아몬드 등 아름다운 보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조개탄은 “눈송이를 머리에 이고 달리는 화차”에서 흘러내린 것이다. 눈송이의 하얀색과 차가운 촉감의 이미지와 대비돼 조개탄의 까만색과 따뜻한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달리는 화차’의 이미지는 이 시 맨 처음에 드러난 “엄마의 재봉틀은 밤 기차예요. 달달달 내 잠속으로……”에서 볼 수 있듯 ‘엄마의 재봉틀 소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밤새도록 달달달 재봉틀을 돌리는 소리가 화차 이미지로 변용된 것이다. 이같이 적확한 이미지 창출과 변용이 어둡고 슬픈 기억들을 있는 그대로 현상해내면서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내고 있다.
█기억의 현상학, 나쁜 실존의 한계상황
나의 유년은 온통 검정고무신으로 가득했죠. 폴리호 태풍이 불던 날이던가요. 자꾸 진흙탕 속에서 미끄러지는 신발 때문에 내 몸이 블랙홀에 빠져 들어갔지요. 신발이 없는 삶이 얼마나 편안한지 그때 알게 되었죠.//나는 그래도 잠이 들면 신발 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죠. 엄마의 자궁같이 따뜻하고 비릿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면 난 꽃으로 피죠. 나비가 날아오르죠.//내 몸은 점점 꽃잎처럼 가벼워지죠. 모두모두 나비가 되어 하늘로 떠나고 댓돌 위에 검정고무신들만 남았어요. 이제껏 내가 신은 신발은 몇 척이나 될까요.//종로 앞에서 세종로 앞에서 충무로 앞에서 자꾸만 잃어버린 신발을 신어 봐요. 흩어지는 나뭇잎들은 또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신다가 버렸는지 헬 수도 없고요. 몸의 감옥을 떠다니는 나뭇잎 한 척.
(「항해」부분)
문학 속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의해 변용된 모형의 현실은 아닐까. 작가의 의식을 나타내기 위한 재구성된 현실은 아닐까.
그럼,「항해」을 보자. 이 시는 종로나 세종로 등 도심 지하도 신발가게에서 이 신발, 저 신발 신어보며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내면에의 “항해”이다. 해서 신발들은 기억의 원점으로 떠가는 배이기에 단위도 켤레가 아니라 ‘척(隻)’으로 잡았을 것이다.
가로(街路)에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들을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신다가 버렸는지 헬 수도 없”다며 신발 이미지로 바라본 대목이 압권이다.
새로 산 신발이 닳을까 신지 않고 끼고 다니고 잘 때도 품고 잤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 누구든 품고 있을 신발에 대한 보편적 기억을 환기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네의 풍습에 ‘신’은 ‘발’과 마찬가지로 인체의 대유로 간주되어 왔다. 발이 육대의 받침대. 그리고 삶의 근거, 존재의 기저를 상징해 왔다. 죽은 사람이 남긴 최후의 자아로서의 ‘신발’이 떨어지는 나뭇잎에 상징화하여, 삶의 통과제의(通過祭儀)를 실연(實演)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꾸만 잃어버린 신발을 신어” 보는 ‘신발’은 기억을 거슬러 오르게 하는 배, 방편(方便)만이 아니다. 신발, 그 사물의 원형(原型)을 찾아 우리네 기억의 원형과 맞닥뜨리는 방법론은, 사물에 시인의 감정을 주입시키는 감정이입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내력과 원형을 돌려줘, 시적자아와 화답하게 하고 있는 활물론(活物論)적인 수사 방법이라 하겠다.
사람은 성냥을 닮았다./성냥은 사람을 닮았다. 포플러나무는/관(棺)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좀 오래된 기억이다. 성냥으로 집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는 것, 나의 凹凸이 심한 리비도는 이런 불장난에서 시작된다.(중략)//그리고 간단하게 성냥갑 속으로 들어가 버린 집 마당, 패랭이꽃들 여전히 아름답다. 하루 종일 내가 쓸 시간은 없다. 모든 사람은 망가지기 위해 존재하고, 모든 시간은 바람에 흩어져 뒹군다.
(「포플러나무집」부분)
“사람은 성냥을 닮았다./성냥은 사람을 닮았다. 포플러나무는/관(棺)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포플러나무집」의 ‘프롤로그’이다. 이는 시에 강렬한 인상을 주기위해 제목 바로 밑에 붙인다. 시의 한 요소나 장치가 아니다. 이 경우는 한 편의 극서정시로도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논어에 나무(木)는 인자(仁者)의 성품을 가리킨다. ‘융’은 나무를 리비도의 상징으로도 보았다. 시의 주인공 역시, “성냥으로 집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는 것, 나의 凹凸이 심한 리비도는 이런 불장난에서 시작되”었다고 진술하고, “모든 사람은 망가지기 위해 존재하고 모든 시간은 바람에 흩어져 뒹군다”는 비극적인, 묵시론적인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경구식으로 짧게 드러낸 게 “프롤로그”이다. 송유미의 경우 현실을 빌어 환상적 이미지로 대치 재구성하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해서 명확한 이미지 사용으로 사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몸이 집인 사다리,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몸을 눕힐 짬도 없이 저벅저벅 누군가의 오르지 못하는 층계가 된다. 허전한 빈 몸으로 처마 밑을 서성인다. 지상의 집들은 사다리에 기대어 잠이 드는 시각, 몸이 사다리인 야곱의 사다리, 잠들 수 없는 계단이 되어 서서 꿈꾸는 희망이란 층계를 벗어나는 꿈을 꾸지만 오늘도 누군가의 고속 승진을 위해 올라간다. 지상으로 올라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예수님처럼 내려오지 못한다.
(「야곱의 사다리」부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레이저 광선을 일정각도로 쏘아 반사되며 빛이 한 층 한 층 올라가게 하는 환상적인 설치예술「야곱의 사다리」를 선보인 적 있다. 최첨단 설치예술작품인「야곱의 사다리」를 감상하며 실제 성경 창세기 속의 천상으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12세기 프랑스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두고 “남의 고통에 절실히 공감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분열된 삶을 하나로 묶는 화해이자 속죄의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 시의 “사다리”는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하지 않는 듯 하다. 그저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사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삶을 은유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아무도 그의 “사다리”가 되어 주지 못한다. 도리어 남의 “사다리”가 되어 살아간다.
사실 이게 우리네 실존양상이 아니겠는가. 지상과 천상, 현실과 이상을 오가지 못하고 그 중간에 못 박힌 고통스런 존재(운명). “지상으로 올라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예수님처럼 내려오지 못”하는 사다리. 그런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꿈을 꾸며 또 누군가의 “사다리”가 되어.
길 위에서 잠들지 못했다. 잠들면 길을 잃었다. 길은 잠이 없었다. 잠엔 꿈이 없었다. 잠들면 눈이 내려 마을을 지우고 발자국 없이 길 끝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유 찾아 그는 예까지 왔다 했다.//망망대해 같은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는 그 잔잔한 물결 위에서 쉬지도 못했다. 한시도 현을 놓아버리지 못했다. 낙인보다 아픈 수인 번호를 가져야 했다. 마른 목을 적시는 소주 한 방울의 달콤함에 취해 점점 그는 문둥이도 아닌데 눈썹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25…」부분)
누가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는 데서부터 참된 문학은 시작되었다고 했던가.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서 거주하고 있는 “새터민”들의 고난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시의 주인공은 “길 위에서 잠들지 못했다. 잠들면 길을 잃었다. 길은 잠이 없었다. 잠엔 꿈이 없었다”고 고해한다. 그는 목숨보다 더 귀한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왔지만, 새 삶도 이전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남한땅에 정착하면서 받은 주민등록증(뒷자리숫자가 125…로 시작되므로) 인해 그는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부여 받게 된 “125…” 숫자가 “낙인보다 아픈 수인번호”가 되었다. 목숨을 담보하고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월남한 단독자로서의 단절감. 뿌리를 내리고 싶지만 뿌리를 정착할 수 없는 불모성,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극기하고자 하는 의태의 의지와 절박한 상황이 진실된 현실로 묘사된다. 또한 새터민에 대한 적극적 지원과 보호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환상적 기억과 아픈 역사와 현실이 마주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그건 아쟁소리였어. 바람이 옥수수 밭을 파도처럼 흔들 때 마다 아이들의 앙상한 팔과 다리가 탄피처럼 날아다녔어. 미친 엄니가 옥수수 밭에 불을 질렀어. 무서운 불길에 하늘이 까맣게 탔어. 우르르 쾅쾅 번개지뢰를 밟은 고양이 한 마리가 매일 밤 꿈속을 날아다녔어. 오래 오래 빈 집들이 불탔어. 숨이 찬 기차가 산을 이끌고 멀리멀리 달아났어. 숯검정을 얼굴에 칠한 아이들은 날마다 멀어져가는 기차 꽁무니 매달려 서울로 서울로 떠났어.
(「1948년 4월 13일생―검은 옥수수밭의 동화」부분)
이 시집의 표제인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를 부제로 달고 있다. 1948년 4월 13일생의 이 주인공은 아쟁소리를 들으며 전쟁에의 처연한 기억들이 촉발된다.마른 옥수수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된다. “가볍게 몸을 부딪치며 날아가”는 옥수수 알갱이는 “소리의 눈물”이 된다. 소리가 눈물이 될 수 있다니.
독특한 상상력과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기차처럼 줄줄이 시를 끌고 가며 한 편의 동화를 쓰고 있다 하겠다. 해서 내용,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 없이 이미지만으로 감상해도 훌륭할 정도로 송유미의 특장이 빛나는 시이다.
총구멍 뚫린 그 여름 하늘에서 한 달 내내 장맛비 쏟아졌지. (중략) 큰오빠는 ‘슈샤인 보이’가 되고, 막내 누이는 식모살이로 팔려가고, 작은 오빠들이랑 껌 팔다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면 앉은뱅이 재봉틀에 엎드려 엄마는 자고 눈 먼 할머니 뿌연 실 보풀 날리며 괴뢰군 군복 뜯다가, 신문지에 궐연 말아 피우며 말했지.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 지붕 위로 날아온 까마귀 떼― 1947년 12월 8일생」)부분
에서처럼, 전쟁은 필로써 표현하기 부족하다. 이 시는 물자가 부족해서 괴뢰군 시체의 군복을 벗겨 와서 검은물을 들여 식량과 맞바꾸어 살아가는 절박한 6. 25 참변 중의 가족상황이 어린이의 시선에 의해 핍진하게 그려진다.
‘1947년 12월 8일생’이란 부제를 단 「미군부대 옆 염색공장 지붕 위로 날아온 까마귀 떼」는, 껌팔이로 나선 아이가 주인공이다. 시 전체에 스며드는 억수로 퍼붓는 “장마 빗소리”가 그때의 상황을 선명하게 떠올려준다. 물론 이 시 속의 현실 속은 전쟁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시적화자의 의식 세계가 저변에 깔려있다. 들은 바로는 송유미는 이산가족의 3세이다. 이러한 간접 체험과 시의 주인공의 삶이 맞물려, 민족의 비극사를 미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송유미의 이번 시집은 특이하게 시의 제목에 생년월일로 적고 있는 시편이 많다. 이는 그때 태어난 사람들의 유년의 기억이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 기억들을 망각 속에 묻힌 뼈아픈 현실로 병치하고 있다 하겠다.
파리 똥 묻은 꽃은 아름답네. 쥐똥을 꿈꾸는 아이도 있네. (중략) 동두천 막내 이모의 짧은 치마로는, 밤이면 굴뚝으로 내려오는 국방색 사내들과 한 지붕 아래 살이 닿지 않고는 잠들기 어렵네.(「1958년 3월 8일생―쥐똥나무」부분)
“인간이 조금만 덜 돌았더라면 전쟁으로부터 생기는 비극에서 벗어났을 거다.”고 앙드레 지이드는 말한다. 전쟁 중에 가장 고생하는 이는 군인이 아니고 아이와 여자라는 말도 떠오른다.
짧게 가지 쳐진 쥐똥나무에서 짧은 치마(미니스커트)를 입은 막내 이모의 기억을 시의 주인공은 떠올리고 있다. 미군과의 잠자리에서 번 달러(dollar)가 (산타가 준 선물처럼) 가족들의 호구책이 되었던, 그 전쟁의 검은 기억들이 쥐똥나무 이미지와 교직되어 있다.
“…쥐똥나무에는 영혼이 흐른다./열매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그 처연한 눈빛을 만질 수 있다.”는, 이 시구는 마지막 연인데, “양공주” 존재의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쥐똥나무)가 아니다. 둘의 이미지가 서로 대등하게 교호하며 실존양상을 진실되게 현실화시킨다.
“비 맞은 중처럼 검은 연기 중얼중얼 피어오르는 판잣집 촌 지나면 양공주 촌이 있었지”라고 기억으로부터 시적화자의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 사물의 정령을 불러내는 방식이다.
고소공포증을 모르는 유리를 ‘K'가 닦는다./죽음보다 깊고 깊은 유리의 희망을 닦을수록/K의 이력서는 적을 말이 없는 편지처럼 깨끗해진다.//처음부터 학력, 경력, 운전면허증 따위는 필요 없는 직종./K는 실어증에 걸릴까봐 종종 유리 너머 K에게/‘K야’ 하고 고함친다. 그러나 빌딩의 유리 안/사람들은 K의 말을 듣지 못한다./그리고 되새 때가 점묘화를 그리는/그날 오후 세시/K는 추락했다.
(「1971년 9월 18일생―유리의 증발」부분)
에서의, ‘K’는 고층 빌딩 유리닦이 노동자이다. 매일 유리를 닦고 있는 그에게 유리는 유리가 아닐 것이다. 곡예사처럼 공중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 그는 날마다 관짝을 등에 지고 노동을 한다.
매일 밤 자면서 추락하는 꿈을 꾼다. 그런 "K"에게 죽음은 삶의 일부이리라. 아니 삶이 죽음의 일부일 수밖에 없으리라.
“죽음보다 깊고 깊은 유리의 희망을 닦을수록/K의 이력서는 적을 말이 없는 편지처럼 깨끗해진다.//처음부터 학력, 경력, 운전면허증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공중에서 줄을 타고 유리를 닦으면 닦을수록 “K"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그래서 “종종 유리” 속에 비치는 자신(허상)에게 “K야”하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을 매일 유리 속에서 존재 확인하며 힘든 삶을 지탱한다. 그러므로 “그날 오후 세시 K는 추락”한 것이 아니다. 계속 “추락”중인 삶에의 “추락”이다. 그렇다. “K"의 세상은, 허공이 바닥인 관계로.
‘…생(生)…’ 시편들을 통해 송유미는 이렇게 시대와 상황이 변해도 여전히 소외적인 인물(인생) 등을 시의 현실 속에 환상적으로 이미지화한다. 그래서 아프고 슬프지만 아름답다.
█ 오늘의 삶의 고해를 건네주는 도저한 휴머니즘
중앙역 13번 비상구는/모래로 만든 계단이다./실크로드의 꿈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한 뼘의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벼를 심듯이/층계에 걸터앉아 김밥을 팔고 잔술을 판다./중국산 가방 폭탄 세일을 한다.//(중략)//한사코 층계가 되기 위해/태어난 13번 출구
(「중앙역 13번 계단 사람들」부분)
에서처럼, 이용하는 인구가 많은 “중앙역”의 13번 계단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북적이는 계단에서 김밥을 팔고 잔술을 팔고 가방을 팔고 앵벌이를 하고 새점을 치며 살아가는 이 시의 주인공들은 아등바등한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익명에게 ‘자릿세’까지 내며 살아낸다. 이러한 풍경을 경작하는 계단식 논밭에 비유하여 모사(模寫) 한다.
“보이는 눈에만 보이는 모래사막”같은 13번 계단은 늘상 중국 황사(모래바람)으로 눈을 뜰 수 없다. 이 계단에 빌 불어 살게 된 이상 이 계단을 벗어나면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막다른 골목과 같이 공장이 망해서 “중국산 가방”을 팔아야하는 노동자일 수도 있는 이들, 이들의 삶 속에는 중국물류가 뼛속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해서 “중앙역 13번 계단”은 삶의 한계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비상구도, 위로 올라가는 층계도 아니다. 살아 버텨야 하는 계단이다. 소재는 다르나 주제가 같은 의미에서 「야곱의 사다리」의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라마승이 되신 당신을 만나러 날마다 파고다에 가지요. (중략) 오늘, 당신의 사진 속에서 세상을 고파하는 눈빛 속에서 거꾸로 어리는 파고다 탑을 보다가 알았지요. 여기가 ‘다고파공원’이라는 것을요. 기념탑 아래서, 노숙자 결식을 해결해주는 무료급식 티켓을 받아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지요. 고픈 배 채우고 벤치에서 졸고 있는 나에게 노신사, 그게 고파 다가왔지요. 이것 봐, 색시, 티켓 하나 끊을까? 왜 티켓이란 말이, ‘티벳’으로 들렸을까요?
(「그 섬, 파고다」부분)
서울 속의 ‘섬’은 몇 개나 될까.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파고다공원’은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집에서 쫓겨난 노인이나 노숙자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시의 주인공들은 최하층의 여생이지만 아직 사회에서 하고픈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고픈’ 것은 가난에 의한 고픔이 아니다. 마음의 ‘고픔’이다. 나이만 많았지 이들은 건장한 노인층이 대부분이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소외된 자들의 해방 공간, 파고다 공원은 현 우리 사회의 복지제도의 모순 등이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성자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으로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실제 파고다 공원에는 노인층을 상대로 속칭 ‘박카스 아줌마’가 존재한다. 오늘의 섬, “파고다 공원” 은 고령화된 시대가 낳은 고도(孤島)이다. 이러한 부조리를 해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머리에 석남꽃을 꽂은 사내가 지하도를 지나간다. 발가락 나온 잠이 따라간다.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두 개 잘린 바람이 전광판 속 사막을 지나간다. 허기진 가로등이 전화 부스에서 야식 배달시킨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잠만 잘 쪽방이 있다고 외치며 지나간다. 잠을 자야 꿈을 꿀 수 있다. (중략) 세상사,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머리에 석남꽃을 꽂은 사내가, 죽은 지 사흘밖에 안 되는 그대의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다. …달이 해골바가지처럼 뒹구는데.
(「석남꽃잠-꽃거지 아재」부분)
죽은 자가 저승에서 석남꽃을 꽂고 사랑하는 사람 집에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도 전하듯 석남꽃은 이승저승을 구분 없이 오가게 하는 꽃이다. 그런 석남꽃 설화를 바탕에 깔고 오늘의 꽃거지들을 다루고 있다. 실제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꽃거지 아재”를 시 속에 현실화시키고 있음이 이채롭다.
잠에서 막 깨어난 허기진 노숙자 모습과 주위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미지들이 경쾌하고 아름답다.
주위 사물들의 풍경이 그대로 노숙자 마음과 교호하며 이미지들이 펄펄 살아나고 있는 시이다. “허기진 가로등이 전화 부스에서 야식을 배달시킨다”는 이미지를 보시라. 전봇대에 닥지닥지 붙은 야식 배달 전단들과 그 옆의 텅 빈 전화 부스, 그리고 허연 가로등 불빛의 사실적 풍경과 허기진 노숙자 심경의 절묘한 배합을. 사물을 주어로 내세워 역동적으로 살아나는 물활론적인 이미지들을.
이런 정치하고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창출하며, 또 이승저승 구분 없이 삼라만상 생령(生靈)들이 두루두루 통했던 신화적 (동화적) 상상력으로 오늘의 꽃거지들의 “삶”은 “꿈”이고 그 “꿈”은 “삶”이라며 존재 이유를 주고 있다.
연산동 지하철역 가려면 해원정사 지나야 한다. 결코 해원정사 가는 길이 아닌데 감로탱화 그려진 담장 밑을 지난다. 4월의 꽃그늘에 앉아 구겨진 종이컵 놓고 구걸하다 보면, 나도 나를 몰라, 해원정사 심우도 속을 헤맨다.//(중략)//일 년 이 년 석삼 년을 걸어도 사방팔방 어디로든 통하는 연산동 지하도 지나면 입전수수(入廛垂手), 나는 나로 돌아간다. 맹한 벚꽃 피고 지는 오늘의 터널 속으로 빛보다 빠른 소 한 마리 흰 수레에 지하철을 싣고 달린다.
(「연산동 심우도(尋牛圖)」부분)
왕래가 많은 지하철역 주변 절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를 소재로 한 시이다. 불교에서 깨달음, 참진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열 단계에 비유해 10장의 그림으로 그려 쉽게 깨닫게 한 그림이 심우도, 혹은 십우도이다. 심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는 잃어버린 소, 즉 마음의 본성을 되찾고 다시 속세로 나와 중생들과 한 몸으로 어우러지는 지경이다.
위 시는 나와 남, 중생과 부처가 그대로 하나가 되는 그 입전수수의 경지에 아주 자연스레 들어서고 있다. 절에 가거나 토굴에 들어가 면벽참선 결과 들어선 소승적(小乘的)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속을 진솔하게 파헤치고 들여다보며, 한계적 삶에 부대끼며 얻어낸 대승적(大乘的) 지경이다.
꽃그늘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이 시인인지 걸인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는 지경. 그런 본마음으로 돌아온 주인공 ‘소’는 오늘도 수레에 지하철 인생을 싣고 광속도로 달리고 있다.
위 시편들은, 밑바닥 삶을 다루고 있으나, 대긍정적인 시선이다. 이것이 슬픔을 아름답게 읽히게 하는 힘인 것도 같다.
█ 삶이 시다, 시가 삶이다
ⅰ)운주에서 손 없는 머슴 부처 만났다./초록은 동색이라고 참 반가웠지만,/두 손을 기브스하고 있어/악수 청할 수 없었다.//(중략)//사지 멀쩡한 부처 하나 없는/운주의 천 명의 부처들,/팍팍한 돌 속에서 다리 없는 부처는/팔이 없는 부처의 팔이 되어주고/눈이 없는 부처는/귀가 없는 부처의 귀가 되어주며/팔 없는 머슴 부처의/여여의 손이 되어/운주(運舟) 한 척 정박해 놓았다.
(「돌 속에 처음부터 부처가 있었네」부분)
ⅱ)영도 남항 선체 수리장 닻줄에 묶인 갈매호, 누가 사글세라도 들어와서 사는지, 모릿줄에는 기저귀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붉은 다라이에 패랭이꽃 하늘거린다. 검은 파도 철썩거리는 배의 옆구리에 적힌 갈매호 이름 석 자, 정겨운 문패인양 읽힌다. 더러 길 잃은 철새들도 하룻밤 묵었다 가는지, 새똥 하얗게 쓴 브리지 창에서 깃털 같은 따뜻한 불빛 새어나온다. (중략) 몸에 익은 뱃길 하나 기억나는지 쿵쿵 망가진 이마를 방파제에 찧으며 녹슨 무적(霧笛)을 부-웅 울린다.
(「물위의 집」부분)
송유미의 시에는 특이하게 “배”가 많이 등장한다. 세상이 억울하고 삶이 팍팍할 때면 한 번 쯤 누구나 찾게 되는 화순 운주사(運舟寺).
ⅰ)에서의 시선은 깊고 넓다. 쪼다만 미완의 불상들을 만나고 있으나, 주인공은 도심 속 살아 부대끼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군상들을 만나고 있다. 아니 통정(通情)하고 있다.
문득 이성계에게 일갈하는 무학 대사의 말이 떠오른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다 부처이다.” 그렇다. 심안은,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부처를 본다.
무한대로 열린 세상은 여여“如如” 할 수 밖에 없다. 성한 오른 팔이 부족한 왼팔을 돕듯이 “다리 없는 부처는 팔이 없는 부처의 팔이 되어” 저 미륵의 세상으로 저어가는 큰 배 한 척을 그려 보이고 있다.
ⅱ)와 ⅰ)과 다른 시편이지만 결국 같다. “검은 파도 철썩거리는 배의 옆구리에 적힌 갈매호 이름 석 자, 정겨운 문패인양 읽힌다”에서, 유년시절 잃어버린 고무신 한 척이 오대양 속속들이 항해하고 돌아와 집 댓돌 위에 단정히 놓인 듯 선명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ⅰ)은 도심에서 밀려 산비알에 자리 잡은 산동네 판잣집의 군상을 부처화하고 있다.
ⅱ)는 전세, 월세의 대란에서 바다로 쫓겨난 폐선에 둥지 튼 오갈 데 없는 “철새”에게 조명을 비춘다. ⅰ)과 ⅱ) 모두 그래서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듯 평화롭다.
남해 노도(櫓島)에 갔지요./뾰족한 가시들 다투어 허공을 할퀴고 있었지요./구운 굴비 한 마리 올려놓고 삼단머리채/풀고 우는 한 많은 파도소리도 있었지요./탱글탱글 가시 손톱 끝에 피 흘리는 봄도 보았지요./고통 밖에 없는 사랑이 사랑이냐고/오갈 데 없어 찾아온 나그네에게/죽은 당신이 산사람들보다 더 다정하게 반겨주었지요./(중략)/가시뿐인 나무들은 가시 찔린 데 없는/시공(時空)을 새둥지로 품고 있었지요./작고 어린 새들은 이를 너무 잘 알고/넉넉한 어미 품처럼 파고들며 울었지요.
(「탱자의 편지」부분)
“시는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의 음악이다.”고 누가 말했던가. 만 원짜리 세일 신발처럼 시들이 세일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 시란 무엇이라고 감히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생략하고,
송유미의 이번 시집 중 너무 아름답기에 다시 읽게 되는 「탱자의 편지」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나에게 굳이 누가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시는 삶이다”고 말하고 싶다.(물론 이런 생각이 몇 시간 후 바뀔 수도 있겠지만)
단언하면 송유미의 시의 이미지들은 아름답고 아프지만 살아있다. 머리채 풀고 우는 파도소리 등 애니미즘적 상상력과 이미지들이 아프면서도 아름답다.
“탱자 향기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왔어요”(조의홍 시인이 「탱자의 편지」두고 “고통을 배가 시키는 절창이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시도 사랑도 고통의 산물이다. 고통 없는 사랑과 시가 넘치는 세상이지만…그럼에도 사랑도 시도 고해(苦海)를 비추는 햇살이기도 하다….
송유미의 시의 주인공들이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되길 빈다.
해설 필자/ 이경철 李京哲
동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문예중앙』, 랜댐하우스, 솔출판사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을 발표했다. 2010년『시와시학』으로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만해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대중문학과 대중문화』,『천상병을 말하다』와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시가 있는 아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