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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전 세계인들이 즐겨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2011년 3월, 유네스코 선정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탄생지
오베른도르프(Oberndorf)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 감사 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 아기 잘도 잔다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성탄 성가는 아마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아닐까!
이 성가는 1818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오베른도르프(Oberndorf)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탄생했다.
오베른도르프는 잘자흐 강을 끼고 독일 남동부 라우펜 마을과 마주하는 오스트리아의 국경 마을로, 모차르트의 고향 잩츠부르크에서 약20km떨어진 곳에 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초연된 오베른도르프 성 니콜라우스 성당은 인근 잘자흐 강으로 소금을 실어 나르는 인부 가족들을 위해 설립된 성당이었다. 잘자흐 강물은 성당 신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젖줄이었다. 강을 이용해 소금을 날랐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가 소금 무역으로 유명했다. 잘자흐(Salzach), 잘츠부르크(Saltzburg)란 이름 자체가 소금과 관련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잘자흐 강은 우기 때 자주 범람해 주변 마을과 도시에 큰 피해를 주었다. 성 니콜라우스 성당은 1900년대 초 잘자흐 강의 범람과 화재 등으로 파괴되고 주변 마을도 홍수를 피해 상류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오베른도르프에 새 성당을 건립하고 옛 성당의 제대와 장식물들을 옮겨 설치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탄생한 옛 성당 자리에는 머리에 돔을 인 8각의 아담한 '고요한 밤 기념 채플(Stille Nacht Kapelle)'이 세워졌다. 채플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고요한 밤'의 작사, 작곡자와 옛 성당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곁에는 배경자료를 전시한 '고요한 밤' 박물관이 있어 채플과 함께 연중 내내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1800년대 초,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보좌신부 요제프 모어(Joseph Mohr:1792~1848)와 프란쯔 사버 그루버(Franz Xaver Gruber:1787~1863) 선생이 이 마을에 살았다. 그루버는 이웃 마을인 아론스도르프의 음악교사로 성가대 지휘자 겸 오르간 부반주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초연된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
(1899년 잘자흐 강의 범람으로 지반이 내려앉아 철거되기 전 모습)
1818년 12월 24일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날은 1818년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때였다. 자정 미사를 몇 시간 앞두고 성당의 보좌신부 모어가 이웃 마을 아론스도르프에있는 친구 그루버를 찾아가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달라고 청했다. 그루버는 시를 읽어 보았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시작되는 시였다. 그는 시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서둘러 멜로디와 화음을 붙여나갔다. (그 때 모어는 26세. 그루버는 31세였다.)
그루버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 오르간이 얼마 전 홍수 때 물에 잠겨 고장이 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노래의 반주를 기타가 맡도록 작곡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성탄 자정 미사 때 제단에 섰다. 모어 신부는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 그루버는 베이스를, 성가대는 후렴을 맡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그것은 아기 예수께 바치는 예물인 동시에 수십 년 후 온 인류가 나누게 될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고요한 밤 거룩한 밤'도 아기처럼 태어났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세계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탄생 후 오베른도르프 마을에서만 부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25년, 성니콜라우스 성당에 새 오르간을 설치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온 한 기술자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Tirol) 지방의 오르간 제조업자 칼 마우라허(Karl Mauracher)였다. 그는 성당에서 '고요한 밤' 악보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이웃 동네 음악가족인 라이마흐의 슈트라서(Strasser) 가족에게 전해주었다.
'고요한 밤'이 유럽에 퍼지는 데 기여한 슈트라서 유랑악단
슈트라서 가족은 매년 외국장터를 두루 떠돌며, 티롤지방 민요를 부르며 장갑을 파는 유명한 유랑악단 이었다.
그들은 '고요한 밤'을 티롤(Tirol) 민요 레퍼토리의 일부로 삼아 1831년 독일 라이프치히의 시장에서 처음 소개했다.
라이프치히 언론 '라이프지거 타게블라트'에 따르면 이들은 1832년 12월 시내음악회에서도 이 곡을 불렀다. 이 무렵
원곡의 가락이 약간 바뀌어 있었다. 독일인들은 앞 다투어 이 캐럴을 배웠고 이내 주변으로 번져갔다.
'고요한 밤'을 미국에서 초연한 라이너 유랑악단
같은 마을의 또 다른 유랑악단 라이너(Rainer) 가족도 미국을 방문, 1839년 당시 화재로 불타버린 뉴욕시 트리니티 성공회의 광장 알렉산더 해밀턴 기념비 곁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밤'이 미국에 첫선을 뵌 것이다. 1859년 트리니티 성당의 존 프리먼 영(John Freeman Young)신부가 독일어로 된 이 노래의 가사를 영어로 옮겨 크리스마스 직전 교회 회보에 소개했고, 그것이 오늘 날 가장 잘 알려진 영어의 가사로 정착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과 미국 곳곳에 보급된 '고요한 밤'은 선교사들을 통해 남북미주는 물론 뉴질랜드, 아프리카,
한국 등 제3세계까지 퍼져나갔다. 최근까지 이 캐럴은 300여 언어로 번역되어 성탄절 때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불리고
있다. 무명 시인 신부와 무명 음악가가 함께 만든 겸허한 노래가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된 것이다.
공적 사항과 사본들
1854년 베를린 프로이센왕가 교향악단이 '고요한 밤' 노래 원본을 구하고 싶다고 잘츠부르크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문의해
왔다. 당대의 하노버 왕립오페라단의 가수 블레차허의 증언에 따르면, '고요한 밤'은 이미 1840년대에 베른린 왕립대성당
합창단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프레데릭 빌헤름4세 프러시아 국왕이 매년 성탄절 시즌 때 즐겨 듣는 곡이었다.
그때까지 왕실악단 측은 이 노래를 하이든의 동생 J, 미카엘 하이든의 작품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일각에서는 하이든,
베토벤의 작곡설마저 나돌았다.
수도원장이 마침 그 때까지 생존해 있던 그루버를 알고 있었다. 모어 신부는 이미 죽고 그루버는 할라인으로 옮겨 근무하던 때였다. 수도원장의 연락을 받은 그루버는 원본악보의 사본과 함께 이 노래의 유래증명서(Authentische Veranlassung)를 12월 30일자로 작성했다. 그루버의 서명이 곁들여진 이 설명서는 특히 모어 신부가 과거 마리아파르 순례자 교회 사목 당시 원시(原詩)의 초고를 이미 썼다가 1816년 정식 시로 만들었고 2년 후 자신이 곡을 붙인 사실을 밝혔다.
이 문서에 의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출처가 지금 정확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모어 신부의 '고요한 밤' 편곡사본(1820년)이 1995년 발견되었다
고요한 밤 채플의 왼쪽 벽에 있는 독일어 원본악보 (사본)
'고요한 밤'의 1818년 원본은 분실됐고, 그와 비슷한 모어 신부의 편곡사본(1820년)이 1995년 발견되었는데 현재
우리의 성가 곡과는 상당히 다르다. 기타 반주가 붙어 있고 멜로디 일부가 장식적이며 가사도 모두 6절이다(현재는 4절)
'아기 잘도 잔다' 부분의 원시(原詩)는 '하늘 평화 속에 잠자네'라는 뜻이며, 합창으로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루버의 교향악을 위한 편곡(1845년), 오르간 편곡본(1855년) 등 모두 5점의 편곡사본도 발견되었다.
고요한 밤 기념 채플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오스 성당은 8각형의 아담한 건물을 옛 터에 짓고
'고요한 밤 채플(Stille Nacht Kapelle)'이라 명명하였다.
'고요한 밤 채플'은 머리에 돔을 인 8각의 통형(筒形)이다.
계단을 올라 정문을 들어서면 '아하, 이렇게 작은 예배당도 있는가!'
기다란 나무 의자가 네 개, 이십여 명이 앉으면 가득 찰 넓이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제대(祭臺)가 있다
제대에는 아기 예수 탄생 부조(浮彫)가 장식되어 있다.
옛 성당에서 옮겨온 이 성물은 '고요한 밤'이 탄생하던 밤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오른 쪽 창에는 작사자 모어 신부,
왼쪽 창에는 작곡자 그루버의 초상이
각각 옛 성당의 모습과 함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다.
채플 양쪽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左)작사자 모어 신부 (우)작곡가 프란츠 그루버
(下) 이곳에 있던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모습
고요한 밤 악보/ 모어 신부와 그루버 초상화/ 모어 신부의 기타
채플 곁에는 배경자료를 전시한 '고요한밤' 박물관이 있어
채플과 함께 연중내내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기념 메달과 우표
130주년(1948년) 기념 우표 150주년(1968년) 기념 우표
조르쥬 루오(1871~1958) <성탄절 풍경>
두 작가(作家)의 삶
평생 청렴했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작사자
요제프 모어 Joseph Mohr(1792~1848) 신부
모어 신부의 젊은 시절 초상화
요제프 모어 신부는 1792년 12월 11일 잘츠부르크에서 대교구 소총병인 아버지와 편물공인 어머니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모범생인 그는 음악을 좋아해 잘츠부르크의 여러 성당 성가대원으로 활약했다. 가난 탓에 보좌신부 겸 성가대지휘자 요한 히른레에게 입양된 그는 명문 크렘스위스터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잘츠부르크 대교구 신학교를 나와 1815년 사제서품을 받는다. 법적 신분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느라 우여곡절을 거친 뒤였다. 첫 사목처는 순례자들을 위한 룬가우 마리아파르 성당. 시(詩) '고요한 밤'은 이 무렵 작품이다. 순례자교회란 주로 마을을 오가는 나그네의 신심을 보살피는 성당이었다.
몸이 허약한 그는 일시 입원했다가 1817년(1816년 설도 있음) 성 니콜라스 성당에 부임했고 이듬 해인 1818년 12월 24일 밤 그루버의 작곡으로 '고요한 밤 거륵한 밤'을 초연했다. 1819년부터는 잘츠부르크 내 여러 교구에서 사목하다가 37년 폰가우 바그라인의 주교대리로 임명되었다.
연로자 사목과 청소년교육에 전념하며 교구민의 존경을 받던 그는 1848년 12월 4일 폐병으로 숨져 바그라인 성당 뜰에 묻혔다. 평생 청렴했던 그는 얼마 안 되는 유산마저 동네 연로자 사목과 어린이교육에 다 바쳐, 돈 한 푼 없이 무덤과 묘비, 시 몇 편만 남겼을 뿐이다. 무덤 곁엔 기념학교가 건립되었다.
불과 12마디 크리스마스 캐럴 한 곡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프란츠 그루버 Franz Xaver Gruber(1787~1863)
1846년 세마스티앙 스티프가 그린 프란츠 그루버
작곡가, 성가대자휘자, 오르간주자, 음악교사, 화가 등으로 다재다능했던 그루버는 1787년 오스트리아 북부 호흐부르크의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한 그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후 교사 안드레아스 페테르레크너 등 몇몇 후원자를 만나 가업의 대물림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18살 때 교회반주자 게오르그 할트도불러에게 3개월 오르간을 배우면서 이미 미사반주를 시작했다. 1807년 아론스도르프의 음악교사로 부임, 교장과 관리인, 교구 오르가니스트를 겸직했다. 1816년에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의 성가책임자까지 겸임하다가 1829년 베른도르프 교사로 승진한다. 1835년에는 할라인 성당 성가대지휘자로 부임, 63년 숨질 때까지 사목했다.
그루버의 생가는 없어졌으나 인근 하이마트하우스 박물관에 모형이 있다. 그가 교장이었던 아론스도르프의 학교건물 2층이 그의 가족아파트이자 '고요한 밤'의 작곡 장소로 현재 프란츠 그루버 기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와 모어 신부의 기타 등이 전시 되어있고, 그의 회화작품들도 있다. 바로 이웃의 마리아 암 뫼슬 성당에는 그루버가 미사 때 사용하던 파이프오르간이 복원되어 있다.
그루버의 'D장조 미사' 등 9개 미사곡과 성가를 비롯한 90여 작품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에서 연주된다.
아내가 연이어 죽는 바람에 두 번 재혼한 사이에 낳은 12자녀 중 생존한 4명이 모두 음악교육을 받았고 장남은 왕립고등학교 음악교사 겸 작곡가였다. 그루버 일가가 이 캐럴의 판권을 소유하고 있었더라면 후손들이 거부가 됐을지도 모른다.
만년에 그루버가 살던 할라인 마을의 집과 그의 묘
크리스마스 정전(停戰)
1914년 12월 24일 1차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이 참호를 파고 대치하던 벨기에 이프르 전선에서 생긴 일이다.
독일군이 참호 주변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촛불을 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곧 영국군도 따라서 같은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합창이 끝난 뒤 양측 지휘관이 즉석에서 정전 약속을 했다. '크리스마스 정전'으로
알려진 저 기적 같은 평화는 1차 대전 서부전선 곳곳에서 약속이나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기도 했다. 합심해서 급조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전선 곳곳에 섰고, 친선 축구경기가 열린 곳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전쟁터였지만 이 노래가 주는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에 그들의 인간성이 되살아난것이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정전을 기념하기 위해 벨기에의 이프르에 세워진 십자가
오스트리아의 신성한 국보(國寶)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10월 중순쯤만 되면 상점이나 쇼핑몰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까지 크리스마스 절기 훨씬 이전부터 다른 경쾌한 캐럴과 함께 길거리에서 마구 흘러 나왔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이 노래의 본고장이며 이 노래를 거의 국보처럼 여기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노래를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
이전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도 전혀 방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본고장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단순힌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닌 그야말로 거룩하고 신성한 노래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
첫댓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2015년에 올렸던 작품입니다.
읽지 못하신 문우들을 위하여 앞으로 옮겨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인 오늘 의미있는 글을 다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탄생은 "하늘에서는 영광이오 땅에서는 평화"라 합니다.
이 땅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감명 깊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이민혜선생님^~~^
이민혜 선생님은 지식을 함양하게 하는 유익한 글을 많이 올리시데요.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