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의 한 파. BC 5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묵자(墨子)가 창시하였다. 당시의 지배적인 유교이념에 도전한 묵가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였고, 하늘 또는 상제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묵가사상은 차별 없는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맹자를 비롯한 유교사상가들의 공격을 받았다
묵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묵자(B.C480~420)이다.
묵자는 처음에는 유가를 배우다가 독립하여 묵가학파를 창설했다.
묵자라는 책에 그사상이 잘 나타나는데, 그것에 의하면 묵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兼愛이다.
겸애는 타인과 자신을 동등하게 재하는것으로 유가의 등급적인 '애'와는 완전히 다른
평등사상이다.
특이한것은 이 묵가학파가 아주 잘 자여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巨子라 불리우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엄격한 규울을 가지고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거자의 지위는 그 전의 거자의 지목으로 승계되었다.
四家의 비교
당시에 묵가사상은 사회혼란중에 일반 백성들의 평등적 이념을 구현하려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으며 종교적 요소도 강하게 자리하고 있엇다.
따라서 이사상은 중국의 통치계급의 사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점차 쇠퇴하였다.
결국 지나친 이상의 추구와 더불어 조직이 파괴되면서 묵가는 사실상 사라졌다.
하지만 그사상은 농민들이 지배질서에 대해 도전하는 민란의 과정에서 무시할수 없는 영향을
끼치며 잠재해 있었다.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왔습니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차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 자기 집안,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람 때문에 생긴 침략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구호도 작은 실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묵가 집단은 그러한 전쟁에 맞서는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묵가 집단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방어전을 위한 전쟁 청부업이라고도 했습니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지배 집단을 도둑에 비유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간 좀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남의 나라를 침략한 큰 도둑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어쩐 일이냐고 했습니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노력은 첫머리에 소개한 일화에서 보았듯이 눈물겹습니다. 묵자는 그 밖에도 제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노나라에 대한 침략을 막았고, 초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막았습니다. 묵자의 전쟁 반대 의지는 그만큼 강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끌어당기고 겸손으로 밀어낸다 : 묵자墨子
김 교 빈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 교수
호서대 철학과 교수
『묵자』 「노문魯問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옛부터 초礎나라와 월越나라는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자주 싸웠다. 초나라 사람들은 물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물흐름을 거슬러 물러섰기 때문에, 나아갈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물러서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반대로 월나라 사람들은 물흐름을 거슬러 나아가고 물흐름을 타고 물러섰기 때문에, 자기 편이 유리하면 적을 쫓기가 쉬웠고 불리할 때도 빨리 물러설 수 있었다. 그래서 월나라가 초나라를 이기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공수반이란 사람이 초나라를 위해 뱃싸움에 쓰는 갈쿠리와 밀대를 만들어 준 뒤로 적이 약하면 갈쿠리로 끌어당기고 반대로 적이 강하면 밀대로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초나라가 월나라를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묵자를 만난 공수반이 뽑내며 물었다. '나는 뱃싸움을 할 때 갈쿠리와 밀대를 쓰는데, 그대가 말하는 의義라는 것에도 내가 쓰는 갈쿠리와 밀대 같은 것이 있소?' 그러자 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말하는 갈쿠리와 밀대는 당신이 만든 것보다 훨씬 좋다오. 나는 사랑으로 상대를 끌어 당기고 공손恭遜으로 막아냅니다. 사랑이 아니면 서로 가까워질 수 없고 공손이 아니면 버릇이 없어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공손히 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이로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대처럼 상대를 강제로 끌어당겨 못움직이게 한다면 상대방도 당신을 그렇게 할 것이고, 강제로 밀어내서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면 상대방 또한 그렇게 할 것이오. 서로 강제로 끌어 당기고 억지로 밀어낸다면 서로를 해치는 것이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는 의義 속에 들어 있는 갈쿠리와 밀대가 당신이 만든 갈쿠리와 밀대보다 훨씬 좋다고 하는 것이라오."
묵자와 묵자집단
위 일화에 나오는 묵자의 이름은 적翟이었지만, 정확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이고 맹자보다 조금 앞이라고 짐작될 뿐이다. 그만큼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에게 반가운 사상이 아니었다. 묵자의 묵墨은 검다는 뜻과 함께 붓글씨에 필요한 먹을 뜻한다. 어떤 학자들은 죄명을 먹으로 떠 넣는 묵형을 받았기 때문에 묵씨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주나라는 피지배층彼支配層만을 형벌로 다스렸으므로 묵자는 하층민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어서 묵씨가 되었다고 한다. 피부가 검다는 것은 노동계층이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묵자가 목수들의 연장을 자주 비유로 든 것이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이 하층 무사나 기술자였던 점도 묵자의 출신 계층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묵자는 뛰어난 기술자였다. 하지만 위 이야기에 나오는 평범한 기술자의 논리와 철학자의 논리가 다르듯이, 공수반은 뛰어난 기술자로 기억될 뿐이지만 묵자는 위대한 사상가로 남았다.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거자라고 불렸으며, 구성원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회남자}에는 묵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180명인데, 그들을 불 속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칼날을 밟게 할 수도 있으며, 명령을 따르다 죽더라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무리라고 하였다. 바로 그 초대 거자가 묵자였다. 묵가집단은 기둥이나 벽에 장식하나 없는 비좁은 방에서 살았고, 흙 그릇에 담긴 옥수수나 조밥과 국 하나만을 먹었다. 여름에는 베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을 입을 뿐이며, 살아서는 노래나 오락을 즐길 수 없었고, 죽어서도 얇은 관에 초라한 장례만이 가능했다. 그러면서도 규율을 철저히 지켰으며, 오로지 남을 위해 일했다. 벼슬을 하면서도 자신의 봉급 일부를 집단에 보내야 했고, 어떤 사람은 묵가집단의 금기사항인 공격전쟁에 참가했다가 거자로부터 소환당하기도 했다.
다음 일화는 묵자집단의 조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형나라에 사는 거자 맹승은 양성군과 가까이 지냈는데, 양성군이 맹승에게 성을 부탁하고 왕의 장례에 참석하러 갔다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형나라는 양성군의 땅을 몰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맹승은 약속을 지키려고 묵가집단에게 사수를 명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묵가집단이 여기서 모두 죽으면 묵가집단이 끊어질 것이며 아울러 양성군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맹승은 거자 자리를 송나라의 전양자에게 계승시킬 것이니 묵가가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양성군과의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아무도 묵가집단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제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결하였다. 그리고 맹승과 부하들도 모두 전사했다. 전양자에게 맹승의 말을 전하러 갔던 두 사람은 임무를 마치고서 다시 돌아가 싸우다 죽겠다고 했다. 새로운 거자인 전양자가 말렸지만 두 사람은 돌아가서 함께 자결하였다. 이 두 사람은 뒷날 거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비난 받았다. 한자어 가운데 끝까지 지킨다는 뜻의 묵수墨守는 이같은 묵가집단의 행동양식에서 나온 말이다.
묵가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전쟁이든 가리지 않는 일반 군인과 달리 오직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방어防禦 전쟁에만 참여하였다. 또 보통 군인들에게 군인이란 지위는 생계 유지 수단에 불과했지만, 묵가집단에게는 자신들의 철학을 실현해 가는 실천수단이었다. 아울러 일반 군인들은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묵가집단은 군인의 윤리를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으로 높여 갔다. 그들은 이미 군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철같은 동지적同志的 결합을 이루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 없어진다 해도
그렇다면 묵가집단을 이토록 강하게 만든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그 핵심은 겸애兼愛와 교리交利였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 평등을 의미하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뜻으로 경제적 평등을 의미했다. 두 가지 가운데 핵심은 겸애로서 무차별적 사랑을 의미하며, 겸애의 반대인 별애別愛는 차별적 사랑을 의미한다. 묵자의 겸애철학은 하급 무사집단의 행동양식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성벽에 둘러서서 적을 맞아 싸울 때, 어느 한 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같이 싸우는 우리 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서로 아끼고 돕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겸애는 바로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동락하던 체험을 철학화한 것이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은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일로 가족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자기 가족과 똑같이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그 경우 누구나 전자를 택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차별적인 사랑보다 무차별의 사랑이 옳다는 것이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묵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굴고, 귀한 자리에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리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보고, 이를 겸애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맹자孟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서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이 이로워진다면 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갔다.
묵자는 또한 겸애가 옳다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옛날 훌륭했다고 하는 임금들은 모두 자신보다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이며, 둘째는 백성들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 수 있고, 셋째는 어떤 정책이나 제도가 국가와 백성들에 이익이 되는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기준은 모두 피지배계층의 입장에 선 주장이다.
민중을 향한 이같은 묵자의 열정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버리고 오직 협객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도 묵자가 살던 2400여 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인류는 더 많은 기술, 더 높은 기술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그 기술이 사회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돈이 되는 기술인지만을 따지고 있다. 더구나 내가 잘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내 자식만 중요하지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으며, 강자가 약자를,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짓누르는 일이 쉴새 없이 벌어진다.
기술 자체를 중시하기보다는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기술인지를 따진 묵자의 사상, 무차별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자는 묵자의 외침을 다시금 곰씹어보게 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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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敎斌 - 성균관대 철학박사, 호서대 인문과학연구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등 역임
▶ 서로 사랑하고 이익을 나누자
묵가 집단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결속시키고 끌고 나간 철학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 철학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였습니다. 겸애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의 요구였고, 교리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의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묵자는 겸애의 반대를 별애라고 했습니다. 겸애가 무차별적인 사람이라면, 별애는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묵자는 무엇으로부터 겸애 철학을 끌어냈을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묵가 집단에는 하급 무사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묵자의 무차별적인 사랑 철학이 바로 이 하급 무사 집단의 행동 양식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고 해 봅시다. 큭히 묵가 집단처럼 방어 전쟁을 할 때 성벽에 둘러서서 적을 맞아 싸우는데, 성의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결국 다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돕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극한 상황에서 동고 동락하던 체험을 철학화한 것이 겸애라는 주장입니다. 묵자는 겸애란 자기를 위하듯 친구를 위하고,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의 부모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차별적인 사랑이라면 자신을 위하듯 친구를 위할 수 없으며, 내 부모를 위하듯 친구 부모를 위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증명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어딘가로 떠나다고 해 보자.맡은 임무가 위험하고 길이 험해서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모른다면, 당신은 처자식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느가? 자기 가족이나 다름없이 당신 가족ㅇ르 돌봐 줄 사람에게 맡기겠느가, 아니면 당신 가족보다 자기 가족을 돌봐 줄 사라에게 맡기겠는가?
묵자는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굴고, 많은 수를 가지고 적은 수를 괴롭히고, 귀한 자리레 있는 자가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리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모두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모두를 겸애, 즉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기고 묵자는 맹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는 신념ㅇ르 가지고 실펀해 나갔습니다. 바로 묵자의 이러한 사랑을 가라켜 겸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자는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을 위하고, 자기 나라를 위하듯 남의 나라를 위한다면, 온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보았습니다.묵자 사상의 이런 점을 가리켜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묵자의 이런 생각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감정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따라서 감정에 기초한다면 남보다는 나를, 남의 부모보다는 내 부모를, 남의 자식보다는 내 자식을, 남의 나라보다는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러난 묵자는 그 같은 차별애가 사회 혼란을 가져오고, 급기야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따져 보자고 했습니다.
묵자는 따져 보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옛날부터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해오는 사람들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입니다.
둘째, 백성들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 어떤 효용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가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묵자가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은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피지배계층의 입장에 판단의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논리적인 묵자의 주장을 피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에 문화적 훈련을 쌓을 기회가 적었던 대다수 묵가 집단 성원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왔습니다. 하늘의 뜻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에, 통치자 역시 백성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가 하늘의 뜻을 잘 따라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 하늘이 상을 주고 복을 내리지만, 안 그러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하늘의 뜻'은 묵자가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빌려온 것일 뿐입니다. 묵자 사상에서 하늘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점은 뒤에서 보겠지만 묵자가 운명을 부정하고 사치스런 장례나 제사를 반대하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
묵자는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 힘인 강력한 통치자의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력한 통치는 전제 군주의 막강한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무차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묵자가 강력한 군주의 통치를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묵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제각기 자신의 기준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겠지요.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의 결정을 마을 사람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을들이 모인 큰 부락에서는 각 마을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부락의 우두머리로 삼고, 더 나아가 여러 부락이 모인 지방 단위에서는 각 부락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 지방의 우두머리로 삼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천자는 온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의 듯은 하늘의 뜻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천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묵가 집단들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거자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제도의 반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묵자의 사상에는 당시 춘추 전국이라는 엄청난 혼란 속에서 중앙 집권의 강화를 통해 혼란을 종식시켜 보려는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묵자의 사상은 집단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묵자여, 우리의 스승이여!
묵적, 지금으로부터 2,450여년 전 태어나시고, 공자가 죽고 맹자가 채어나기 전,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예수 태어나기 450여년 전 중국 노나라에서 태어나신, 위대한 스승이신 묵적. 그때는 춘추전국시대 엄청난 살상과 권모술수와 비극이 중원 천하를 뒤덮던 사절이었으니, 사람들은 힘있는 이는 왕후장상이 되고, 힘없는 이는 그냥 죽어 살아야 했겠죠. 그때 우리의 위대한 스승 묵적은 '사랑'을 설파하시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손발이 닳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털들이 다 닳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인간의 평화와 함께 잘살기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생명도 신체도 아낌없이 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니 실로 머리 조아려 감복해 마지않습니다. 뒤에 예수께서 사랑을 설파하셨는데 그렇게 손발에 못이 박히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먼길을 뛰어다니며, 밤낮 쉴새없이 일을 하며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묵적, 묵자께서 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투쟁적 삶은 거의 신의 경지라 생각됩니다.
어느 날 평소 하던 버릇대로 교육방송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묵가(묵적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의 인류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듣고 깜짝 놀라 언제든 '묵자'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방학에 드디어 묵자를 구해 읽었습니다. 그 충만한 사랑과 실천의 위대한 삶에 저절로 머리 숙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자의 가르침은 이미 유가(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리를 잡은 후에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유가보다 묵가가 많았다고 보여집니다. 춘추전국시대 말에 나타난 기록들에 세상은 양자와 묵자 혹은 유가와 묵가 다 차지했다고 해서 두 번 다 묵가가 그 반을 점유했다 하니 대단히 많은 이들이 묵자를 따랐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진시황의 분서 갱유와 지식인 탄압에 의해 묵적의 가르침이 사라져 버리고, 진의 멸망 후로 곧 한나라가 이어지는데 한나라는 왕에게 유리한 공자의 가르침을 국교로 떠받들어서 유교의 서적은 밝히지고 정리되었으나 묵적의 가르침은 묻히고 말았답니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고 우리 민족의 한 파를 이루는 여진족(그들은 스스로 고려에서 나왔다고 했음)들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 한족을 다스리게 되는 청나라 때에야 그 여진족에 의하여 묵적의 가르침을 발굴 조사 정리하여 오늘날 전하게 되었다니 슬픈 일입니다.(참고: 공자가 태어나시고 묵자가 채어나신 노나라 곡부 땅은 본래 동이족 즉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습니다. 공자의 아버지가 동이 족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산이 이들에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유교와 함께 묵가들이 조선을 지배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하나 마나한 아쉬움을 떨칠 수는 없었겠죠?
묵자의 사상은 정말 매력이 넘칩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드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귀하고 의롭고 지혜롭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며, 그래서 인간은 인간 모두를 사랑해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귀신들이 감시하여 상과 벌을 준답니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서로 사랑하고 베풀어야 하며 하느님을 섬기고 귀신에게 공경스러워야 합니다. 귀신이라니 좀 이상하지만 이것을 우리 조상들의 용어로 바꾸면 하느님을 모시는 삼선사령의 신령(神靈)들이지요. 이를 실천하기 위해 묵자는 겸애(兼愛: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 너와 내가 나뉘지 않는 사랑)를 설파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박애(博愛)와 너무 닮았지요? 정치도 사랑으로 하고, 산업도 사랑으로 하고, 효도도 사랑으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평소 내가 학생들에게 말해 왔던 이야기, "내 아버지 어머니께만 효도하지 말고 이웃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사랑하여 보살펴야 한다. 모두 그렇게 산다면 혹시 내게 일이 생겨 부모님을 못 모시더라도 우리 부모님은 편안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거의 같은 가르침을 그 옛날 묵자 선생께서 설파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라 이런 겸애의 사랑을 하기 위해 많은 가르침이 뒷받침됩니다. 전쟁을 하지 말고 평화로 산업을 일으켜 모두 잘 사는 나라를 만들라고 가르쳤어요.(비공편) 단군할아버지의 홍익인간 사상과 너무 닮았지요? 또 자기가 사는 노나라와는 무관한 초나라의 송나라 공격 소식을 듣고 우리의 스승 묵적은 초나라에 가서 인간을 사랑하라 요구하고 전쟁은 인간을 괴롭히는 일이라며 목숨을 걸고 송나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특유의 사랑의 방어 병법으로써 설득하여 이를 이루어냈습니다.(공수편) 또 이웃을 사랑하고 돕기 위하여, 사람들의 괴로움을 덜기 위하여 절약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하게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를 몸소 실천하셨지요.(절용편) 절약을 하는데 장례식도 간략하고 정성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절장편) 아껴쓰고 나눠쓰고 절약하는 이 모두를 절용(節用)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는데 이것은 현대의 엔트로피 이론에서 주장한 문명에 의한 파괴로부터 인류 생존 전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가들이 장례를 지낼 때 가깝고 먼 데 따라 등급을 달리하여 많은 시간과 재물을 없애는 것을 몹시 비판하며, 장례도 모두 살아있는 인간에게 유리하게 할 것과 평등하고 차별 없이 하되 유교식 거짓 곡(哭=울음)이 아니라 정성의 슬픔으로 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인간다움이겠지요?(비유편). 또 애써 사랑하고 남을 도울 수 있도록 살되 힘쓴 만큼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으니 운명에 인생을 맡기지 말라 했습니다(비명편) 훌륭한 친구를 사귀고, 세상을 살아감에 유능하고 재주 있는 이를 높이 쓰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한 부분은 요즘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꼭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내용이기도 했습니다(친사편) 구구절절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사랑이 넘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좀 색다른 것은 '비악(非樂)의 주장입니다. 유교가 예악(禮樂)을 중시하는데 반하여, 생존의 위협과 먹고 살기 어려운 춘추전국시대를 반영한 것인지 거추장스런 예(禮)와 낭비적인 음악(音樂)은 배격했습니다. IMF 때문에 TV 쇼프로 줄였던 것과 비슷하지요? 이것은 음악의 효용을 몰랐다기보다는 흐트러진 삶의 자세를 거부했다고 봐야겠지요? 좀더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고나 해야 할까요?
이런 사랑의 가르침을 따르는 묵가의 무리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무척 고생하고 땀흘리며 살아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군자: 유교의 최고 인격자)들은 묵가를 노예의 도(役夫의 道: 일꾼 되는 가르침)라고까지 했답니다. 또 당시 고대 중국의 학문이 대부분 논리의 비약이 심했는데 이 묵가들은 매우 논리적이라고도 합니다. 평생의 좌우명으로 삶을 만한 구절이 많았는데 여기 약간만 제시하겠습니다.
"올바른 이는 가까운 것을 잘 살피어 가까운 것부터 닦아 나가는 사람이다.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을 반성하여 남의 원망을 받지 않도록 하고 행실을 닦아 나가며, 남을 해치려는 간악한 말은 귀에 담지 아니하고 남을 공격하는 말은 입에서 내지 아니하며 남을 죽이거나 상케 할 뜻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힘써 일하며 날로 분발하고 항상 욕망을 억제하며 몸차림을 정제(正齊)히 한다. 올바른 이의 도는 가난함에는 청렴함을 보여 주고 부(富)함에는 의로움을 보여주고 삶에는 사랑을 보여보고 죽음에는 슬픔을 보여 주는 것이다."
끝으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이 묵자를 읽어보시길 당부하고 싶습니다. 말로만 성령이 임하소서 기도하지 말고 몸으로 묵적의 가르침을 따르면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리라. 천국의 좁은 문이 절로 크게 열리리라 생각됩니다.
제목 <묵공>
작가 모리 히데키 그림, 사케미 켄이치·구보타 센타로 글
키워드 묵가사상, 휴머니즘과 봉사의 공동체, 천하통일의 꿈, 머리가 잘려 날리는 전쟁터에서도 태어나는 새 생명들
주타깃층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전국시대를 말달리며 따뜻한 공동체를 꿈꾸고픈 싸나이들과 여장부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날. 모두가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적(묵자·BC 480∼360년경)이 꿈꾸었던 세상이다.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진(秦), 초(楚) 일곱 나라가 꼬리를 물고 전쟁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던 당시 이런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 묵가사상을 실천을 통해 완성시켜나갔다. 천하통일이라는 위업을 향해 거세게 들끓던 세상에서 비주류 중에서도 엄청 비주류였던 이들이지만 주류의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었기에 전쟁의 소용돌이가 격렬해질수록 이들에게 보내는 지지와 공감도 또렷했다. <묵공>(墨攻)은 이러한 묵가사상의 한 제자가 전국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어떻게 사상을 실천하고 주위를 변화시켜가는지를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와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묘사하면서 전해주는 작품이다.
연나라 변방의 작은 성 양성은 조나라 군사들을 맞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묵가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전쟁을 ‘살인행위로,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최악의 불의’로 정의하던 그들은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서 수비 위주의 전술로 인명을 지켜주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을 다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요청을 받고 결국 양성에 와준 묵가인은 단 한명, 그것도 매우 왜소하고 땅딸한 장돌뱅이풍의 사내였다. 그러나 이 볼품없는 사내 혁리는 머릿속에 확고히 새겨져 있는 전법과 몸에 익은 무예, 그리고 타고난 통솔력을 바탕으로 오합지졸이었던 양성 백성들을 정예군사로 거듭나게 하며 조군에 맞서 성을 훌륭히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묵공>은 일단 그림체로만 보면 첫눈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쪽은 전혀 아니다. 시커멓고 험악하다. 게다가 몇몇 인물 표정묘사는 식상하고 사람을 질리게 한다. 탐욕스런 자는 뚱뚱하고 개기름이 흐르며 눈이 뒤집어질 듯 희번득인달지, 극화체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명랑체 묘사도 눈에 설고 튄다. 게다가 인물들 중 친밀감을 줄 만한 이들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주인공마저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읽다보면 그 그림속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터 아닌가.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선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눈이 홰홰 돌아가고 정신이 반쯤 나간 어딘가 비정상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몇장 넘기기가 멀다하고 나오는 ‘지워진 그림들’은 잔인한 장면들 때문이다. 잘린 머리가 날고 내장이 흩뿌려지는 살육의 현장이니만큼 끔찍한 광경이 자주 나오지만 그렇다고 선정적이지는 않다.
<묵공>은 일본인 작가가 그렸으되 중국적인 특성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중국은 거대한 땅이다. 그 넓은 땅에 엄청난 인구가 산다. 당연히 인걸도 많고 기상천외한 종자들도 많으며 “생각 좀 한다”하는 왕이나 사상가들의 관심은 언제나 “이 다종다양하고 수많은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질서있게 다스릴 수 있을까”일 수밖에 없었다. 묵가사상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묵공>은 이런 관용적이면서 급진적인 사상이 어떻게 배태되고 또 어떤 시련과 변질을 겪었는지를 흥미롭게 조립된 허구적 이야기들 속에서 곡진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