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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리더 형제는 공동생활은 영적 성장에 매우 효과적이며 제자 훈련의 좋은 방법이라 했지만 나는 그 말을 실감하지 못한 채 몇 개월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물론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사람마다 사생활이 있는데 리더 되는 형제가 매사에 간섭하는 것이 못마땅해서였다. 그 이후에도 수년동안 우선 순위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 마음속엔 사생활에 대한 신성 불가침적인 생각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생활은 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성장하나 대인관계 특히 믿는 형제 자매들의 관계에서는 사생활의 영역이 넓을수록 영적 성장은 더디다. 사생활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을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마 16:24
죽으면 산다 마16:24-28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16:24)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슴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과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고 난 다음에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걸음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고, 새롭게하고, 결단있게 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지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겁고, 심각한 말씀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어서 25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25절은 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한 이유입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25절 말씀은 아주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고, 잃으면 찾게된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들이 생명을 말하면, 육신의 생명 하나만을 생각하지만, 인간에게 있는 생명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는 목숨이라고 부르는 육신적인 생명,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생명입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말하는 육체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코로 호흡을 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목숨은 제한됩니다. 강건해야 7, 80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생명입니다. 나이 들면, 늙고, 병들고, 시들고마는 풀과 같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인생에게 또 다른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생명을 얻고, 알지만, 어떤 사람은 이 생명에 대하여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단지 육체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인 생명입니다. 요한 1:4에는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에게 생명이 되시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는데, 이 영원히 사는 생명, 영생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이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습니까?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사망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다 하나님과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인생입니다. 그 이유는 죄 값입니다.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끊어진 어두운 인생에게 빛이 비쳤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심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이를 화친, 화목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를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은 육신의 생명과 다릅니다.
25절 말씀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생명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상실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을 미워하고, 포기하면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시간과 돈과 정력을 다 투자합니다. 아파트 늘리기,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안전하게 좀 더 부요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뿐만아니라,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마땅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적인 삶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의 머리에는 온갖 세상적인 가치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말하는 일시적이고, 찰라적인 것에 관심이 있고, 영원하고, 신령한 데는 관심 조차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이 생명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도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 보다는 덜 합니까? 아닙니다. 세상 사람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한 번 비침을 입고, 내세를 맛본 사람으로서도 세상으로 떨어지면 이러합니다. 육체로 가치를 삼고, 목표를 삼은 사람의 결말은 영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과 육체의 욕심과 혀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의 옛사람을 쳐서 복종시키고, 스스로 감당할 십자가의 고난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것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몇 벌 옷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많은 반찬 아니라도 밥을 먹는 것으로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거처가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단장은 얼굴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 온유함과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합니다. 그의 열심은 어떻게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항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감격하고,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불필요한 자존심과 오만과 편견을 가지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푯대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부름의 상, 영원한 것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만족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루 하루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단지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의 판단이 있을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모든 일에 조심합니다.
이 두 길이 있는데,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두 길 사이에는 너무 간격이 넓습니다. 이 길과 저 길은 겉 모습은 비슷할 수도 있으나 그 중심과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 길은 사망이요, 한 길은 생명입니다. 스스로 속지 맙시다.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둡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도 오늘 하루 하루는 영생이냐? 육체의 생명으로 사느냐가 결정이 있습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겉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육체의 생명은 후패합니다. 이는 아무리 꾸며도 연수가 되면, 쭈굴 쭈굴합니다. 별 수 없이 허리는 구부려지고, 눈은 안보이고, 이는 빠지게 됩니다. 또 인간의 육체의 영광은 어떠합니까? 이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 곧 시들고, 마릅니다. 박찬호 선수, 한창 떠 오릅니다. 얼마나 영광됩니까? 그러나 해아래 새 것이 없나니 보라 어떤 것을 가리켜 이것은 새것이라 할 것이 있느냐. 이전의 것이 이후에 다시 있다고 했습니다. 별 수 없이 육체가 풀 같이 시들 때에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떨어집니다.
이를 알고 싶습니까? 병원에 가보고, 노인정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왕년에 내노라 하던 사람들도 지금 노인정에 가면 많이 계십니다.
겉 사람은 후패합니다. 다 덜어진 헌 옷과 같이 되고, 변색된 누더기 같이 쭈굴쭈굴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 전부라면 인생의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우리 영을 살렸고, 오늘 우리의 썩고 쇠하여질 육신까지도 가치있고, 영원한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 강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겉사람이 후패될 때에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목표를 포기할 때에 속사람의 목표, 영원한 목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을 표준해서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 그 사람에게 영생의 생명 역사는 없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간의 육신의 생명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된 영생의 생명의 가치를 말합니다. 만일 이 말슴을 육신의 생명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 했으면, 왜 이 목숨을 주를 위해 버리라고 합니까? 이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 곧 하나님과 하나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의 가치와 영광이 어떤 것입니까?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영생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에 이를 다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이 없는 사람이 더 큰 소리치는 세상입니다. 영생의 가치는 주님 오실 때에 그 때에 가치있습니다. 이 영생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육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자가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자기르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가 오늘에는 바보 같기도 하고, 다 뺏기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영생이 있기 때문에 그의 행한 모든 일을 다 갚으시는 그 때에 그는 영광 중에 드러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육체의 생명으로 제일의 가치를 삼고, 이를 뱃기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망한 자는 그 목숨도 뺏길 뿐 아니라, 영생을 뺏깁니다.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는 구원얻는 것은 꼭 같지만 그 천국에서의 영광의 차이는 엄청난 것을 말씀합니다. 차이가 있어야 공의의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도, 영생도 팽개친 사람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육체의 생명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과 어떻게 같은 대우, 같은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에 주를 위해, 영생을 위해 버린 것 만큼 그는 영원한 것으로 받을 것이요, 오늘에 자기를 위해 육신을 위해 살고, 영생을 버린 자는 그 때에 부끄러움과 황송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영광의 차이가 하늘의 태양과 바닷가 모래 알의 하나의 차이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못나고, 못 배워서 멸시 천대 받는 것이 안타깝고, 그래서 자식이라도 공부를 시킵니까? 영원한 나라의 변치 않는 영광과 수치를 생각해 보셨습니가? 이를 아는 사람이 십자가를 달게 집니다.
오늘, 죽으면 삽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으면 주님이 사시지 못합니다. 육체의 생명이 살아서 주장하는 대로 움직이면, 영생의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멸입니다. 어떤 길을 버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오늘 이 귀로에 저와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