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순에 2박3일간 제주에 다녀왔다.
우리부부의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이었다.
장성한 자녀들까지 모두 4명이 동행했다.
시종일관 행복했고 감사했다.
우리가족이 만나면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편이다.
때론 시끄럽다.
적극적인 대화모드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만날 때마다 대화와 소통이 풍성한 점이다.
어떤 주제든 테이블 위로 다 쏟아진다.
격의없다.
항상 그랬다.
적어도 대화의 시간만큼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분명한 인격체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함께 나누는 한 잔 술이 늘 깔금하고 좋다.
이번 여행의 숙소는 '한화 리조트'였다.
첫날 석식은 흑돼지 구이였고, 이튿날 석식은 바닷가에서 싱싱한 생선회를 먹었다.
꿀맛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웠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다양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아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써둔 글이 하나 있는데 그걸 소개하겠다고 했다.
관심이 컸고 구미가 확 당겼다.
아들은 스마트폰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최근에 쓴 글이라고 했다.
내용은 이랬다.
(글이 좋아 여행 후 아들에게 부탁, 글을 건네받았고 여기에 그대로 게재함)
글의 제목은 '열 살짜리 꼬마는 울지 못한다'였다.
응석받이로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던 시절.
바로 열 살 나이.
그러나 그 꼬마는 울지 못한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우리집이 어렵다는 걸 느꼈다.
부모님은 똑같이 웃으시며 날 대해주셨지만 아버지가 타시던 차(갤로퍼)가 어느날 사라졌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집엔 차가 없었다.
어린이날이었다.
아버지가 선물을 주시겠다며 누나와 나를 회사로 데려가셨다.
회사에 도착해서 주인 없는 빈 책상 두 개를 트럭에 실으셨다.
그게 우리의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망한 회사에서 부하직원이 쓰던 빈 책상을 자식에게 선물로 안겨주시던, 돈 없는 가장은 얼마나 가슴이 쓰리셨을까?
'탑블레이드'라는 팽이가 한창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만 원도 안하는 그 팽이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나에겐 그게 당연했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팽이를 사주시겠다고 나를 데리고 문방구로 가셨다.
나는 사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호기롭게 어린 아들 팽이를 사주시겠다고 하는 가장의 자존심을 꺾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방구에서 가장 싼 '중국산 팽이'를 골랐다.
국산팽이와 불과 이삼 천원 차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과학을 좋아했다.
또 누구에게라도 과학자가 꿈이라고 말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현미경을 사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성능도 별로인 가장 싼 현미경을 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퇴근시간에 맞춰 현미경을 꺼내서 보곤 했다.
아들에게 선물한 그 현미경이 가치있고 보람된 선물이었다는 걸 나는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열 살의 나는 부모님께 '좋은 아들'이고 싶었다.
나에게 '좋은 아들'이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아들'이 되는 거였다.
그 당시 부모님들도 퍽이나 걱정과 근심이 많으셨을 텐데 나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울지도 않았다.
그리고 매번 울면 안됐다.
20여 년이 흘렀다.
열 살짜리 꼬마는 어느새 해병대를 제대했고 스물여덟 청년이 되었다.
대학졸업 후 취업해서 몇 년째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은 나도 힘이 부칠 때가 있다.
건전지가 빠진 로봇처럼 힘없이 주저앉고 싶은 때도 있다.
그럴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뇌인다.
"아버지, 이 힘든 일을 어찌 이겨내셨나이까?"
스물여덟 청년은 울지 않는다.
'좋은 아들'이고 싶었던 열 살짜리 꼬마는 어느새 '좋은 동생', '좋은 친구', '좋은 선배', '좋은 동료', '좋은 남친'이고 싶은 청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울고 싶은 때'가 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쎈 척을 하면서 버티는 것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가 "너 참 잘 살고 있다"라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
열 살짜리 꼬마는 울지 못한다.
누군가는 감정이 메말랐다고 하겠지만 열 살짜리 꼬마가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글은 여기까지였다.
아들이 폰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족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특히 나는 둔탁한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들은 어린 나이였지만 그당시 거의 모든 일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유년시절과 현재의 직장생활을 대비하여 심플하게 풀어 낸 솔직한 일기였다.
가슴이 뻐근해졌고 이내 잔잔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밤 늦도록 대화를 나눈 뒤에 아내와 딸은 큰 방, 아들은 작은 밤으로 들어갔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11월의 만추, 제주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아들의 글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내 과거를 뒤돌아 보게 되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어느 기업에 입사하여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 회사엔 여러개의 계열사들이 있었는데(현재의 BU) 나는 그 한 계열사의 대표까지 올랐다.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불철주야 젊음을 불태웠다.
이삼십 대는 그런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국가부도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리스크가 터졌다.
일명 'IMF 사태'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어느 기업이나 할 것 없이 엄청난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휘말렸고 나는 내가 맡고 있는 계열사의 책임자로서 그 일을 묵묵하게 3년간 수행했다.
그러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위천공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렇게 이주간 침잠의 시간을 보냈다.
병석에서 때론 까닭모를 뜨거운 눈물도 쏟았다.
퇴원 후에 나는 옷을 벗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미친듯이 일했고, 열정적으로 살았으니 미련은 없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춥고 외로웠다.
그리고 호기롭게 사업에 두 번 도전했다가 모두 말아먹었다.
광막한 얼음의 땅, 툰드라에 나 홀로 남겨진 형국이었다.
참혹하고 암담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늘 크게 웃으며 자신감있게 행동했다.
제 아무리 깊은 나락으로 굴러떨어졌을지라도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정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신있었다.
그리고 매사에 긴 호흡과 시선으로 성실하게 매진했다.
건강을 위해 '울트라 런'과 '트레일 런', '수영', '검도'로 심신을 단련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특히 신경썼던 건 가족들과의 '추억만들기'였다.
돈은 없었지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국내와 해외로 열심히 다녔다.
내가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최대치를 실천에 옯겼다.
아이들의 유치원, 초등, 중등, 고교시절.
각 단계와 상황에 맞는, 그때가 아니면 안되는 일들이 있다고 믿었다.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으며 미리 수립된 포트폴리오에 따라 비행기를 탔다.
학교공부가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기본 철학이 중요하다고 봤고, 그 가치관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만이 제대로 형성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자연속에서, 가족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이것이 내가 생각했던 자식교육의 3대 방향이었다.
오죽했으면 아들 고3 여름방학 때, 수능 100일 전이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세부로 날아갔을까?
아들 고3 담임이 미쳤냐고 난리를 쳤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대신 나는 내 가족의 what to do, how to do, where to go에 대한 생각과 방향성을 편지로 써서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긴 인생길, 아무리 고3 여름방학일지라도 '긴급도'가 아니라 '중요도'에 따라 각자가 갈 길을 묵묵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련의 행위와 계획들 때문에 내 딸과 아들의 인생이 변형되거나 추락한 것도 아니었다.
훗날 자녀들이 둘 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가끔씩 치맥파티를 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 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집이 그렇게나 어려웠었나요? 나는 지금까지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요..."
결혼30주년 기념으로 떠났던 제주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아들의 솔직한 일기를 듣게 되었다.
새로웠다.
그 일기 덕분에 색다른 감회를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 밤에 과거의 숱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다.
고저장단, 희노애락, 생노병사의 인생여정.
살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으며 때론 형극의 길도 만난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지 흔들리지 않기를 간구한다.
어려워도 웃으며 배려하는 삶이길 기도하고 있다.
'소유의 과다'나 '권력의 대소'가 아니라 헌신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우리가족이기를 소망했다.
'지행합일'이 중요하리라.
그것 뿐이다.
사람들은 일요일이되면 예배당이나 법당에 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가정이 예배당이자 법당이 되면 그것이 제일 바람직하다고 본다.
나는 어느새 고이 잠든 청년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 안전 때문에 항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배의 '존재의미'는 없는 것이다.
거칠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스스로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서 박차고 떠나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배가 배다워지는 것이며 인생이 인생다워지는 것이라 확신한다.
너희들의 인생은 구만리 같다.
안전하고 보장된 항구를 떠나서 뜨겁게 도전하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경작하는, 그런 미더운 청춘이 되길 바란다.
'강한 자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 본 자가 강해지는 것이다.'
너희들 영혼에 꼭 새겨주기 바란다.
그날 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2박3일간 다양한 여정을 마치고 공항 부근 바닷가에서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다.
딸이 가방속에서 '기념일 토퍼'를 꺼냈다.
"와우, 오오, 굿 아이디어!!!"
작은 것이지만 준비성이 돋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토퍼'의 등장에 세 식구들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렀다.
감사했다.
푸른 바다와 창공이 내려다 보이는 어느 카페의 창가에서 그 '토퍼'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
진정으로 흐뭇한 시간이었다.
언택트 시대다.
그래서 과거보다 자주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신뢰'와 '공감'이 우리네 인생을 밝게 꽃피워준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가족이란 의미일 테니까.
소통, 신뢰, 공감, 이것이 가장 소중한 '삶의 불씨'가 아닌가 한다.
제주의 광활한 바닷가에서 나는 눈에 사무치도록 푸른, 그 쪽빛 바다와 하늘을 가슴에 담았다.
함께 여서 행복했다.
가족 모두에게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특히, 정신적, 경제적, 생활적인 측면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열심히 뛰고 있는 두 청년들에게, 부모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힘찬 박수를 보낸다.
함께 했던 세월들.
함께 할 시간들.
감사와 기대가 교차한다.
인생은 아름답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