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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머리말]
강대국 흥망의 경제 논리
: 세계 근대사를 다시 보다
류이劉怡
『산롄생활주간三聯生活週刊』 국제보도 주필
많은 독자들이 역사가이며 국제관계 전문가인 폴 케네디Paul Kennedy의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1987)을 읽었을 것이다. 나도 정식으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기 전 고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 『강대국의 흥망』의 부제는 ‘1500년에서 2000년까지 군사적 충돌과 경제 변천’으로, 강대국 간의 전쟁과 군사적 충돌 위주로 세계사를 이해하며 전쟁을 실행할 능력의 기초는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력에 있다고 했다. 특히 각국은 특정 기술을 토대로 부를 축적해 이것을 군사력 경쟁에 이용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케네디는 이런 각도에서 500년간의 세계 역사를 새롭게 정리했는데,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정확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폴 케네디가 영국 출신이라는 것과 그가 이 책을 펴낸 1987년 무렵의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모를 것이다. 『강대국의 흥망』이 세상에 나온 시대를 들여다보자. 잘 알고 있듯이 1970년대 말에는 냉전 상황이 중반기를 지나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날 그 시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당시 군사 공업을 포함한 소련의 경제 성장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헤게모니의 성장 속도가 이미 정체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1970년대에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핵무기, 우주 개발, 육상 재래식 무기 등의 방면에서 새로운 절정을 맞이해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마저 그 세력권 안에 두었다. 소련은 특히 미국과 전면적인 경쟁을 전개했는데, 심지어 소련이 전통적으로 약세를 보이던 해군 역량까지도 1970년대에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룩했다. 당시 미국의 정치, 군사, 학술계는 실제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미국은 과연 소련과의 전략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미국이 어떻게 해야 소련의 상승세를 억제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과 의심이 미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때 미국 정계와 학계의 고위층은 역사 속에서 답을 찾고자 했지만 전략사와 세계사를 연구한 미국 내 연구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영국에서 학문적 업적을 이룬 학자들이 초청되었다. 그들이 미국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이 중대한 문제를 미국인이 숙고하고 해결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랐다. 미국에 온 학자 중에 콜린 그레이Colin S. Gray와 폴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둘은 해군 역사와 해군 전략을 연구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저술한 폴 케네디가 경제학자가 아니며 또한 그의 전문 분야가 세계 역사가 아니었다는 점이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다. 미국은 왜 해군 역사학자인 케네디를 초청했을까? 미국의 군부와 정계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벌이고 있는 전 세계 차원의 전략 경쟁을 해상 강국과 육상 강국 사이의 경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해상 대국이 된 미국의 권력 구성과 이 권력이 세계적인 범위에서 구현된 형식은 실제로 이전의 영국(대영제국)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영국은 4세기 가까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로 대표되는 유럽 대륙 패권 국가의 도전을 수차례에 걸쳐 물리친 강대국이었다. 그러므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미국은 해양 강국이 어떻게 해야 대륙 강국의 도전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영국의 해군 역사학자에게서 얻으려고 한 것이다.
『강대국의 흥망』은 이 문제를 다룬 폴 케네디의 대답이다. 이 책은 크게 산업화 이전 세계, 산업화 시대, 현대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단계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해양 강국과 대륙 강국 간의 경쟁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흥망』은 시대마다 대표성을 지닌 해양과 대륙 국가를 선택했다. 예를 들면 해양 강국의 대표로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일본을, 대륙 강국의 대표로 스페인, 프랑스, 독일을 들고 있다. 이들 해양 강국과 대륙 강국은 과거 5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잇따라 발전을 이룩하며 세계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물론 이처럼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사이의 대결로 세계 역사를 보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해양 경제, 해양 패권의 대표로, 소련을 대륙 경제, 대륙 패권의 대표로 설정하는 것을 두고, 소련은 동시에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해군력을 건설하지 않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대륙 패권국으로 분류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이 영국과 충돌이 격화되어 마침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독일이 영국에 맞먹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문제를 답하려면 반드시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강대국의 흥망』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시작점을 1500년 전후로 설정했다. 바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다가마Vasco da Gama 같은 유럽 항해가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이 연결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5세기 말 이전에도 일정한 형식의 원거리 무역이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잘 알려진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는 고대 역사에서 일정 시간 동안 번창했다. 그러나 두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 첫째, 빈번한 군사적 충돌로 인해 종종 길이 막혔다. 둘째, 당시의 선단船團이든 대상隊商이든 한 번에 운송할 수 있는 화물의 양이 제한적이었다. 이 힘든 무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한 상인은 귀금속이나 사치품 등 부피는 작고 단위 단가는 높은 상품을 운송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물건은 각국 정부나 부자들만 관심을 갖고 구매할 수 있던 것이기에, 주류 소비자를 비롯한 전체 국가의 국민 경제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중 략)
19세기 말에 이것이 가능했던 국가가 막 통일을 이룩한 독일이었다. 독일과 달리 당시 영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열세에 있었다. 첫째, 원가 요인을 고려하느라 영국 제조업은 응용 신기술과 신기계 측면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이로써 노동 생산율 면에서 독일에 뒤처졌다. 둘째, 영국 본토의 인구가 독일보다 적었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식민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효과적이면서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식민지 인구와 자원을 재빨리 전환시켜야만 독일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셋째, 영국이 맡고 있던 전 세계적인 의무가 실제로 매우 중요하고 복잡해 상당 부분의 자원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두 가지 정책으로 독일의 도전에 대응했다. 우선, 1907년부터 영국은 오랜 기간 전략적 라이벌이던 러시아, 프랑스와 화해를 맺는 등 전 세계적 범위의 의무를 대폭 축소하고 유럽 대륙 주변으로 역량을 집중해 독일에 맞섰다. 그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여러 차례에 걸친 노력으로 마침내 유럽 밖에 있던 강대국 미국을 유럽 정치에 끌어들여 전 세계 경제와 강대국 간의 경쟁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영국, 서유럽 대륙 국가와 비교했을 때 미국, 이후의 소련, 나아가 중국은 그 잠재력에서 완전히 다른 등급에 놓여 있는 국가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특히 서유럽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인구도 가장 밀집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자연국경에 따른 면적의 제약으로 그들의 잠재 전략은 이미 상한선에 도달한 상태였다. 수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선진국으로서 크게 앞서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해외 식민지를 제외하면 개발할 수 있는 잉여의 토지가 없고 공업 생산 규모와 노동력 모두 상한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소련, 중국은 개발될 수 있는 유휴 토지가 많았고 인구 또한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중국 같은 국가의 잠재력은 서유럽 국가보다 우위에 있었다.
미국, 소련, 중국이 대륙급 강대국에 속한다면, 당시 서유럽은 설령 고도로 완비된 선진국이라 해도 중등 강국 정도로 볼 수 있다. 대륙급 강대국이 일단 중등 강국의 경기장으로 들어온다면 전 세계 경제에서 경쟁의 규모와 격렬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40년 여름에 독일은 서유럽 대륙을 거의 점령해 그 세력이 정점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총발전량과 비행기 생산량은 소련에 비해 단지 20퍼센트 정도만 높았을 뿐이다. 그때 소련은 주요 강대국 가운데서도 산업화 정도가 비교적 낮고 경제력도 약한 국가로 여겨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vefCYcnSc
또 다른 예를 보자. 1941년에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해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도달함으로써 독일군의 진공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마주하는 저항의 강도도 아주 약했다. 그러나 이 6개월 동안 탱크, 장갑차, 트럭, 병력 등 독일의 군사 장비가 개전 때와 비교해서 3분의 1이 손실되었다.
이 예는 대륙급 강대국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넓은 영토 자체가 우월점으로 작용해 중등 강국이 특히 역량이 있다고 여기는 전략 자원을 천천히 소모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이 다시는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 양대 대륙급 강대국이 세계무대를 좌지우지하게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제 경쟁 역시 매우 전형적인 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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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ㆍ 자본주의 입헌제와 대의제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와 관련해 현대인은 흔히 영국의 대헌장과 의회, 프랑스의 삼부회를 우선으로 꼽는다. 그러나 실제로 최초의 근대국가 정치 형태를 세상에 드러낸 것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다.
ㆍ 중상주의는 진정 터무니없는 학설이고 유해한 체제일까?
국가가 제한 없는 국제 자유무역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않을 때, 특히 산업 발판이 불안정할 때 자유주의 정책은 산업 생산력 육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국가의 뿌리를 흔들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중상주의의 진정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발전된 산업이 뒷받침되어야 프랑스가 독립적으로 실력을 쌓아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ㆍ 나폴레옹은 왜 동쪽으로 진격해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게 영국과 무역하지 말라고 요구할 때에는 전제가 필요했다. 바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물건을 프랑스가 모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동쪽의 러시아를 침공해 토지를 빼앗고 유럽 국가에 제공할 식량을 얻으려 했다.
ㆍ 20세기 초 독일이 꿈꾼 헛된 망상은 무엇일까?
독일은 줄곧 영국과 더불어 어떤 의미에서 G2가 될 것이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곧 독일과 영국이 주도자가 되어 유럽은 물론 세계 관리 모델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핵심 이익을 오해하고 경시한 것에서 비롯된 환상이었다.
ㆍ 전후 미국은 달러 패권을 기반으로 전 세계 패권을 장악했을까?
달러가 전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지배적 위치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의 역할은 지정학적 안보, 이데올로기와 우주 기술에서의 일부 우세에 국한되어, 국제 경제체제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ㆍ 대외무역이 주도하는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수출 주도형 경제를 내수 주도형으로 순조롭게 변화시키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대외무역 주도 방식에서 벗어나면 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장기 불황이 아니라면 낮은 성장 수준에서 안정세를 유지할 것이다. 정책은 이러한 규율을 바꿀 수 없다. 이 규율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적인 기술 혁신으로 글로벌 소비의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