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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각일 뿐이다
샘 해리스(Sam Harris) 시공사,
마음은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마음은 우리가 가진 적이 있었던 전부이며,
우리가 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전부이다.
당신이 경험해본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형성되었다.
현재 순간에 어떻게 집중하느냐가
우리가 얻는 경험의 성질을 크게 좌우하고,
따라서 삶의 질도 결정한다.
영성은 종교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종교가 있던 없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영적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험을 보통 종교적 교리의 렌즈를 통해 해석하곤 한다. 이는 매우 커다란 오류다.
기독교도, 무슬림(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모두
자아를 초월한 사랑, 황홀경, 더 없는 행복, 내면의 빛 등을
경험할 수 있지만, 이런 영적 경험에는 그들의 전통적 믿음을
지지해주는 근거가 전혀 없다.
그들의 믿음은 논리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수준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사실 착각이다.
뇌의 미로 속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로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
또한 눈 뒤 어딘가에 올라앉아 세상을 내다보는,
우리 자신과는 별개인 어떤 존재가
몸속에 있다는 느낌은 바뀌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경험은
보통 종교적 의미로 다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경험이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경험은 과학적 시각에서도,
철학적 시각에서도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더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뜻이다.
언젠가 당신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았던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아직 몸 안에 있는 채로 광활한 창공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땅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신의 땅은 광활하다 God's earth is vast"는 말이
바로 성자들의 고향인 이 영역을 뜻함을 알게 될 것이다.
- 잘랄 우딘 루미
만일 친한 친구가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좋은 말은 많이 해줄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런 식으로 살지는 못활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 지혜란 스스로의 조언에 따를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우리가 경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것에 관해 어떻게 느낄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고작 ‘원함’과 ‘원치 않음’ 사이에서
휘적대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순간순간 우리의 주의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제 별 의문이 없다.
우리의 마음과 삶은 대체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리 형성된다.
언제나 ‘지금’이다. 진부하게 들리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신경학적 관점에서 그 말은 그다지 옳지 않다.
우리 마음은 각각 다른 시간에 투입되는 정보 층위를 기반으로
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의식적 경험의 문제로는 이것이 진실이다. 당신 삶의 실재는 언제나 ‘지금’이다.
우리는 경험을, 물건을, 관계를,
단지 그것에 싫증을 느끼기 위해서 갈망한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경험에 관해 더 명확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라
더 명확하게 ‘경험’하는 행위다.
얼마나 끔찍한 꿈이든, 꿈에서 깨어나면
즉각적인 안도감이 찾아온다.
그러나 한 번에 몇 초 이상 깨어 있는 채로 머물기는 어렵다.
영적 수행에서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는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영원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그 순간에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사실뿐이다.
인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각 자극을 의식적으로 지각할 수
있지만(약 30분의 1초까지도), 바로 뒤이어 차폐mask기능을 하는 다른 형태가 나오면 더 이상 그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즉 단어와 그림이 잠재의식에 전달되고,
그 자극이 후속적으로 우리의 인지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그런 예로 ‘대양’이란 단어는 ‘망치’처럼 전혀 무관한 단어가
아니라 ‘파도’같은 연관 대비어가 뒤따를 때 더 빨리 인지된다.
또한 정서적으로 더 비중있는 단어가 중립적인 단어보다 더 쉽게 인식되는데(‘섹스’가 ‘자동차’보다 더 빨리 인지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단어의 의미가 의식보다 먼저 인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운 것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고 마음에 그 의미를 불러올 수 있는가? 모른다. 이런 과정은 의식밖에서 일어난다.
집은 제 스스로를 고치지 못한다.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아내와 내가 양동이와 샐러드볼을 잡은 순간부터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현실이 당기는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순전히 내 생각의 산물이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차분하게, 인내심 있게, 집중해서 일을 하든지 공황 상태로
그 일을 하든지. 실제로 우리 생애의 모든 순간은 느긋하게 대응할 것인지 불필요하게 고통받을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준다.
우리는 이해와 창의성에서 놀라운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거의 어떤 고통도 인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누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누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과는 느낌부터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의 확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인류의 유전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회적 상황에 놓인다.
우리 자신이 관찰당할 위험이 전혀 없이,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시점에도 타인의 상세한 얼굴 표정과 행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대면 만남이라는 원시적 상황을 마법같이 바꿔놓았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혼잣말을 하며 점차 언어 능력을 발달시켜가는 모습을 본다. 이런 혼잣말은 마치 그것이 실제 ‘대화’인 것처럼 전 생애에 걸쳐 이어진다. 이런 대화는 이상하고 불필요하다.
왜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살아야 할까?
왜 ‘내가’와 ‘나에게’가 서로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할까?
선글라스를 가지러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맞아, 거기 두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심지어 그 생각을 소리 내 말하기까지 한다.
슬픔을 인식하는 ‘그것’은 슬프지 않다.
두려움을 인식하는 ‘그것’은 두렵지 않다.
명상 수행을 하면서 맨 처음 알게 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지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루함은 단순히 주의력이 결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 수행에서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는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는 영원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그 순간에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영성은
그저 현재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일 뿐이다!”
“영성은
합리적인 사람의 방어 전략에 남아 있는
커다란 빈틈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영성을 이야기할 수 있기 전까지,
우리 세계는
독단주의에 산산조각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삶에 있는 좋은 일들 가운데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어떤 운동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서는 연습을 계속해
실력을 높이고 신체적 피로로 인한 저항감을 이겨내야 한다.
더 좋은 배우자나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게으르고, 산만하고, 속이 좁고, 쉽게 화를 내고,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시간을 낭비하는 자신을 단순히 받아들인다고 해서 행복으로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명상은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당신이 상해를 입어 통증을 느끼고 있다고 하자.
마음의 평화로 가는 길은 단 한걸음으로도 횡단이 가능하다.
몸이 회복할 수 있게 도우면서, 그저 통증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발표를 앞두고 초조하다면 기꺼기 불안이 압도하도록 내버려두고 마음과 몸에 일어난 에너지가 의미 없는 형태가 되도록 둔다. 어떤 순간이든 의식의 내용을 받아들이면 역경에 다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효과적으로 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쾌한 감각과 기분이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만 그런 감정들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불쾌함을 의식의 일시적인 출현으로 여기면서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직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지혜와 지속적인 변화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과거에 행동해왔던 대로 행동하는 자신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더 현명하고 자애로워질 수 있으며 더욱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느긋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편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실재 앞에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접해본 실재의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표현이다.
현재에 당신인 것 같은 무언가를 알아채려는 겸허한 프로젝트가
얼마나 심오한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얼마나 결함이 많은 사람이든, 지금 이 순간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은 본래 그대로인 것이고 오로지 당신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눈을 뜨고, 보라.
문제는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고 있지 못한 채'로 생각에 빠져 있는 상태다.
인간의 마음은 자유롭게 떠돌고, 떠도는 마음은 행복하지 못하다.
정신 상태의 일시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깨달음이 아닌 단순히 그런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바뀔 수 있다.
의식 자체의 본질을 조사하는 것, 그리고 의도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영적인 삶의 기본이다.
의식의 탄생은 조직화의 결과이다.
원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 바로
그 원자의 집합이 존재하는 경험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의식이라는 것은 분명 있다.
내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의식의 실재는 분명한 것이다. 의식은 우주에서 환상이나 착각이 될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엇이 관찰되기 전까지는
실재가 아니라면, 의식은 우리 같은 동물 뇌의 전기화학적 사건들에서 일어날 수 없다.
그보다는 의식이 실재를 구성하는 구조의 일부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뇌의 산물이다.
의식은 무의식적 정보처리 과정의 정당한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모른다
우주가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
당신의 생각과 기분과 감각이
지금 이 순간에 질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은 미스터리다.
그것을 능가하는 미스터리는
오직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 뿐이다.
비록 과학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행복을 최대화할 방법을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우리 존재 그 자체의 근본적인 미스터리를 종식시키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습관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지만,
성찰하는 삶에 대한 심오한 토대는 제공한다.
우리 자신에 관한 많은 진실은 의식에서 곧바로 발견되거나,
아니면 전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Waking Up: A Guide to Spirituality Without Religion'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