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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제 3장
중앙 집권화된 권위
"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계실 때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연로자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그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 일들을 하는지, 또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는지 우리에게 말하시오” 하였다." ―― 누가 20:1,2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그분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분쟁의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자신들에게 집중된 것으로 여겼으며, 자기들이 선택적으로 위임한 사람들에게도 (권위가) 연장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분은 이방인이었고, 종교적 선동가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단적이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연로자들이 세운 표준과,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해 선생들이 발전시켜온 해석에 부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수 세기를 걸쳐서 동일한 쟁점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놀랍게도, 한 때 용감하게 "권력의 폭정"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종종 그들 자신도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실용적"으로 보이는 것이나, 또 다른 경우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제공하는 기회에 설득당합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진리는 가증스러운 추리들과 궤변으로 대체됩니다. 양심은 편의주의에 길을 내어주게 됩니다. 고결함은 현실주의로 교체되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견해를 갖게됩니다.
1975년과 1976년에 걸쳐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폭풍과 같은 시기를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최상층부를 조직 중심적 운영체계로 완전히 재정비하게 됩니다. 협회장의 독점적 지배력이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라는 집단적 지배력으로 교체됩니다.[「양심의 위기」영문. 50-94 페이지 참조] 이 기간동안 나는 이전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게 권위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 회중내에 존재했던 권위는 결코 내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어떤 종류의 권위이었습니까? 그리고 어떠한 제한들이 있었습니까? 나는 다섯명으로 구성된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 운영체계에 대한 쟁점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였습니다. 이 위원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결정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마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길 원했습니다. 내가 그 협약서에 포함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성구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하나이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 또한 '지도자'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도자'는 하나이며 그리스도입니다. [마태 23:8,10]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라들의 통치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그 큰 자들은 그들 위에 권위를 휘두릅니다.여러분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 20:25-27]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떠한 방법으로든 형제 관계를 왜곡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떠 형태의 직분이나 공적 지위도, 스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영적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며, 어쨌든 자신의 추종자들의 유일한 주인이자 스승인 하느님의 아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에서 벗어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발견되는, "목자", "가르치는 사람"("교사"-개역한글), "예언자", "장로"(혹은 "연로자") 등과 같은 명칭들은 무엇입니까? (에베소4:11; 디모데 첫째5:17 참조) 이러한 모든 묘사들은 사실상- 권력 구조에서의 공직 즉 공적인 지위가 아니라- 형제들의 공동체에 바쳐진 봉사들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갖춘 자질과 능력입니다. 이러한 봉사들 드렸던 사람들의 권위는 자신들을 형제들의 영적 머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첫째 11:3; 비교 고린도 첫째 12:4-11,27-31]
이러한 봉사, 재능과 능력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갓난아이에 남아있어서는 안되며, 이어서 스스로 생각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자결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비교 에베소 4:11-16; 고린도 첫째 3:1-3; 히브리 5:12-14.]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회중적 교제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여 "장성한 사람"이 되고 자결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성장한" 남자나 여자는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영적인 머리직분이외의 다른 어떤 것의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태 18:3; 23:9; 고린도 첫째 14:20; 16:13; 에베소 4:1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족 관계의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합니다. (디모데 첫째 5:1,2) 그리스도인 경험과 연륜에서 장성된 형제들은 가족내에서 나이 많은 형제들이 하는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가장이 자리를 비웠다면, 가장이 남겨준 교훈들을 지키도록 가족들앞에서 맏아들에게 위임할 수 있습니다. 가장은 자신이 말한 부탁들과 교훈을에 고착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주제넘게 가장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가족의 주인처럼 굴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가장이 정하고 남겨준 것을 넘어선 행동 규범을 정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가장에게만 합당한 구별과 복종을 결코 (가장이 아닌 맏아들이) 기대하거나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족과 집안에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와 주님으로 여기고, 그분이 개인적으로 혹은 자신의 선택한 제자들을 통해서 주신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 첫째 11:3; 에보소서 4:15,16.]
나는 1976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 운영에 팽배해 있던 "군왕적" 형태의 주요 책임이 만연한 권위주의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5-76년의 획기적인 재정비 이후에 내가 실수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나의 진실한 바람은, 새로운 마련이 성과를 내거나, 적어도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태도와 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동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종속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종 결과는 필연적으로 단지 권력을 나누거나 분산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집의 내부는 리모델링 되었지만 ― 여전히 동일한 집이었으며, 근본적인 특성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권위주의적 구조, 즉 과거의 접근방식과 태도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사실상 오히려 더 명확해졌습니다.
협회장, 한 사람에 대한 강조에서, 사람들로 된 통치체를 강조하는 전환은, 처음에는 다소 신선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통치체"라는 용어의 섬뜩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중 이러한 "타이틀"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구별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때로 심지어 집회에서 기도중에, 형제들이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하느님과 통치체"에 감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하는 대신에 (원했을 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충분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가르치며, 보호하는 수단인 성령을 받고자 하는 더 간절한 인식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과는 동떨어져 보였으며, 사실상 기도가운데 성령에 감사하는 언급도 없었습니다. 통치체에서 나에게 운영 방식의 재정비에 대한 임명을 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으며, 내가 본 것들 때문에 모든 책임들에 대해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한번은 통치체 회의에서, 이 쟁점이 좀 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제기 되었습니다. 협회장은 '성서만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협회 출판물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회의에서, 칼 클라인(Karl Klein)은 매우 호들갑스럽게 에드 던랩을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드 던랩은 집필 위원중 한 명이었으며 길르앗 학교의 전 교무 담당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가운데서 "통치체"라는 타이틀 대신 "장로 중심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에드는 통치체 성원은 아니었으며, 자신에 대한 비난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던랩이 이러한 기사를 쓴지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렸으며 클라인은 이미 이전 회의에서 두차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매우 격양되어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연설할 때 잠자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동료 성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너무 큰 소리로 격양된 것을 변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통치체"라는 용어를 배제시키려는 드러나지 않는 움직임에 큰 염려를 나타냈습니다. 다양한 성원들이 대부분 부르러운 어조로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나는 이 문제가 쟁점이 될 만한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하겠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협회의 출판물중에서 프랑스어는 "통치체"(Governing Body)에 대한 표준 번역이 '꼴레주 쌍뜨랄' (college central) 이며, 이것은 프랑어로 단순히 "중심체"(Central Body)를 의미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통치체"라는 명칭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임처럼 들리기 때문에 다른 명칭의 사용을 개인적으로 환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클라인의 반응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지적한 문제의 요점을 신중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건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어쨌든 "통치체"라는 명칭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오? 사실상 현재, 우리는 통치하고 있단 말이오!"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칼 클라인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은, 에드 던랩에게 명칭 자체 보다도 더 많은 쟁점들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통치체는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의 특별한 결정없이 제쳐두었습니다.
수 많은 통치체 결정의 결과를 목격하고 내가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A.D 325 년 니케아 공의회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주교들의 회의는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되어 진행되었는데, 그들이 만든 교리를 모든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의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성을 전통적 요소들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어떻게 단지 몇 세기만에 순수한 형제애가 권위적인 교회 제도로 변형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그리스도인 회중을 자신과 사도들과 예언자들 위에 세우셨습니다. [에베소 2:20-22.] 그런데 왜, 예수와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전달한 가르침과 영에서 ―그토록 멀리 그리고 그토록 빨리― 배교가 진행되었습니까? 조직의 성서 사전,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작업하면서 특정한 주제들을 연구해 본 결과, 일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단지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본부 집필부 도서관에 있는 참조서적들의 도움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2,3세기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작품을 읽어본 결과, 인상적이었던 점은, 초기 회중내에서 인간의 권위를 세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압박감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의 역사는, 가르침이 발전하고, 회중의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과 권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였으며,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권력의 집중화를 향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내가 속해 있었던 통치체는 가르치는 권위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예수께서 직접 그러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 구조를 세우셨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파수대」1990년 3월 15호 (11면)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집안을 구성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종 반열 중 소수의 남자를 보이는 통치체로 섬기도록 택하셨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기사는 계속해서 열두사도가 최초로 이러한 "통치체"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합니다.(12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늦어도 기원 49년까지는, 통치체가 이미 확대되어, 남아있는 사도들 외에도 예루살렘의 연로자들 여러 명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15:2) … 회중의 능동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에 의한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교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확대된 통치체를 사용하셨습니다.
기사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회중이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간 후에, 이러한 통치체는 중앙 집중화된 권력으로써 조직적으로 작용하였으며, 1세기의 모든 회중들에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파수대」에서는 단정적으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묘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그는 예루살렘을 지상에 널리 퍼져있는 회중적 활동에 대한 신성하게 임명받은 정책적 중심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러한 그리스도의 임명받은 "통치체"가 존재했었다면, 분명히 바울은 개종한 후에 통치체와 즉각적으로 접촉하고, 그들의 인도와 지침을 순종적으로 추구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부여된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책임의 막중함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합니다.[사도 9:15; 로마 11:13.] 만약 그러한 통치체가 존재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그 성원들과 함께 자신의 사명을 조직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의 활동이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통치체" 와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지시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면, 심각한 "신권질서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사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씀을 절대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는 대신에, 그 당시 바울이 있던 도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다마스쿠스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다마스쿠스 거주자를 통해, 바울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분명히 예수살렘에 기반을 둔 "통치체" 성원 중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9:1-17; 22:5-16.]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바로 도입부부터, 자신의 사도직과 영적 지침이 인간들을 통하거나 계승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갈라디아 1:1,10,11] 그는 자신이 개종한 후에 권력을 위한 인간적인 지위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분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이방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나와 관련하여 그분의 아들을 나타내는 것을 좋게 여기셨을 때에, 나는 즉시 육과 혈로 더불어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 [갈라디아 1:16,17.]
삼년이 지난 후에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분명히 베드로와 제자 야고보만을 만났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15일 동안 머물면서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체"에 의해 매일 주제되는 회의와 같은 형태의 "본부 총회의"에서 어떠한 지침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쟁점을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하였는지를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이 보시는 데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1:18-20]
따라서 그후에 바울은 자신의 근거지를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에 두었습니다. 그가 선교 여행에 참여하였을 때에도 그를 보낸 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 회중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에 근접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크는 시리아의 해안 지역에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들과 상황들 때문에 그 도시로 돌아가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디도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간 것입니다." [갈라디아 2:1,2.]
주어진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이 때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할례와 율법 준수에 관한 위원회가 열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계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례적으로 또는 일상적으로 예루살렘을 모든 그리스도인 회중들에 대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의 지위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즉 특정한 혹은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기관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곳으로 이러한 특정한 목적의 여행을 한 것은 신성한 계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15장은 왜 예루살렘이 이 특정한 쟁점이 발생한 장소가 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 설명 어디에도 예루살렘을 특정한 형태의 국제적인 정책 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암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로 예루살렘 자체는 골치아픈 문제들의 근원지였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섬기던 안티오크(안디옥)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내려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안티오크의 상황은 비교적 평화로웠습니다. [사도 15:1,2,5,24.] 그리스도인 회중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중에서도 율법 준수에 대한 강한 집착이 매우 강력하게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심지어 이 특별한 위원회가 열린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비교 갈라디아 2;11-14; 사도 21:15, 18-21.] 안티오크에서 문제를 일으킨 자들은 예루살렘 출신들이었습니다. 단순히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이 특정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조정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신성한 선택을 받은 사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비중있는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사망하고 더 이상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은 곧 종말을 고할 것이었습니다. ― 즉 더 이상 아무도 사도적 은혜와 권위를 갖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관련된 요소들은 영속적이고 지속적인 특성을 지닌것이 아니며 결국 단순하게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살아있던 시대에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종체를 "통치체"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국제적 정책 중심부인 "본부 조직"이라는 의미로 보지 않았습니다. 1975년 당시 부협회장이었던, 프레더릭 프랜즈는 자신의 길르앗 졸업식 연설가운데서, 성경을 사용하여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양심의 위기」에도 나오는 그의 연설문을 인용하자면,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가 논쟁할 당시에 대해, 그는 이렇게 강변합니다:
"혹시, 사도들과 예루살렘 회중의 장로들로 구성된 종체는 그들을 소환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여기 보아라, 우리는 너희 두 사람이 선교 여행을 떠나 그것을 마쳤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기 예루살렘으로 와서 우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
너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느냐?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너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직분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만약 너희가 즉시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희들에게 제명 처분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성령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에 있는] 회중에 보고한 일로 인해
혹시 그들이 제명 처분을 받았다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공의회와 유대인 회중의 장로회는 자신들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위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의 연설문 전체를 통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양한 현대 교회 조직들을 "통치체들"이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협회장은 결코 1세기 당시에 "통치체"가 존재했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반복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 혹은 "사도들의 종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통치체"보다 이러한 용어들이,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발생했던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좀 더 현실적이고 훨씬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실상, 성경적 설명들을 조사해보면, 특별한 정책적 권위를 가지고 비밀 회의에 모여 결정을 내리는 소규모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회중의 장로들이 상당한 규모의 모임을 갖고 최종적으로 특정 부면에 대해 자신들의 결정이 최소한의 영향력만을 미치기를 표명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브룩클린 통치체에 기반을 둔 여호와의 증인 조직내의 정책적 결정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도 15:6,12,22. 1990년 3/15 파수대]
그 당시 부협회장의 주장은 광범위한 권위를 갖은 통치체라는 개념을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오늘날 다시 그러한 독특한 연설과 주장을 반복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 왜냐하면 그 주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조직의 상황은 1975년의 조직의 정책적 대 격동기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협회장이 앞서 언급한 특별한 내용의 연설을 한 분명한 목적은 (그가 종종 매우 긍정적인 용어들로 언급하였던)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로 알려진 협회와 협회장의 권위를 고취시키고, 또한 통치체 성원들이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다고 간주하고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의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앞서 1세기 상황에 대해 성경적으로 주장한 내용은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그는 (사도행저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라는 한가지 독립적인 사건이 모든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광범위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체가 존재했던 증거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심지어 안디옥 회중이 예루살렘의 권고와 승인에 상관없이 행동한 것처럼, 워치 타워 협회와 협회장은 통치체의 승인과 권고에 상관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중 어떤 것도 협회 출판물의 가르침 혹은 그 자신의 초기 연설이나 저서들과의 일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후 출판물의 내용과 조직의 입장은 1975년 당시 워치타워 협회의 부 협회장(나중에 협회장이 된 프레더릭 프랜즈)의 연설에서 제공된 주장과 증거를 완전히 무시해왔습니다. 내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통치체 성원들은 앞서 제시된 성경적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한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부 협회장이 진정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요점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모든 회중들과 그것을 형성하는 그리스도들인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지닌 통치체의 개념을 전적으로 폄하한 것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 책이 쓰여진 1991년 현재에) 현 협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는 자신의 연설에서 주장했던 입장을 명백히 보류하거나 포기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 증거로 논증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직이 결정한 방식과 화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히 변절되어 권력자들의 결정에 순응한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당시 그들의 위상을 고려해 볼때, 만약 "통치체"가 존재하여 초기 회중안에서 정책의 중심부로써 역할을 하였다면, 예루살렘에서의 단 한번의 모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증거들이 남아서 이 사실을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나머지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사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베드로,요한,누가,유다 혹은 야고보의 모든 서신들 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중앙 집권화된 종체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여러 지역에 감독자를 보내어 통제력을 행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바울, 바나바, 베드로 혹은 그 외 다른 사람들의 활동들이 "통치체"의 명령과 감독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어 예루살렘이 기원 70년에 멸망되었을 때, 그 후에는 어디에서 "통치체"로 여기지는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였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만약 그것이 하느님의 마련이었다면, 즉 만약 그러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결정기구가 광범위하게 있는 그리스도의 회중을 인도하기 위한 그분의 도구였다면, 적어도 그것에 관한 몇가지 암시들이 있어야 합리적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의 유일한 성경적 저술물들은 명백히 사도 요한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는 분명히 거의 세기말에 그것들을 저술하였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된 후 몇 십년이 지난 때입니다. [기원 98년. 「성경 통찰」제 2권 506,507면 참조.] 그의 편지 어디에서도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 결정기구에 대한 최소한의 실마리조차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의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 아시아 전역의 일곱회중에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소식들 중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그리스도 자신이외의 다른 인도를 받고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지상의 보이는 "통치체"를 통하여 인도하고 계시다는 어떠한 표징도 없습니다.
2,3 세기 초기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작품들을 구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중 어디에서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감독하기 위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 기구의 존재에 대해 암시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의 역사들은 오히려 이와는 반대되는 것을 밝혀줍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의 기반은 사도시대 이후에 그리고 성서시대 이후에 발전한 산물임을 알려줍니다. 워치 타워가 수용한 "통치체"라는 개념의 보이는 조직적 지도력은 명백히 수 세기를 망라하여 점진적으로 중앙 집권화된 통제력의 형태로 진행되어온 결과입니다.
중앙 집권화된 통제력의 발전
역사적인 근거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증거들을 살펴보면, "프레스비터스" 즉 장로회의 역할에 대한 관점의 변화, 사실상 왜곡으로 인해 중앙 집권화가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장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프레스비테로스입니다.] 처음에는 장로를 단순하게 마치 가족내에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는 형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장로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하고 구별된다는 주장이 생겨납니다. 최초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회중내의 모습이 샤프(Schaff)의 「그리스도인 교회의 역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124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신약에서는, 어떠한 영적인 귀족 즉 성직자 반열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칭호를 받기에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모든 신자들을 '성도들'(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제사장 반열이나,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에 중재자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유일하신 대제사장, 오로지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고, 신자들에게 하늘의왕권과, 하늘의 제사장 반열만을 가르쳤습니다.
[베드로 첫째 2:5,9; 5:3; 계시록 1:6; 5:10; 20:6.]
그리스도인 각자는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습니다. 다른 인간적 관여 혹은 중재자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기자신이 "왕겸 제사장 반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영적인 권위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권위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돕고, 충고하고, 때론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논쟁과 진실된 토론 그리고 설득을 통해서였지, 결코 강요와 협박――다시 말해 압제적인 권위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마태 20:25-28; 23:1011; 고린도 둘째 1:24; 디도 1:9-13; 베드로 첫째 5:1-5.]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하나이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마태 23:8]
우리의 스승께서 직접 주신 이러한 원칙을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발견하더라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히브리 13장 17절에서, 다음과 같은 간곡한 권고가 주어집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인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십시오.(권위를 존중하십시오-쉬운성경) 그들은 답변할 사람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깨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일을 기쁨으로 하게 하고 한숨을 지으며 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원문에는 괄호안에 New English Bible(신영어성경)에 나오는 번역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세계역의 "be submissive"-"복종하십시오"에 해당하는 말은 신영어성경의 "defer to them"-"그들을 따르십시오."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도하는 사람들의 지시에 사실상 기계적인 복종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것은 단순히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위치나 지위를 행사하도록 인정해주는 것, 즉 그러한 종류의 권위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도록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마태 23:10] "순종하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페이토마이)에 대해서, 「신약 성서 신학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요약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어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믿다', '따르다' 그리고 때론 '순종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818페이지]
"순종하다" 라고 번역된 표현은 여러가지 가능한 번역 중에 하나라는 사실과 여기에서 마지막에 사용된 의미라는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영감받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서)의 저자는 사실상 이미, "인도하는 자들"의 자격 조건이,자신들의 견해나 해석이나 금지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히브리 13:7) 저명한 성서 학자 앨버트 반스(Albert Barnes)가 논평하였듯이, "인도하는 자들" (또는 많은 번역판에서 "지도자") 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안내자"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즉 안내자와 목자로써 섬기는 선생들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인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롭고, 양치는 일이 그분의 영을 반영함으로써, 적극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의롭고 선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경적인 문제가 아닌 일을 다룰때에는, 각자 자신의 양심과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서로 협력하였을 것입니다. 기계적이고 사대주의적이고 심지어 맹목적인 복종을 했다거나, 감독자의 권위를 가지고 순종하도록 명령할 권리를 내세우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페이토마이)라는 그리스어 용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순응은 먼저 '신뢰'하고,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믿음'을 갖게된 결과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계승해 온 것을 근거로 삼을때, 각자는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써, 그들은 함께 모여 신자들과 자발적인 교제를 하고, 친절한 배려심에 근거해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반응이 유도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치는 노력이 더 즐겁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으면 섬기는 자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조직의 "권력자"들이 신자들을 추출할 권리를 갖는 특권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권위에 대한 강조가 성장함
사도들조차 예언한 것처럼, 일부 장로들은 점차 원칙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개인적인 관계통해 통치하신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도 20:28-30] 모든 관심의 집중을 유일한 권위인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리는 대신에, 현재 증거들이 알려주듯이 점점 그들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물론 자신들의 권위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회중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킵니다.)
그들이 이러한 일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합당히 짊어져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인간적 권위아래 있는 것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며 과거에도 사실이었습니다. 이로인해,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중 자기 자신을 "탁월한 사도"와 동급이라고 내세우면서 자랑하던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삼거나 착취하거나 이용하거나 여러분에게 거만을 떨거나 여러분의 뺨을 쳐도 여러분은 잘 참고 견딥니다.
부끄럽긴 하지만 우리는 너무 약해서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고린도 후서 11:20,21,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말씀에 대해, 한 성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거짓 선생들은 개인의 양심위에 성직자 계급을 세워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즉 개인적 의견을 표명할 자유를 말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지에 영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종이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자유에서 멀어졌습니다. … 거짓 선생들은 마치 얼굴을 때리듯이 멸시하는 태도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은밀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방식이 지배적이었으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의견과 감정에 대해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반스의 주해 (고린도 전서에서 갈라디아서까지) 232,233페이지]
사도 요한은 하나의 예를 제시하면서, 이미 자신의 생애중에 이러한 자기 중심적 태도가 표면화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어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에 대해 편지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첫째 자리 차지하기를 좋아"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며 회중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려고 하였습니다.[요한 셋째 9,10]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인간적 권위를 매우 교묘히 격상 시키면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약 기원 30년에서 기원 107년까지 살다가, 순교한) 안티오크(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쓴 저술물중에서, 우리는 이러한 적극적인 권고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하듯, 장로들에게 순종하라. 너희의 장로들은 사도들의 집회 장소에서 [사회를 보았다.] 그리스도의 율법을 대하듯 장로회에 순종하라. [ 이그나티우스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6장; 동일한 편지 2장]
사실상, 이것은 장로들에게 사도들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한 것이며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사도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적 권위를 갖지 않았으며 그들을 그러한 관점으로 보는 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훈계는 사실상 성서에서 발견되는 일부 간곡한 권고를 교묘히 확대적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권고들은 설득력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암묵적 내용을 시사한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내세운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어떤 사람이 감독자나 장로회나 집사의 동의없이 어떤 일을 행한다면 "양심이 순결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그나타우스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7장]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두드러지면서 동시에 인간의 종교적 권위가 개인적 양심에 교묘히 침투합니다. 이전 다른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인간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한다고 선전함으로써 율법주의적 지배력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최종 결과는 사람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네안데르의 저서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역사 194-201 페이지]
군주적 감독제의 확립
[군주적 감독제(monarchical episcopate)란 일정 지역 교회에서의 감독 한 사람에 의한 독점적 지배와 통치를 말한다. 사도들과 '방랑하는 카리스마'들에 의해 로마 제국 전 지역에 퍼졌던 원시 기독교는 복음의 1세대들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또 기독교가 일정 지역에 안착하기 시작하면서, 무정부적인 카리스마적 형태에서 조직화 체계화된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 역자의 각주]
보이는 중앙 집권화된 권력이 한 걸음 더 발전하는 과정에서, 장로회의 한 사람을 감독자의 지위로 높입니다. 그는 동료 장료들보다 더 큰 권력을 갖게 됩니다.
(워치 타워 출판물인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Aid to Bible Understanding) 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원래 "감독자" (에피스코포스)와 "장로" (프레스비테로스)는 서로 호환적인 용어입니다. 전자는 기능을 묘사하는 것이고, 후자는 장성된 인격적 특성을 가르킵니다. 물론 장로들이 모여서 토론을 할 때는 관습적으로 그들중에서 한 명이 의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로들 중 한명에게 "감독자"라는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용어는 장로들 전체가 아니라, 한 개인에게 독점적으로 적용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습니까?
한 사람의 개인에게 더 큰 권위를 집중시켜서, 적절한 결론을 내려야할 상황에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분명히 "합리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기원 404년경에 최초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은 다음과 같이 확증하였습니다. 먼저, 원래는 장로와 감독자가 동일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점점 모든 책임이 한 사람에게 부여되었다. 이로써 배교의 가라지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제롬의 빌립보서에 대한 논평 229, 300페이지]
아마도 박해의 물결을 경험하면서, 거짓 가르침들이 스며들자, 장로들은 한 사람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일명 감독자, 즉 장로들 가운데 유일한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주교"라는 용어는 "감독자" (에피스코포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것이 주교(bishop)라는 성직의 기원입니다.
이 때부터 아주 상의하고 그릇된 관점과 가르침들이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뒤덮게 됩니다. 만약 양치는 봉사를 수행하는 자들이, 영적인 전투를 위한 무기로써,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포함된 성경적 진리에 의존하였다면, 그들은 진리의 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바와 같습니다.'우리는 추리들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거슬러 일어난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재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합니다. 인간적 권위를 높여서 그리스도인 연합을 유지하고, 이로써 교리적 순수함을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고리도 둘째 10:4,5]
(한국어 편집자의 각주 - 또한, "주교"라는 용어에 대한 형성 과정은「선포자」책 35면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 "주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비숍(bishop)은 희랍어 단어 에피스코포스("감독자")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과정을 거슬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기 영어로는 비스숍(bisshop), 고대 영어로는 비스케옵(bisceop), 통속 라틴어로는 비스코푸스(biscopus) 즉 후기 라틴어 에피스코푸스(episcopus)의 변형, 희랍어로는 에피스코포스(e·pi′sko·pos).)
이점에 관해서,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자들에게 이렇게 독려하였습니다. "연합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된다." [이그나티우스의 폴리캅에 보낸 서한 1장] 이러한 주장은 불행하게도 연합의 수단으로써 사랑과 진리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은 '감독자들과의 조화로운 협력'에 달려있다는 견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그나티우스의 에페시안에 보낸 서한 6장, 트랄리안에 보낸 서한 2장, 필라델피안에 보낸 서한 3장] 한 학자가 논평하였듯이, 주교(감독자)라는 성직은 이제 "회중내의 연합을 위한 보이는 중심"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제롬의 빌립보서에 대한 논평 234,235 페이지]
이 모든 것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도했던 인간적인 추리중 하나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과의 문제로 추가적인 도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로써 보이는 왕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울 왕을 인정해 주셨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분의 보이지 않는 통치권을 거부한 것이며,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짐이 될 것이며, 자유의 제한이 뒤따를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속적으로 보이는 통치권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사무엘 첫째 8:4-20] 동일한 믿음의 부족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머리직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하기 보다, '연합을 위한 보이는 구심점'를 열망하며 추구합니다.
첫댓글 러셀은 1874년이 예수 재림의 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성경적이며 다각도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1914년은 '이방인의 때의 끝'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주장대로 그의 사망 후에 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 종말이 왔으며 1917년에 영국외무상 발포어의 선언에 따라 이스라엘 유민들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법적권리를 획득하였으며 결국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워타의 주장과는 달리 러셀의 예언은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러셀의 성서연구 6권 중의 제1권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참조)
워치타워는 러셀의 주요사상을 배척하고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이며 그의 역작인 '성서연구 6권시리즈'를 '여호와의 증인' 설립자 러더퍼드의 주도하에 폐기하였으므로 지금 여증들은 그 책의 내용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면 현재 여증교리의 많은 부분이 원래 러셀의 사상에서 변질된 것이며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워타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그들이 배신한 러셀의 사상인 것입니다.
러셀은 조직을 반대하였고 모든 종교조직을 큰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워타를 조직화한 사람은 러더퍼드입니다. 러더퍼드는 장로를 조직에서 임명하게하였으며(러셀은 각 회중 성원들이 스스로 민주적 방식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함) 사법회의를 고안하였고 이를 통해 조직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제명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