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 스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22년 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이메일 : cheongjeon91@hanmail.net
티베트의 비구니 승려로서 중국수용소에 끌려가 수많은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 뒤 티베트를 탈출해 환속한
세담최 될까르(36세), 니마 될마(33세), 장춥 최양(32세)이라는 세 여성이다.
한때는 티벳 비구니 스님이었던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담최 될까르(36세), 니마 될마(33세), 장춥 최양(32세)이라는 세 아가씨.
여기서 실명은 거론하기가 어렵기에 가명을 썼다. 이젠 승복을 벗은 평범한 재가자들이다.
이 글을 과연 써야하는가도 매우 망설였는데, 얼마 전 티벳 설날을 맞아 인사차 필자의 방을 찾아와
많은 얘기를 하다가 끝내 글을 쓰기로 작정 했다.
티벳에서 인도로 망명 전엔 사원에 있다가 1994년 라싸 봉기에 연유되어 5년에서 6년의 감옥살이를
했던 스님들이다.
감옥 안에서 알게 되었다는 세 스님들.
그들 셋만이 그들 속사정을 알 수 있으리라.
얼마나 두들겨 맞고 강제노동에 시달려 왔던가.
감옥 각방은 열두 명씩 기거하는데 밤이 되면 한명씩 호명되어 끌려 나갈 때는
지옥으로 가는 길 보다 더 추한 꼴을 당한다는 것을 안단다.
되돌아 왔을 땐 그저 서로 부둥켜 앉고 우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뿐.
무엇보다도 인간 탈을 쓰고는 짐승보다 못한 수도 없이 성폭행을 당해온 것이다.
그들은 출소해서 승복을 다시 입을 양심적인 고뇌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환속하기로 작정 했단다. 그 악명 높은 드랍치 수용소.
세계인권 단체에서도 매번 중국정부에 인권 유린 및 인간적인 처우개선 등등
수도 없이 발표해온 바로 그 감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감옥소라지만 화장실이 없이 큰 깡통 두 개로 일을 보며 아침저녁 비우는 고역이며,
말이 감옥이지 음식이나 감옥안의 열악함이란 인간으로써 먹고 견디기 어려워 머물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있는 동안에 죽어나간 동료들을 애기하다가는 말문을 잇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알게 된 의리의 비구니 췰팀 쌍모스님의 죽음에서는 끝내 말을 못한다.
모진 매에 못 견뎌 앓아눕다가 끝내 죽음 사흘 전에 가족에게 양도 되어 출소 후 바로 죽었단다.
가족 면회는 한 달에 한번, 시간은 단 5분.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하고 서로간의 안부라도 물을 시간이나 되겠는가.
그 옛날 일제 강점기에 우리 애국지사들이 감금된 감옥이 연상 된다.
그 땐 남자대 남자였다. 그러나 이 세 스님은 여자가 아닌가.
글을 쓰면서도 감정이 앞선다. 인간이란 탈을 쓰고 이토록 추악한 짓을 할 수 있는가.
세 명의 나이든 이 아가씨들. 막상 죽지 않고 형기를 마쳐 밖에 나왔지만
끊임없는 감시와 재차 불려가 받은 조사를 또 받고 하는 통에
티벳 내에서는 살아갈 수가 어려웠단다.
결국 인도로 망명 아닌 탈출을 시도했다.
만약 여기서 도망 나오다가 들키는 날이면 남은 인생이 어찌 되는지 익히 알기에
비밀리 준비하면서도 무서운 불안이 큰 고통이었다.
2004년, 라싸에서 시가체와 라체 까지는 차량으로 나눠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이후 도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제 발로 호랑이 입에 들어가는 격이 되기 십상이라서,
거기서부터는 밤에 걷는 이동방법으로 히말라야 설산 넘어 천신만고 끝에 보름 만에 네팔로 나올 수 있었단다.
말이 보름이지 여자의 몸으로 어설픈 장비와 먹거리로 그 힘든 눈밭 설원을 걸어 넘어 나온 것이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혹시나 공안(公安; 경찰)에 발각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었단다.
가끔 외신에 의하면 국경을 몰래 넘다가 국경 수비대원의 무차별 총격으로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보도를 들어왔지 않은가.
이들이 이곳 다람살라에 도착해서는 꿈에도 그리던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고,
감옥에서의 부끄러운 수난 등등이 다 밝혀지고 인정받게 된다.
난민 구호소에서 일 년 동안은 그런대로 마음 편한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난민이 이들 셋뿐이겠는가.
얼마의 정착금을 받아 이젠 살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옥에서 고문당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일 맏이인 언니에게 귀 고막이 썩어 고름이 나오고 있던 때였다.
바로 큰 병원에 알선하어 세달 정도 치료에 지금은 한쪽귀로 잘 듣는다.
이 때 필자가 그들의 딱한 소식을 알게 되어 그 때 부터 보이지 않는 도움을 펴게 되었다.
이 사실을 더러 아는 필자의 지인들에게 알리니 곳곳에서 도움 요청이 오기도 했다.
많이 맞아 어디 성한대가 없는 몸이라서 늘 따습게 할 수 있는 우리 전기장판이 크게 도움이 되며
특히 우기 때 아주 요긴하기도 하다.
다행이도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거사님의 후원으로 조그만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
셋이서 성실한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며, 또한 자립할 수 있도록 향후 오년간 꾸준히 돕기로 했다.
몰래 도움 주는 그 거사님이 올 여름에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니 너무 기뻐해 한다.
지금도 막내 아가씨는 엉치뼈의 문제로 힘든 일을 못하고 있다.
아마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판이다.
감옥에서 자기에게 상해를 입히고 부끄러운 짓거리를 해온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를 물으니
아직은 용서 못한다고 한다.
꿈에서도 그 악몽이 재현 될 때는 먼저 분노가 일어난다고 한다.
옛날엔 스님으로 절에 살았지만 이제 삶의 방향이 바뀌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세 아가씨가 법(法)에 희망을 두고 건강과 함께 밝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 사진은 차마 얼굴을 보이기가 너무 부끄러워 뒷모습을 찍은 세 아가씨이다.
#3월 히말라야의 봄기운 속에서, 비구 청 전 합장.